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케르크 - 세계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 지음, 정탄 옮김, 권성욱 감수 / 교유서가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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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비극적인 사실을 말하려 합니다. 유럽은 히틀러에게 굴복당했습니다. 이제 다음 차례는 영국입니다. 하지만 저는 국민들에게 해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국민의 피와 땀과 그리고 눈물입니다.

앞으로 기나긴 투쟁과 고난한 시련의 세월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의 확고한 정책은 보장되지 않는 기만적인 강화조약이 아닌 전쟁입니다. 수많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쟁을 하는 목적은 승리입니다. 파시즘에 굴복당하지 않는 자유민의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승리해야 우리는 생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의 단결된 힘이 기필코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1940년 5월 13일 처칠이 수상으로 취임했을 때 전쟁은 겨우 3일이 지났을 뿐이지만 상황은 이미 최악이었다. 독일 공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에 네덜란드는 삼일만에 백기를 들었고 벨기에가 "작은 마지노"라고 자랑하던 에방 에말 요새 역시 함락되어 방어선의 한쪽이 무너졌다. 또한 구데리안이 이끄는 독일군 기갑 부대는 프랑스군 수뇌부가 절대 넘을 수 없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아르덴을 단숨에 돌파하여 뫼즈강을 도하한 후 서쪽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전쟁이 시작될 때만 해도 승리는 따놓은 당상인양 기세등등했던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렝은 패닉에 빠진 채 자포자기해 버렸다. 그나마 예비 전력으로 남겨 두었던 프랑스의 3개 기갑 사단은 가믈렝이 축차 투입한 덕분에 각개 격파당하였다. 연합군의 2/3는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에서 갇힌데다 나머지의 대부분도 마지노선에 묶인 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만약 연합군 지휘관 중에 롬멜이나 패튼, 몽고메리, 쥬코프처럼 과감하고 뛰어난 장군이 있었더라면 조직적인 종심 방어로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면서 지나치게 깊숙이 진격한 독일군의 측면을 찔러서 양분시키고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가 가장 두려워했던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또한 4년 후 히틀러가 아르덴에서 미군을 상대로 똑같은 방식으로 도박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전혀 통하지 않은 채 참담한 패배로 끝이 났다.

물론 프랑스군 수뇌부도 반격을 계획했다. 하지만 막상 반격 작전에 필요한 수단이 결여되어 있었다. 공군은 숫적으로 우세했지만 무계획적으로 흩어져 있었고 전차는 보병 사단에 분산되어 있었으며 프랑스군의 부대는 대부분 기동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연합군은 오랫동안 독일의 공격을 기다렸음에도 정작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프랑스군 수뇌부가 대체적으로 나이만 많을 뿐 고루하고 창의성이 부족하며 행동이 느렸기 때문이었다.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연합군의 대응 능력보다 훨씬 빠르게 파고 들어오는 독일군을 저지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독일군이 연합군의 미약한 방어선을 밀어내고 영불 해협에 도착하자 40만명의 연합군의 퇴로가 차단되면서 거대한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5월 22일에는 칼레가 포위되었고 23일에는 볼로뉴 항구가 함락되었다. 연합군에게 남은 것은 덩케르크의 손바닥만한 작은 교두보 뿐이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선봉부대는 이미 덩케르크에서 겨우 15km 떨어진 곳까지 당도하였다. 이제 한발만 더 내딛으면 사상 최대의 포위 섬멸전이 시작될 판이었다. 

상황이 급박하자 영국 해군은 이들의 구출 작전을 처칠에게 건의하였다. 처칠은 스탈린처럼 무조건적인 사수를 명령하는 대신 현명하게도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른바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 이라 불리게 되는 사상 최대의 철수 작전이었다. 참고로 "다이나모"는 작전 회의가 열리던 도버성의 방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5월 26일 일요일 오후 6시 57분 다이나모 작전이 발동되었다.

영국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령 갈리폴리에서 대규모 철수 작전을 수행한 바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해군 장관으로서 갈리폴리 철수를 지휘했던 사람은 처칠이었다. 비록 갈리폴리 전투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륙작전"이라고 불릴 만큼 재앙에 가까운 실패였지만 철수 작전만큼은 매우 질서정연하게 조직적으로 실시되어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덩케르크는 갈리폴리보다 훨씬 불리하였다. 광범위한데 흩어져 있던 영국 해군은 철수 작전에 대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터키군은 추격에 나서지 않았지만 독일군은 당장이라도 덩케르크의 해안가로 들이닥칠 판이었다.

하늘은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영불 해협에서는 유보트들이 승냥이떼처럼 활동하면서 연합군의 선박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게다가 덩케르크는 해안가는 넓지만 수심이 얕아서 대형 수송선이 정박하기에 마땅하지 않은데다 대부분의 항구 시설은 이미 파괴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해안가에서 직접 병사들을 태우고 먼 바다까지 나오는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도박이었기에 처칠과 영국 수뇌부는 그저 전체의 1/10 정도인 4만명 정도만 구출해도 대성공이라고 여기는 판이었다.

상황은 일분일초가 다급했기에 철수에 필요한 해군 선박을 충분히 모을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처칠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서 영국 국민들을 향하여 지금의 위기를 알리고 도움을 호소하였다. 그의 비장하고도 간절한 호소는 놀라운 효과가 있었고 전쟁에 냉담하던 영국 국민을 전례없이 하나로 뭉치게 하였다. 어선, 요트, 구명정, 낚시배, 심지어 관광객들을 위하여 템즈강을 오가던 구식 범선에 이르기까지 수백척에 달하는 선박들이 너나 할 것없이 덩케르크 해안가로 일제히 향하였다.

    

 

영불 해협의 거친 풍랑과 독일 공군의 폭격, 유보트의 위협, 자기 기뢰 등 온갖 장애물과 난관이 있었지만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병사들을 태운 후 영국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영국군 병사들 또한 독일군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음에도 전의를 잃지 않은 채 질서 정연하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결과는 놀라울 만큼 성공적이었다.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9일 동안 구출된 장병들은 무려 33만8천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 영국군이 19만명, 프랑스군이 14만명 정도였다. 덩케르크의 모습은 당시 패닉에 빠진 채 총을 버리고 독일군에게 무질서하게 투항하던 다른 연합군 병사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순수하게 군사적으로 본다면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되고 조직적인 철수 작전이 아니었기에 철수 부대는 거의 모든 장비를 상실했다. 당시 3개 군단 10개 보병 사단, 1개 기갑 사단으로 구성된 영국의 대륙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은 영국군이 보유한 최정예 부대였다. 또한 500대의 영국 공군이 프랑스에 배치되어 있었다.

덩케르크에서 철수하면서 이들이 버리고 온 장비는 야포 880문, 대공포 500문, 대전차포 850문, 기관총 1만1천정, 전차 700대, 차량 4만5천대에 달했으며 그 외에도 막대한 탄약과 유류, 보급품이 있었다. 덩케르크에는 영국, 프랑스군이 남긴 무수한 무기와 야포, 차량이 즐비하게 늘려 있었고 대부분 파괴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독일군의 손에 넘어가 1년 뒤 발칸과 소련 침공 작전에 쓰이게 된다. 영국에는 겨우 2개 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예비 장비가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처칠은 미국에게 도움을 급히 요청하여 미국이 제공하는 "랜드리스"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또한 철수 과정에서도 6만 8천여명에 달하는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마지막까지 철수를 엄호했던 부대는 결국 탈출하지 못한 채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철수 과정에서 6척의 영국 구축함과 3척의 프랑스 구축함이 격침되었고 19척이 큰 손상을 입었다. 또한 474대의 영국 공군기가 격추당했다. 독일 공군의 피해는 132대에 불과했다. 작전에 동참했던 민간 선박들 역시 200여척 이상이 침몰하거나 피해를 입었다. 냉철하게 말하자면 전쟁에 패배하여 빈털털이가 된 채 목숨만 겨우 건져서 비참한 몰골로 돌아온 꼴이었다. 따라서 참패의 원인을 놓고 격론이 벌어지고 처칠은 그 책임을 졌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국민들은 오히려 처칠을 찬사하였고 귀환한 병사들을 따뜻하게 격려하였다. 또한 독일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은 더욱 불타 올랐다.

작전의 성공 여부를 놓고 본다면 덩케르크보다 갈리폴리의 철수 작전이 훨씬 성공적이었음에도 우리는 전자를 기억하고 후자는 기억하지 못하지 못한다. 이것은 덩케르크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처칠은 국민들에게 "아직 우리는 진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었다. 그 힘이 수많은 고통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날까지 영국을 끌고 간 것이다. 뮌헨 회담에서 히틀러에게 굴복한 체임벌린을 "평화를 지켰다"라며 환호했던 영국 국민들은 이제 전쟁에 스스로 동참하였고 전쟁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처칠이 말하는 진정한 "덩케르크의 기적"이었다.

얼마 전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동명 영화와 함께 <덩케르크 - 세계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이 출간되었다. 표지의 사진은 프랑스 해군의 1500톤급 구축함인 브라스크(Bourrasque)의 침몰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덩케르크를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 중의 하나이다. 브라스크는 덩케르크 작전 당시 병사들을 구조하다가 1940년 5월 30일 독일군의 기뢰에 부딪쳐 침몰하였다.

엊그제 필자도 휴가를 이용하여 영화를 보았는데 놀란 감독 특유의 영상미와 웅장하면서도 긴장감을 끌어내는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할리우드 특유의 액션이 거의 없다보니 <라이언 일병>이나 <애너미 앳더 게이트>와 같은 전쟁 영화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다소 실망할 수 있겠지만 다양한 카메라 구도를 통해 마치 나 자신이 당시의 긴박한 전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는 호불호가 갈리면서도 국내에서 꾸준히 1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니 잘 만든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대신 놀란의 영화는 전후 배경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 연합군이 왜 덩케르크에 갇히게 되었는지 왜 여기서 탈출해야 하는지, 선장들이 어째서 자신의 배를 끌고 위험하다는 덩케르크로 향하는지, 내가 살기 위해 전우의 희생조차 마다하지 않는 병사들의 이기적인 모습, "너희 공군은 뭐하고 있느냐" 질타하는 병사에게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떨구는 파일럿. 놀란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관객들을 77년 전 덩케르크의 현장으로 데려다 놓을 뿐이다. 이것이 놀란 감독 특유의 방식이기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거의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본다면 재미가 반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교유서가에서 나온 <덩케르크>는 영화의 배경, 즉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의 상황을 다룬 책이다. 5월 10일 새벽, 독일군의 기갑부대가 일제히 네덜란드 국경을 돌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독일 공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네덜란드, 벨기에 전선에서 벌어진 연합군의 패배, 구데리안의 기갑부대가 아르덴을 돌파하여 연합군의  후방으로 쇄도하였다. 덩케르크의 좁은 포켓에 갖힌 40만명의 연합군. 책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책은 존 키건의 <2차대전사>와 같은 전쟁사 책이 아니다. 장군들이 테이블 위에서 어떠한 작전을 짰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구조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배를 몰고 바다로 나서는 모습, 한번 떠나면 귀환을 장담할 수 없는 긴장감, 어떠한 위험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았던 놀라운 투지, 생사의 갈림길 속에서도 남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의 용기, 마치 영화 <타이타닉>이나 <포세이돈>, <판도라>럼 거대한 재난 속에서 그것과 용감하게 싸우며 그 속을 헤쳐나오는 한편의 휴먼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램지 중장은 프랑스 해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시종일관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신속하게 도버 해협을 건넜을 때 마주한 것은 정유공장과 정유조가 있는 덩케르크 항 서쪽에서 솟구치는 화염과 검은 연기의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16킬로미터에 이르는 모래톱! 모래톱에서 해안선까지는 온통 집으로 돌아가려는 병사들로 새까맣게 채워져 있었다."  - p.101

"독일군 전투기 10여대가 한꺼번에 몰려와 주위를 선회하면서 폭탄으로 조준 타격하고 갑판에 기관총을 난사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몇번이고 이런 공격이 쏟아질 때면 실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같았다. 그럼에도 지옥 구덩이를 간발의 차로 빠져나온 병사들과 배를 잃고 바다 위에서 살려달라고 외쳤던 선원들의 대부분은 놀라우리만큼 침착했다." - p.183

"그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두 다리 모두 무릎 아래가 잘려나간 상태였다. 승조원들은 그를 조심스럽게 갑판에 뉘였고 냉혹한 상황에서도 허용되는 한 편안하게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그의 기백은 육체 속에서 강렬하게 타올랐다. 육체적인 고통도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는 단호하게 일어서려고 몸부림쳤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영국 해군 만세!" 그는 쓰러졌다."  - p.329

이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은 영국의 군사 전문가이자 작가로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4년에 죽었다. 이 책은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결행된 지 1년 후에 써였다고 한다. 영국인으로서 덩케르크는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자 불굴의 의지와 같았을 것이다. 우리로 치면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에 비견될만하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가지는 비중에 비하여 그동안 국내에서는 소홀히 여겨져 온 면이 있다. 2차세계대전사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존 키건 교수의 <2차세계대전사 The Second World War>를 비롯하여 시중의 관련 서적을 보면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대하여 고작 몇 페이지를 할애하여 연합군이 어떻게 철수할 수 있었는지를 간략하게 언급할 뿐이다. 따라서 충분한 배경 지식이 없는 독자들로서는 프랑스 전역과 영국 본토 항공전 사이의 짧은 단막극 정도로 여겨질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좌우했던 덩케르크 철수 작전의 진정한 의미가 가려지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밀덕들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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