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전쟁 - 제1차 세계대전부터 사이버전쟁까지, 전쟁의 승패를 가른 비밀들
박종재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하지 않는다" - 군사 격언

"많은 임금과 장수 중에서 특출나게 승리를 거두는 자는 적에 대한 정보를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적에 대하여 미리 알려면 귀신에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물을 흉내낼 수도 없으며 짐작으로 추측하여 시험해 볼 수도 없다. 반드시 상대의 사정을 잘 아는 첩자를 써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다" - 손자 용간편

일찍이 손자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적을 알고 나를 알기 위한 정보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무리 적보다 많은 병력과 유리한 상황을 선점하고 있어도 막상 그 사실을 지휘관이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소극적인 지휘관일수록 오히려 내가 불리하다고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나거나 패배를 자초하는 경우도 흔하게 있다. 반대로 적이 얼마나 강대한지 모르고 자신의 용맹함을 과신하여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스스로 사지에 들어가는 예도 있다. 그 단적인 예가 태평양전쟁 당시 버마전선을 담당하였던 무다구치 렌야이다.

그는 일본군이 가장 유리했던 1942년 여름에는 지형의 험난함과 보급 문제를 들어서 인도 침공을 완강하게 반대했다가 뒤늦게 태도를 바꾸어 이번에는 일본군의 사정은 무시한 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격을 강행하였다. 영국군이 허약했던 1942년에 공격했다면 손쉽게 승리했겠지만 1944년의 영국군은 훨씬 강해진 반면, 일본군은 약화되어 있었다. 결국 병력의 2/3를 잃고 참담한 몰골로 철수하였다. 그의 실패는 태평양전쟁을 통틀어 일본이 경험한 최악의 참사였으며 결국 버마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심지어 연합군은 그를 "연합군의 승리에 가장 기여한 일본군 장군"이라고 칭찬했을 정도였다. 무다구치가 실패한 이유는 정보를 무시한 채 자신의 막연하고 관념적인 편견만으로 "이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동서 고금의 전쟁에서 정보의 중요성이란 새삼 말할 것도 없으리라. 고대 서양에서 가장 위대한 전투라고 꼽히는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이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정보력 덕분이다. 그는 상대의 강약에 대하여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하였고 적장의 성향까지 파악하여 허를 찔렀다. 반면, 로마군 사령관인 바로는 그저 숫적인 우위만 믿고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한 채 무작정 공격에 나섰다가 한니발의 함정에 빠져서 문자 그대로 전멸하고 말았다. 23전의 싸움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이순신 역시 일본 수군의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이를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누구나 알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안개(The Fog of War)"라는 말을 사용하여 정보가 얼마나 불확실하며 그 중에서 진짜 정보를 골라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강조한 바 있다. 현실에서는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그 중에서는 적이 의도적으로 흘린 더미 정보도 있고 서로 상충되거나 상식에서 어긋나는 정보도 많다. 설령 뛰어난 정보 전문가가 수많은 쓰레기 정보 중에서 진짜 가치가 있는 정보를 어렵사리 골라내어도 윗선까지 제대로 올라간다는 보장도 없다. 중간 보고 단계에서 버려지거나 전혀 엉뚱하게 왜곡되기도 한다. 정확한 정보가 정확하게 보고되어 정확하게 활용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야말로 행운에 가깝다.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가. 정보를 골라내는 과정에서 사람의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만약 서로 상충하는 정보가 있을 때 냉철하게 판단하여 결정하거나 보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냥 내 입맛에 맞는 쪽을 택한다. 그저 "이랬으면 좋겠다"는 단순힌 희망 사항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해 버린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정보의 중요성을 무시한 예가 다름아닌 임진왜란이다. 히데요시는 조용히 쳐들어오는 대신, "명을 치겠으니 조선은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하라"라고 엄포를 놓았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히데요시의 허세 덕분에 대비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번 셈이었다. 하지만 모든 수단을 다하여 상대의 의중과 군사력, 작전 계획 등 정보를 수집하기는 커녕 그저 의례적인 통신사 두명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그조차도 한 사람은 "쳐들어온다" 또 한사람은 "안 쳐들어온다"라는 완전히 상반되는 보고를 하여 혼란을 부추겼고 무사안일에 젖어 있었던 조정은 "안 쳐들어오겠지만 혹시 모르니까"라는 태평한 생각으로 의례적인 수준의 대비를 했을 뿐이었다. 결국 예상을 훨씬 초월하는 침공에 조정 전체가 패닉 상태에 직면하여 선조는 조중 국경의 끝단인 의주까지 도망쳐야 했다.

히데요시가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는 것은 그저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상황임에도 조정이 이를 무시한 것은 그런 상황 자체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수백년 동안 외적의 대규모 침략은 없었는데 하필 우리 대에 와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귀납법적인 오류, 사실이 아닌 희망에 불과한 가정을 사실로 단정해 버린 채 다른 가능성은 모두 무시하는 전형적인 가정 망각의 오류라 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전쟁사에는 비일비재하다. 한국전쟁에서 맥아더 역시 중공군의 참전을 알려주는 수많은 정보가 있었지만 그 정보 자체가 불쾌하다는 이유로 묵살하거나 자신의 편의대로 해석하였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침공한다는 경고를 외면하여 개전 초반에 500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하는 대참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 군대에 대한 경멸감과 경제적인 부담을 이유로 동원령을 미뤘다가 이집트, 시리아의 기습을 받아 거의 패망 직전까지 몰리는 호된 댓가를 치루었다. 정보를 무시하기는 쉽지만 정보를 무시한 대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얼마 전 전쟁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주목할 만한 신작 도서가 나왔다. <함께 보는 근현대사> <유라시아 견문> 등을 출판한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서해문집에서 나온 <정보전쟁>이다. 마침 해당 출판사에서 필자에게 신작이라면서 선물로 보내왔다. 감사할 따름이다.

저자인 박종재 교수님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 대학에서 전략학 박사를 수료한 후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해군 제1함대, 안보정보비서관실 등에서 근무하는 등 국내에서는 정보분야의 통이라고 하실만한 분이다.

"여러분의 성공은 기억되지 않지만 실패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CIA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정보는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막상 사람들의 이목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성공하면 그저 본전이요, 실패하면 이유 여하와 상관없이 사방에서 두들겨 받는 것이 바로 정보 부서의 운명이다. 아무리 큰 공을 세워도 그들에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없다. 그것은 정치인, 장군들의 몫이다. 007과 같은 스파이들의 멋진 액션은 그저 영화에서나 가능한 얘기이다. 하지만 그림자 속에서 숨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걸고 누구보다도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것이 바로 이들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20세기 현대사에서 정보력이 전쟁사를 어떻게 좌우했는지 다룬다. 가장 먼저 나오는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지키는 미국의 참전을 결정적으로 유도한 이른바 "치머만 사건"이다.

당시 독일 외무장관이었던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관으로 한통의 전문을 보낸다. 독일은 멕시코에 자금과 무기를 대고 만약 미국이 유럽 전선에 참전할 기미가 보일 경우 멕시코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미국은 유럽에 참전하지 못할 것이고 독일이 전쟁에 승리한 뒤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멕시코가 빼앗긴 텍사스, 뉴멕시코, 아리조나 등을 되찾아주겠다는 것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내용이었다.

      
1917년 4월 2일 미 의회에서 참전을 공식 요청하는 윌슨 대통령. 2년전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루시타니아호가 침몰되면서 가뜩이나 독일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데다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치머만 전보까지 공개되면서 더 이상 고립주의자들도 참전을 반대할 명분이 없었고 결국 참전이 결정되었다.

이 전문을 입수한 윌슨은 1917년 2월 27일 <AP통신>을 통하여 언론에 공개하였다. 게다가 어리석게도 치머만 스스로도 이 전문이 사실이라고 인정함으로서 미국이 참전할 명분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4월 6일 윌슨은 정식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유럽으로 군대를 보냈다. 당시 동부전선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서 러시아군이 붕괴되고 영국, 프랑스 역시 니벨의 졸렬한 공세가 전례없는 대참사로 끝나면서 패배 직전에 몰린 상황이었다. 만약 치머만 사건이 없었거나 그 전문이 가짜라고 고집했다면 윌슨은 고립주의자들을 누르고 참전을 강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일은 승리를 목전에 두고 제 무덤을 판 꼴이 되었다.

치머만 전보는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사건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밀 전보가 어떤 경위로 미국 정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 전후 배경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암호화되어 있었던 치머만 전보를 처음 캐치한 것은 미국이 아니라 영국 정보부였다. 암호 해독만도 20여일이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이 핵폭탄같은 기밀 문서를 미국에게 넘기는데 주저하였는데 그들은 독일만 감청한 것이 아니라 미국도 감청하고 있었기에 자칫 이 사실이 미국에게 알려질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설령 넘겨주어도 미국이 과연 이 문서가 진짜인지 믿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전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자 영국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미국에게 넘겼다. 영국의 예상대로 미국 사회는 들끓었고 독일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미국의 참전을 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양쪽 모두 난타전으로 기진맥진한 가운데 그나마 독일이 어느 정도 승기를 잡았음에도 팔팔한 새로운 전력이 끼어들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참호를 사이에 둔 채 몇년에 걸쳐서 수백만명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제1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른 것은 독가스나 전차와 같은 신무기가 아니라 바로 정보전이었던 것이다.

또 한가지, 정보전하면 빠질 수 없는 사건 중의 하나가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었던 미드웨이 해전이다. 만약 미국 정보부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이 어디를 공격할지 알아내지 못했다면 미드웨이 해전은 결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일본 정보부가 미국 해군이 미드웨이로 이동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미드웨이에서 승리한 쪽은 틀림없이 일본 해군이었을 것이다. 물론 미드웨이에서 일본 해군이 이겼어도 결국에는 미국이 승리했겠지만 전쟁은 보다 길어졌을 것이며 오스트레일리아는 틀림없이 일본의 수중에 넘어갔을 것이다. 진주만도 위험해졌을 것이며 루즈벨트는 보다 상황이 유리해질 때까지 태평양을 포기한 채 서부 캘리포니아로 남은 해군력을 철수시켰을지도 모른다. 그 전까지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하던 미군이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미드웨이의 승리 덕분이었다는 점에서 의미는 크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케 했던 보디가드, 포티튜드 작전, 독일군을 농락했던 영국의 더블크로스 시스템, 독일의 애니그마를 해독한 영국의 울트라첩보, 6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스라엘의 첩보전쟁 등 제1장에서는 정보전에서의 승리가 곧 전쟁의 승리로 이어진 사건들을 다룬다. 반대로 제2장에서는 정보전에서 실패함으로서 호된 댓가를 치룬 경우에 대한 것이다. 히틀러의 침공을 무시했던 스탈린, 진주만 기습에 당한 미국, 베트남 전쟁 당시 구정 대공세의 정보를 무시했던 미국,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건들은 우리에게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스레 알려준다.

오늘날 정보전은 더욱 치열하다. 또한 그저 상대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이버전과 해킹을 통하여 적국의 정치, 경제를 마비시키고 엄청난 손실을 입히기도 한다. 총한발 쏘지 않고도 상대를 굴복시킬 수도 있다. 2천여년 전에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승리"라고 하였는데 21세기에 와서 그것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강대국들에 비하여 우리는 정보전에서는 상당히 뒤쳐져 있다. 그동안 전차나 항공기, 미사일, 대포와 같은 유형적인 무기만이 진짜 무기라고 여기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적인 무기는 무기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정보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지만 행동이 뒤따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재래식 전력은 막강하지만 정작 정보전 능력에서는 여전히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미국 없이는 당장 장님 신세가 되는 것이 우리이다.

이 책은 여느 전쟁사 서적처럼 그저 전쟁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정보가 왜 중요한지, 오늘날 강대국들의 첨예한 정보전쟁,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과제에 대하여 언급한다. 국내에서는 그동안 보기 드문 정보전을 다룬 책이라는 점에서 많은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