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 - 일본이 감추고 싶은 비밀들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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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에서 청조가 완패한 지 약 10여년 뒤인 1853년 7월 8일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인 매튜 페리 제독이 지휘하는 동인도 전대(East India Squadron) 산하 4척의 군함이 에도 성 남쪽, 도쿄만 끝의 우라가(지금의 요코스카)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들은 무력 시위를 하면서 막부를 위협하고 개항을 요구하였다. 지난 백여년 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 태평양을 꾸준히 잠식해 나가던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드디어 동쪽 끝단에 있는 일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래 지난 250여년 동안 조선과 청, 류큐, 네덜란드와 제한적인 교역 이외에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누구도 나갈 수 없다는 쇄국 정책을 완고하게 고수해 왔던 막부도 미국의 함포 외교에는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약 8개월 뒤인 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문호를 열었다. 막부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다른 열강들에게도 굴복하여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였다. 덧붙여, 우라가에서 페리 제독의 함대가 무력 시위를 벌이며 일본인들에게 위압감을 주었던 모습은 그로부터 꼭 92년이 지난 뒤에 할제이(William F. Halsey) 제독이 지휘하는 미 제3함대가 또 한번 그대로 재현하게 된다.

오랫동안 좁은 세계에 갖혀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문호를 연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나라와의 통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바깥 세계에 여지껏 몰랐던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구 체제의 권위는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졌고 질서가 무너지면서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일본은 둘로 갈라져서 막부를 지키려는 자와 타도하려는 자로 나뉘어 서로를 향하여 칼을 들이대었다. 막부 타도의 선봉에는 조슈의 모리 가문과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이 섰다. 이들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래 도쿠가와 막부의 냉대를 받아 왔기에 오랜 원한이 있었으며 전국 300개 번 중에서도 '웅번(雄藩)'이라고 불릴 만큼 손 꼽히는 실력을 갖춘 세력이기도 하였다. 또한 막부나 다른 번들에서는 고루한 관료들이 어떻게 하면 낡은 질서를 유지할 것인가에만 골몰했던 것과 달리 조슈번과 사츠마번은 젊고 혈기왕성한 개혁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차지하고 번의 내정을 적극적으로 개혁하고 신분과 상관없는 유능한 인재 등용과 군비 증강에 나서는 등 힘을 키웠다. 막부도 나름대로 근대화에 힘을 기울였다고 하지만 그 속도와 추진력에서는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힘의 균형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조슈-사츠마 쪽으로 빠르게 기울었다.

막부와 反막부 세력의 신경전은 결국 보신 전쟁의 폭발로 이어졌다. 1868년 1월 3일 막부군의 교토 진격으로 도바-후시미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군에 의하여 서구식으로 훈련된 막부군은 삿쵸군보다 숫적으로 무려 5배나 우세했기에 사람들은 막부측의 승리를 예견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구식 군대와 신식 군대가 뒤섞여 있는데다 사기도 형편없었던 막부군과 달리 삿쵸군은 훨씬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으며 미니에 강선식 머스킷으로 무장한 막부군은 당시로는 최신이었던 슈나이더 후장식 라이플로 무장한 삿쵸군에게 화력에서 완전히 제압당하였다. 막부군이 한발 쏠 때 삿쵸군은 10발을 쏘는 판이니 숫적 우위 따위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항전을 포기하였고 에도성을 삿쵸군에게 내주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일본의 내전은 한동안 계속되어 1877년 세이난 전쟁을 끝으로 비로소 일본은 유신 정부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일본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의미에서 중앙 집권화의 실현이었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를 비롯한 각종 창작물에서는 흔히 칼 든 사무라이가 총과 대포의 포문을 향하여 용감하게 돌진하는 모습이 장렬하게 묘사된다. 근대적인 총기 대신 검 한자루를 들고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죽음을 선택하는 사무라이들의 비장한 모습은 팔기군이나 마라타 동맹의 인도군, 줄루 전쟁에서의 줄루 군대 등 동 시대의 다른 아시아-아프리카 군대들이 막강한 서구 군대의 총포 앞에서 도주하기 급급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과는 그야말로 대조적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실제 역사와 전혀 동떨어져 있을 뿐더러, 서구 사람들의 일본 문화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서구의 기사들이 소위 '일기토'를 고수하면서 자신의 용맹함을 드러내기 어려운 원거리 투사 무기를 배척했던 것과 달리 사무라이들은 총과 활에 대한 아무런 거부감도 없었다. 검은 주된 무기가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에 불과하였다. 사무라이와 기사 문화를 동일하게 바라본 것에서 비롯된 관념적인 오해이다.  

전 세계가 서구 열강들에 짓밟히던 빅토리아 시대에 식민지가 되지 않은 나라들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중국과 인도처럼 가장 오래되었으며 강성한 나라들조차 유럽의 총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중국과 태국, 에디오피아가 식민지 신세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외세의 침략을 물리칠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 아니라 세력 균형이라는 명목으로 열강들이 놔둔 덕분이었다. 그런 점에서 더 강성한 나라들도 해내지 못했던 일본의 성공은 실로 놀라운 것이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언젠가 부흥이라는 카페에서 누군가가 에도 시절의 발전상과 도쿠가와 막부의 세입이 청조와 맞먹었다는 이유로 일본에게는 근대화를 이룩할 만한 자금력이 있었던 덕분이라고 주장한 것이 기억난다. 이것은 일견 그럴 듯 하지만 그 말대로라면 메이지 유신의 주체는 마땅히 막부가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일본과 조선을 놓고 비교한다면 에도 시절의 발전상은 그야말로 굉장하게 보이겠지만 동 시기 중국이나 인도와 비교한다면 초라한 수준에 불과했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무역의 중심은 항상 중국과 인도였다. 유럽인들은 중국의 차와 인도의 향신료, 면화에 열광하였다. 만약 이것이 아니었더라면 애초에 대항해시대가 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콜롬부스가 인도로 가는 새로운 길을 찾겠다고 나선 것이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 아니었던가. 반면, 일본은 변두리였다. 유럽인들이 보기에 일본은 시장이 작고 은 이외에 매력적인 상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도 시절의 발전상이란 그저 조선보다 좀 나은 정도이지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본보다 10년 먼저 문호를 개방한 중국은 창장 이남의 연안을 중심으로 빠르게 서구화되었으며 서구와의 무역 허브 역할을 했던 상하이, 광저우, 우한, 홍콩은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였다. 농민들에 대한 쥐어짜기 식 수탈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허덕였던 막부와 달리, 청조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조세 부담을 최소한으로 억제하였고 GDP에서 국가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3% 미만이었다. 중국 농민들의 조세 부담은 일본 농민들의 1/12에 불과하였다.

인구와 국력, 자원 어느 면을 보더라도 근대화에 성공했어야 할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열강의 침략을 견디지 못한 반면,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지정학적으로 유럽인들에게 중국보다 일본이 더 멀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더 가까우면서 훨씬 더 크고 먹음직스러운 중국에 달려든 덕분에 아시아의 끄트머리에 있던 일본은 뒷전이 되었다. 또한 일본이 개항을 했을 때에는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유럽에서는 프-오전쟁과 보불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다는 점도 행운이었다. 아무리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제법 강성한 축에 속했다고 한들 유럽 열강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대수롭지 않았다는 점에서 만약 일본이 중국보다 먼저 침략을 당했다고 했을 때 과연 그것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일본은 운이 좋았다.

하지만 일본의 성공을 그저 행운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분명 지나친 도식화일 것이다. 지정학적인 유리함으로 따진다면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중국이나 조선도 유럽의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부국강병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중국과 조선에서는 개혁 세력이 구 세력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막연한 생각과 달리 청조의 황제와 조선의 임금은 결코 사치향락에만 눈이 멀었던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개혁의 필요성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변법파를 숙청했다는 이유로 중국인들에게 수구 세력의 대명사로 불리는 서태후만 하더라도 사실은 개혁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다. 고종 또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궁전 깊숙한 곳에 틀어박힌 채 제한적으로 외국 문물을 접하던 이들로서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방향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고루한 관료들 또한 둔감하고 우유부단하면서 바깥 세상에 대하여 무지하기 짝이 없었다. 메이지 정부가 재정적인 궁핍함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이와쿠라 사절단이라는 대규모 사절단을 구성하여 장장 2년에 걸쳐서 세계 각지를 돌아본 것이나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실권자가 된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앞두고 미국과 서방을 방문하여 근대화의 방향을 잡고 협력을 요청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개혁은 일관성이 없었으며 대개는 권력자의 자기 과시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성과는 적으면서 돈만 쓸데없이 낭비하기 일쑤였다. 나름 야심차게 시도되었던 양무운동과 광무개혁이 완전히 실패로 끝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기득 세력들 입장에서 부국강병도 물론 중요했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개혁과 보수는 서로 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태평천국의 난처럼 구 체제에 대한 도전이라고 해서 반드시 개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중국과 조선 사회는 일본에 비하여 훨씬 보수적이었으며 개혁 세력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일본은 분명 남들보다 운이 좋았지만 그 운을 살린 것은 전적으로 유신파 지도자들의 능력이었다. 만약 삿쵸 동맹이 막부에게 굴복했거나 또는 유신파가 태평청국의 지도자들처럼 그저 권력에만 눈이 멀어서 개혁에 대한 비전이나 구심점 역할을 할 능력이 없었더라면 과연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냉철하게 말하여 일본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화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메이지 유신은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의 독립 전쟁과 달리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구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일부 하급 사무라이 계층과 상인 세력이 주도하였다.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신분제는 철폐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지배와 피지배라는 봉건적인 신분제가 일본 사회를 굳건히 지배하였다. 근대화의 열매는 소수 엘리트 권력층이 독점하였고 대다수 민초들의 삶은 이전과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에도 시절보다도 더 열악하였다. 과연 무엇을 위한 근대화였던가. 호전적인 지도자들은 사회 개혁 대신 그로 인한 불만을 주변국에 대한 침략으로 돌렸다. 파멸을 향한 폭주는 결국 두방의 원폭과 함께 온 국토가 초토화된 뒤에야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이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는 메이지 유신의 실체이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므로 어지간한 일본 근현대사 서적에서는 빠짐없이 거론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 특유의 일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일본 근현대사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데다 중요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두루뭉실하게 언급할 뿐, 디테일하게 분석하는 책은 찾아보기 어렵거나 너무 전문적이라 충분한 배경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꽤 부담스럽다. 그런 점에서 도도 출판사의 신작 도서 <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은 주목할 만한 책이다. 저자이신 조용준 씨는 동아일보 편집자를 지낸 분으로 비록 역사를 전공한 사학자는 아니지만 전문 언론인답게 탁월한 필력이 느껴진다. 또한 <도자기 여행>이라는 시리즈물을 내는 등 도자기 쪽으로 박학하신 분인데 이 책에서 다루는 주된 소재가 바로 이 도자기 얘기에 있다는 점이다.

과연 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무엇을 묻는다는 말인가. 저자는 메이지 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임진왜란 시절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갔던 조선의 도공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임진왜란에서 일본은 조선의 수많은 기술자들을 납치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표적이 된 것은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이었다. 전국 시대 말기에 오면 일본 상류 계층을 중심으로 다도 문화의 열풍이 한창 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법에 따라서 차를 마시는 것은 다이묘나 상위 사무라이, 상인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교양 덕목이었다. 제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다도 문화를 모르고 이름 있는 다기 한 세트 정도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상류 사회에 끼지 못하였다. 단적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4천왕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웠는데 자기가 원하는 다기 대신 영지를 받았다고 하여 크게 실망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일본의 도자기 제작 능력은 형편없었기에 조선과의 무역에서 도자기 수입은 인삼, 서적류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임진왜란은 낙후된 도자기 기술을 끌어올릴 수 있는 호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마즈 요시히로더러 조선에서 도공을 납치해 오라고 지시하였다. 이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 중에 납치된 조선인 노예들은 적어도 5만 명에서 많게는 1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사람은 고작 7500여명에 불과하였다. 어떤 이는 가고 싶어도 주인이 놓아주지 않아서 갈 수 없었고 또 어떤 이는 이쪽의 삶이 더 낫다는 이유로 돌아가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은 주로 큐슈와 주코쿠 등 서 일본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이 집단으로 사는 마을은 도진초(唐人町)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사람 마을이라는 뜻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중국인을 가리키는 '당나라 사람'으로 부른다는 것은 해괴한 소리이지만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이나 중국인이나 같다고 여겼던 것이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많은 다이묘들이 조선인 도공의 납치에 열을 올렸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 히젠의 나베시마 나오시게였다. 덕분에 사츠마와 히젠은 일본의 주요 도자기 생산 지역이 되었다. 다이묘의 적극적인 후원과 꾸준한 기술 개량을 통하여 17세기 후반에 오면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었고 기술력에서도 조선을 능가할 정도였다. 북큐슈 히젠의 아리타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네덜란드 상인을 통하여 아시아와 유럽으로 수출되었으며 중국산 도자기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650년부터 1757년까지 약 100년 동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수출된 아리타산 도자기는 무려 120만 점이 넘는다. 사츠마와 히젠 사가번의 주된 재정 수입이 도자기 판매 이익이었다.

저자는 사츠마번과 사가번이 임진왜란에서 납치한 조선인 도공들을 어떻게 활용했으며 도자기 판 돈으로 최신 기계류와 무기를 구입하여 조슈번, 도사번과 함께 메이지 유신에서 막부 세력을 격파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책을 읽으면서 일본 근대사에서 조선인 도공의 위상을 새삼스레 돌아보게 된다. 만약 임진왜란이 없었더라면, 조선인 도공들을 납치하지 않았더라면 사츠마번과 사가번은 최신 무기를 구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연 삿쵸 동맹이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또 한가지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다. 사야가 김충선을 비롯하여 조선에 귀화한 항왜들이 조선군이 되어서 정묘, 병자호란에 활약하였듯이 많은 조선인들 역시 일본의 사무라이가 되어서 세키가하라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쟁에 참전하고 큰 희생을 치루었다. 책에서는 이 부분까지 언급되지는 않지만 보신 전쟁에서 사츠마 군에는 조선인 출신들이 의용군으로 참여했으며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킨 세이난 전쟁에서도 100여명의 조선인들이 정부군에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다.(일본에서 꽃핀 조선의 도자기 문화, 구태훈, 2008년) 이들은 장장 260여년에 걸친 시간 동안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지만 메이지 유신에 와서 더 이상의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일본인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책에서는 임진왜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의 과정을 다양한 사료를 통하여 설명하는데 저자의 박학다식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메이지 유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인 삿쵸 동맹을 실현시킨 최대의 공로자로서 불후의 명성을 떨치게 된 사카모토 료마의 진실, 당대 세계 최대의 다국적 기업이었던 영국 로스차일드 가문이 막후에서 무엇을 했는지, 300여개에 달하는 번 중에서 하필이면 사가 번, 조슈번, 사츠마번이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어 거대한 막부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이유, 메이지 지도자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대륙 침략을 처음으로 주장했던 요시다 쇼인에 대한 이야기 등 흔히 간과되거나 제대로 알지 못했던 메이지 유신의 역사를 이 책을 통하여 다시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는 불충분한 근거로 과도한 억측과 확대 해석, 논리 비약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부분도 있다. 시바 료타로의 말을 빌려서 사가 번의 군사력이 동 시기 유럽의 손꼽히는 열강 중의 하나였던 프로이센에 비견될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건 어떻게 보더라도 억지인 듯 하다. 프로이센은 비록 영토는 작았지만 가장 근대화된 지역이었으며 영국,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와 함께 유럽 5대 군사 강국이었다. 그 힘으로 강적인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격파하고 독일을 통일하였다. 반면, 사가 번은 일본의 여러 번 중에서는 강한 축에 속했을지 몰라도 메이지 유신의 주역도 아니었을 뿐더러, 정작 사가의 난에서는 별 힘을 쓰지 못한 채 정부군에게 간단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시바 료타로야 역사가가 아니라 소설가이고 특유의 국뽕과 과장을 섞어서 "사가번은 프로이센과 맞먹었다." 운운했을 뿐이다.

또 한가지  메이지 천황이 사실은 진짜 천황 가문이 아니라 조슈번의 유신 지사들이 세운 가짜라는 점, 게다가 조슈번 내에 있었던 조선인 부락민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카더라"식일 뿐,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 내에서 이런 주장이 있다고 흥미 차원에서 거론할 수야 있겠지만 메이지 유신과 조선의 연관성을 끌어내겠다는 의욕이 너무 앞선 것은 아닌가 싶다. 근거가 불충분한 얘기는 흥미보다 오히려 책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법이다. 저자가 아무래도 전문적인 역사가가 아닌 언론인이다보니 그런 듯 하다.

약간의 억측은 없지 않지만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지루하기 쉬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저자 특유의 필력과 흥미로운 이야기, 풍부한 자료는 읽는 이로 하여금 책에 푹 빠지게 만든다. 컬러풀한 사진 또한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 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눈요기 꺼리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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