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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타자기 ㅣ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황희 지음 / 들녘 / 2020년 7월
평점 :
힘들면 도피하던 상상속 세상이 있었다. 백일몽 세상은 자기 최면과 상상력의 도움으로 어느샌가 단어 하나로 빠져들 수 있는 탄탄한 곳이 되었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도피란 임시대피소일 뿐이었다.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꿈은 그대로 꿈으로만 남는다. 그래서 지하는 꿈을 현실로 만들기로 했다.
벗어나고 싶은 현실과 맞닥뜨려야 하는 현재는 지하에게 잔인하다.

"집으로 돌아온 우탁은 무서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농아인데다 걸핏하면 현실을 잊고 상상속에 빠져 사는 딸 지하. 그리고 남편과 시부모의 폭력과 냉대 속에 갖혀 살아야 하는 엄마, 서영은 원인제공자인 시어머니를 원망한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그곳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지하는 아버지의 폭력에 이기지 못하고 찾지 말라는 편지를 남긴 채 가출한다. 6년 뒤, 그 뒤로 소식조차 듣지 못하던 어느 날, 서영은 입주도우미가 몰래 전해준 소포로 지하가 출판한 소설책을 얻게 된다. 몰래 화장실로 가지고 와서 심상치 않은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서영은 흠칫 떨고 만다.
딸이 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였다.

소설속의 서영은 탈출했다.
소설 밖의 서영도 탈출에 성공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할까? 친가를 인질로 붙잡던 시가를 탈출하면서 서영은 남편에게 똑똑히 일렀다. 그녀는 아직 남편의 아내였다. 남편은 현직 서울시의원이자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아는 교회의 목사다. 가진것이 많은 사람은 잃을 것도 많다. 그녀는 지하를 건드리지 말라는 말을 단단히 박아둔 채 그 집에서 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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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몽 속에서만 산 줄 알았던 지하는 어느 새 꿈을 이루고자 달려나가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나는 꿈을 그대로 이루기 위해 자신과 한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지하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매일매일 써내려가는 일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올곧은 길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 길에는 방해가 많다. 걸리는 것도 많다. 나를 뒤돌아보게 하고, 붙잡는 것들도 있다.
나는 지하가 매일매일을 쓸 수 있었던 힘은, 힘들 때 빠져들었던 백일몽 속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기대고 싶었던 사람과 갖고 싶었던 강아지, 그리고 초현실적인 능력까지. 그곳에서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하는 어머니와 갇혔던 지하 와인 창고에서 발견한 '타자기'에 적혔던 이름을 찾아나섰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데에는 조력자인 친구의 도움도 컸다. 하지만 작품을 완성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공모전에 도전하는 일은 지하 스스로 해 낸 일이다.
나도 좀 더 잘쓰고 싶다. 나를 갈고 닦고 싶다. 지하가 되어 보지 않아서 모를 수도 있다. 폭력의 잔인함을. 하지만 누군가 어디에 가둬놓고 밥이랑 책이랑 종이랑 연필만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타자기나 노트북 까지 가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써내려 갈 수만 있으면 된다. 나는 항상 쓰고 읽는 것에 목말라 있으니까. 때로는 나를 재촉하는 커서가 없는 곳에 놓이고 싶다.
지하는 도피하는 것만 생각하지 않았다. 현실을 대비하고, 고통도 스스로 이겨냈다.
"문제가 생기면 풀면 된다. 문제를 똑바로 보기도 전에 두려워한다면 그 문제를 풀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