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년2월10일
오늘의정진: 覺即了不施功 각즉료불시공 /깨치면 바로 마침이요, 공을 베풀지 않으니
- 100일 정진, 47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마흔 여섯 번째 구절은
<優遊靜坐野僧家 우유정좌야승가 /한가히 노닐며 절 집에서 고요히 앉으니
闃寂安居實瀟灑 격적안거실소쇄 / 고요한 살림살이 참으로 기운이 맑고 깨끗하다.> 였다.
선(禪)에서는 깨달음을 얻고 난 후 보임(保任) 혹은 보림이라 하는 과정이 있다.
자신의 본래 성품을 깨친 후, 그것이 끝이 아니라 다시 갈고 닦아야 된다는 뜻이다.
즉 돈오점수(頓悟漸修), 깨달은 후에도 점차 닦아야 되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
육조 혜능선사도 오조 홍인의 인가를 받았지만 곧 바로 오조의 법을 잊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쫓는 사람들을 피해 사냥꾼들 속에 섞여 자신을 감추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육조 같은 선지식도 자신의 깨침에 대해서 다시 점검하고 또 점검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영가선사 또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 고요한 참 성품을 깨쳤다고 하지만 그 고요함의 향기를 한동안 음미하고 지냈을 것이다.
그 깨달음의 향기 내음은 그가 묵었던 암자 주위로 신성하게 퍼져 나가지 않았을까?
오늘은 마흔 일곱번 째 구절
覺即了不施功 (깨칠 각, 곧 즉, 마칠 료, 아닐 불, 베풀 시, 공 공 )
각즉료불시공 /깨치면 바로 마침이요, 공을 베풀지 않으니
一切有爲法不同 (한 일, 온통 체, 있을 유, 할 위, 법 법, 아닐 불, 같을 동 )
일체유위법불동/ 일체유위법과 같지 않다.
이번 구절은 선에서 깨달음에 관한 중요한 견해에 해당한다.
깨치면 바로 마침이란다. 각즉료(覺卽了)!
바로 돈오돈수(頓悟頓修)를 뜻하는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간의 논쟁이 있었다.
퇴옹성철(退翁性徹 1912~1993) 스님께서 이 논쟁의 주역으로 등장하여 돈오돈수가 옳다고 주장하신 것이다.
깨우치면 그걸로 끝이지 무얼 더 닦아야 하느냐?
더 닦을 것이 있다면 그건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자 당시 불교계에서는 논쟁이 붙었다.
성철스님보다 700년 전에 고려시대에 이미 보조국사 지눌스님(普照國師 知訥 1158~1210) 은 돈오점수를 주창하셨기 때문이었다.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가 이전까지 보편적인 깨달음 이후의 보임과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창하니 사람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돈오돈수가 옳은지? 돈오점수가 옳은지? 과연 무엇이 맞는지?
그런데 이 문제는 옳고 그름이란 판단의 문제일까?
판단의 문제로 생각하면 결정을 내야 하지만 깨달음의 문제가 과연 판단의 문제일까?
깨달음은 순전히 개인의 체험이다.
나의 체험을 누가 판단 할 수 있을까?
돈오점수와 돈오돈수가 서로 다르다고 확신 할 수 있을까?
영가스님의 이 구절은 깨달음을 마친 돈오돈수로 이해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공(功)은 공덕(功德)을 말한다.
공덕이란 무엇인가?
흔히들 착한일, 즉 선업을 짓는 것을 복덕(福德)을 쌓는 다고 한다.
공덕은 복덕보다 개념이 더 넓다.
자신의 복을 짓는 것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을 공덕이라 부를 만 하다.
공덕은 나와 남을 포함하여 우주에 까지 이로움이 생기는 덕을 뜻한다.
깨달음은 나 혼자만의 사건이 아니다.
분명 나를 포함한 내 주위, 심지어 우주에 까지 그 이로움이 미친다.
그러면 공덕은 자연히 베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깨달음을 마쳤는데 공덕을 베풀지 않는다고 했을까?
바로 뒷 구절과 이어서 봐야 한다.
우리의 세간은 유위법이 지배한다. 그러나 무위법은 유위법과 같지 않다.
유위법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무위법이 바탕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무위의 공덕을 베푸는 게 오히려 맞다고 본다.
이 구절은 반어법으로 이해함이 옳지 않을까?
돈오돈수라 하여 공덕 베품이 없을까?
오히려 깨달음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일일 소견>
돈오돈수나 돈오점수의 논쟁은 부질없다. 내가 우선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