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 - 일본이 감추고 싶은 비밀들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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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에서 청조가 완패한 지 약 10여년 뒤인 1853년 7월 8일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인 매튜 페리 제독이 지휘하는 동인도 전대(East India Squadron) 산하 4척의 군함이 에도 성 남쪽, 도쿄만 끝의 우라가(지금의 요코스카)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들은 무력 시위를 하면서 막부를 위협하고 개항을 요구하였다. 지난 백여년 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 태평양을 꾸준히 잠식해 나가던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드디어 동쪽 끝단에 있는 일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래 지난 250여년 동안 조선과 청, 류큐, 네덜란드와 제한적인 교역 이외에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누구도 나갈 수 없다는 쇄국 정책을 완고하게 고수해 왔던 막부도 미국의 함포 외교에는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약 8개월 뒤인 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문호를 열었다. 막부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다른 열강들에게도 굴복하여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였다. 덧붙여, 우라가에서 페리 제독의 함대가 무력 시위를 벌이며 일본인들에게 위압감을 주었던 모습은 그로부터 꼭 92년이 지난 뒤에 할제이(William F. Halsey) 제독이 지휘하는 미 제3함대가 또 한번 그대로 재현하게 된다.

오랫동안 좁은 세계에 갖혀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문호를 연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나라와의 통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바깥 세계에 여지껏 몰랐던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구 체제의 권위는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졌고 질서가 무너지면서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일본은 둘로 갈라져서 막부를 지키려는 자와 타도하려는 자로 나뉘어 서로를 향하여 칼을 들이대었다. 막부 타도의 선봉에는 조슈의 모리 가문과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이 섰다. 이들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래 도쿠가와 막부의 냉대를 받아 왔기에 오랜 원한이 있었으며 전국 300개 번 중에서도 '웅번(雄藩)'이라고 불릴 만큼 손 꼽히는 실력을 갖춘 세력이기도 하였다. 또한 막부나 다른 번들에서는 고루한 관료들이 어떻게 하면 낡은 질서를 유지할 것인가에만 골몰했던 것과 달리 조슈번과 사츠마번은 젊고 혈기왕성한 개혁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차지하고 번의 내정을 적극적으로 개혁하고 신분과 상관없는 유능한 인재 등용과 군비 증강에 나서는 등 힘을 키웠다. 막부도 나름대로 근대화에 힘을 기울였다고 하지만 그 속도와 추진력에서는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힘의 균형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조슈-사츠마 쪽으로 빠르게 기울었다.

막부와 反막부 세력의 신경전은 결국 보신 전쟁의 폭발로 이어졌다. 1868년 1월 3일 막부군의 교토 진격으로 도바-후시미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군에 의하여 서구식으로 훈련된 막부군은 삿쵸군보다 숫적으로 무려 5배나 우세했기에 사람들은 막부측의 승리를 예견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구식 군대와 신식 군대가 뒤섞여 있는데다 사기도 형편없었던 막부군과 달리 삿쵸군은 훨씬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으며 미니에 강선식 머스킷으로 무장한 막부군은 당시로는 최신이었던 슈나이더 후장식 라이플로 무장한 삿쵸군에게 화력에서 완전히 제압당하였다. 막부군이 한발 쏠 때 삿쵸군은 10발을 쏘는 판이니 숫적 우위 따위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항전을 포기하였고 에도성을 삿쵸군에게 내주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일본의 내전은 한동안 계속되어 1877년 세이난 전쟁을 끝으로 비로소 일본은 유신 정부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일본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의미에서 중앙 집권화의 실현이었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를 비롯한 각종 창작물에서는 흔히 칼 든 사무라이가 총과 대포의 포문을 향하여 용감하게 돌진하는 모습이 장렬하게 묘사된다. 근대적인 총기 대신 검 한자루를 들고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죽음을 선택하는 사무라이들의 비장한 모습은 팔기군이나 마라타 동맹의 인도군, 줄루 전쟁에서의 줄루 군대 등 동 시대의 다른 아시아-아프리카 군대들이 막강한 서구 군대의 총포 앞에서 도주하기 급급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과는 그야말로 대조적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실제 역사와 전혀 동떨어져 있을 뿐더러, 서구 사람들의 일본 문화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서구의 기사들이 소위 '일기토'를 고수하면서 자신의 용맹함을 드러내기 어려운 원거리 투사 무기를 배척했던 것과 달리 사무라이들은 총과 활에 대한 아무런 거부감도 없었다. 검은 주된 무기가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에 불과하였다. 사무라이와 기사 문화를 동일하게 바라본 것에서 비롯된 관념적인 오해이다.  

전 세계가 서구 열강들에 짓밟히던 빅토리아 시대에 식민지가 되지 않은 나라들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중국과 인도처럼 가장 오래되었으며 강성한 나라들조차 유럽의 총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중국과 태국, 에디오피아가 식민지 신세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외세의 침략을 물리칠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 아니라 세력 균형이라는 명목으로 열강들이 놔둔 덕분이었다. 그런 점에서 더 강성한 나라들도 해내지 못했던 일본의 성공은 실로 놀라운 것이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언젠가 부흥이라는 카페에서 누군가가 에도 시절의 발전상과 도쿠가와 막부의 세입이 청조와 맞먹었다는 이유로 일본에게는 근대화를 이룩할 만한 자금력이 있었던 덕분이라고 주장한 것이 기억난다. 이것은 일견 그럴 듯 하지만 그 말대로라면 메이지 유신의 주체는 마땅히 막부가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일본과 조선을 놓고 비교한다면 에도 시절의 발전상은 그야말로 굉장하게 보이겠지만 동 시기 중국이나 인도와 비교한다면 초라한 수준에 불과했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무역의 중심은 항상 중국과 인도였다. 유럽인들은 중국의 차와 인도의 향신료, 면화에 열광하였다. 만약 이것이 아니었더라면 애초에 대항해시대가 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콜롬부스가 인도로 가는 새로운 길을 찾겠다고 나선 것이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 아니었던가. 반면, 일본은 변두리였다. 유럽인들이 보기에 일본은 시장이 작고 은 이외에 매력적인 상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도 시절의 발전상이란 그저 조선보다 좀 나은 정도이지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본보다 10년 먼저 문호를 개방한 중국은 창장 이남의 연안을 중심으로 빠르게 서구화되었으며 서구와의 무역 허브 역할을 했던 상하이, 광저우, 우한, 홍콩은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였다. 농민들에 대한 쥐어짜기 식 수탈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허덕였던 막부와 달리, 청조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조세 부담을 최소한으로 억제하였고 GDP에서 국가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3% 미만이었다. 중국 농민들의 조세 부담은 일본 농민들의 1/12에 불과하였다.

인구와 국력, 자원 어느 면을 보더라도 근대화에 성공했어야 할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열강의 침략을 견디지 못한 반면,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지정학적으로 유럽인들에게 중국보다 일본이 더 멀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더 가까우면서 훨씬 더 크고 먹음직스러운 중국에 달려든 덕분에 아시아의 끄트머리에 있던 일본은 뒷전이 되었다. 또한 일본이 개항을 했을 때에는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유럽에서는 프-오전쟁과 보불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다는 점도 행운이었다. 아무리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제법 강성한 축에 속했다고 한들 유럽 열강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대수롭지 않았다는 점에서 만약 일본이 중국보다 먼저 침략을 당했다고 했을 때 과연 그것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일본은 운이 좋았다.

하지만 일본의 성공을 그저 행운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분명 지나친 도식화일 것이다. 지정학적인 유리함으로 따진다면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중국이나 조선도 유럽의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부국강병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중국과 조선에서는 개혁 세력이 구 세력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막연한 생각과 달리 청조의 황제와 조선의 임금은 결코 사치향락에만 눈이 멀었던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개혁의 필요성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변법파를 숙청했다는 이유로 중국인들에게 수구 세력의 대명사로 불리는 서태후만 하더라도 사실은 개혁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다. 고종 또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궁전 깊숙한 곳에 틀어박힌 채 제한적으로 외국 문물을 접하던 이들로서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방향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고루한 관료들 또한 둔감하고 우유부단하면서 바깥 세상에 대하여 무지하기 짝이 없었다. 메이지 정부가 재정적인 궁핍함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이와쿠라 사절단이라는 대규모 사절단을 구성하여 장장 2년에 걸쳐서 세계 각지를 돌아본 것이나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실권자가 된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앞두고 미국과 서방을 방문하여 근대화의 방향을 잡고 협력을 요청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개혁은 일관성이 없었으며 대개는 권력자의 자기 과시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성과는 적으면서 돈만 쓸데없이 낭비하기 일쑤였다. 나름 야심차게 시도되었던 양무운동과 광무개혁이 완전히 실패로 끝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기득 세력들 입장에서 부국강병도 물론 중요했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개혁과 보수는 서로 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태평천국의 난처럼 구 체제에 대한 도전이라고 해서 반드시 개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중국과 조선 사회는 일본에 비하여 훨씬 보수적이었으며 개혁 세력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일본은 분명 남들보다 운이 좋았지만 그 운을 살린 것은 전적으로 유신파 지도자들의 능력이었다. 만약 삿쵸 동맹이 막부에게 굴복했거나 또는 유신파가 태평청국의 지도자들처럼 그저 권력에만 눈이 멀어서 개혁에 대한 비전이나 구심점 역할을 할 능력이 없었더라면 과연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냉철하게 말하여 일본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화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메이지 유신은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의 독립 전쟁과 달리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구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일부 하급 사무라이 계층과 상인 세력이 주도하였다.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신분제는 철폐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지배와 피지배라는 봉건적인 신분제가 일본 사회를 굳건히 지배하였다. 근대화의 열매는 소수 엘리트 권력층이 독점하였고 대다수 민초들의 삶은 이전과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에도 시절보다도 더 열악하였다. 과연 무엇을 위한 근대화였던가. 호전적인 지도자들은 사회 개혁 대신 그로 인한 불만을 주변국에 대한 침략으로 돌렸다. 파멸을 향한 폭주는 결국 두방의 원폭과 함께 온 국토가 초토화된 뒤에야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이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는 메이지 유신의 실체이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므로 어지간한 일본 근현대사 서적에서는 빠짐없이 거론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 특유의 일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일본 근현대사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데다 중요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두루뭉실하게 언급할 뿐, 디테일하게 분석하는 책은 찾아보기 어렵거나 너무 전문적이라 충분한 배경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꽤 부담스럽다. 그런 점에서 도도 출판사의 신작 도서 <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은 주목할 만한 책이다. 저자이신 조용준 씨는 동아일보 편집자를 지낸 분으로 비록 역사를 전공한 사학자는 아니지만 전문 언론인답게 탁월한 필력이 느껴진다. 또한 <도자기 여행>이라는 시리즈물을 내는 등 도자기 쪽으로 박학하신 분인데 이 책에서 다루는 주된 소재가 바로 이 도자기 얘기에 있다는 점이다.

과연 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무엇을 묻는다는 말인가. 저자는 메이지 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임진왜란 시절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갔던 조선의 도공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임진왜란에서 일본은 조선의 수많은 기술자들을 납치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표적이 된 것은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이었다. 전국 시대 말기에 오면 일본 상류 계층을 중심으로 다도 문화의 열풍이 한창 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법에 따라서 차를 마시는 것은 다이묘나 상위 사무라이, 상인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교양 덕목이었다. 제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다도 문화를 모르고 이름 있는 다기 한 세트 정도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상류 사회에 끼지 못하였다. 단적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4천왕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웠는데 자기가 원하는 다기 대신 영지를 받았다고 하여 크게 실망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일본의 도자기 제작 능력은 형편없었기에 조선과의 무역에서 도자기 수입은 인삼, 서적류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임진왜란은 낙후된 도자기 기술을 끌어올릴 수 있는 호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마즈 요시히로더러 조선에서 도공을 납치해 오라고 지시하였다. 이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 중에 납치된 조선인 노예들은 적어도 5만 명에서 많게는 1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사람은 고작 7500여명에 불과하였다. 어떤 이는 가고 싶어도 주인이 놓아주지 않아서 갈 수 없었고 또 어떤 이는 이쪽의 삶이 더 낫다는 이유로 돌아가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은 주로 큐슈와 주코쿠 등 서 일본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이 집단으로 사는 마을은 도진초(唐人町)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사람 마을이라는 뜻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중국인을 가리키는 '당나라 사람'으로 부른다는 것은 해괴한 소리이지만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이나 중국인이나 같다고 여겼던 것이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많은 다이묘들이 조선인 도공의 납치에 열을 올렸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 히젠의 나베시마 나오시게였다. 덕분에 사츠마와 히젠은 일본의 주요 도자기 생산 지역이 되었다. 다이묘의 적극적인 후원과 꾸준한 기술 개량을 통하여 17세기 후반에 오면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었고 기술력에서도 조선을 능가할 정도였다. 북큐슈 히젠의 아리타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네덜란드 상인을 통하여 아시아와 유럽으로 수출되었으며 중국산 도자기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650년부터 1757년까지 약 100년 동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수출된 아리타산 도자기는 무려 120만 점이 넘는다. 사츠마와 히젠 사가번의 주된 재정 수입이 도자기 판매 이익이었다.

저자는 사츠마번과 사가번이 임진왜란에서 납치한 조선인 도공들을 어떻게 활용했으며 도자기 판 돈으로 최신 기계류와 무기를 구입하여 조슈번, 도사번과 함께 메이지 유신에서 막부 세력을 격파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책을 읽으면서 일본 근대사에서 조선인 도공의 위상을 새삼스레 돌아보게 된다. 만약 임진왜란이 없었더라면, 조선인 도공들을 납치하지 않았더라면 사츠마번과 사가번은 최신 무기를 구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연 삿쵸 동맹이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또 한가지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다. 사야가 김충선을 비롯하여 조선에 귀화한 항왜들이 조선군이 되어서 정묘, 병자호란에 활약하였듯이 많은 조선인들 역시 일본의 사무라이가 되어서 세키가하라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쟁에 참전하고 큰 희생을 치루었다. 책에서는 이 부분까지 언급되지는 않지만 보신 전쟁에서 사츠마 군에는 조선인 출신들이 의용군으로 참여했으며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킨 세이난 전쟁에서도 100여명의 조선인들이 정부군에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다.(일본에서 꽃핀 조선의 도자기 문화, 구태훈, 2008년) 이들은 장장 260여년에 걸친 시간 동안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지만 메이지 유신에 와서 더 이상의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일본인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책에서는 임진왜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의 과정을 다양한 사료를 통하여 설명하는데 저자의 박학다식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메이지 유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인 삿쵸 동맹을 실현시킨 최대의 공로자로서 불후의 명성을 떨치게 된 사카모토 료마의 진실, 당대 세계 최대의 다국적 기업이었던 영국 로스차일드 가문이 막후에서 무엇을 했는지, 300여개에 달하는 번 중에서 하필이면 사가 번, 조슈번, 사츠마번이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어 거대한 막부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이유, 메이지 지도자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대륙 침략을 처음으로 주장했던 요시다 쇼인에 대한 이야기 등 흔히 간과되거나 제대로 알지 못했던 메이지 유신의 역사를 이 책을 통하여 다시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는 불충분한 근거로 과도한 억측과 확대 해석, 논리 비약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부분도 있다. 시바 료타로의 말을 빌려서 사가 번의 군사력이 동 시기 유럽의 손꼽히는 열강 중의 하나였던 프로이센에 비견될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건 어떻게 보더라도 억지인 듯 하다. 프로이센은 비록 영토는 작았지만 가장 근대화된 지역이었으며 영국,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와 함께 유럽 5대 군사 강국이었다. 그 힘으로 강적인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격파하고 독일을 통일하였다. 반면, 사가 번은 일본의 여러 번 중에서는 강한 축에 속했을지 몰라도 메이지 유신의 주역도 아니었을 뿐더러, 정작 사가의 난에서는 별 힘을 쓰지 못한 채 정부군에게 간단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시바 료타로야 역사가가 아니라 소설가이고 특유의 국뽕과 과장을 섞어서 "사가번은 프로이센과 맞먹었다." 운운했을 뿐이다.

또 한가지  메이지 천황이 사실은 진짜 천황 가문이 아니라 조슈번의 유신 지사들이 세운 가짜라는 점, 게다가 조슈번 내에 있었던 조선인 부락민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카더라"식일 뿐,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 내에서 이런 주장이 있다고 흥미 차원에서 거론할 수야 있겠지만 메이지 유신과 조선의 연관성을 끌어내겠다는 의욕이 너무 앞선 것은 아닌가 싶다. 근거가 불충분한 얘기는 흥미보다 오히려 책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법이다. 저자가 아무래도 전문적인 역사가가 아닌 언론인이다보니 그런 듯 하다.

약간의 억측은 없지 않지만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지루하기 쉬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저자 특유의 필력과 흥미로운 이야기, 풍부한 자료는 읽는 이로 하여금 책에 푹 빠지게 만든다. 컬러풀한 사진 또한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 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눈요기 꺼리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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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의 만리장성 - 그림자 금융, 유령 도시, 대규모 부채 그리고 중국 경제 기적의 종말
디니 맥마흔 지음, 유강은 옮김 / 미지북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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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40대 이상이라면 1997년 IMF 외환위기의 암울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의 분위기는 말그대로 대한민국은 완전히 끝장났다는 것이었다. 주식은 하루아침에 1/4 토막이 났고 수많은 기업들의 도산과 정리 해고로 쫓겨난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가정의 붕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뉴스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자살 얘기에, 우리가 중진국의 문턱에서 걸려 넘어졌다는 둥, 아시아 네 마리 용 중에서 유일하게 추락한 나라라는 둥 온갖 어두운 얘기 뿐이었다. 한국전쟁 이래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겨우 3, 4년 후 분위기는 전혀 달라졌다. 2002년 월드컵은 우리의 자신감을 회복시켰다. IMF에서 빌린 외채를 조기 상환했을 만큼 여유도 되찾았다. 주가는 2000선에 도달했으며 부동산 또한 폭등하였다. 그 시절의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전후 상황은 쏙 빼놓고 단편적인 수치만 내세워 마치 노무현 정권이 부동산을 폭등시킨 장본인이라고 함부로 얘기하지만 엄밀히 말하여 MB정권 시절처럼 경기를 부양하겠답시고 정부가 나서서 국민들더러 집을 사라고 부추겼기 때문이 아니라 IMF 때 반토막이 되었던 부동산이 경제가 회복되면서 돈이 몰린 덕분이었다.

그 시절에는 부동산만 오른 것이 아니라 주가도 올랐고 소득도 올랐다. DJ-노무현 시절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5%에 달하였다. 연평균 10%에 육박하던 박정희-전두환 시절의 고도 성장기에 비할 수야 없겠지만 IMF 때만 해도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이 필리핀, 인도네시아 수준으로 추락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선전한 셈이다. 금수저도 아니고 어지간한 서민 중산층이 30평대 아파트에 살면서 세탁기와 대형 냉장고, 거실에 대형 판넬 TV를 달아놓고 집집마다 차 두대를 굴리고 외식과 휴가를 즐긴다는 것은 1990년대나 그 이전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1970년대에 고도 성장을 이룩했던 브라질, 멕시코 등 남미 국가들이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서 수십년 째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나, 199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보다 사정이 훨씬 나았던 타이완, 홍콩이 완전히 주저앉은 채 뒷걸음질을 치는 것에 비하면 우리는 상당히 안정적으로 안착하여 이제는 3만 달러를 넘보고 있다.

우리가 IMF를 조기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때 마침 중국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에 운 좋게 편승한 덕분이었다. 물론 1978년 덩샤오핑이 처음으로 개혁개방을 선언한 이후 중국 경제는 1980~90년대 내내 꾸준히 성장했지만 전체적인 경제 규모는 대수롭지 않았다. 마오 시절이 남긴 상처가 워낙 컸기에 중국 경제는 파산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시작되었고 개방 또한 중국 전체가 아니라 몇몇 특구에 국한되어 경제적인 파급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1989년 톈안먼 사건은 서방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면서 차관과 투자가 끊겼고 중국 경제는 한동안 얼어붙었다.

1990년대 중반에 와서 장쩌민 정권은 전면적인 개혁개방을 선언한다. 2001년에는 WTO에 가입하면서 비로소 중국은 글로벌 경제에 편입되었다. 특히 이른바 '신자유주의'를 외치던 부시 행정부는 높은 인건비에 허덕이던 미국내 다국적 기업들의 생산 단가를 낮추어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명목으로 국내 공장들을 대거 중국으로 이전케 하였다. 미국인들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뻘짓이지만 중국에게는 기적이었다. 중국은 부시 덕분에 가만히 앉아서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당시에 수많은 전문가들이 IMF의 직격탄을 맞은 동남 아시아나 구 소련 붕괴 후 극심한 경제 침체에 직면하였던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처럼 중국 또한 같은 길을 가리라 예측했지만 그 예측이 빗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2000년대 이후 중국 경제의 폭발적인 성장이 흔히 "우리가 세계 경기를 떠받힌다."라고 막연하게 자부심을 가지는 중국인들의 생각만큼 글로벌 경제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중국 경제는 여전히 매우 폐쇄적이고 외부의 접근이 어려우며 자유 무역을 철저하게 차단하여 중국이 수출하는 것에 비하여 수입 규모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중국은 그냥 남의 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은 물론이고 심지어 홍콩, 타이완조차 중국발 경제 성장에 편승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예외가 있다면 바로 우리이다. 1991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의 무역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미국, 일본 경기가 침체일로였던 2000년대 초반 이 두 나라에 빌붙어 먹고 살았던 우리가 IMF를 조기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중국에서 벌어들인 돈 덕분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전체 무역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8%로 미국, 일본을 합한 것보다 많으며 무역 흑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매년 거액의 적자가 나는 대미, 대일 무역을 상쇄할 수 있는 것은 이 덕분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중국에서 돈을 벌어서 미국, 일본에게 갖다 바침으로서 경제를 꾸려 나가는 셈이지만 바꾸어 말하면 우리 경제가 전적으로 중국 경제에 종속되어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2010년 이후 우리 경제의 성장률이 점점 낮아지고 불황의 늪에서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국 경제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10년 전 너도나도 중국 펀드를 사겠다고 줄을 설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누구도 중국 펀드를 거론하지 않는다. 겨우 2, 3년 전만 해도 많은 글로벌 연구 기관들이 중국이 2020년대 중반이 되면 미국을 제치고 G1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더 이상 그런 얘기는 없다. 요사이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 느낌이다. 장미빛 기대는 사라지고 오히려 중국발 위기에 대한 경고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판이다.

아직은 중국의 성장 동력이 남아 있다는 지금도 경제 성장률이 3%를 넘지 못하여 자영업자들은 죽을 지경이라느니, 청년 실업률이 더 악화되었느니 온갖 앓는 소리를 늘어놓는만약 중국 경제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워진다면 그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대중 무역으로 IMF를 극복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만 그 타성에 젖은 나머지, 좋았던 시절에 우리 스스로의 경쟁력을 높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앞날을 대비하지 않은 대가이다. 대중 일변도에서 벗어나서 무역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야 십수년 전부터 나왔던 얘기이지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우리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그게 하루 아침에 될 일도 아니고 지난 10년을 어영부영하는 사이 이미 버스는 떠나버린 느낌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위기감은 없고 서로 니탓을 하면서 정쟁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과연 중국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우리 앞날은 또 어떨 것인가.

미지북스의 신작 도서인 <빚의 만리장성>은 우리가 막연히 여기는 것보다 중국의 실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경고하는 책이다. 저자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저널리스트로 중국 경제와 금융 시스템 전문가이기도 하다.

"베이징 당국이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책임을 다한다는 점에는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베이징 당국은 활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기꺼이 동원하기 때문에 중국이 금융 위기를 겪을 것이라는 예상은 공상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융기관들이 안도하는 사이 금융시스템은 점점 몸집을 커지고 복잡해지고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베이징 당국이 때때로 통제력을 상실한다는 점이다."

"2014년 석탄 부문을 감독하는 한 관리는 집에 현금 3,300만 달러를 쌓아두고 있다가 발각되었다. 지폐를 세기 위한 계수기 중에서 네 대가 과열로 고장이 났을 정도였다. 한 육군 병참부 장성의 집에는 엄청난 현금 다발을 찾아내었다. 말그대로 1톤 무게가 나가는 돈을 세는데 1주일이 걸렸다. 다른 관리들도 많은 돈을 숨겨두고 있다가 잡혔는데 바닥에 깔려 있는 돈은 이미 썩어가는 중이었다."

"부패한 지원들을 해고하면 타락한 행태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빈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이 기꺼이 자기 조직의 특권을 해체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의미있는 개혁을 하려면 변화를 방해하는 면에서 정말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뿌리 깊은 기득권 세력과 대결해야 한다."

"중국 소비자들은 국내에서 구입하는 농산물이 제대로 관리되거나 가짜가 아니거나 절차를 무시한 누군가가 내용물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식료품에 관한한 많은 중국인들은 외국 상표가 붙은 것만 산다. 국산보다 더 품질이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은 제품의 품질과 출처를 보증하는 유일한 방법은 외국인들이 쇼핑하는 해외에서 구매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저자는 이른바 G2라고 불리는 중국의 화려한 신기루 뒤에 숨겨진 민낯을 거침없이 벗겨낸다. 중국 관료들의 부패와 권력 남용, 돈만 벌면 장땡이라는 식의 비뚤어진 금전만능주의, 조작과 날조로 가득 찬 좀비 기업들, 기업의 뒷배를 봐주는 지역 공무원들과 그들의 횡포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힘없는 농민들. 이 책에서 거론되는 중국의 문제점은 총체적이지만 그렇다고 충격적이라기에는 새삼스럽기도 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수많은 전문가들이 경고했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중국의 민낯은 또 한번 강렬한 충격과 함께 경각심을 준다. 상하이 푸둥의 화려한 번화가, 중국 곳곳에 건설 중인 현대화된 도시들, 세계 최대 규모의 거대한 조선소와 중화학 설비, 세계 관광지를 휩쓰는 중국인 관광객들, 미 해군의 아성에 도전하는 중국 해군의 위용 등. 이 모든 것은 사실은 허상일 뿐이며 언제 허물어 질 지 모르는 모래성이라는 점이다. 중국은 여지껏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고 만약 그 폭탄이 터졌을 때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얼마 남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은 매년 7~8%의 성장률을 달성했으며 성장이 둔화되었다는 정도가 무려 6%이다. 이것은 연평균 1~2%에 머물러 있는 서구의 기준에서 본다면 여전히 대단한 수준이다. 중국 경제는 여지껏 단 한번도 마이너스 성장을 한 적이 없지만 정작 주식 시장은 반토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GDP  성장분만큼 반드시 주식도 정비례하여 오르는 법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올라야 정상이 아닌가. 도대체 성장한 부분은 죄다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중국 기업들은 성장률 5%를 유지한다면 겨우 본전치기이고 그 이하가 되면 도산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중국의 성장은 뻥튀기되었다는 얘기이다. 이것은 그저 "아마도 그럴 것"이라는 외부인들의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중국 총리 리커창이 직접 인정했던 말이다.

시진핑 집권 이후 아무리 중앙 정부가 통계를 조작하지 말라고 호령을 해도 지방 정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중국 특유의 관료주의는 수천년에 걸쳐서 형성된 봉건적인 중국 문화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어떠한 비판조차 허용하지 않는 공산당 지배 체제가 만들어 낸 것이기도 하다. 차라리 왕조 시절의 사대부들은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서 청빈한 삶을 추구했으며 권력의 절제가 있었고 언론과 비판도 허용하였다. 지금의 공산당 관료들은 최소한의 양심조차 찾아볼 수 없고 함부로 권력을 남용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철저하게 막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관료들의 부패 고리나 치부를 드러내는 사소한 시도라도 한다면 엄중한 처벌을 각오해야 한다. 법도 소용없다. 애초에 중국은 서구와 같은 법치 국가가 아니라 당의 지시, 그리고 그 지시를 실제로 내리는 관료들의 입이 법이다.

그나마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최고 지도자인 시진핑이다. 실제로 시진핑은 집권 이후 최우선 과제로서 부패한 관료들을 때려 잡는 일에 나섰다. 소위 '大虎'라고 불리는 가장 부패한 고위 관료 수십여명이 붙잡혔고 50만명이 넘는 '파리'들(중하위 관료)이 처벌받거나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 숫자는 서구 기준에서 본다면 분명 엄청난 것이지만 중국에는 무려 4천만명이 넘는 공무원들이 있고 여기에 비하면 한줌도 되지 않는다. 시진핑이 거창하게 떠드는 소위 '반부패 운동'이란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 마오 시절 이래 역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해온 일에 불과하다. 수십만명의 관료들이 처벌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부패가 조금도 해소되지 못하는 것은 재수 없는 몇 놈만 때려잡았을 뿐,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방식은 그저 관료들을 잠깐 겁주고 그들이 좀 더 양심있게 행동하라고 주의를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보다 근본적인 해결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공산당의 독재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더러, 시진핑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애초에 시진핑 자신도 수조원의 재산을 쌓아두고 있다는 점에서 부패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자신이 자신을 구속할 수 있겠는가.

중국인들은 외부의 비판을 진솔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특유의 자존심으로 불쾌감을 드러내기 일쑤이다. "너희 방법이 최선이라고 여기지 말라. 우리는 우리의 방식이 있다."라는 식이다. 심지어 중국에 빠져 있는 일부 서구 학자들조차 여기에 편승하기도 한다. 자칭 "유교 좌파"라고 하는 캐나다 출신의 정치 학자 대니얼 A. 벨 교수의 <차이나모델 :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왜 유능한가>라는 책이 있다. 그는 "왜 서구식 민주주의가 가장 나은 정치 모델이라고 단언하는가."라면서 서구 특유의 오만함이라고 비난한다. 중국에서는 미국처럼 선거를 통하여 정치인을 뽑지 않지만 엄격한 심사 과정을 통하여 가장 능력이 우수하고 올바른 품성을 갖춘 지도자를 선발한다는 것이다. 벨 교수는 소위 "현능주의(賢能主義, meritocracy)"라는 이름을 붙이고 "일당 독재의 중국이 수준 낮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인도보다 낫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이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도를 사례로 독재주의와 민주주의를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도 어폐가 있지만, 인도가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해서 누가 무슨 기준으로 중국보다 더 못하다고 단언한다는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소리이다. 벨 교수의 눈에는 중국 지도자들이 마치 무릉도원의 신선들처럼 보이는지 몰라도 세상에는 만고 불변의 법칙이 있다.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사실이다. 온갖 부패와 불법을 저지르고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보시라이가 한때 가장 유력한 중국 최고 지도자 후보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진핑이나 리커창이 보시라이보다 더 훌륭한 품성을 가졌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중국 경제의 현실은 실로 총체적이다. 가장 큰 문제점은 중국은 자본주의를 흉내내지만 사실은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전히 전체 기업의 80%는 관료들의 통제를 받는 국영 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민간인이 창업을 할 수는 있지만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그조차 관료들과의 연줄, 즉 꽌시가 있어야 한다. 어렵사리 투자자들을 모아서 사업을 꾸려 나가도 부패한 지방 공무원들의 끝없는 괴롭힘이 시작된다. 이들의 요구를 영원히 들어주거나 아니면 항복하는 것이외에 방법이 없다. 관료들 입장에서 사기업들은 뇌물을 뜯어내기 만만한 '호구'이면서 또한 자신들의 쏠쏠한 돈줄인 국영기업들의 아성을 위협하는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반면, 국영 기업들은 관료들의 연줄을 이용하여 정부 은행에서 얼마든지 돈을 빌릴 수 있다. 담보도 필요 없다. 상한선도 없다. 그 돈으로 그들만의 잔치를 벌인다. 돈이 떨어지면 또 빌리면 그만이다. 경제성, 효율성 따위는 알 바가 아니다. 과잉 투자를 해도 언젠가는 쓰이겠지 하는 식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돈이 아무렇게나 허공에 낭비되지만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누구도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구조이다. 만약 누가 그 사실을 들추어내려는 시도를 한다면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중국 공산당의 방식이 멕시코를 지배하는 마피아 카르텔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중국 국민들이 이런 현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왜 침묵을 지키는가. 저자는 중국에서 아직까지 공산당에게 저항하거나 중동의 자스민 혁명처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대다수 국민들 또한 자신들이 언젠가 부자가 될 지 모른다는 환상에 갖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개혁 개방 이후 수많은 서민 출신의 억만장자가 등장하였고 우리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 사다리'라는 것이다. 만약 중국 경제의 성장이 멈추고 더 이상 계층의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들의 불만 또한 폭발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서구의 사고 방식이다. 중국 국민들이 공산당의 횡포에 인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서 부패와 수탈이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온 일이다. 중동 여성들이 쉽게 히잡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것처럼 오랫동안 관습에 길들여진 사람들로서는 그것을 깨뜨리고 바로 잡으려는 시도 자체가 오히려 두려운 일이다. 나름 민주화되었다는 우리 사회조차 여전히 나랏님이 하는 일에 민초들이 나서는 것은 반역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원래 사람이란 쉽게 바뀌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시위가 있고 때로는 분노한 농민들의 폭동도 일어나지만 당장의 부당함을 잠시 호소하는 것일 뿐, 정작 근본적인 모순에 도전하는 움직임은 없다.

지금의 중국은 너무나 타성에 젖은 나머지 썩은 서까래나 다름없게 되어서 마치 백년 전의 청나라나 임진왜란 시절의 조선을 보는 느낌이다. 여기를 손대려면 저쪽이 무너지고 저쪽을 손대려면 이쪽이 내려앉는, 위기감은 있지만 막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게 중국이다. 아무리 잘 길들여진 중국 국민들이라고 해서 언제까지 인내심을 발휘한다는 보장은 없으리라. 중국에 민주화 운동이 일어날 지 아닐 지 누가 알겠는가. 또는 청 말의 입헌 운동처럼 공산당 스스로 자기 개혁에 나서고 권력을 내려놓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시진핑은 과감한 개혁보다는 오히려 더욱 보수 반동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꽉 쥐려는 쪽을 선택한 듯 하다. 그는 덩샤오핑보다는 위안스카이에 더 가까우리라.

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중국이 지금 이대로 간다면 그들의 화려했던 잔치는 곧 끝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 경제에 미치는 여파는 어느 정도일까. 사드 이후 우리 사회의 반중 감정은 하늘을 찌르지만 우리 경제가 중국에 의존하는 정도를 생각한다면 중국의 몰락은 우리가 결코 기뻐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당장 10년 후 우리 미래가 어떨런지 암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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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의 본질 - 누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가?
그레이엄 앨리슨.필립 젤리코 지음, 김태현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전쟁의 안개(fog of war)'라는 말이 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전쟁이란 결코 합리적이고 정량화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우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전쟁은 반드시 더 강한 쪽이 승리하고 약한 쪽은 패배하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세상에는 굳이 전쟁이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누구도 질 것이 뻔한 싸움을 선택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싸우는 이유는 비록 가능성은 낮지만 조금이라도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윗이 골리앗을 꺾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베트남은 미국과 중국에게 승리하였고 소련은 아프간에서 혹독한 대가와 망신을 당한 채 물러나야 했다. 강대국들 역시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굳이 무리한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은 불확실성이 너무나 크다. 무솔리니의 그리스 침공처럼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여기고 전쟁을 시작했지만 적의 저항이 예상외로 강하거나 뜻밖의 상황에 부딪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도 한다. 어느 쪽도 결코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상대의 의중을 오판하거나 두려움, 정보 부재로 결국에는 파멸적인 전쟁으로 이어진 예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제1차 세계대전이다.

대개 우리는 역사를 바라볼 때 "그들은 왜 그렇게 했을까"를 놓고 다양한 가설을 세운 다음 우리 나름의 관점에서 미루어 짐작한다. 이것은 지나간 역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치인들과 장군들 역시 정치 외교, 군사적인 사안에서 상대가 어떠한 의중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원하는지 예측하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며 잘못된 정보와 상대의 기만 전술, 선입견과 고정관념도 끼어들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은 반드시 합리적인 동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가 보더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또한 그 시점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라도 시간이 지난 뒤 결과적으로 보면 최악의 선택인 경우도 있다. 따라서 충분한 정보와 근거의 뒷받침 없이 가설과 상상력에만 의존해서는 전혀 엉뚱한 결론을 도출할 수 밖에 없다.

루즈벨트가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할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용인했다는 둥의 소위 음모설들은 지금도 수없이 제기되고 있다. 음모설들이 대개는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대신, 상상력만으로 의혹을 부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막연히 '가장 합리적인 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책 결정이란 사실은 굉장히 허술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이러이러했다"라는 결과를 다루는 책은 얼마 있어도 "왜 그렇게 했는가" 과정을 다루는 책은 거의 없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포장된 음모설에 쉽게 현혹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모던 아카이브 출판사에서 신작 도서 <결정의 본질 - 누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가, 그레이엄 앨리슨, 필립 젤리코>가 출간되었다. 결정의 본질은 1971년에 첫 출간되어 국제정치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기념비적 저서라는 평을 받았으며 1999년에 개정판이 나온 뒤에도 45만 부가 팔린 국제 정치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1990년대 말에 이미 모 출판사에서 페이퍼북 형식으로 한번 출간되었다가 2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또 한번 햇볕을 보게 된 셈이다. 번역 수준이나 편집 상태 역시 예전의 퍼이퍼북과는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닐 정도로 깔끔하다.

"전쟁은 경쟁국의 의도를 지나치게 낙관할 때 일어날 수 있다. 또한 상대가 선제공격할 가능성을 지나치게 우려할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 전쟁에서 얻는 순 이익은 영토 획득과 같은 실물도 있지만, 전쟁보다 더 나쁠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래를 회피하는 기대치가 될 수도 있다."   - p.79

"쿠바 미사일 사건 당시 흐루쇼프의 마음을 바꾼 것은 케네디의 봉쇄 작전 때문이 아니었다. 공습, 침공과 같은 추가적인 위협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소련의 후퇴를 유도하지 못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이미 배치된 미사일을 철수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흐루쇼프의 마음을 진짜로 바꾼 것이 과연 당근인지, 채찍인지는 여전히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 p.165

"1994년 4월 어느 맑은 날 이라크 북부에서 미 공군 F-15 전투기 두대가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조기경보기의 도움을 받아서 헬리콥터 두대를 격추시켰다. 그 헬리콥터는 미 육군 소속의 블랙 호크였고 평화유지군 26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 사건을 2년 동안 조사한 결과는 조종사나 항법사의 실수일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정상적인 조직의 정상적인 사람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행동한 결과였다. 이 비극을 불러온 진짜 이유는 사전에 준비된 메뉴얼에 순응했기 때문이었다." - p.195

"소련은 기존 방침대로 구형 미사일을 신형 미사일로 교체했을 뿐이었다. 자연스럽고 거의 불가피한 정상적인 현대화 계획의 일환이었다. 소련 정부는 SS-20 미사일의 배치가 서방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분석하지 않았다. 따라서 서방이 항의하자 깜짝 놀랐다. 소련은 자신들의 신형 미사일 배치가 서방의 신형 미사일 배치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외교적 위기가 초래 되었다." - p.222
 
이 책의 주된 내용은 "국가는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 "그것을 누가 어떻게 결정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국가 정책의 결정 과정이란 여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외부 사람들은 심지어 전문가들조차도 그것의 진짜 속내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심지어 이를 직접 결정한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정부란 어느 한 사람이나 몇몇 고위 관료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 조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각자의 영역에서 분업을 하고 있다.

개개인은 제아무리 자신의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반드시 전체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조직들 간의 협력이 얼마나 잘 되는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톱니바퀴가 조금만 어긋나더라도, 가령 적의 공격이 임박했을 때 매우 중요한 일급 기밀이 하부에서 걸러지면서 상층부까지 전달되지 않는다면, 또는 그 정보가 가장 윗선까지 올라간다고 해도 막상 그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윗선에서는 대응하라는 지시를 내려도 그 명령이 하부에 제때 전달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진주만 공격, 바바롯사 작전 당시 독일의 기습 작전이다. 우리는 역사를 바라볼 때 그저 눈 앞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세세한 부분까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모델과 사례를 통하여 국가 정책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다룬다. 여기에는 크게 세가지의 모델이 있다. 첫째는 제1모델(합리적 행위자 모델)이다. "이런 행동을 한 것에는 거기에 걸맞는 합리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널리 사용되는 모델이지만 이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허점 또한 있다. 국가란 결코 사람처럼 단일 행위자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고도로 나누어진 복잡한 기계 장치와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의 행동은 항상 일관성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제1모델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두번째 모델이 제2모델(조직이론)이다. 정부를 구성하는 조직의 문화와 가치관, 절차 등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모델이 정부정치이론이다. 정부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한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타협을 벌인 결과라는 것이다. "어느 정부가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 게임에 참여한 플레이어들이 흥정한 결과이다."

이 세 가지 모델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다양한 정치적 사건에 대하여 막연한 추론이나 허황된 음모론이 아니라 보다 진실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초반부의 이론 설명은 다소 난해한 느낌도 있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빨려들어가는 책이다. 냉전 시절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에 가장 근접했다는 쿠바 미사일 사건 당시 케네디 행정부는 소련의 의중을 분석하기 위하여 다양한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그 가설들에 맞추어 미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최선의 방안을 찾아나갔다. 

미국 수뇌부 앞에는 크게 6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쿠바를 침공할 것인가, 공습을 할 것인가, 봉쇄를 할 것인가, 카스트로를 매수할 것인가, 외교 루트를 통한 압박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할 것인가. 각각의 선택지에는 그렇게 했을 때 얻는 것도 있지만 잃는 것도 있었다. 어떤 것도 나름의 리스크가 뒤따랐기에 쉽사리 선택할 수 없었다. 케네디가 고민에 빠졌듯이 같은 시간 흐루쇼프와 소련 수뇌부 또한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그나마 그 중에서 가장 최선이라고 여기는 선택을 하였다. 이것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2부의 내용은 정책 결정권자들이 복잡한 정치 외교적인 사안을 놓고 어떠한 방식으로 판단을 내리며 나름의 해답을 찾아가는지 그 과정을 이해하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뮌헨 회담에서 체임벌린은 왜 히틀러에 대하여 오판했는가. 루즈벨트는 어째서 일본의 위협에 대비하지 않았는가.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위협했을 때 부시는 왜 방관했는가. 그리고 손바닥 뒤집듯이 이라크를 공격했는가. 쿠바 미사일 사건 당시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상대의 의중을 어떻게 파악했는가. 무엇이 이들을 물러나게 하였는가. 겉만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많은 의혹들에 대하여 이 책은 "그들은 왜 그렇게 했는가"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이 책은 주로 미국의 외교 정책을 사례로 삼고 있지만 우리 주변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다. 냉탕과 온탕을 쉴 새 없이 오가는 남북 관계, 올초만 해도 최악으로 치달았다가 어느 순간 분위기가 좋아질 수 있었는지, 당장 북한을 폭격할 듯 위협하던 트럼프가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서게 된 이유 등 그저 단선적으로 바라보아서는 그 본질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어보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석을 빼고 480여 페이지의 많다고도, 적다고도 할 수 없는 분량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정치 외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필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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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 - 세계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 지음, 정탄 옮김, 권성욱 감수 / 교유서가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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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비극적인 사실을 말하려 합니다. 유럽은 히틀러에게 굴복당했습니다. 이제 다음 차례는 영국입니다. 하지만 저는 국민들에게 해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국민의 피와 땀과 그리고 눈물입니다.

앞으로 기나긴 투쟁과 고난한 시련의 세월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의 확고한 정책은 보장되지 않는 기만적인 강화조약이 아닌 전쟁입니다. 수많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쟁을 하는 목적은 승리입니다. 파시즘에 굴복당하지 않는 자유민의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승리해야 우리는 생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의 단결된 힘이 기필코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1940년 5월 13일 처칠이 수상으로 취임했을 때 전쟁은 겨우 3일이 지났을 뿐이지만 상황은 이미 최악이었다. 독일 공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에 네덜란드는 삼일만에 백기를 들었고 벨기에가 "작은 마지노"라고 자랑하던 에방 에말 요새 역시 함락되어 방어선의 한쪽이 무너졌다. 또한 구데리안이 이끄는 독일군 기갑 부대는 프랑스군 수뇌부가 절대 넘을 수 없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아르덴을 단숨에 돌파하여 뫼즈강을 도하한 후 서쪽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전쟁이 시작될 때만 해도 승리는 따놓은 당상인양 기세등등했던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렝은 패닉에 빠진 채 자포자기해 버렸다. 그나마 예비 전력으로 남겨 두었던 프랑스의 3개 기갑 사단은 가믈렝이 축차 투입한 덕분에 각개 격파당하였다. 연합군의 2/3는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에서 갇힌데다 나머지의 대부분도 마지노선에 묶인 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만약 연합군 지휘관 중에 롬멜이나 패튼, 몽고메리, 쥬코프처럼 과감하고 뛰어난 장군이 있었더라면 조직적인 종심 방어로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면서 지나치게 깊숙이 진격한 독일군의 측면을 찔러서 양분시키고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가 가장 두려워했던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또한 4년 후 히틀러가 아르덴에서 미군을 상대로 똑같은 방식으로 도박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전혀 통하지 않은 채 참담한 패배로 끝이 났다.

물론 프랑스군 수뇌부도 반격을 계획했다. 하지만 막상 반격 작전에 필요한 수단이 결여되어 있었다. 공군은 숫적으로 우세했지만 무계획적으로 흩어져 있었고 전차는 보병 사단에 분산되어 있었으며 프랑스군의 부대는 대부분 기동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연합군은 오랫동안 독일의 공격을 기다렸음에도 정작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프랑스군 수뇌부가 대체적으로 나이만 많을 뿐 고루하고 창의성이 부족하며 행동이 느렸기 때문이었다.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연합군의 대응 능력보다 훨씬 빠르게 파고 들어오는 독일군을 저지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독일군이 연합군의 미약한 방어선을 밀어내고 영불 해협에 도착하자 40만명의 연합군의 퇴로가 차단되면서 거대한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5월 22일에는 칼레가 포위되었고 23일에는 볼로뉴 항구가 함락되었다. 연합군에게 남은 것은 덩케르크의 손바닥만한 작은 교두보 뿐이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선봉부대는 이미 덩케르크에서 겨우 15km 떨어진 곳까지 당도하였다. 이제 한발만 더 내딛으면 사상 최대의 포위 섬멸전이 시작될 판이었다. 

상황이 급박하자 영국 해군은 이들의 구출 작전을 처칠에게 건의하였다. 처칠은 스탈린처럼 무조건적인 사수를 명령하는 대신 현명하게도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른바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 이라 불리게 되는 사상 최대의 철수 작전이었다. 참고로 "다이나모"는 작전 회의가 열리던 도버성의 방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5월 26일 일요일 오후 6시 57분 다이나모 작전이 발동되었다.

영국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령 갈리폴리에서 대규모 철수 작전을 수행한 바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해군 장관으로서 갈리폴리 철수를 지휘했던 사람은 처칠이었다. 비록 갈리폴리 전투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륙작전"이라고 불릴 만큼 재앙에 가까운 실패였지만 철수 작전만큼은 매우 질서정연하게 조직적으로 실시되어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덩케르크는 갈리폴리보다 훨씬 불리하였다. 광범위한데 흩어져 있던 영국 해군은 철수 작전에 대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터키군은 추격에 나서지 않았지만 독일군은 당장이라도 덩케르크의 해안가로 들이닥칠 판이었다.

하늘은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영불 해협에서는 유보트들이 승냥이떼처럼 활동하면서 연합군의 선박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게다가 덩케르크는 해안가는 넓지만 수심이 얕아서 대형 수송선이 정박하기에 마땅하지 않은데다 대부분의 항구 시설은 이미 파괴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해안가에서 직접 병사들을 태우고 먼 바다까지 나오는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도박이었기에 처칠과 영국 수뇌부는 그저 전체의 1/10 정도인 4만명 정도만 구출해도 대성공이라고 여기는 판이었다.

상황은 일분일초가 다급했기에 철수에 필요한 해군 선박을 충분히 모을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처칠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서 영국 국민들을 향하여 지금의 위기를 알리고 도움을 호소하였다. 그의 비장하고도 간절한 호소는 놀라운 효과가 있었고 전쟁에 냉담하던 영국 국민을 전례없이 하나로 뭉치게 하였다. 어선, 요트, 구명정, 낚시배, 심지어 관광객들을 위하여 템즈강을 오가던 구식 범선에 이르기까지 수백척에 달하는 선박들이 너나 할 것없이 덩케르크 해안가로 일제히 향하였다.

    

 

영불 해협의 거친 풍랑과 독일 공군의 폭격, 유보트의 위협, 자기 기뢰 등 온갖 장애물과 난관이 있었지만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병사들을 태운 후 영국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영국군 병사들 또한 독일군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음에도 전의를 잃지 않은 채 질서 정연하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결과는 놀라울 만큼 성공적이었다.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9일 동안 구출된 장병들은 무려 33만8천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 영국군이 19만명, 프랑스군이 14만명 정도였다. 덩케르크의 모습은 당시 패닉에 빠진 채 총을 버리고 독일군에게 무질서하게 투항하던 다른 연합군 병사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순수하게 군사적으로 본다면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되고 조직적인 철수 작전이 아니었기에 철수 부대는 거의 모든 장비를 상실했다. 당시 3개 군단 10개 보병 사단, 1개 기갑 사단으로 구성된 영국의 대륙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은 영국군이 보유한 최정예 부대였다. 또한 500대의 영국 공군이 프랑스에 배치되어 있었다.

덩케르크에서 철수하면서 이들이 버리고 온 장비는 야포 880문, 대공포 500문, 대전차포 850문, 기관총 1만1천정, 전차 700대, 차량 4만5천대에 달했으며 그 외에도 막대한 탄약과 유류, 보급품이 있었다. 덩케르크에는 영국, 프랑스군이 남긴 무수한 무기와 야포, 차량이 즐비하게 늘려 있었고 대부분 파괴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독일군의 손에 넘어가 1년 뒤 발칸과 소련 침공 작전에 쓰이게 된다. 영국에는 겨우 2개 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예비 장비가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처칠은 미국에게 도움을 급히 요청하여 미국이 제공하는 "랜드리스"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또한 철수 과정에서도 6만 8천여명에 달하는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마지막까지 철수를 엄호했던 부대는 결국 탈출하지 못한 채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철수 과정에서 6척의 영국 구축함과 3척의 프랑스 구축함이 격침되었고 19척이 큰 손상을 입었다. 또한 474대의 영국 공군기가 격추당했다. 독일 공군의 피해는 132대에 불과했다. 작전에 동참했던 민간 선박들 역시 200여척 이상이 침몰하거나 피해를 입었다. 냉철하게 말하자면 전쟁에 패배하여 빈털털이가 된 채 목숨만 겨우 건져서 비참한 몰골로 돌아온 꼴이었다. 따라서 참패의 원인을 놓고 격론이 벌어지고 처칠은 그 책임을 졌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국민들은 오히려 처칠을 찬사하였고 귀환한 병사들을 따뜻하게 격려하였다. 또한 독일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은 더욱 불타 올랐다.

작전의 성공 여부를 놓고 본다면 덩케르크보다 갈리폴리의 철수 작전이 훨씬 성공적이었음에도 우리는 전자를 기억하고 후자는 기억하지 못하지 못한다. 이것은 덩케르크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처칠은 국민들에게 "아직 우리는 진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었다. 그 힘이 수많은 고통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날까지 영국을 끌고 간 것이다. 뮌헨 회담에서 히틀러에게 굴복한 체임벌린을 "평화를 지켰다"라며 환호했던 영국 국민들은 이제 전쟁에 스스로 동참하였고 전쟁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처칠이 말하는 진정한 "덩케르크의 기적"이었다.

얼마 전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동명 영화와 함께 <덩케르크 - 세계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이 출간되었다. 표지의 사진은 프랑스 해군의 1500톤급 구축함인 브라스크(Bourrasque)의 침몰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덩케르크를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 중의 하나이다. 브라스크는 덩케르크 작전 당시 병사들을 구조하다가 1940년 5월 30일 독일군의 기뢰에 부딪쳐 침몰하였다.

엊그제 필자도 휴가를 이용하여 영화를 보았는데 놀란 감독 특유의 영상미와 웅장하면서도 긴장감을 끌어내는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할리우드 특유의 액션이 거의 없다보니 <라이언 일병>이나 <애너미 앳더 게이트>와 같은 전쟁 영화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다소 실망할 수 있겠지만 다양한 카메라 구도를 통해 마치 나 자신이 당시의 긴박한 전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는 호불호가 갈리면서도 국내에서 꾸준히 1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니 잘 만든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대신 놀란의 영화는 전후 배경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 연합군이 왜 덩케르크에 갇히게 되었는지 왜 여기서 탈출해야 하는지, 선장들이 어째서 자신의 배를 끌고 위험하다는 덩케르크로 향하는지, 내가 살기 위해 전우의 희생조차 마다하지 않는 병사들의 이기적인 모습, "너희 공군은 뭐하고 있느냐" 질타하는 병사에게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떨구는 파일럿. 놀란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관객들을 77년 전 덩케르크의 현장으로 데려다 놓을 뿐이다. 이것이 놀란 감독 특유의 방식이기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거의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본다면 재미가 반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교유서가에서 나온 <덩케르크>는 영화의 배경, 즉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의 상황을 다룬 책이다. 5월 10일 새벽, 독일군의 기갑부대가 일제히 네덜란드 국경을 돌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독일 공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네덜란드, 벨기에 전선에서 벌어진 연합군의 패배, 구데리안의 기갑부대가 아르덴을 돌파하여 연합군의  후방으로 쇄도하였다. 덩케르크의 좁은 포켓에 갖힌 40만명의 연합군. 책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책은 존 키건의 <2차대전사>와 같은 전쟁사 책이 아니다. 장군들이 테이블 위에서 어떠한 작전을 짰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구조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배를 몰고 바다로 나서는 모습, 한번 떠나면 귀환을 장담할 수 없는 긴장감, 어떠한 위험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았던 놀라운 투지, 생사의 갈림길 속에서도 남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의 용기, 마치 영화 <타이타닉>이나 <포세이돈>, <판도라>럼 거대한 재난 속에서 그것과 용감하게 싸우며 그 속을 헤쳐나오는 한편의 휴먼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램지 중장은 프랑스 해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시종일관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신속하게 도버 해협을 건넜을 때 마주한 것은 정유공장과 정유조가 있는 덩케르크 항 서쪽에서 솟구치는 화염과 검은 연기의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16킬로미터에 이르는 모래톱! 모래톱에서 해안선까지는 온통 집으로 돌아가려는 병사들로 새까맣게 채워져 있었다."  - p.101

"독일군 전투기 10여대가 한꺼번에 몰려와 주위를 선회하면서 폭탄으로 조준 타격하고 갑판에 기관총을 난사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몇번이고 이런 공격이 쏟아질 때면 실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같았다. 그럼에도 지옥 구덩이를 간발의 차로 빠져나온 병사들과 배를 잃고 바다 위에서 살려달라고 외쳤던 선원들의 대부분은 놀라우리만큼 침착했다." - p.183

"그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두 다리 모두 무릎 아래가 잘려나간 상태였다. 승조원들은 그를 조심스럽게 갑판에 뉘였고 냉혹한 상황에서도 허용되는 한 편안하게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그의 기백은 육체 속에서 강렬하게 타올랐다. 육체적인 고통도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는 단호하게 일어서려고 몸부림쳤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영국 해군 만세!" 그는 쓰러졌다."  - p.329

이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은 영국의 군사 전문가이자 작가로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4년에 죽었다. 이 책은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결행된 지 1년 후에 써였다고 한다. 영국인으로서 덩케르크는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자 불굴의 의지와 같았을 것이다. 우리로 치면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에 비견될만하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가지는 비중에 비하여 그동안 국내에서는 소홀히 여겨져 온 면이 있다. 2차세계대전사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존 키건 교수의 <2차세계대전사 The Second World War>를 비롯하여 시중의 관련 서적을 보면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대하여 고작 몇 페이지를 할애하여 연합군이 어떻게 철수할 수 있었는지를 간략하게 언급할 뿐이다. 따라서 충분한 배경 지식이 없는 독자들로서는 프랑스 전역과 영국 본토 항공전 사이의 짧은 단막극 정도로 여겨질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좌우했던 덩케르크 철수 작전의 진정한 의미가 가려지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밀덕들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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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전쟁 - 제1차 세계대전부터 사이버전쟁까지, 전쟁의 승패를 가른 비밀들
박종재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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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하지 않는다" - 군사 격언

"많은 임금과 장수 중에서 특출나게 승리를 거두는 자는 적에 대한 정보를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적에 대하여 미리 알려면 귀신에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물을 흉내낼 수도 없으며 짐작으로 추측하여 시험해 볼 수도 없다. 반드시 상대의 사정을 잘 아는 첩자를 써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다" - 손자 용간편

일찍이 손자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적을 알고 나를 알기 위한 정보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무리 적보다 많은 병력과 유리한 상황을 선점하고 있어도 막상 그 사실을 지휘관이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소극적인 지휘관일수록 오히려 내가 불리하다고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나거나 패배를 자초하는 경우도 흔하게 있다. 반대로 적이 얼마나 강대한지 모르고 자신의 용맹함을 과신하여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스스로 사지에 들어가는 예도 있다. 그 단적인 예가 태평양전쟁 당시 버마전선을 담당하였던 무다구치 렌야이다.

그는 일본군이 가장 유리했던 1942년 여름에는 지형의 험난함과 보급 문제를 들어서 인도 침공을 완강하게 반대했다가 뒤늦게 태도를 바꾸어 이번에는 일본군의 사정은 무시한 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격을 강행하였다. 영국군이 허약했던 1942년에 공격했다면 손쉽게 승리했겠지만 1944년의 영국군은 훨씬 강해진 반면, 일본군은 약화되어 있었다. 결국 병력의 2/3를 잃고 참담한 몰골로 철수하였다. 그의 실패는 태평양전쟁을 통틀어 일본이 경험한 최악의 참사였으며 결국 버마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심지어 연합군은 그를 "연합군의 승리에 가장 기여한 일본군 장군"이라고 칭찬했을 정도였다. 무다구치가 실패한 이유는 정보를 무시한 채 자신의 막연하고 관념적인 편견만으로 "이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동서 고금의 전쟁에서 정보의 중요성이란 새삼 말할 것도 없으리라. 고대 서양에서 가장 위대한 전투라고 꼽히는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이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정보력 덕분이다. 그는 상대의 강약에 대하여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하였고 적장의 성향까지 파악하여 허를 찔렀다. 반면, 로마군 사령관인 바로는 그저 숫적인 우위만 믿고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한 채 무작정 공격에 나섰다가 한니발의 함정에 빠져서 문자 그대로 전멸하고 말았다. 23전의 싸움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이순신 역시 일본 수군의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이를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누구나 알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안개(The Fog of War)"라는 말을 사용하여 정보가 얼마나 불확실하며 그 중에서 진짜 정보를 골라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강조한 바 있다. 현실에서는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그 중에서는 적이 의도적으로 흘린 더미 정보도 있고 서로 상충되거나 상식에서 어긋나는 정보도 많다. 설령 뛰어난 정보 전문가가 수많은 쓰레기 정보 중에서 진짜 가치가 있는 정보를 어렵사리 골라내어도 윗선까지 제대로 올라간다는 보장도 없다. 중간 보고 단계에서 버려지거나 전혀 엉뚱하게 왜곡되기도 한다. 정확한 정보가 정확하게 보고되어 정확하게 활용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야말로 행운에 가깝다.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가. 정보를 골라내는 과정에서 사람의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만약 서로 상충하는 정보가 있을 때 냉철하게 판단하여 결정하거나 보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냥 내 입맛에 맞는 쪽을 택한다. 그저 "이랬으면 좋겠다"는 단순힌 희망 사항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해 버린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정보의 중요성을 무시한 예가 다름아닌 임진왜란이다. 히데요시는 조용히 쳐들어오는 대신, "명을 치겠으니 조선은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하라"라고 엄포를 놓았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히데요시의 허세 덕분에 대비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번 셈이었다. 하지만 모든 수단을 다하여 상대의 의중과 군사력, 작전 계획 등 정보를 수집하기는 커녕 그저 의례적인 통신사 두명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그조차도 한 사람은 "쳐들어온다" 또 한사람은 "안 쳐들어온다"라는 완전히 상반되는 보고를 하여 혼란을 부추겼고 무사안일에 젖어 있었던 조정은 "안 쳐들어오겠지만 혹시 모르니까"라는 태평한 생각으로 의례적인 수준의 대비를 했을 뿐이었다. 결국 예상을 훨씬 초월하는 침공에 조정 전체가 패닉 상태에 직면하여 선조는 조중 국경의 끝단인 의주까지 도망쳐야 했다.

히데요시가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는 것은 그저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상황임에도 조정이 이를 무시한 것은 그런 상황 자체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수백년 동안 외적의 대규모 침략은 없었는데 하필 우리 대에 와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귀납법적인 오류, 사실이 아닌 희망에 불과한 가정을 사실로 단정해 버린 채 다른 가능성은 모두 무시하는 전형적인 가정 망각의 오류라 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전쟁사에는 비일비재하다. 한국전쟁에서 맥아더 역시 중공군의 참전을 알려주는 수많은 정보가 있었지만 그 정보 자체가 불쾌하다는 이유로 묵살하거나 자신의 편의대로 해석하였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침공한다는 경고를 외면하여 개전 초반에 500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하는 대참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 군대에 대한 경멸감과 경제적인 부담을 이유로 동원령을 미뤘다가 이집트, 시리아의 기습을 받아 거의 패망 직전까지 몰리는 호된 댓가를 치루었다. 정보를 무시하기는 쉽지만 정보를 무시한 대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얼마 전 전쟁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주목할 만한 신작 도서가 나왔다. <함께 보는 근현대사> <유라시아 견문> 등을 출판한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서해문집에서 나온 <정보전쟁>이다. 마침 해당 출판사에서 필자에게 신작이라면서 선물로 보내왔다. 감사할 따름이다.

저자인 박종재 교수님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 대학에서 전략학 박사를 수료한 후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해군 제1함대, 안보정보비서관실 등에서 근무하는 등 국내에서는 정보분야의 통이라고 하실만한 분이다.

"여러분의 성공은 기억되지 않지만 실패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CIA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정보는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막상 사람들의 이목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성공하면 그저 본전이요, 실패하면 이유 여하와 상관없이 사방에서 두들겨 받는 것이 바로 정보 부서의 운명이다. 아무리 큰 공을 세워도 그들에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없다. 그것은 정치인, 장군들의 몫이다. 007과 같은 스파이들의 멋진 액션은 그저 영화에서나 가능한 얘기이다. 하지만 그림자 속에서 숨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걸고 누구보다도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것이 바로 이들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20세기 현대사에서 정보력이 전쟁사를 어떻게 좌우했는지 다룬다. 가장 먼저 나오는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지키는 미국의 참전을 결정적으로 유도한 이른바 "치머만 사건"이다.

당시 독일 외무장관이었던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관으로 한통의 전문을 보낸다. 독일은 멕시코에 자금과 무기를 대고 만약 미국이 유럽 전선에 참전할 기미가 보일 경우 멕시코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미국은 유럽에 참전하지 못할 것이고 독일이 전쟁에 승리한 뒤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멕시코가 빼앗긴 텍사스, 뉴멕시코, 아리조나 등을 되찾아주겠다는 것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내용이었다.

      
1917년 4월 2일 미 의회에서 참전을 공식 요청하는 윌슨 대통령. 2년전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루시타니아호가 침몰되면서 가뜩이나 독일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데다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치머만 전보까지 공개되면서 더 이상 고립주의자들도 참전을 반대할 명분이 없었고 결국 참전이 결정되었다.

이 전문을 입수한 윌슨은 1917년 2월 27일 <AP통신>을 통하여 언론에 공개하였다. 게다가 어리석게도 치머만 스스로도 이 전문이 사실이라고 인정함으로서 미국이 참전할 명분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4월 6일 윌슨은 정식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유럽으로 군대를 보냈다. 당시 동부전선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서 러시아군이 붕괴되고 영국, 프랑스 역시 니벨의 졸렬한 공세가 전례없는 대참사로 끝나면서 패배 직전에 몰린 상황이었다. 만약 치머만 사건이 없었거나 그 전문이 가짜라고 고집했다면 윌슨은 고립주의자들을 누르고 참전을 강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일은 승리를 목전에 두고 제 무덤을 판 꼴이 되었다.

치머만 전보는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사건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밀 전보가 어떤 경위로 미국 정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 전후 배경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암호화되어 있었던 치머만 전보를 처음 캐치한 것은 미국이 아니라 영국 정보부였다. 암호 해독만도 20여일이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이 핵폭탄같은 기밀 문서를 미국에게 넘기는데 주저하였는데 그들은 독일만 감청한 것이 아니라 미국도 감청하고 있었기에 자칫 이 사실이 미국에게 알려질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설령 넘겨주어도 미국이 과연 이 문서가 진짜인지 믿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전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자 영국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미국에게 넘겼다. 영국의 예상대로 미국 사회는 들끓었고 독일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미국의 참전을 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양쪽 모두 난타전으로 기진맥진한 가운데 그나마 독일이 어느 정도 승기를 잡았음에도 팔팔한 새로운 전력이 끼어들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참호를 사이에 둔 채 몇년에 걸쳐서 수백만명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제1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른 것은 독가스나 전차와 같은 신무기가 아니라 바로 정보전이었던 것이다.

또 한가지, 정보전하면 빠질 수 없는 사건 중의 하나가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었던 미드웨이 해전이다. 만약 미국 정보부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이 어디를 공격할지 알아내지 못했다면 미드웨이 해전은 결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일본 정보부가 미국 해군이 미드웨이로 이동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미드웨이에서 승리한 쪽은 틀림없이 일본 해군이었을 것이다. 물론 미드웨이에서 일본 해군이 이겼어도 결국에는 미국이 승리했겠지만 전쟁은 보다 길어졌을 것이며 오스트레일리아는 틀림없이 일본의 수중에 넘어갔을 것이다. 진주만도 위험해졌을 것이며 루즈벨트는 보다 상황이 유리해질 때까지 태평양을 포기한 채 서부 캘리포니아로 남은 해군력을 철수시켰을지도 모른다. 그 전까지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하던 미군이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미드웨이의 승리 덕분이었다는 점에서 의미는 크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케 했던 보디가드, 포티튜드 작전, 독일군을 농락했던 영국의 더블크로스 시스템, 독일의 애니그마를 해독한 영국의 울트라첩보, 6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스라엘의 첩보전쟁 등 제1장에서는 정보전에서의 승리가 곧 전쟁의 승리로 이어진 사건들을 다룬다. 반대로 제2장에서는 정보전에서 실패함으로서 호된 댓가를 치룬 경우에 대한 것이다. 히틀러의 침공을 무시했던 스탈린, 진주만 기습에 당한 미국, 베트남 전쟁 당시 구정 대공세의 정보를 무시했던 미국,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건들은 우리에게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스레 알려준다.

오늘날 정보전은 더욱 치열하다. 또한 그저 상대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이버전과 해킹을 통하여 적국의 정치, 경제를 마비시키고 엄청난 손실을 입히기도 한다. 총한발 쏘지 않고도 상대를 굴복시킬 수도 있다. 2천여년 전에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승리"라고 하였는데 21세기에 와서 그것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강대국들에 비하여 우리는 정보전에서는 상당히 뒤쳐져 있다. 그동안 전차나 항공기, 미사일, 대포와 같은 유형적인 무기만이 진짜 무기라고 여기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적인 무기는 무기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정보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지만 행동이 뒤따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재래식 전력은 막강하지만 정작 정보전 능력에서는 여전히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미국 없이는 당장 장님 신세가 되는 것이 우리이다.

이 책은 여느 전쟁사 서적처럼 그저 전쟁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정보가 왜 중요한지, 오늘날 강대국들의 첨예한 정보전쟁,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과제에 대하여 언급한다. 국내에서는 그동안 보기 드문 정보전을 다룬 책이라는 점에서 많은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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