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년3월22일
오늘의정진: 不是山僧呈人我/불시산승정인아/산승이 인아상을 드러냄이 아니오
- 100일 정진, 87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한 번째와 백 두
번째 구절은
<若是野干逐法王/약시야간축법왕/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百年妖怪虛開口/백년요괴허개구/백년 묵은 요괴가 헛 되이 입만 여는 것이라
圓頓敎勿人情/원돈교물인정/원돈교는 인정이 없나니
有疑不決直須爭/유의불결직수쟁/의심이 있어 결정치 못하거든 바로 다툴지어다> 였다.
선(禪)에서 소소한 인정(人情)은
필요치 않다. 자비(慈悲)의
종교인 불교에서 살불살조(殺佛殺祖) 같은 선의 과격함은 어쩌면
이단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교는 방편(方便)의 종교이기도 하다. 수많은 법문과 수행이 결국 전부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는 법화경의 말씀이 있다. 사람마다 근기(根機)가 다 달라서 어떤 이는 쉽게 불법의 요체를 체득하지만
어떤 이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위해 각각의 근기에 맞추어
가르침을 펴야 했던 것이다. 일체 중생들이 본래 가진 부처의 성품을 깨닫게 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방편을 사용했다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선의 과격한 일면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선은 방편을 넘어선 최고의 수행이기도 하다. 모든 의심을 단박에 깨부수기 때문이다.
오늘은 백 세 번째와 백 네 번째 구절
不是山僧呈人我/불시산승정인아/산승이 인아상을 드러냄이 아니오
修行恐落斷常坑/수행공락단상갱/수행타가 단상의 구덩이에 떨어질까 염려함이로다
非不非是不是/비불비시불시/그름과 그르지 않음과 옳음과 옳지 않음이요
差之毫釐失千里/차지호리실천리/털끝만큼 어긋나도 천리 길로 잃으리도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금강경에서는 사상(四相)이라
부른다.
불교에서 상(相)이란 ‘고정된 모습’ 또는 ‘고정된 관념’을
뜻한다. 불법을 배우는 목적이 궁극적으로 내가 본래 없음을 아는 무아(無我)를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 내가 없다는 사실을 고정관념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상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네가지 고정된 생각을 지칭하는 것이다. 아상은 내가 있다는 생각, 즉 자아가 있다는 고정 관념, 인상은 남이 있다는 생각, 즉 개아(個我)가
있다는 고정 관념, 중생상은 우리 모두가 중생이라는 생각, 즉
범부라는 고정 관념, 수자상은 우리 모두는 목숨이 있으며 영혼이 있다는 고정 관념을
의미한다. 결국 사상이란 ‘나’ 가 있다는 고정관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수행자는 이러한
사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정된 생각은 또 하나의 분별심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분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정말 쉽지 않다. 그 또한
‘나’라는 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맞다, 틀렸다고 하는 시비(是非)를 따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증도가에서는 털끝만큼의
분별심이 있다면 결국 천리나 되는 거리 만큼이나 어긋나게 되버림을 경고했다.
승찬(僧璨) 대사의 심신명(心信銘)에서도 같은 구절이 나온다.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털 끝 만큼의 차이가 있어도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다.>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서는 결코 ‘참 나’를 알지 못한다.
<일일 소견>
어쩌면 마음 공부는 내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별심을 내려 놓는 것이 전부 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