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노인과 바다 (양장) - 1952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수정 옮김 / 더스토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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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OLD MAN AND THE SEA

지은이: HEMINGWAY

   :  헤밍웨이와 가상 인터뷰

 

마힐: 안녕하세요. 헤밍웨이(1899~1961) 작가님, 전 마힐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선생님의 <노인과 바다> 를 읽었는데요. 독후감을 쓰려다 차라리 선생님을 초빙해서 가상 인터뷰를 진행 하고자 합니다. 괜찮으시겠지요?

 

 

헤밍웨이: 물론요. 상상속에서 존재하는 인터뷰인데 뭐가 어렵겠어요?

 

 

 

마힐: 그럼 오늘은 몇가지 작품 속의 내용과 관련해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작품 배경이 쿠바 이던데요. 왜 하필 쿠바로 배경을 정하신 건가요?

우리에게 쿠바는 체 게바라의 나라, 공산 국가, 야구 최강의 나라로 알려 졌거든요.

전 작품속 배경이 쿠바라는 걸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어요.

 

 

헤밍웨이: 체게바라(1928~ 1967)와 피델 카스트로(1926~2016)가 쿠바에서 공산 혁명을 한 것은 1953년 이후 일이에요.

전 그전에 1939년에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살았었죠.

내가 <노인과 바다>를 내놓은 것은 1952년 이에요.  

작품속 배경은 공산 혁명 하기전의 시기 쿠바 배경이라 보면 되고요.

쿠바는 미국의 플로리다주 바로 아래에 있는   섬나라예요. 아마 대한민국 면적하고  비슷 할 꺼예요.

원래 쿠바가 스페인 식민지 였어요. 그런데 1898년에 미국이 도와줘서 쿠바가 독립을 하게 돼요. 그래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50년대 전까지는 미국과 쿠바 사이가 지금 처럼 적대적 관계가 아니였어요.

그래서 그 시기의 쿠바는 미국 본토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제 작품속에 메이저리그 경기 소식이 나오는 것이 다 그 때문이죠.

그 당시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 리그의 인기가 쿠바에서도 최고였죠.

나중에 쿠바 혁명을 성공한 피델 카스트로도   혁명 전사가 안 됐었다면 야구선수가 되었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마도 그 때문에 쿠바가 나중에 아마추어 야구 최강이 된 이유가 되기도 하는 거죠.

 

 

 

마힐:, 그래서 작품속에 '양키스는 지는 법이 없어. 양키스를 믿어라.  위대한 디마지오가 있잖니 ? 하는 대사가 나오는 군요?

 

 

 

 

헤밍웨이: 맞아요. 노인이 가장 우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양키스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1914~1999)'예요.

조 디마지오는 1936~1942년 과 1946~1951년 동안 모두 13시즌을 뛰는데 원클럽 맨이라고 해서 은퇴할 때 까지 줄곧 뉴욕 양키스, 한팀에서만 뛰었죠.

그가 있는 동안 양키스는 월드 시리즈 우승 9번 과 자신은 리그 MVP 3번을 받았고 지금 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운 대단한 선수였죠.

그래서 디마지오가 있는 이상 양키스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긴거죠.

 

 

 

마힐: 아 그렇군요. 디마지오가 당시 시대에선 엄청난 선수였군요. 그래서 노인이 그렇게 우상화한 것 이였군요.

 

 

헤밍웨이: 우상화란 표현 보다는 존경을 넘어선 경배하는 마음이 강했다고 하는게 좋겠어요. 사실 우리 주위에 어떤 영역에서도 독보적인 성취나 경지를 보여 주면 우리는 그사람을 경외하고 존경 하잖아요. 아마 노인에게 디마지오는 그런 사람 이었던 겁니다.

또 노인을 존경하는 소년도 노인을 그렇게   존경하잖아요.

누구든 누군가를 존경하면 또 경배 하게 됩니다.

 

 

마힐: , 맞습니다.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나도 그 사람을 닮고 싶다는 마음도 같이 있는 것 같아요. 소설에서 소년이 노인을 존경하는 마음이 참 지극해서 마치 스승과 제자와 같이 느껴지더라구요. 소설에서는 노인이 84일동안 물고기를 낚지를 못하는 얘기로 시작 하는데요. 그래도 소년은 노인이 꼭 물고기를 잡게 되리라고 믿더라구요.

그런데 왜 하필 노인은  84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했을 까요?

 

 

 

헤밍웨이: 그래요. 사실 84일에 뭐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그전에 노인이 소년과 함께 87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한 적도 있었죠. 그러다 88일째 대박을 터드려 3주 내내 만선이 됐고요.

우리 인생도 순조롭지 않잖아요. 꼬일때로 꼬이는 것도 정상 아닌가요? 맨날 바다에 나가 만선을 채울 수 있나요? 그렇게 안좋다가 또 좋아지기도 하는게 인생인거죠.

그래서 노인은 삶의 경험치가 있으니 조급하지 않죠. 소년도 그런 노인을 믿는거죠.

 

 

 

마힐: , 그렇군요. 그런데 노인은 왜 어부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 건가요?

 

 

 

헤밍웨이: 어부 라는 직업은 태생 부터 정해지는 직업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요.

쿠바는 섬나라 예요.  그곳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바다와 맞닿을 수 밖에 없죠.

책에는 어부라는 직업이 예수님 제자 베드로도 어부 출신이고, 디마지오 아버지도 어부 출신이라고 표현해서 미화 했지만 우리 인류가 수렵 채집 시기 때부터 시작해서 가장 원시적 직업으로 현재까지 남은게 어부라는 직업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제가 쿠바에 살때 바다를 보면 제 남은 인생을 어부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서 내가 만약 어부가 되었다면 어땧을까 생각해 본거죠.

 

 

 

마힐: 그럼 노인은 작가님 자신의 분신으로 작품속에 투영 시킨 건가요?

 

 

 

 

헤밍웨이: , 사실 그렇죠.

당시  내가 쿠바에 살 때는 40대 였거든요.

사실 제 실제 노년은 62살에 끝을 맺죠.

작품속의 노인은 대략 60대라 보면 돼요. 내가 만약 쿠바에서 어부로 태어나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소설속 노인 산티아고 처럼 살게 되리라 생각 했어요.

젊을적 산티아고는 능력있는 어부였어요. 아마 행복 했을 거예요. 결혼도 했지만 자식은 없었죠. 그래서 이웃의 소년을 아들 처럼, 또 손자 처럼 사랑했던 거죠.

노년이 되면 참으로 외로워 지죠. 더구나 젊을 적에 '엘 캄페온(EL CAMPAON: 참피온 스페인어 )' 으로 불렸던 강했던 몸도 쇠해지게 되죠.

그럴때 모든 것이 변했다고 느끼겠죠.  이때 또 84일 동안 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 하잖아요?

그렇지만 노인은 희망을 버리지 않죠. 

그러다 마지막 자신의 삶의 불꽃을 일으켜줄  강력한 동기가 나타난 거죠.

그렇게 노인은 티뷰론(TIBURON: 상어 스페인어) 을 잡아내죠.

제 실제 삶도 같아요. 저도 이 작품을 쓰기전에 이미 능력있는 작가라 칭송 받았죠. 하지만 늘 새로운 작품을 쓰지만 그게 다 히트 합니까? 저도 혹평을 당하기도 했었죠.

그렇게 저도 나이를 먹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 <노인과 바다> 란 티뷰론을 잡아낸 것 아니겠어요? 

 

 

 

 

마힐: 저도 그점에서 감동 했어요. 특히 티뷰론을 잡아내는 장면들 묘사에서 노인 혼자 고군분투(孤軍奮鬪) 하잖아요. 그것도 잠도 못자면서 힘겹게 낚시대를 들어 올리면서 소위 밀당 하는 것 처럼 낚은 고기를 낚시줄로   풀어주고 다시 당기고 내가 직접 고기를 잡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몰입감이 상당하더라구요.

특히 낚시줄에 손이 베여 피가 나오는 장면은 내 손이 베인 것 처럼 손이 쐐~ 했어요.

 

 

 

 

헤밍웨이: 맞아요. 원래 인생은 외롭지요.  고군분투 하는거죠.  홀로 낚시대를 잡고 물고기와 다투는 거와 뭐 다를게 있나요?

 

 

 

 

마힐: 그렇게 물고기를 잡아낼 때 노인은 늘 소년을 생각 하잖아요. '그 아이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아이가 여기 있으면 좋을텐데... ' 하면서 낚시대를 잡고 있으면서 여러번 떠올리잖아요? 그것도 외로워서 그런거죠?

 

 

 

 

헤밍웨이: 노인이 외롭다기 보다는 , 사실 늙으면 다 외롭습니다.

그보다 소년과 노인은 서로 무한한 신뢰와 믿음으로 연결 되어 있어요.

작중 초반에 노인이 살라오(SALAO: 불길한 스페인어) 가 됐다고 믿는 소년의 부모에 의해서 소년을 노인에게서 떼어 놓게 되죠.

소년은 어쩔 수 없이 노인과 헤어지게 되는 거죠. 하지만 소년도 그렇고 노인도 서로 굳은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있었죠. 소년이 5살때 부터 노인을 따라 다녔잖아요?

소년은 노인을 최고의 어부로 믿었고 늘 배워야 된다는 마음이었던 거죠.

또 노인에게 있어 어부 인생 최대의 대어를 낚는데 같이 있어 지켜 봐주고 도와줄 소년이 절실했겠죠. 또 자신이 별난 노인이었음을 입증 하고 싶었죠. 그리고 함께 그 영광을 보고 누렸으면 했겠죠. 그래서 더욱 찾은 것 이고요.

 

 

 

 

마힐: 그런데 그렇게 힘겹게 잡은 티뷰론을 왜 다른 상어떼 한테 전부 뺏았기게 되나요? 결국 노인이 집으로 돌아오지만 남은건 뼈 밖에 없잖아요? 너무 아쉽지 않나요?

이점은  소설적 장치 인가요?

제가 노인 이었다면 참으로 억울 할 것 같아요.

 

 

 

헤밍웨이: 이건 소설적 장치라기 보다는 현실을 담아 낸 거예요.

노인이 물고기를 무사히 잡아와서 제대로   팔면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오히려 성한 물고기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은   재미도 없구요. 또 피 냄새 맡아 쫓아오는 상어떼가 없다는 게 더 비현실적이에요.

현실은 바다 한 가운데서  상어떼와  사투를 벌이는 겁니다.

물론 상어떼에게 모두 다 뺏았겼다고 생각 할 수도 있죠. 또 실제로 그렇구요.

 

'인간은 패배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어. 인간은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아.'

작품속에서  잡은 물고기를 지키기 위해 상어떼와 사투를 벌이며 노인이 이렇게 말 하잖아요?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건 아니었죠.

잡은 물고기 뼈는 남게 되잖아요.  5.5미터 대형 물고기의 뼈 잔해.

노인이 젊을 적 팔씨름으로 하루 날밤을 새우고 '참피온' 이란 칭호를 사람들에게 받게 되잖아요?

노인의 본래 참피언이었음을 말년에 다시 한번 증명 한 셈이 된거죠.

비록 뼈만 남았지만 뼈를 통해서 우리는 그 노인이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잡아낸 것이라고 믿게 되잖아요?

그러니 소년은 그 뼈를 보지도 않고 알죠. 그리고 눈물을 흘리 잖아요.

이 눈물에서 진심어린 노인에 대한 존경이 느껴지죠.

 

 

 

마힐: 동화 같은 결말은 아니지만 충분히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 였네요.

그런데 작품 제목이 왜 <노인과 바다> 인가요? 노인이 주인공이라서 노인이 들어 가는건 이해가 가는데 왜 바다를 넣었을 까요? 노인과 소년, 혹은 노인과 티뷰론, 노인과 상어떼 , 어부와 물고기, 또 디마지오를 사랑한 노인등등 같은 제목도 지을 생각은 없었나요?

 

 

 

헤밍웨이: , 좋은 질문 입니다. 소설에서  한번 설명이 되어 있는데요. 노인은 바다를 라 마르(LA MAR) 라고 여성형 스페인어로 바다를 좋게 표현할 때 쓰는 말로 부르죠.

바다를 남성형 엘 마르(EL MAR)라 부르는 부류도 있지만 노인에게는 바다는 여성을 상징하죠. 바다는 만물이 기원(起源)하는 생명의 공간이죠. 바닷속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살고 있나요?

바다는 생명을 잉태하는 공간이자 또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죠.

여성 처럼 변덕을 부릴 때도 있죠. 파도가 치고 폭풍이 불고, 그래서   바다를 속셈을 알 수 없는 여성 처럼 대하는 거죠. 게다가 바다는 달에 영향을 받잖아요. 우리 여성이 월경을 하는 것 처럼 바다와 달, 그리고 여성은 하나로 이어지는 거죠.

바다에서 노인이  상어떼와의 사투에서 패배했나요?

노인이 이러잖아요. '아무것에도 패하지 않았어.', '그저   내가 멀리 나갔을 뿐이야'  

바다의 입장에서 노인이 티뷰론을 잡았든, 상어떼에 다 뜯겨 먹었든, 다   자신의 몸에서 벌어진 일 입니다. 파도가 치고, 폭풍이 몰아쳐도 다 바다에서 일어난 일이죠.

파도가 폭풍이 바다를 지배할 수 있나요?

바다는 큰 의미를 담고 있죠.

노인이라는 인간과 바다라는 거대한 공간, 그 공간에서 노인은 태어나고 자라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포함하는 공간이 되는거죠.

 

 

 

 

마힐: <노인과 바다> 단순한 제목이라 생각 했지만 뭔가 좀 더 심오 한 면이 있네요.

마지막 질문인데요. 작가님이 작품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뭔가요?

노인의 마지막 불꽃 같은 열정을 보여 주고자 한 건가요?

 

 

 

 

헤밍웨이: 전 사실 노인이 바다에서 마딱드린 고난과 역경을 이기는 그런 의미 보다는 믿음을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작품속에는 많은 믿음들이 있어요.

자신이 은퇴할 때 까지 양키스에서만 뛴   디마지오의 팀에 대한 믿음,  양키스는 절대 지지 않는다는 노인의 믿음, 오늘도 디마지오가 안타를 치리라는 믿음, 디마지오가 발 뒤꿈치 가시 뼈가 아픔에도 견뎠듯이 자신도 왼손의 고통을 이겨내리라는 믿음, 그리고   노인 산티아고 에 대해 소년 마놀린의 순수한 존경의 믿음 들이 있죠.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이끌어 가는 셈이죠.

시련과 고통도 다 믿음을 시험하는 거잖아요.

노인이 한평생 쿠바 바닷가를 벗어난적이   없는데 아프리카의 사자를 본 적이 있나요?

그러나 꿈속에서 백수의 왕 사자를 보잖아요. 사자는 노인 자신인거죠.

자신에 대한 믿음을 뜻하는 거죠.

그래서 전 역경 고난을 극복한 노인의 서사보다 바다에 벌어지는 믿음에 대한 서사라고 봅니다.

전 노벨상을 운 좋게 받았지만 사실 많은   위대한 작가들은 은연중에 믿음을 말합니다.

제 작품속 노인과 비슷한 연령대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을 예를 들면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를 보면요,

싯다르타의 말년은 제 작품의 노인 산티아고와 비슷한 나이 대에요.

그 작품 마지막 부분에서 말년의 강가에서 싯다르타와 뱃사공간의 믿음은 어떤가요? 서로간의 믿음이 곧 자신의 믿음이지 않았나요?

또 니코스카잔차 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와 주인공인 '두목' 과의 믿음은 어땠었나요? 광산을 말아 먹었어도 그 둘의 서로에 대한 믿음은 끝까지 가지 않았나요?

결국 인간에게는 서로간의 믿음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가장  절실하지   않나 싶습니다.

 

 

 

 

마힐: , 그렇게 이해 할 수도 있겠군요.

앞으로 작가님의 다른 작품도 기회가 된다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독후감 인터뷰 소환에 응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헤밍웨이: , 문학은 주관적인 세계를 표현한 겁니다. 객관적일 수가 없어요. 해석은 각자의 영역입니다. 맞고 틀리고가 없는 거죠. 제가 표현한 서사는 제 생각을 벗어난 영역이 되면서  독자는 달리 해석 할 수 있는 겁니다.

어찌 이 우주에 똑 같은 별이 있을 수 있나요? 같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것 같아도 결국 다 다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 존재하는 세계는 없습니다.

 

 

 

마힐: 해밍웨이님. 저의 지면 관계상 이렇게 아쉽게도 끝을 맺어야 하네요.

다음번에 소환해서  좀더 깊은 대화를 나누는 걸로 하겠습니다. 오늘  인터뷰 감사 했고요. 저승에서 잘 지내시고요.  안녕...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 불멸의 기록이 되었다.>

 

 

 

양키스는 지는 법이 없어. 양키스를 믿어라. 위대한 디마지오가 있잖니 - P17

퀘바(Que Va) 천만예요. 고기 잘 잡는 어부도 많고 실력이 월등한 어부들도 있긴 있어요. 그래도 할아버지는 독보적이에요. - P26

사자들은 황혼 녘이면 새끼 고양이처럼 뛰놀았고 노인은 소년을 사랑하듯 사자들을 사랑했다. - P28

나는 자신감을 가져야 해. 발뒤꿈치 가시 뼈가 몹시 아플 텐데도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는 위대한 디마지오 처럼 나도 훌륭해져야 한단 말이지. - P82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어. 노인이 말했다.
인간은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아. - P127

"그놈들 한테 내가 졌어,마눌린" 노인이 말했다.
"놈들에게 제대로 지고 말았어"
"그 물고기 한테 지신 건 아니예요. 그 물고기는 아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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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6-25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힐님!
가상 인터뷰 기사 잘 읽었어요😄😄
저도 7월엔 ‘노인과 바다‘를 한 번 정독해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인터뷰 내용, 참조하겠습니다^^

마힐 2024-06-26 16:51   좋아요 1 | URL
전 ‘양키스를 믿어라‘ 에서 꽂혔는데요. 페넬로페님은 어느 부분에서 꽂힐까 기대가 됩니다.
 
낭송 전습록 낭송Q 시리즈
왕양명 지음, 문성환 풀어 읽음, 고미숙 기획 / 북드라망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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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낭송 전습록

지은이: 왕양명/ 문성환 풀어 읽음/ 고미숙 기획

   :  저는 감히 소인의 마음으로 주자를 섬기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사용했던 멸칭 중에  '사문난적' 이란  표현이 있다.

사문난적(: 이 사 文: 글 문 亂: 어지러울 난 賊: 도둑 적), 지금 시대로 말하면 '쌍놈의 시키'  와  비슷한 뜻일 것 이다.

 

 

유학(儒學)은  본래 2500년전 공자(b.c 551~479) 에게서 나왔지만  당시엔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사상, 즉 제자백가 사상들 중의 하나에 불과 했다.

그러나 유방에 의해  통일된 한나라가  유학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게 된 이래로 역대 중국의 왕조에서는 유학을 국가의 공식 학문, 즉  관학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특히  공자 시대의 유학을 송나라 때 주자(1130~1200)가  재해석한 신유학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주자학이 된다.

 

 

 

주자학은 곧 고려말기 우리나라의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급기야는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을 세우게 된다.

조선의 유학은 학() 이라는  배움을 넘어서 교() 의  수준으로 격상하게 되는데 이때 부터는  거의 종교와도 같은 수준으로 믿게 되어진다. 

그렇게  조선의 유교는 주자학을  신봉했고  사대부들은  주자가 해석한 유교 경전 해석외에  다른 식의 해석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게 주자가 달아 놓은 사서(四書)의   해석서 외에는 전부 이단이라 칭했다.

그때 그런 이단의 학설을 멸시하는 호칭이 '사문난적' 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읽게 된 <낭송 전습록>은  조선 시대 성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문난적과 같은  성리학의 이단 학설 '양명학' 에 관한 책이다.

양명학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전습록은 '왕양명' 과  그의 제자들 간 서로 나눈 대화들이  기록된 책이다.

공자의 <논어>와 같은 형식이라고 볼 수있다.

논어는 공자가 저술한 게 아니고 그 제자들이  스승 공자와의  일화나 대화를 공자 사후(死後)에 엮어 편집 했듯이  전습록 또한 왕양명이 직접 저술 한 책이 아니다.

 

그렇다면 전습록을 왜 성리학에서는 이단으로 보는 것인가?

사실 조선 시대 주자학을  종교 수준으로   신봉한 조선 사대부들의 변태 같은 믿음이 이단으로 규정한 것이지 양명학이 탄생한  명에서는 그런 분위기는  없었다고 보여진다.

 

 

 

왕양명(王陽明: 1472~1528) 의  본래 이름은 수인(守仁) 이고  자()가 양명이 된다.

양명학의 시조가 되는 왕양명을  깊이 알기  위해  나는 그의 시간과  공간을 우선 이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간적으로는 15세기후반과  16세기에 걸친 명나라와 세계 상황, 공간적으로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절강(浙江) 지역을  살펴 봐야 된다고 본다.(단지 내가 좀더 알기 위해서)

우선 공간적으로 보면 그의  출생지는  지금의 중국 절강성 '여요 (余姚) ()' 으로  현대 중국의 행정 구역상  영파(寧波: '닝보' 라 읽음) 시에  속한다. 이곳은  근대 국민당의  대만 총통 '장제스' (1887~1975) 태어난  지역이기도 하다.

 

 

 

영파 라는 지역은 지금의  상하이(上海) 하고  바다 사이를 두고 있는데 항주만 대교(杭州灣跨海大橋)가 놓여 있어  바다위에 35킬로가 넘는 다리로 연결 돼 있다.

이곳은 중국의 따뜻한  강남지역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옛 오나라 지역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산과 벌판뿐인 북방에  비해 이곳 절강 지역은   따뜻하고 바다를 끼고 있어 농사뿐 아니라 해산물도 쉽게 얻어 역사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속한다.

닝보는 중국의  동해에 위치하고 우리 나라 서해, 즉  황해와 마주보고 있다.

그래서 고대때 부터 무역을  발전 시켰고  신라시대 때에 교류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우리 나라 심청전에 나오는  중국쪽 뱃사람들이   바로 이 지역 닝보 지역 사람을 말한다.

(  10년전 내가 닝보를 여행할 때 우연히  지나친 기념비속에 맹인 아비를 둔 신라에서  넘어온  여인이 아버지를  그리워 했고 그것이 심청전의 모티브가 됐다는 내용을 모고 깜짝 놀란적이 있다. )

또 이 지역 근처 주산(舟山)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은 중국 불교 4대 성지인 보타산(普陀山)  관세음보살 성지(聖地)라 불린다.

관음보살이 그곳에서 중국 동해를  보살펴 준다고 그 지역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이처럼 왕양명이  자랐던 절강지역은  물질적으로는 부유한 지역 이였고 정신적으로는  개방적으로 교류하는 분위기의  풍토에서 양육 되었다고 보아진다.

또한 그 지역 신앙인  관세음 보살을 믿는   불교 신앙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 되어진다.

물론 그가 정통 유학자를 자처 했기  때문에  불교도라고  보진 않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학파를 세우는데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 없다고 본다.

 

 

 

내가  이 책<전습록> 에서 주목한 것은 양명과 제자들과의  선불교적인 문답과 당시 자신이 느낀 불교의 한계를  유학으로 극복한다는  점이다.

그의  사상이 불교, 특히 선불교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는 확실히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양명학의 무엇이  선()과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것은 알기에 앞서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 봐야 한다.

 

 

 

시간적으로 보면 양명이 살았던  시기는  15세기 말 16세기 초기로 서양에서는 한창 창발의 시대(1490~1530)라  불리는 시기와 겹친다.

이 시기 유럽은 신대륙 발견,  인쇄술이 보편화 되고, 전쟁의 기술이 발전하였고, 루터에  의한  종교 분쟁이  시작 되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 조선은 비교적 성군이였던  9대 성종과  개 망나니 였던 10대 연산군을 거쳐 11대 반정을 일으킨 중종 시기와 겹친다.

또 이웃 일본은 이때  오닌의 난을 시작으로  센코쿠 시대, 100년 전국시대에 돌입 했다.

이때는 한마디로 유럽은 아메리카까지  세력을   확장 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조선은  그냥 우리끼리 볶닦거리며 정체 되고 있었고,  일본은 아예 나라 전체가 싸움판이 된 시기였다.

그나마  명나라는 그에 비해 큰 문제 없이 나름 평화로운 시기를 보낸 것 같다.

 

 

양명이 태어나고 자란 시기의 명() 왕조는  9대 황제 홍치제(재위 기간1470~1505)로 명나라 시기 몇 안되는 현군의 시대였다.

이후  10대 정덕제(재위기간 1505~1521)는  역대 중국 황제를  통털어 진짜 독특한  4차원의  사고를 가진 황제 였었다.

역대 황제중  가장 놀기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표방(豹房)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놀이터를  만들어  표범이나 호랑이를 키우고  자신은 시녀들과 놀거나, 마음이 내키면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몽고족하고 싸우러 전쟁터에 나가 직접 전투에 참여 했다고 한다.

 

원래 명이란 나라는 원()말 시기에  몽고족을  북방으로 내쫓은 탁발승 출신의 주원장(1328~1398)이 세운 나라였지만  명나라 시기 내내 몽고족은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다.

() 왕조가 후에 명을 정복하기전 까지  명나라 시기에는 끊임없이  명과 몽고는 충돌 했었다.

그 세력 다툼은 한때는 명의 황제(정통제)가   몽고 부족에게 사로 잡히는 수모( 토목의 변:1449)를  당하기도 하는 등  당시의 명나라는 북쪽으로는 몽고와 남쪽으로는  왜구들로 인해 골치가 아팠다.

 

 

 

따라서 정덕제가 전쟁터에 직접 나가서 뛸  정도로  명나라 국경은 항상 전투 대비 상태 였는데  곧 이 시기가  왕양명이 무장(武將)으로  전장(戰場) 을 떠돌 때의 시기 였던 것이다.

왕양명은  유학자 출신이지만  만명의 군사로  10만의 반란군을 진압했을 정도로  천재적 군사적 재능을 지닌 명나라의 선봉 장군이기도 했다.

 

 

정리 하자면 왕양명은 명나라 전장을 누비는  장수이긴 했지만 당시 나라 안의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왔고  그 속에서 그의 유학은 독창적인 사상으로 발전 된 것이라 보아진다.

적당히 긴장하고 또  적당히 평화로운 분위기 라는 독특한 환경속에 그의  양명학이  완성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의 양명학은 주자학과는 구별이 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모든 사물과 뜻을 마음에다 바탕을 두었다.

마음 이란 것은  본래 주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양명학은 이 점에서 본질을 객관적으로   따지고 드는 주자학과 구별된다.

 

 

좀더 들어가 보면 양명학은  심학(心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명은  (), 즉 마음을 학문을 하는데 가장 바탕이  되고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심즉리(心卽理), 마음이  바로 이치다.  심즉신(心卽身), 마음이  바로 몸이다.

그에게 마음은 어떤 의미 였는가 하면  우리가 가진 몸이 라는 것도 마음이 물질화 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분리 시키는  서양 철학과는 달리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았다.

또한 그는 더 나아가 마음에서  앎()과  뜻(), 물질(), ()이 전부 나온다고 보았고  그들 모두가 하나라고 여겼다.

이 점이 불교의  불이사상(: 둘이 아닌)  과  유사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양명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치양지( 致良知) 양능(良能) 에 대한 것이다.

치양지는 양지에 이른다는 뜻으로,   양지는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고 양능은 배우지도 않아도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래서 양능은 양지를   활용하는 능력으로  이해 해도  될 것 같다.

 

 

양지는 누구나 지니고 있으며 없앨 수도   없는 것이고 그는 양지를  알고  따라야 된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도  양지가 있지만 욕심이  우선이고  양지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도()와는 멀어진다는 것이다.  양지가 곧 도 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양명의  양지 개념은  우리가  본래  지닌 능력을 말하는데 이것은 불교에서의  불성(佛性)과 같은 개념으로 보인다.

양명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 했는데 이것은 양지와  양능이 체현되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지행일치(知行一致)라고도  한다.

알면 행 할  수 있다는 뜻인데  행 할 수 없으면 아직 진짜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앎이 곧 실천이 되야 한다. 실천이 없다면  참된 앎이 아닌 것이라 볼 수있다.

그가  강조한 실천은 주자가  학문적으로 알기 위해 파고드는 것과  대비가  되는 것이다.

 

 

 

그는 공자로 부터 이어지는 유학의 근본이  되는  정신을  자신이 제대로 이행하고 있다고 여겼다.

비록 그가 주자를 따르지 않는다는 당시  성리학자들의 비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학문은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마음에서 구했는데 아니라면  비록  그  말이   공자님에게서 나왔다 해도 감히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공자를 믿는다.

주자는 무슨 이유로 공자의  문장을  개정하고 보충하고 편집하는 것인가?

도는 천하의 것인데 어찌 주자가  터득했다고 사사로이 소유할 수 있고 공자가 터득 했다고  사사로이 가질 수 있는가? 

비록 내가 주자와 논의가  다르더라도  나는  감히  소인의 마음으로 주자를 섬기지는 않았다.">

이 구절,  나는 감히 소인의 마음으로  주자를 섬기지는 않았다! , 감동이다.

주자학 외엔  사문난적이라 칭했던  조선 사대부들에게 일갈을 던지는 것 같은 후련함이 느껴진다.

 

 

주자학만이 최고이며 거의 광신적으로  변해가는 성리학 풍토에서 양명학이  나온 것은 진화적으로 돌연변이 같은 일이 발생 한 것 같다.

이때 어쩌면 성리학 수준을 한단계  더 올려 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조선에서는 강화학파(江華: 강화도에  은퇴하며 연구) 라 하여 양명학을 연구했던 소수의 학자들이 있었지만  성리학에 비해 인지도는 아주 낮았다고 한다.

그렇게 양명의  사상은 이후에 까지 호응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아직도 간간히 그의 진면목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나 역시 그런 사람중에 한 사람이 될 것 같다.

 

논어  선진편에 보면 공자와  제자들이 나눈 문답이 있다.

공자가 자로, 염유, 공서화, 증점에게  각자의 품은 뜻을 말해 보라고 한다.

그러자 자로와 염유, 공서화는 각자의 포부를 공자 앞에서 밝힌다.

자신에게   3년의 시간을  주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을 교화 시킨다는 둥 제후국들의 예악(禮樂) 을 맡은 벼슬아치가 되고 싶다는 대답들을 한다.

그들의 대답에 공자는 단지 미소를 짓는다.

그때 그들 곁에 있던  증점은 홀로 비파를 타고 있다.

그들과  공자의 문답에 아랑곳 하지 않고  증점은  여여하게  비파를 탄 후 자신은 봄이 오면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무우대에서 바람을 쐬며 노래 한 곡조 뽑은 후 돌아오겠다고 대답한다.

이에 공자는 증점을  찬탄한다. '나도 점과 뜻을 같이 한다.'

 

전습록에도 이들의 문답에 대한  제자가  양명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증점이 노는 듯 한 대답에 공자는 왜 칭찬을 했을까그것은  무슨 의미 였을까?

그에 대한 답은 왕명이 그랬듯이 내 스스에게 묻고 내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하리라.

 

이 책<낭독 전습록>은 왕양명의  사상에 대한 입문편으로 이해 하면 아주 좋은 책인것 같다.

이 책을 기획하고  출판한 출판사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양명은  자신의 심학이 불교의 마음을 닦는 것과 다르다고  했지만 나는 그 차이를 잘 모르겠다.

앞으로 이 책과  왕양명에 관련된  책을  곁에 두고 꺼내 보며 무엇이  다른지 곰곰히 따져 볼 것 같다.

 

 

공무와 송사 처리 같은 관아의 일을 수행하는 가운데서 학문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격물(格物) 공부인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학문을 강의할 수 있다. - P54

주자가 자신으로부터 먼저 절실히 수양했다면 자연히 그 밖의 것에 미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중략.....
주자는 젊은 시절부터 많은 책을 저술하였지만 만년에는 오히려 그 일들을 후회했다. - P61

광자는 비록 성인은 아닐지언정 그 자신이 품은 성인을 향한 열정을 포기하거나 굽히지 않는다. 나는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나의 행동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웃을지라도 나의 뜻을 포기하거나 굽히지 않을 생각이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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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옳다는 착각 - 내 편 편향이 초래하는 파국의 심리학
크리스토퍼 J. 퍼거슨 지음, 김희봉 옮김 / 선순환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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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나만 옳다는 착각

지은이: 크리스토퍼 J. 퍼거슨 / 김희봉 옮김

   :  파국(破局), 막으려면

 

 

 

'헤드라이트 앞의 사슴' 이란  용어가 있다.

한밤중에  도로 가운데에서  차의  헤드라이트를   보고  순간  얼어버린 사슴을  일컫는다.

이처럼  사람들이 판단 불능의  공황 상태에  빠졌을  경우에 '헤드라이트 앞의 사슴'이란   비유를 쓴다.

사슴 입장에서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눈부신 빛  때문에 달려오는  차를  순간적으로  피할 생각조차  못하게 된다.

운전자 입장에서도  눈 앞에 나타나  서있는  사슴을 보고  역시 똑같이  사고가 정지 될 것이다.

양쪽  다  순식간에  당황을 해서  피하지도   못하고  끔찍한  위기를  맞게 된다.

'헤드라이트  앞의 사슴' 처럼  우리는  때때로 삶에서  판단 불능이나 공황으로  인해 위기의 순간을 빠져 나오지 못할 때가 있다.

 

 

 

이와는  반대로 위기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재빨리 판단을 내리긴 하는데  오히려  비정상적이고  비효율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마음만 급해지고  정신적인  압박감으로 인한 패닉 상태에 빠져 비정상적인 행동만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경우이다.

'이렇게 하면 될 꺼야, 돼야 돼' 하고  중얼 거리면서  비효율적인 행위를  계속  반복하면서   자기에게 닥친 위기를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아무런 변화도 이끌어 내지 못하고 결국 최악의  결과를 맞이 하게 된다.

 

 

 

파국(Catastrophe: 破局= 깨뜨릴 파, 판 국). 즉  판이 깨지는 걸 말한다.

모든 파국의 상황을  시간이 지난후 다시 돌이켜 보면 당시엔 왜 저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최악의 상황만 골라 선택한 상황들을 마주하게 된다.

신이 의도적으로 개입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제 정신으로는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이해가 가질  않는 면이 있다.

이러한 파국들은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내는 것 일까?

이 모두가 어쩌면  단지 심하게 운이  좋지 않아서 일까?

 

 

이 책<나만 옳다는 착각>'크리스토퍼 J. 퍼거슨' 이라는  미국 스텟슨 대학의  심리학 교수가 쓴 파국에  관한 심리학 책이다.

 

책에는  에어 프랑스 477편  항공 사고를  비롯하여 코로나 19 펜더믹   발생후 초기의  화장지 대란 사건,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의 파국, 체르노빌   원자력 사태와  후쿠시마 원자력의  재난 과정 , 학교내 총격 사건, 이민자 문제, 인종차별 같은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또한  2020년 백인 경찰관에  의해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2021년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사당 폭동 까지  최근  미국에서  발생했던 굵직한 사건들을 통해 파국의 심리를 파헤친다.

 

 

저자는  심리학 교수 답게  광범위한 분야를 넘나들며 많은 일화와   자료를 통해 파국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위트가 넘치는 언어로 독자를 몰입 시킨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자는  대부분의  모든 파국은  인간의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감정이  이성을 앞도하는  상황에서는   서로간에 의사 소통이 단절되고, 판단력이  흐려지며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위기의 순간에 닥친 항공기 조종 오류, 팬더믹 사태에서  사재기에 대한 욕구, 이민자와  인종 차별에 이르기 까지 인간은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안한 감정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분석 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내가 관여하는 모든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 하지만 이런 판단은  다 착각 이란 것이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편향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때 부터  우리는  불안 해지며  심해지면  급기야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러다  결국엔  파국의 전조인  판단 불능과 공황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이 특수한 상황이 아니며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은  우리 주위에서 늘 발생하며  내 주위에도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확실한  자신의 생각 보다는   전문가의 말에 더 귀기울이게  되거나  나보다 주관이  확실한 사람을 따르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미디어가  몰아가는 여론이나  정치인의 확신에 찬 주장에 쉽게 우리는 선동되기도 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군중에게  값싼  사탕을 던지며 퍼레이드를  벌일때 군중들은 사탕을 받으며  기뻐하고  열광 했지만   수레가 지나간 후 애초에 사탕 따위를 원한적이  없었다는걸 깨닫게 된다는  작가의  통찰에 깊이 공감이 되었다.

 

 

그러나 책의  후미에 저자가 제시하는 파국을 막기 위한 해결책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면이 있다.

저자는  해결책으로  개인적인 조치와  사회적 조치를 제시 하는데  비교적 원론적인 대답에 지나지 않았나 싶다.

 

 

위기의  순간에 당황하지 말 것, 미리  연습을 통해  위기에 대한 경험과 훈련을 쌓을 것, 여론을   몰아가는 미디어나  편향된 과학자들의 주장 보다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따라야 한다는 것, 음모론 같은 주장에 반박하기 보다는  음모론에 대해  보다 깊게 이해 하여  다각적인 시각을 갖춰라 는  정도의 비교적 진부한 제안을 제시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양한  파국의 실례를 살펴 보는면에서 도움이 되지만  저자가 말한 파국의 원인이  되는 불안한 감정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 하지 못한 것 같다.

저자의 주장대로 라면 파국의 원인이 되는  인간의  불안한 감정을 통제 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내가  생각해 보건데 불안한 감정에  대한 해결책은  현대의 심리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라고 본다.

뇌 과학이  발전하면서 뇌 과학과  진화적인   측면에서  방안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우선  동양의 정신 수양면에서 답을 찾고 싶다.

보이지 않는 세계, 무의 세계의 영역까지 확장 시켜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양의 정신 세계는 아마 이런 면에서 가장   좋은 답들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유불도(儒佛道) 의 스승들 께서는 자신의 참성품을 깨달으라 하셨다.

물론  '' 를 깨닫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래서 스승들 께서는  수행을 강조 하신 것이다.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고 전하셨다.

내가  '나' 를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보이는 세계에  집착하고 끌려 다니고 산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짐작 할 수 있다면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도록  심안(心眼: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어떤  상태 인지, 내 주위 에서 벌어지는 일 들에 대해 내가 먼저 본능적인 반응하기 보다 좀더  근원적인 관찰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내가 옳다고  착각 하는 것도 나의 정확한 상태를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니 파국이란 것도 근본적으로는 나를 정확히 보지 못해서 벌어지는 것이다.

양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 어느  한쪽을 고집하지 않는 마음, 그러한 마음은  모두 '중도' 를 지켜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파국이란  중도를 지키지 못하고  나와 상대의 겉모습에 집착하는 편향된 마음을 가질때 벌어지는  결과가 된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금세   알고 있는 것을 잊어 버린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상태로 돌아 가고자 해야 한다.

큰스님 께서는  본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자꾸 그걸 까먹는다.

 

 

, 그럼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미디어나 정치인들이 말하는 것들에 우선 바로 반응하지 말고 내  마음을 지켜 보는게 우선일 것 같다.

내가 원하지도 않은 사탕을  주는 사람을 조심하고 내가  진정 바라고 원하는게 무엇  이었는를 잊지 말고 지켜 봐야 된다.

보이고 들리는 남들의   행동과 말에 반응 하지 말고  나의 상태만 끊임없이 돌이켜 보는것을  항상 염두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파국이란 것은 이제 앞으로 결코 일어 날 수 없는 일이 되지 않을까?

최소한 '' 앞에서 파국이  일어날 일은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헤드라이트 앞의 사슴' 은  이제 내게는 없을 것이다.

 

물론 나만의 희망 사항이다.

 

 

 

 

<사랑하면 참으로  알게 되고, 알면  참으로  보인다.

             (愛卽爲眞知, 知卽爲眞看)

  알면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이다.  

             (知卽爲眞愛, 愛卽爲眞看)

  보이면 모으게 되지만 , 그저 쌓아 두는 것은 아니다

             (看卽蓄知而, 非徒蓄也)>

 - 유한준(1732~1811) 정조시기 문인

다른 사람의 잘못이 더 잘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그 일에 감정적으로 매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 P11

자기가 소속된 집단 내의 태도와 신념이 의심스러워도 어느 정도는 순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거의 누구나 느낀다는 것이다. - P37

누군가의 신념을 지적하고 비웃으면 그 사람은 신념에 더 가까워지고, 멀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 P64

정치적 좌파나 우파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나 과학이 마음에 들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한다. 그들이 과학을 들먹일 때는 말 그대로 과학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며, 자신이 떠받드는 사회, 정치적 세계관을 위해 ‘과학‘을 편리한 몽둥이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올바른 정보는 없고 불안하기는 하니까 명백한 답을 찾아 헤멘다. 어설픈 관찰에서 존재하지 않는 상관관계를 찾아낸 다음, 일단 마음을 정하면 공격적인 행동을 취한다. 그 결과는 비극적일 수 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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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 - 손웅정의 말
손웅정 지음 / 난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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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

지은이: 손웅정의 말

   : 나는 슈퍼맨 이야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영화 <슈퍼맨>에서   슈퍼맨의 고향  클립톤 행성이 폭발을 앞두고 있다.

이때 그 별의 지도자급이자 과학자 였던 아버지 '조 엘'은  자신의 아들 '칼 엘'   홀로 우주선에 태워  탈출 시켜 버리고  자신은 행성의 운명과 함께 한다.

행성을  탈출한  우주선은  지구에 떨어 졌지만  다행히도  스몰빌에 사는  마음 착한 양 부모님 밑에서 '클라크 켄트' 로 자라나게 된다.

그리고 클라크 켄트는  하늘을 나는  슈퍼맨이 되어  지구가 위기에 빠질때 마다  지구를 구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슈퍼맨 줄거리 이다.

하지만 나에게 슈퍼맨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따로 있다.

클라크 켄트가  친부 조 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다.

우주선  프로그램에  입력된 홀로그램을  통해  슈퍼맨의 친부 조 엘은 클라크 켄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 놓았다.  

"아버지   눈으로  아들을  보고, 아들은  자라서  아버지가 되어  다시 아버지  눈으로 아들을 본다. 아들은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는   곧  아들이 된다."

내게는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다시 또  아버지가 아들이  된다' 는 말은  참으로 의미 심장하게 느껴진다.

 

 

나는 아들 둘을 키우는 아빠인 동시에 나는 또 우리 아버지의 아들로서 살고 있다.

내가  우리 아버지의 아들로  또 지금 내가   기르는  아들들의 아빠로서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이 부분에  대해 예전에 읽었던  동국대 '황수경 교수님' 이 쓴 칼럼(한마음 저널 57이 생각난다.

칼럼에서  황교수님은 어느  남자들만  있는 집단에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당신은 진정으로 바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세요? '  라고 묻고 답을 적게  했더란다.

그때  나온 답들이 '좋은 아빠', '믿음직한 남편', '신뢰를 주는 아빠', '존경 받는 아버지', '효도 하는 아들' 등등.

그들이  제출한 답들 대부분은  가정에서 좋은 가장이자 아버지, 아들이   되고 싶은  사람 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보통 우리 아빠들이 바라는 가장 전형적 이고 이상적인 대답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대답을 한 사람들은 전혀 생각도 못한 사람들의 답이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런 답을 적은 집단은 우리나라 최악의 범죄자들만 모여 있는 '청송 교도소' 에 복역중인 사형수 같은 흉악한 재수자들의 답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 경험은 권수경  교수님이 청송교도소의 사형수들을 매주 10년간 만나서 상담을 하며 겪은 일이라고 했다.

교수님 칼럼 글에서 우리의  시각으로 보는 그 흉악한 사형수들도 결국 자식을 가진 아버지 였고  그 자식들 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랑을 전해 주고  싶어 했고  하루라도 좋은 애비 노릇을 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즉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것은 평범한 사람이든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힌 사람이든  그 바램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바램을 이루게 되지  못한 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에 대한  답으로 이번에 읽게  된 손웅정 감독의 책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고 생각 된다.

책을 읽기전에  그동안 메스컴을 통해 접한 손웅정 감독의  이야기들은 이미  내가 책에 흥미를 끌기에 충분  했었다.

나도 그와 같은  아버지로서, 손감독이 자신의 아들들을 키우면서 느끼고 경험한 내용을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읽고 나니  이 책은 단순히  누구의 아버지가  아닌 인간  손웅정이 가졌던  체험 철학에 대하여  깊이  매료가 되었다.

이 책은 손웅정  감독과 김민정  시인이 일년 동한 대화  녹취한 인터뷰를 기반으로  만들어 졌다.

처음엔  손웅정이  직접 손으로 쓴 책이 아니라   실망할 뻔 했지만 오히려   두사람간의  일상적이고  진솔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손감독이 가진 철학을  끄집어 냈다.

그의 철학은 단순함을 기본으로 삼고  그 단순함을 섬세화  하는 과정을 충실히  반복 한다는 점이다.

아버지로서 아들들과의 관계, 감독으로 자신의 선수들과의 관계, 그리고 스스로 자신에 대함에 있어 늘 기본이 되는 단순함과 섬세함(책에는 '디테일' 이라 표현)을 반영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책에서 가장 놀라 웠던것은 그는  결혼한 큰 아들 집에 여지껏 한번도  간적이 없다는 것이다.

"걔들 공간에  왜  제가 부모라는  이름으로 침범하냐고요?"

이 말만 들어 보면 어찌 그리  부모 자식간에 냉정한가 싶을 정도로  생각되었지만

'자식은 부모 곁에 잠시 머물다 가는 귀한 손님으로 여긴다' 는 그의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 졌다.

"자식이 이름나고 애비가 어깨 힘주고 다니면서 꼴깞 떨지 마라"는 그의 말에는 내 마음속  은연중에 감춰진 자식 덕 보려는  심리를  들춰보게 해줬다.

또한  그는 독서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으며 수양 (修養)하는 아버지 상을 내게 제시했다.

손감독은  책을 읽으면서  그 책 내용중  가슴을 울리는 대목들은  항상 메모를 하고  외운다고 했다그리고 읽은 책은 쓰고 난후 버린다고 했다.

참으로 모든 일에 미련없이 간결 하게 처리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가 나눈 인터뷰중에 나오는 대화들은 손감독 자신에게 체화된 어록들로 도배 되어 있다.

<어디서든 나이 부터 들먹이는 사람은 꼰대다.

자식에게  마침표를  주는게 아니라   물음표를 던지는 부모가 되야 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육신을  키우는게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키워야 한다.

자식을  위해 자기를 지우고 희생하는게  아니라 자식을 위해 오히려 자신을  키워야 되는 부모가 된다.> 는 그의 어록에선  깊이 공감이 되었다.

<몰입은 단순함에서 오고 단순함은  버림에서 온다. 그리고  버림은 마음이  풍족한 상태에서 온다. 또한 토끼와 거북이 경주 일화를 통해 토끼는 상대, 즉 거북이만 보고 쉬었지만  즉 거북이는  목표만 봤기 때문에 승리 했다면서  봐야될 대상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는 그의 말은 어느 한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일류 대가의  풍모가 느껴졌다.  

 

그의  발 밑에는 축구공, 손끝에는 책이 있다고 한다.

그가  좋아하는 축구를 위해  늘  쉼없이 운동하고   단련하며 또 시간을 내어  부지런히 독서를 하는  그의 모습에서  인간 손웅정은 이미 누구의 아버지로  사는게 아니었다.

그의 이러한 면에서 깊이 공감이 되며 내 자신을 다시금 채찍질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를 보면  좋은 아버지는 만들어 지는 것이라 생각 된다.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고 수 양(修養)을 쌓는 수행자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든다.

 

 

 

그렇다면  다시  청송 교도소의 아빠들은 왜 훌륭한 아빠가 아닌 범죄자 될 수밖에  없는가를  살펴 보면 결국 차이는  그들은 자기 수행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업식대로  산 행위의 결과였다.

결국  좋은 아빠가 되는 것도  하나의 수행이라고  여겨야 되는게 아닐까 싶다.

 

 

 

이제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어린 아들들의 입장에서는 슈퍼맨이란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범죄자이든 훌륭한 사람이든 다 누군가에게 한때는 멋진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들들의 눈에도  자기 아빠가 세상 최고의 슈퍼맨 이었을 것이다.

한때 내 아버지도 내게는 슈퍼맨이었고 또 내 아들들에게도 나는 슈퍼맨 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세상을 보는 시선이 올라가자 내 아버지는 어느덧 백발의 노인으로 변했고 나역시 아이들 눈으로 보면 중년 아저씨로 변했다.

하지만 우리의 겉모습이야 변할지 언정 진짜 슈퍼맨의 모습은 겉모습에 항상 우리 안에 감춰져 있다.

내 아버지도 슈퍼맨 이었고 나도 슈퍼맨 이었고 이제 곧 내 아들도 슈퍼맨이 될 것이다.

 

 

 

한때  내 자신이 슈퍼맨 이었음을 잠시 망각 했지만  다시 슈퍼맨으로 변신해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나는 이렇게 독서를 하고 글을 쓴다.

영화속  클라크 켄트는 태양 에너지로  힘을 보충하지만  현실속에 사는 우리의  모든 슈퍼맨들은 자식들과 아내의 격려로 힘을 얻는다.

비록 얻어 내는 격려가 생각보다 충분하진 않지만 그래도 좋다.

내가 슈퍼맨 이였음을  자각하고 다시  내가 좋아 하는 일로 스스로 값지게 만들어야  하는 세상에 살게 됨에 감사 할 따름이다.

세상의 모든 슈퍼맨들이여 !

힘내고 다시 날아 오르자.

우리 위의 창공은 우리가 다시 떠오를 때를 기다리고 있다.

 

 

 

 

결국 불편함은 노력이에요. 내가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그런데 이 불편함이 지속 된다는 건 한편으로는 내 몸에 좋은 습관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얘기잖아요. - P20

흔히들 자식에게 친구 같은 부모가 되어 줘야 한다고들 하는데 저는요, 그거 직무유기라고 봐요... 중략...
친구가 지적은 할 수 있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끝끝내 말해줄 수 있는 건 부모뿐이에요. - P24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니까 부모가 제 틀에 제 자식을 딱 끼워 맞춰버리는 거예요. 좀 비약해서 말하자면 그건 부모가 자식을 안 보고 자기를 본다는 거거든요. - P41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하루하루 무언가를 더하고,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하루하루 무언가를 버리라고 그랬어요... 중략...
이 가운데 버려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은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안다는 얘기도 되거든요. - P104

그 순간 나는 내 가치를 어디에 뒀지? 하고 묻는거예요.
내가 지금 돈을 잃게 생겼어. 그런데 나는 내 가치를 건강에 뒀어. 그러면 그 순간 뭔가 좀 심플해지지 않나요?... 중략...
그 순간 뭔가 아주 선명해진다니까요 - P130

제목의 한 줄 메시지가 크고 확실한 책에 꽂혀요. 가슴을 때리는 그 타격감이 있나 없나, 그거 없으면 절대로 안 집어요. - P192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가질 수 있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를 수 있다.
樹木等到花谢, 才能結果
江水流到捨江, 才能入海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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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허락이 필요치 않은 삶 - 하나의 경계선이 당신을 자유롭게 합니다
조세프 응우옌 지음, 박영준 옮김 / 서삼독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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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타인의 허락이 필요치 않는 삶(하나의 경계선이 당신을 자유롭게 합니다)

지은이: 조세프 응우엔/ 박영준 옮김

   : 삼반견해(三般見解)중 두번째 견해

 

 

 

조세프 응우엔의 신작<타인의 허락이 필요치 않는  삶>은 '바운더리 (Boundary)  가  곧  자유'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타인과  나 사이에  경계선을  세운다.

상대가 불편해 할  수도 있겠지만 상대를  향해 나는 ''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 는 내용만 보면.

마음을  닦아 내면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언뜻 이해가 안갈 수 있는 내용이다.

보편적으로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남과 나를 차별 하지 말고 항상 둘로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상대와 나를 둘로 보지 말고, 항상 내 탓으로 돌리는 삶이 수행이라 여긴다.

하지만 조세프 응우엔은  경계선을  세우는 것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만든다고 말하다.

무념의 전도사를 자처했던  저자는 이런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 인가?

 

 

 

저자의 전작인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믿지 말라>를   읽었다면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대략 감이 오리라 생각 된다.

'조세프 응우엔' 은  전작<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믿지 말라> 을 통해서  '생각하기(사고 하기:Thinking) 를 멈추고  무념(non-thinking) 속에서  떠오르는  직관을 믿어라' 고 했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짓는 모든 생각하기,  사고하기를  멈춰야만 비로소 내 안에 본래 있는 근원적인 무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었다.

저자는 무념에 대하여 '인더존(in the zoon)' , '(zoon) 안에 들어 간다' 는 스포츠 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통해  무념무상의 경지를 설명하였고 이때  무념의 상태에서 떠오르는 직관의 힘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는 것이 작가 조세프 응우엔이  전하고자 하는 요지 였다.

즉 억지로 지어내는 생각이나   알음알이가 아닌  무념의 상태에서 떠오는 직관을  따르라는 뜻이다.

작가가 말하는 '무념' 은 우리가 본래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생각과 같은 의미이다.

이는 '신성(神性)'이나 '불성(佛性)' 이라 불러도  무방할  용어라고 생각 된다.

그런데  이번 신작에서 작가는 무념과 동떨어진 선긋기를 말하고 있다.

 

그럼 그는 이번의 신작에서는 왜 경계를 세우는 것, 바운더리를 치는것을 내세웠을까?

왜  바운더리가 곧  자유라고 했을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운더리, 내안의 경계는 '내 중심' 을 지키라는 말과 상통하는것이 아닐까 싶다.

내 중심이라면  내 근본 마음을 말한다.

즉 내가 남에게서 의견을 구하고 남의 말에 따르는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근본 마음에 귀 기울이고 그 소리에 따르라는 뜻이다.

작년에 읽었던 남들이 믿고 있는 상식에 대하여 'Say No' 라고 할 수 있어야 된다고 했던 <세이노의 가르침> 의  구절과도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내 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직 나에게   좀더 집중을 해야 한다.

 

 

 

듣고 보고 행하는 모든 것을 주체가 되는 나에게로 돌려야지 타인의 말과 소리, 뜻에 맹목적으로 쫓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 <타인의 허락이 필요치 않는 삶>이 되는 것은 곧 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는 내 인생, 내 삶의 주인은  내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작가는 남이 소중하고 귀하듯이 나도 귀하고 소중하다고 했다.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게 아니고 또 나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논리가 아닌 남은 남대로 소중하고 나는 나 대로 전부  다 소중하는 뜻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바운더리, 경계선은  사실 내  안의 참나를 오롯이 세우는 것을 뜻한다.

결국 남과 나를  구분 하고자 했던 '분별' 이 아니라 사실은 오히려 '나 다운 나' 로 살기 위한 '방편' 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작에서 언급 했던 '무념'과 이번  책에서 언급한 '경계선' , 모두 참나를  알기 위한 과정을 담아내기 위한 방편이라 여겨진다.

 

 

이 처럼 독자의 마음을  깨닫게 위해 저자가  이끌어주는 방법을 보면 유명한 선어록 구절이 떠오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 법어중 마지막 구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는 성철 큰스님(1912~1993)께서 1981년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 하실때  남기신 어록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원래는 중국 선어록에  나오는 말로 송나라때 '청원 유신 선사(?~1117)'가 남긴 어록이다.

 

 

<견산시산 수시산(見山是山 見水是山)

견산불시산 견수불시수(見山是山 見水佛是水)

견산시산 견수시산(見山是山 見水是水)

이 세가지 견해(三般見解)가 같은것 인가? 다른 것인가?

누가 이것을 가려 낼 수 있는가? >

 

청원 선사는 산과 물을 보는  시선(見)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를 설(說)해 주었다고 한다.

선사는 깨닫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좀더 확철대오(廓撤大悟: 큰 깨달음)를  해보니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 보였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 견해가 과연 같은 것인가다른 것인가를  대중들에게 물은 것이었다.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를 보는 단계의  마지막 단계는  첫번째 단계와 다르지 않지만  다르다.

중요한 것은 두번째 단계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를 반드시 거쳐야지 만이 세번째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헤겔의 변증법 처럼 정() 다음에  반()이 있어야  합()이 되는 것과 같다.

 

조제프 응우엔이 이번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세번째 단계로 가기 위한 반(反): '분별' , 즉 삼반견해중 두번째 견해에  해당 된다고 본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바운더리는 곧  주체적으로  살기 위한 참나인 '주인공' 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곧 자유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자신만의 간결한 어조로 담아내는 작가의 통찰에  공감하며 그래서 그의 다음 책이  더욱 기대가 된다.

 

남들의 기준에 맞춰 모든 일을 올바르게 했는데도 왜 과도한 일에 시달리고,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함을 느끼고, 불만족스러운 감정에 시달리는지 스스로 의아해합니다.
그것이 바로 경계선이 없는 삶을 살아갈 때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 P21

오직 직관에 따라,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경계선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 합니다. - P41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아도 아무렇지 않을 때 당신은 비로소 평화를 얻게 됩니다. - P62

한 분야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그 변화를 다른 분야에서도 적용하여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P71

당신이 사랑하는 삶을 창조하는 일은 자신을 파악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중략...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세계가 아닌 이것도 저것도 소유할 수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 P103

예전의 경계선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경계선을 설치해도 당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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