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놀란의 영화는 전후 배경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 연합군이 왜 덩케르크에 갇히게 되었는지 왜 여기서 탈출해야 하는지, 선장들이 어째서 자신의
배를 끌고 위험하다는 덩케르크로 향하는지, 내가 살기 위해 전우의 희생조차 마다하지 않는 병사들의 이기적인 모습, "너희 공군은 뭐하고 있느냐"
질타하는 병사에게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떨구는 파일럿. 놀란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관객들을 77년 전 덩케르크의 현장으로
데려다 놓을 뿐이다. 이것이 놀란 감독 특유의 방식이기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거의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본다면 재미가 반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교유서가에서 나온
<덩케르크>는 영화의 배경, 즉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의 상황을 다룬 책이다. 5월 10일 새벽, 독일군의 기갑부대가 일제히
네덜란드 국경을 돌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독일 공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네덜란드, 벨기에 전선에서 벌어진 연합군의 패배,
구데리안의 기갑부대가 아르덴을 돌파하여 연합군의 후방으로
쇄도하였다. 덩케르크의 좁은 포켓에 갖힌 40만명의 연합군.
책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책은 존 키건의 <2차대전사>와 같은 전쟁사 책이 아니다.
장군들이 테이블 위에서 어떠한 작전을 짰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구조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배를 몰고 바다로 나서는
모습, 한번 떠나면 귀환을 장담할 수 없는 긴장감, 어떠한 위험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았던 놀라운 투지, 생사의 갈림길 속에서도 남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의 용기, 마치 영화 <타이타닉>이나
<포세이돈>, <판도라>처럼 거대한 재난 속에서 그것과 용감하게 싸우며 그 속을 헤쳐나오는
한편의 휴먼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램지 중장은 프랑스 해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시종일관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신속하게 도버 해협을 건넜을 때 마주한 것은 정유공장과 정유조가 있는 덩케르크 항 서쪽에서 솟구치는 화염과 검은 연기의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16킬로미터에 이르는 모래톱! 모래톱에서 해안선까지는 온통 집으로 돌아가려는 병사들로 새까맣게 채워져 있었다." -
p.101
"독일군 전투기 10여대가 한꺼번에 몰려와 주위를 선회하면서
폭탄으로 조준 타격하고 갑판에 기관총을 난사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몇번이고 이런 공격이 쏟아질 때면 실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같았다.
그럼에도 지옥 구덩이를 간발의 차로 빠져나온 병사들과 배를 잃고 바다 위에서 살려달라고 외쳤던 선원들의 대부분은 놀라우리만큼 침착했다." -
p.183
"그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두 다리 모두 무릎 아래가 잘려나간
상태였다. 승조원들은 그를 조심스럽게 갑판에 뉘였고 냉혹한 상황에서도 허용되는 한 편안하게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그의 기백은 육체 속에서
강렬하게 타올랐다. 육체적인 고통도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는 단호하게 일어서려고 몸부림쳤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영국 해군 만세!"
그는 쓰러졌다." - p.329
이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은 영국의 군사 전문가이자 작가로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4년에 죽었다. 이 책은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결행된 지
1년 후에 써였다고 한다. 영국인으로서 덩케르크는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자 불굴의 의지와 같았을 것이다. 우리로 치면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에 비견될만하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가지는 비중에 비하여 그동안 국내에서는 소홀히 여겨져 온 면이
있다. 제2차세계대전사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존 키건 교수의 <제2차세계대전사
The Second World War>를 비롯하여 시중의 관련 서적을
보면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대하여 고작 몇 페이지를 할애하여 연합군이 어떻게 철수할 수 있었는지를 간략하게 언급할 뿐이다. 따라서 충분한 배경 지식이 없는 독자들로서는 프랑스 전역과 영국 본토 항공전 사이의 짧은 단막극
정도로 여겨질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좌우했던 덩케르크 철수 작전의 진정한 의미가 가려지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밀덕들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