‘단순함이 가장 궁극적인 세련됨이란 말이 있다’(Simplicity is the ultimate sophistication by Leonardo da Vinci).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에 비하면 앉은 자리에서 읽을만큼 엄청 짧은 내용이지만, 그에 버금가는 큰 메세지가 담겨 있는 책이다.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질문과 답을 함에 있어서 반드시 장황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제목부터 우리게게 심오한 질문를 던지고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What Men Live By)

내 삶의 목적과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왔으며,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 책은 나를 살게 하는 수단과 방법에 대해 말해 주는 듯하지만 내가 항상 궁금하게 여겼던 삶의 목적과 이유에도 유사하게 접근하고 있다. 구두 수선공으로 근근히 살아가던 Simon이 추운 겨울날 자신의 겨울 코트도 못사고 아내에게 꾸중들을 걱정도 있는데, 길에서 떨고 있는 Michael을 집으로 데려가는 자비를 베푼다. 그 역시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으나, 그의 양심이 다시 Michael을 돌보게 이끈다.

아내 Matryona 역시 당장 내일 끼니를 걱정해야 히는 상태에서 이름 모를 낯선 사람을 데리고 온 남편에게 핀잔을 주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라는 남편의 말에 마음이 움직여 낯선 Michael을 환대하게 된다. 농부의 아내 Mary는 자신의 자녀가 아닌 쌍둥이(한명은 불구)자녀를 친자녀처럼 돌보며 살아간다. 그 무엇이 Simon, Matryona, Mary의 마음을 움직인 것인가? 나는 나 자신의 문제 해결도 너무 힘들고, 내 문제를 해결한 후, 여유가 있어야 남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신으로부터 추방된 천사 Michael은 3가지 질문에 답을 구해 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1)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가? (What dwells in man?) 2)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What is not given to man?) 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What men live by?).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사랑이고, 사람은 자신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간다. 신이 사람에게 주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한 귀족 남자는 가죽을 가져와서 일 년을 신어도 튼튼하게 유지될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지만, 주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서 죽게 된다. 오후에 죽음을 맞이하는 줄도 모르고 일 년간 신을 구두를 주문하고 간 것이다. 인간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당장 오늘 꼭 해야 할 일과 필요를 모두 안다면 신이 되고자 하는 교만함으로 고개 숙이며 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예지력과 능력을 신은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가슴 속에 풍요롭게 넘치는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자이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여유있는 자의 몫으로 생각하기 쉽다. 각박하고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가기에는 사랑만으로 부족하고, 물질, 명예, 건강, 자신감, 정체성 등등의 많은 요구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 세상의 조물주가 어떤 조건과 상황에 상관없이 인간의 내면에 사랑을 심어 두셨다고 했다. 우리는 그 사랑과 자비를 꺼내어 나누고 살면 된다. 그리고 물질과 명예가 아니어도 사랑을 지팡이 삼아 사랑의 버팀목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하셨다고 했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도 너무나 버거운 삶에서 내 것도 빼앗겨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삶인데, 내 안에 거주하는 사랑과 자비를 꺼내어 그것을 수단으로 살아가라고 가르치고 있다.

올해는 이 책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살고 싶다. 책 읽기의 궁극적인 목적은 삶 속에서 책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내 삶의 변화를 이루는 것일지니 실패하더라도 다시 책을 읽고 다시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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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넘는 기간에, 전체 1215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고 리뷰를 쓰려니 중압감이 밀려 온다. 책 사이즈도 커서 들고 다니기도 손목이 아파 나중에는 집에서만 읽었고, 글씨도 너무 작아 침대에서 읽기엔 불편할 정도였다. 워낙 분량이 많고 앞 뒤 여백이 적어 애초에 감동 문구와 약간의 줄거리 내용을 다른 종이에 적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10장(A4)이나 되어서, 책을 다 읽고 이걸 읽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빨리 읽었어야 하는데, 게으름의 늪에 빠져서 오랜 기간 읽고 나니, 내가 왜 이걸 감동 문구로 적었는지 이유가 잘 기억나지 않기도 했다.

예전에 읽은 Anna Karenina와는 사뭇 다른 종류의 작품이었다. 톨스토이가 왜 이 작품을 시, 소설, 역사 연대기가 아니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에필로그를 읽으며 펑펑 눈물을 흘렸는데, 마지막에 그의 철학적 담론이 나의 심금을 크게 건드렸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역사가 기록되는 방법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그런 이유로 그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 했다. 나의 영웅은 바로 진실( My hero is truth.)이라 했던 그가, 특정 기간(1805-1812)의 러시아인들에 대한 삶의 진실을 철학적 담론으로 풀어낸 이야기이다.

Volume 1~Volume 4까지는 러시아 귀족들의 삶과 전쟁이야기가 교대로 전개된다. 워낙 등장인물이 방대해서 누가 주인공인지 혼동스럽기도 했다. Princess Marya, Natasha가 주로 등장하는 러시아 귀족들의 화려한 파티, 사교 모임, 사랑 고백이 이어질 때는 소설을 읽는 듯 했으나, Prince Andrei, Pierre, Nicolas가 참전한 전쟁편에서는 그냥 역사책 같았다. 160명 이상의 실제 인물과 톨스토이가 Crimean War에 참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려진 전쟁 이야기는 용어도 너무 어려웠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유일하게 패했다는 Bordino 전투는 내용이 더 많기도 하고 지도까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엄청 몰입하며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모두가 회의적일 때 Bordino 전투의 승리를 확신했으나 노익장으로서 많은 비난을 받았던 총사령관 Kutuzov의 감동적인 문구가 있다. 인내와 시간(patience and time)이 그의 전쟁 무기였던 총사령관이 쫓기는 프랑스 군인들을 향해 보여주는 자비로운 표현이다. “그들이(프랑스 군대) 강할 때, 우리는 자신에게 동정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들을 동정할 수 있다. 그들 또한 사람이다( While they were strong, we took no pity on ourselves, but now we can pity them. They’re also people. p. 1089)”

Bordino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Moscow를 프랑스 군대에 넘겨 준 것에 대해 엄청난 비난이 따랐다. 그러나 그는 약세로 몰린 군대와 Moscow 둘 다를 잃느냐 혹은 Moscow를 넘겨 주느냐의 선택에서 후자를 선택하며 Moscow가 프랑스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에 탄 것에 대해 맹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Moscow에서 마침내 쫓겨나가는 프랑스 군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말하고 있다. 총사령관으로서, 엇갈린 평을 받았던 Kutuzov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 내용을 톨스토이가 담고 있다.

한 영웅이나 혹은 역사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올바르게 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We can know only that we know nothing. p. 348)”라는 표현이 있었다. 나폴레옹이 유일하게 패배한 Bordino 전투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나폴레옹은 Moscow에서도 다른 나라에서 처럼 철저하게 준비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철저하게 지시하고 명령을 내렸으나 그는 결국 실패하고 쫓겨가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과거 역사가들은 인류의 역사를 신의 직접개입과 신이 의도하는 목적으로 설명했다. 즉, 재앙이 내리는 경우 인간의 과오에 대한 신의 징벌로 해석을 했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부인하고 영웅과 그의 목적으로 해석을 하려 든다. 그러나 과연 나폴레옹 같은 영웅으로 인해 그 전쟁이 일어 났을까? 이런 해석은 곧, 뜻밖의, 이해할 수 없는, 알려지지 않는(unexpected, incomprehensible, unknown) 무수한 우연들(coincidence, accidents)을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그 어떤 힘(by what force)이 60만명의 병사들로 하여금 죽음을 불사하며 전쟁에 참여하게 했는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말하면서 수백만명을 서로 죽이고 참수형에 처하게 했는가? 왜 종교혁명이후에 서로 학살을 하고, 프랑스 혁명 동안 서로를 처형했는가? 현대 과학, 역사, 문화, 추상화(자유, 평등, 진보 등과 같은 대의 명분)로도 이 사건들 뒤에 작동한 힘(power)과 원인(cause)을 밝히는데 실패했다.

왜 전쟁과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왜 사과가 익어서 떨어지는지 이유를 모르듯이. 왜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누군가가 만든 법칙이고 섭리에 의해서, 그렇게 일어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반복되는 우연과 사건(coincidence, accidents) 뒤에 작용하는 힘(power, force)을 무엇으로 설명하고 증명할 것인가?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주변 상황, 시간, 공간에 제약을 받는다. 내 팔을 내 의지로 올리는 것 조차, 과거로는 할 수도 없고, 약간의 장애물이 있는 있어도 들지 못한다. 천문학과 역사에 대한 비유가 마지막에 나온다. 우리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모순에 도달하게 된다. 반면에 느끼지 못하는 그 움직임을 인정함으로써 법칙에 도달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무언가에 의존하고 있다는걸 느끼지 못한다.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해 독립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하다고 인정함으로써 모순에 도달하게 된다(실제 주변 상황, 시간, 공간의 제약이 있기에). 반면에, 외부 상황, 시간, 공간에 의존함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법칙에 도달하게 된다. 그 법칙과 섭리가 무엇인를 Pierre, Marya, Prince Andrei를 통해 잘 설명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자유(freedom)을 부인하고, 우리가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의 의존성(dependence)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에필로그는 한 편의 철학서적과 같이 너무나 감동적이다. 자신의 주장을 펴기위한 궤변도 아니고 설득력있는 논리도 곁들여 있다. 뒷부분은 집중력이 떨어져서 이해를 다 못해서 나중에 다시 읽으려고 한다. 올해 첫날부터 이 책을 읽게 된 것이 우연일까? 에필로그에서 그 동안의 많은 궁금증이 모두 풀리는 느낌에 많은 눈물을 쏟게 된 것이 우연일까? 요즘 들어 자꾸 일어나는 우연들 뒤에 어떤 힘이 작용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감상의 눈물을 넘어 깨달음을 얻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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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출근길에 이 책을 한 손에 들고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을 때 첫 장(Alone)을 읽고 감격이 밀려와서 울뻔했다. 또 누군가 어딘가에서 내 맘을 읽어내는 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오랜만에 진한 감동을 느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꾸 욕심을 내면서 어려운 책에 도전하다가 결국 지난 번 책을 중간에서 접고 새로 주문한 이 책을 읽으니 독서가 도전이 아닌 즐거움으로 다가선다. 어떻게 읽을 것인지 다시 고민이 되기도 한다.

책 제목과 내용이 이렇게 잘 들어맞기는 오랜만인 것 같다. 제목 그대로 내게 커다란 ‘위안’이 된 책이고 분량이 적어 금방 끝낼 수 있었으나, 일부러 아껴서 읽었다. 언어의 연금술사인 작가가 특정 단어에 대해 은유(metaphor)를 사용하여 정의를 내린 것이라 스토리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시간 날 때 챕터별로 다시 읽어도 커다란 위안이 되는 책이다.

언어 치료란 이 책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내가 늘 사용하고 글로 쓰는 언어가 이렇게 심금을 울릴 수 있고, 평이한 단어 하나로도 나를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Disappointment, Forgiveness, Loneliness, Longing, Maturity, Parallels, Procrastination, Unrequited, Vulnerability 등에 관한 내용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약간 긴 한 편의 시를 읽는 느낌이었다.

이 책에 가장 많이 반복된 단어는 robust vulnerability이다. Vulnerability는 인간의 나약함, 취약함, 상처받기 쉬움 등을 의미한다. 신이 아닌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나약하며 불완전하기에 이 단어는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친다. 이 단어 앞에 서면 저절로 작아지고 위축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촌철살인의 작가는 robust(강인한/튼튼한)란 형용사를 취약함 앞에 여러 번 사용하며 우리에게 큰 위안을 선물한다.

‘실망, 용서, 외로움, 후회, 지연’ 등의 그늘이 있어 어두운 색깔의 단어조차, 세련되고 정제된 언어의 옷을 입혀주니 반짝 반짝 빛나는 보석이 된다. 부정의 단어도 모두 긍정이 되고, 어둠도 빛이 된다. 실제로 단점이 장점이 되고, 장점도 단점이 될 수 있다는걸 생각할 때 과장된 표현은 아니라 생각한다.

진한 외로움이 나를 엄습할 때, 나의 미성숙함이 나를 슬프게 할 때, 실망감이 커서 용서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 영원히 만나지 못할 평행선이 원망스러울 경우를 대비하여 이 책을 늘 침대 곁에 두고 다시 읽으며 위안을 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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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2-10-18 0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어보고 싶네요.. 리뷰 감사합니다. ^^
 
On Liberty, Utilitarianism and Other Essays (Paperback)
Mill, John Stuart / OUP Oxford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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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란 단어는 부르짖기만해도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사실 책은 너무 어려웠는데 끝냄으로써 자유함을 얻기위해 포기할 수 없었고 오랜 시간 씨름을 해야했다. 결국 정신적 자유함을 얻은 후, 부족한 내용 이해를 안고 리뷰를 쓰고 있다. Mill이 말하는 자유는 정신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Each is the proper guardian of his own health, whether bodily, or mental and spiritual. (신체, 정신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든, 각자는 자신의 건강의 수호신이다.)

이 한 문장만 보더라도 Mill이 개인이 가진 고유한 특성, 즉 개성(individuality)을 얼마나 중시하였으며, 고유한 개성을 지닌 각 개인의 의견, 생각, 느낌, 그리고 그것들을 표현할 자유를 얼마나 중시하였는지 알 수 있다. 개인은 각자의 주권(sovereign)으로서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한, 생각, 느낌, 의견, 정서, 취향, 종교등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 다양성, 다원성, 삶의 복잡성과 그 가능성을 소중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세상에 대해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반응에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글이 1859년도에 발행되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진실’이라는 것에 대해 큰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는 회의와 토론을 통해 어떤 합의점에 도달함으로써 결론 혹은 진실을 얻고자 한다. 다수결의 횡포는 감지하고 있었으나 달리 차선이 없기에 다수결을 따르거나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수의 의견은 적어도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수에 의해 도출된 의견이나 진실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는 반대자들에 대해 눈살을 찌푸린 적이 많다. 혹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싫기까지 했다.

그러나, 개인의 중요성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Mill은 의견과 다수결의 폭력(tyranny of opinion and majority)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한다. 진실이란 또 무엇인가? 진실이란 반대자의 침묵에 의해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며, 반대의견을 화합하고 결합하는 문제도 포함해야 한다고 했다. 만장일치의 부재가 지식의 필수불가결한 상태(Is the absence of unanimity an indispensable condition of the knowledge? P.43)라는 말에 큰 울림을 받았다.

난 사실, 만장일치가 안된 채로 어떤 일을 진행하거나 처리함에 있어서, 반대자의 눈치를 보며 불편했던 적이 많았다. 심지어 Mill은 양쪽 모두(반대자의 의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들을 때 비로소 희망이 있다고 했으나, 나는 그동안 내가 듣고 싶은 말에만 귀를 쫑긋했던 것 같다. 이미 받아들여진 의견을 시험하는 사람이 있다면 감사해야 하며, 정복의 열매는 승리의 바로 그 완전함에 의해 멸망한다는 표현도 매우 신선했다. 나에게는 다름과 논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감사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중국과 달리, 성격과 문화의 놀라운 다양성을 존중하며 성장해 온 유럽의 예시를 들며 다양한 길의 중요성 및 교육의 다양성도 강조한다. 근육이 그러하듯이, 정신과 도덕도 끊임없는 개인의 사용에 의해 발달되기에, 개인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판단하고 선택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각자의 선택과 개성이 존중되어야 하지만,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 정부에 의해 자유가 제한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필요한 정부의 간섭은 커다란 악이며, 정부의 관료제도는 개혁이 일어남을 방해한다. 지적 개혁, 점진적 개혁(intelligent reform, gradual reform)은 매우 중요하며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의 가치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의 가치이다. (The worth of a state is the worth of the individuals composing it. P.111) 즉, 개인의 정신적 팽창과 고양에 따라 정부의 가치가 빛이 난다면,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간섭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의 성장을 막아서도 안되며, 손안에 넣고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유순한 도구로 취급해서도 안된다. Mill에게 있어 성장, 향상, 진보(growth, improvement, progress)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정부는 개인의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질서 없는 진보가 없고, 진보 없는 질서가 없다고 했다. 국가와 진보 혹은 개인과 진보(발전)가 함께 나란히 가는 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 자신은 나의 나이듦과 함께 나의 진보(progress)가 동행하는지 궁금하다. 나이듦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내 의견이 자유롭게 표현되며 반영되지 못함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경청하고 인정하려는 관용적 태도를 기르지 못함을, 정신적으로 깨어있지 못해 정신적 진보를 이루지 못함을 두려워해야 할것 같다.

Mill은 가정이 있은 Harriet Taylor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1830), 그녀의 남편이 죽은 후, 20년도 넘은 1851년에 그녀와 결혼하여 7년을 함께 산다. 그녀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 시대에 그가 했던 선택에 놀라고, 자유론에서 보여지는 그의 깨어있는 사고에 또 놀란다. 3살에 그리스어를 배운 박학다식한 작가라 그런지 영어는 너무 어려웠다. 이렇게 삽입구와 삽입절이 많은 만연체 문장을 내가 또 읽을 수 있을까 싶다. 조금 더 쉽게 썼다면 그의 값지고 귀한 사고가 더 많이 널리 읽혀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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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는 어떻게 삶을 파고드는가 - 최신 신경생물학과 정신의학이 말하는 트라우마의 모든 것
폴 콘티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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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동료들과 함께 읽고 나누는 책이다. 오늘 후기의 키워드는 ‘함께’가 아닌가 한다. 사실 나도 혼자가 더 편리하고 효율적이며, 같이 한다는 것은 많은 번거로움을 동반하고 양보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긴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이자 교수인 작가는 책 전반에 걸처 ‘연민, 공동체 정신, 인간애’라는 3가지 핵심 단어를 아주 많이 반복하고 있다. 함께 하지 않으면 미연에 방지하기도, 발생 후 치료도 어렵다는 경종을 울리고 있다.

요즘 우리는 ‘공공 선’이라는 개념에도 많이 고무되지 않으며 정신건강의 개념이 과소평가되고 정서지능 수준이 매우 낮다고 시작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비유되는 트라우마(trauma)는,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마스크를 쓰고 생활하듯, 가면를 쓰고 조용하고 음흉하게 환자를 위협한다. 둘다 고립을 유발하지만 바이러스는 백신이 나올 때 까지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며 활동을 줄이면 되지만, 트라우마는 감정적 거리를 유지하게 하기에 오히려 우리 각자가 백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활짝 열고 생활해야 물리 칠 수 있다.

트라우마가 무서운 것은 죽음에서도 우리의 이야기를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표면적인 사망 원인은 교통사고이지만 실제는 동료에 의한 강간이며, 간경변도 사실은 어린 시절 중독 부모에 의한 학대임이 알려지지 않는다. 또한 ‘죽음의 수용소’의 저자 빅터 프랭클’에 의하면, 상상할 수 없는 트라우마는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 버리게 한다. 인간의 수많은 인식, 믿음, 그리고 행동이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그런 기둥 역할을 하는 종교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학대자와 동거하고 부정적인 자기와 대화를 하는 트라우마의 궁극적 목적은 사전에 저지하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수면 아래에서 무섭게 활동하게 하는, 두려움, 수치심, 편견 및 내면의 줄다리기를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들지 알기에 교육과 보호책이 미리 개입해야 한다고 한다. 스스로 선택한 새로운 습관, 점진적인 근육 긴장 완화 요법, 개인의 글쓰기 연습과 신뢰할 만한 사람과의 공유, 스스로에게 좋은 아군되기 등의 해결책도 제시하지만,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이 개방적인 돌봄의 환경에서 자양분을 얻도록 우리가 다같이 함께 노력해야함을 아주 여러 번 반복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즉, 누군가의 삶이 더 나아지도록 사는 곳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전 세계적 대의를 옹호하는 삶을 살도록 촉구한다. 이런 삶을 위해 우리에게 연민, 공동체 정신, 인간애가 필요하다. 또한 구체적으로 온정어린 사회를 만드는 5대 요소( 역사, 종교, 과학과 의사, 삶의 경험, 조기교육)를 포함시킬 것도 제시한다.

저자는 그 누구보다 환자들과의 소통과 치유를 우선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의료 시스템에 대한 냉철한 시선을 감추지 못한다. 환자의 치료가 우선시되지 못하고, 경비 최소화, 시간 절감 및 되도록 많은 환자 진료를 보게 하며 의사들을 과중한 업무량에 시달리게 하는 의료업계의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의료 분야는 내부 규정과 지침을 앞세우는 최악의 범죄집단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슬프게 들린다.

트라우마는 누구에게나 있고 그 정도와 깊이가 다를 뿐이다. 저자는 동생의 자살을 미리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사는 동안 치러야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 후에 찾아든 수치심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았다. 나 역시 올해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더 잘 해드리지 못한 상처가 있다. 작년 일중독으로 살면서 지치고 힘들어 2번 밖에 시골에 내려가지 못했고, 임종 직전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조금 좋아지셨다고 하기도 했고 다음 날 맡은 큰 업무 때문에 바로 내려가지 못해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한 상처는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다. 물론 과거 작은 상처들도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숨쉬며 가끔씩 열등의식과 자괴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나는 트라우마의 무서운 마력을 알지만 프로이드 이래 과거의 상처에서 원인을 찾는 트라우마를 많이 신뢰하고 싶지 않다. 과거는 고칠 수가 없고 상기될 수록 눈물만 연상시킨다. 그래서 목적과 용기의 심리학인 애들러의 심리학을 더 신뢰한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이 트라우마는 치료가 힘들고 손끝에서 바로 나오는 답이 아니라서 미연에 저지하기 위해 공동체가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애들러의 심리학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 목적을 두기에 고칠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선에 대한 믿음과 남을 돕는데 헌신함으로써 트라우마를 극복했다고 했다. 각자의 서로 다른 고군분투와 공공 선에 기여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함께’가 있어야 바이러스 같은 트라우마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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