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의 본질 - 누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가?
그레이엄 앨리슨.필립 젤리코 지음, 김태현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전쟁의 안개(fog of war)'라는 말이 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전쟁이란 결코 합리적이고 정량화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우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전쟁은 반드시 더 강한 쪽이 승리하고 약한 쪽은 패배하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세상에는 굳이 전쟁이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누구도 질 것이 뻔한 싸움을 선택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싸우는 이유는 비록 가능성은 낮지만 조금이라도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윗이 골리앗을 꺾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베트남은 미국과 중국에게 승리하였고 소련은 아프간에서 혹독한 대가와 망신을 당한 채 물러나야 했다. 강대국들 역시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굳이 무리한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은 불확실성이 너무나 크다. 무솔리니의 그리스 침공처럼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여기고 전쟁을 시작했지만 적의 저항이 예상외로 강하거나 뜻밖의 상황에 부딪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도 한다. 어느 쪽도 결코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상대의 의중을 오판하거나 두려움, 정보 부재로 결국에는 파멸적인 전쟁으로 이어진 예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제1차 세계대전이다.

대개 우리는 역사를 바라볼 때 "그들은 왜 그렇게 했을까"를 놓고 다양한 가설을 세운 다음 우리 나름의 관점에서 미루어 짐작한다. 이것은 지나간 역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치인들과 장군들 역시 정치 외교, 군사적인 사안에서 상대가 어떠한 의중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원하는지 예측하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며 잘못된 정보와 상대의 기만 전술, 선입견과 고정관념도 끼어들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은 반드시 합리적인 동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가 보더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또한 그 시점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라도 시간이 지난 뒤 결과적으로 보면 최악의 선택인 경우도 있다. 따라서 충분한 정보와 근거의 뒷받침 없이 가설과 상상력에만 의존해서는 전혀 엉뚱한 결론을 도출할 수 밖에 없다.

루즈벨트가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할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용인했다는 둥의 소위 음모설들은 지금도 수없이 제기되고 있다. 음모설들이 대개는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대신, 상상력만으로 의혹을 부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막연히 '가장 합리적인 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책 결정이란 사실은 굉장히 허술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이러이러했다"라는 결과를 다루는 책은 얼마 있어도 "왜 그렇게 했는가" 과정을 다루는 책은 거의 없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포장된 음모설에 쉽게 현혹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모던 아카이브 출판사에서 신작 도서 <결정의 본질 - 누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가, 그레이엄 앨리슨, 필립 젤리코>가 출간되었다. 결정의 본질은 1971년에 첫 출간되어 국제정치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기념비적 저서라는 평을 받았으며 1999년에 개정판이 나온 뒤에도 45만 부가 팔린 국제 정치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1990년대 말에 이미 모 출판사에서 페이퍼북 형식으로 한번 출간되었다가 2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또 한번 햇볕을 보게 된 셈이다. 번역 수준이나 편집 상태 역시 예전의 퍼이퍼북과는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닐 정도로 깔끔하다.

"전쟁은 경쟁국의 의도를 지나치게 낙관할 때 일어날 수 있다. 또한 상대가 선제공격할 가능성을 지나치게 우려할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 전쟁에서 얻는 순 이익은 영토 획득과 같은 실물도 있지만, 전쟁보다 더 나쁠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래를 회피하는 기대치가 될 수도 있다."   - p.79

"쿠바 미사일 사건 당시 흐루쇼프의 마음을 바꾼 것은 케네디의 봉쇄 작전 때문이 아니었다. 공습, 침공과 같은 추가적인 위협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소련의 후퇴를 유도하지 못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이미 배치된 미사일을 철수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흐루쇼프의 마음을 진짜로 바꾼 것이 과연 당근인지, 채찍인지는 여전히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 p.165

"1994년 4월 어느 맑은 날 이라크 북부에서 미 공군 F-15 전투기 두대가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조기경보기의 도움을 받아서 헬리콥터 두대를 격추시켰다. 그 헬리콥터는 미 육군 소속의 블랙 호크였고 평화유지군 26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 사건을 2년 동안 조사한 결과는 조종사나 항법사의 실수일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정상적인 조직의 정상적인 사람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행동한 결과였다. 이 비극을 불러온 진짜 이유는 사전에 준비된 메뉴얼에 순응했기 때문이었다." - p.195

"소련은 기존 방침대로 구형 미사일을 신형 미사일로 교체했을 뿐이었다. 자연스럽고 거의 불가피한 정상적인 현대화 계획의 일환이었다. 소련 정부는 SS-20 미사일의 배치가 서방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분석하지 않았다. 따라서 서방이 항의하자 깜짝 놀랐다. 소련은 자신들의 신형 미사일 배치가 서방의 신형 미사일 배치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외교적 위기가 초래 되었다." - p.222
 
이 책의 주된 내용은 "국가는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 "그것을 누가 어떻게 결정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국가 정책의 결정 과정이란 여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외부 사람들은 심지어 전문가들조차도 그것의 진짜 속내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심지어 이를 직접 결정한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정부란 어느 한 사람이나 몇몇 고위 관료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 조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각자의 영역에서 분업을 하고 있다.

개개인은 제아무리 자신의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반드시 전체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조직들 간의 협력이 얼마나 잘 되는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톱니바퀴가 조금만 어긋나더라도, 가령 적의 공격이 임박했을 때 매우 중요한 일급 기밀이 하부에서 걸러지면서 상층부까지 전달되지 않는다면, 또는 그 정보가 가장 윗선까지 올라간다고 해도 막상 그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윗선에서는 대응하라는 지시를 내려도 그 명령이 하부에 제때 전달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진주만 공격, 바바롯사 작전 당시 독일의 기습 작전이다. 우리는 역사를 바라볼 때 그저 눈 앞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세세한 부분까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모델과 사례를 통하여 국가 정책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다룬다. 여기에는 크게 세가지의 모델이 있다. 첫째는 제1모델(합리적 행위자 모델)이다. "이런 행동을 한 것에는 거기에 걸맞는 합리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널리 사용되는 모델이지만 이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허점 또한 있다. 국가란 결코 사람처럼 단일 행위자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고도로 나누어진 복잡한 기계 장치와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의 행동은 항상 일관성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제1모델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두번째 모델이 제2모델(조직이론)이다. 정부를 구성하는 조직의 문화와 가치관, 절차 등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모델이 정부정치이론이다. 정부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한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타협을 벌인 결과라는 것이다. "어느 정부가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 게임에 참여한 플레이어들이 흥정한 결과이다."

이 세 가지 모델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다양한 정치적 사건에 대하여 막연한 추론이나 허황된 음모론이 아니라 보다 진실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초반부의 이론 설명은 다소 난해한 느낌도 있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빨려들어가는 책이다. 냉전 시절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에 가장 근접했다는 쿠바 미사일 사건 당시 케네디 행정부는 소련의 의중을 분석하기 위하여 다양한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그 가설들에 맞추어 미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최선의 방안을 찾아나갔다. 

미국 수뇌부 앞에는 크게 6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쿠바를 침공할 것인가, 공습을 할 것인가, 봉쇄를 할 것인가, 카스트로를 매수할 것인가, 외교 루트를 통한 압박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할 것인가. 각각의 선택지에는 그렇게 했을 때 얻는 것도 있지만 잃는 것도 있었다. 어떤 것도 나름의 리스크가 뒤따랐기에 쉽사리 선택할 수 없었다. 케네디가 고민에 빠졌듯이 같은 시간 흐루쇼프와 소련 수뇌부 또한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그나마 그 중에서 가장 최선이라고 여기는 선택을 하였다. 이것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2부의 내용은 정책 결정권자들이 복잡한 정치 외교적인 사안을 놓고 어떠한 방식으로 판단을 내리며 나름의 해답을 찾아가는지 그 과정을 이해하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뮌헨 회담에서 체임벌린은 왜 히틀러에 대하여 오판했는가. 루즈벨트는 어째서 일본의 위협에 대비하지 않았는가.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위협했을 때 부시는 왜 방관했는가. 그리고 손바닥 뒤집듯이 이라크를 공격했는가. 쿠바 미사일 사건 당시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상대의 의중을 어떻게 파악했는가. 무엇이 이들을 물러나게 하였는가. 겉만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많은 의혹들에 대하여 이 책은 "그들은 왜 그렇게 했는가"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이 책은 주로 미국의 외교 정책을 사례로 삼고 있지만 우리 주변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다. 냉탕과 온탕을 쉴 새 없이 오가는 남북 관계, 올초만 해도 최악으로 치달았다가 어느 순간 분위기가 좋아질 수 있었는지, 당장 북한을 폭격할 듯 위협하던 트럼프가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서게 된 이유 등 그저 단선적으로 바라보아서는 그 본질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어보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석을 빼고 480여 페이지의 많다고도, 적다고도 할 수 없는 분량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정치 외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필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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