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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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 네트가 사랑했던 꽃은 장미가 아니라 감자꽃이었다?"

우리 전통 음식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김치이다. 온갖 양념과 함께 고추장으로 시뻘겋게 갓 담근 햇김치 하나만 있어도 다른 반찬이 필요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다 아는 새삼스러운 얘기이지만 붉은 김치가 우리 식단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고추는 토종 작물이 아니라 외래종이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처음 유입된 것은 학자들마다 약간의 이견은 있지만 대략 임진왜란 전후로, 일본을 통해 전달되었다. 하지만 고추의 매운 맛에 더 익숙해진 쪽은 일본인보다 우리가 아닐까 싶다. 일식에서 고추냉이를 제외하고 딱히 고추가 들어가는 음식을 찾기 어려운 반면, 고추가 들어가지 않는 한식은 상상할 수 없으니 말이다.

고추의 원산지는 멕시코이다. 그곳에서 처음 고추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우리도 잘 아는 스페인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인도의 향신료를 찾겠다고 떠난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발견한 것은 고추였고 그는 엉뚱하게도 고추를 후추라고 우기면서 '붉은 후추(red pepper)'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의 고추가 돌고 돌아서 한 세기만에 지구 정반대편의 존재감 없는 나라 조선에까지 전해진 셈이다. 그가 신대륙에 가지 않았거나 고추에 관심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의 먹음직스런 붉은 김치도 없지 않았을까. "브라질의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텍사스에서는 허리케인이 일어난다."라는 이른바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는데 콜럼버스와 김치의 관계 또한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나비효과의 사례라고 하겠다.

16세기 유럽에서는 이른바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역사적 특이점 중 하나이자 근세 시대의 시작이었다. 또한 그 전까지 인류 문명에서 변방 취급을 받았던 유럽이 처음으로 아시아를 능가하여 나중에는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해서 어째서 유럽인이 아니라 비 유럽인들, 아시아인들이나 다른 대륙 사람들은 대항해에 나서지 않았던가. 왜 하필이면 유럽인들이 대항해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던가. 이들이 거친 파도를 뚫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 머나먼 바다로 나아가게 된 가장 큰 동기는 향신료(spice)였다. 후추, 육두구, 정향, 계피 등 유럽인들은 이것을 손에 넣으려고 목숨을 걸었다. 후추의 가격은 한 때 금과 맞먹을 정도였다.

                                

수많은 바다 사나이들이 세계의 보물 "원피스" 아니 "육두구"를 찾아서 떠나는 대항해 시대.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조미료 따위에 그 정도의 가치를 매긴다는 말인가 싶지만 먹거리가 다른 탓도 있다. 아시아인들은 쌀을 주식으로 한다. 쌀은 탄수화물 외에도 단백질과 지방이 함유되어 있어 별다른 부식 없이도 그럭저럭 영양분을 확보할 수 있다. 불교에서 육식을 금할 수 있는 것도 이 덕분이다. 반면, 밀은 아미노산이 부족하기에 단백질을 섭취하려면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 하지만 고기는 상하기 쉽상이고 그 전까지 유럽인들은 기껏해야 거친 소금으로 짠 맛나는 간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무슨 맛이 있겠는가. 아시아에서 향신료가 들어오자 한번 여기에 중독된 유럽인들은 전쟁도 불사할 정도였다. 향신료가 듬뿍 섞인 고기를 먹는 것이 곧 지위와 권력을 상징했다. 만약 아시아인들이 밀을 먹고 유럽인들이 쌀을 먹었다면 대항해 시대는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향신료의 천국인 동남아에서 더 많은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해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고 훗날 식민지 건설의 첨병이 된다. 향신료 경쟁은 그야말로 살벌했고 여기에 끼지 못한 사람들은 보다 저렴하면서 대체 가능한 다른 향신료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 와중에 발견한 새로운 먹거리가 옥수수와 감자였다. 밀과 쌀에 비해서 훨씬 강인한 생명력과 수확 능력을 가진 두 먹거리는 기근 해결에 크게 일조했다. 하지만 설탕의 재료인 사탕수수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재앙이 다름없는 노예 무역 시대를 열었다. 사탕수수 재배는 다른 작물과 달리 가축의 힘을 빌릴 수 없고 사람 손이 엄청나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유럽인들의 향신료 경쟁이 만든 세상인 셈이다.

사람과 나무사이 출판사의 신작 도서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은 현대 인류 사회를 이룩하는데 일조했던 13가지 식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인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일본의 권위 있는 식물학자이자 시즈오카 대학 교수이며 자신의 전공인 식물을 통해서 본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쓰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이 양반의 저서 중 하나인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글항아리>도 꽤나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프랑스 혁명을 그린 만화이다. 이 만화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궁전에 핀 고고한 장미 한 송이에 비유했다. 하지만 왕비가 실제로 사랑한 꽃은 만화 제목에 있는 장미가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그녀가 사랑한 꽃은 감자꽃이었다. 고귀한 왕비 신분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왜 장비나 백합같은 화려한 꽃이 아니라 감자꽃을 사랑했을까?" - p.26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식물 1위는 옥수수이다. 그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은 곡물이 밀이고 3위가 벼이다. 그 다음 4위는 감자, 5위는 대두이다. 토마토는 이 세계 5대 주요 작물 바로 뒤인 여섯번째로 생산량이 많은 작물이다." - p.68

"사치스러운 식생활을 즐긴 귀족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신선한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귀족이나 상류층에서 후추의 인기가 치솟은 것은 실용적인 목적보다 자신의 높은 지위와 부를 과시하기 위한 상정성이 컸다. 이것은 설탕이 귀하던 시절 사람들이 설탕을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 p.90

"고추는 유럽인들에게는 외면당했지만 장기간 항해해야 하는 뱃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용했다. 당시 뱃사람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괴혈병이었다. 비타민C를 다량 함유한 고추는 괴혈병 예방과 치료에 특효가 있었다. 뱃사람들은 항해를 떠날 때 소중한 식량이자 의약품으로 고추를 챙겼다." - p.105

"논 시스템과 벼라는 작물은 적은 농지로 많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서 16세기 섬나라 일본은 같은 섬나라인 영국과 비교해서 6배 많은 인구를 부양했다. 유럽에서는 3년에 한 번 밀을 재배할 수 있었지만 아시아에서는 1년 동안 쌀과 밀을 모두 수확할 수 있었다." - p.240

이 책에서는 도합 13가지의 식물이 나온다. 저자가 붙인 별명도 거창하다.

1. 초강대국 미국을 세운 악마의 식물 감자

2. 인류의 식탁을 바꾼 붉은 열매 토마토

3. 다항해시대를 연 검은 욕망 후추

4. 콜럼버스의 고뇌와 아시아의 열광 고추

5. 거대한 피라미드를 떠받힌 약효 양파

6. 세계사를 바꾼 두 전쟁의 촉매 차

7. 인류의 재앙 노예무역을 불러온 사탕수수

8. 산업혁명을 일으킨 목화

9. 한 톨의 씨앗이 문명을 탄생시킨 밀

10. 고대 국가의 탄생 기반이 된 벼

11.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한 콩

12.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작물 옥수수

13. 인류 최초 거품 경제를 불러온 욕망의 알뿌리 튤립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친숙하면서도 이들이 인류 역사에 남긴 발자취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심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어쩌면 위의 13가지 식물 중에서 하나라도 없었다면 우리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누가 알겠는가. 대항해 시대를 연 후추는 말할 것도 없지만, 가령 우리가 주식으로 쓰는 쌀이 없었다면 아시아 문명은 탄생할 수 있었을까. 감자와 옥수수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인류가 70억에 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산업혁명은 영국 면직물 산업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면직물의 원료인 목화가 없었다면 산업혁명도 없었으리라. 하물며 고추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김치는 상상할 수 없다. 물론 백김치, 물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별로다. "너희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트라도 뽕뽕 날려주고 싶다.

고추는 일본이 우리에게 전해 주었는데 왜 정작 일본인들은 고추를 즐기지 않을까. 반대로 우리는 고추 없이는 살 수 없을까. 고추가루를 넣어서 부글부글 끓인 매운탕은 상상만 해도 군침이 흐른다. 고추장을 바른 불고기를 밥과 함께 쌈에 싸서 입에 넣고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이보다 맛있는 별미가 없다. 저자는 종교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일본은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즐기지 않는 반면, 고려 시대 이후 우리는 불교의 영향이 약화되면서 다시 육식을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육식에는 향신료가 빠질 수 없다.

이 책에서 나오는 13가지 식물의 역사 이야기는 다채로우면서 흥미진진하다. 우리 주변에 있는 식물들에게 알고 보니 이런 역사가 담겨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내용이 풍부하다. 또한 누구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아직 여름 휴가를 가지 않은 분, 갈 곳이 마땅찮은 '동남아(동네에 남아 있는 아저씨)'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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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5 - 열도의 게임 본격 한중일 세계사 5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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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공사가 다망하여 정신은 없지만, 그럼에도 타고난 습성 탓에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여 짬짬이 읽는 중이다. 역덕후 굽 선생의 역사 만화 <본격 한중일 세계사> 작년 12월 쯤에 4권 리뷰를 했던 것같은데 벌써 5권이 나왔더라. 이번 편은 전편에 이어서 태평천국의 난을 최종 마무리 짓고 옆동네 열도로 포커스를 옮긴다.

태평천국의 수도 난징 포위되다. 장장 14년 동안 중국 대륙을 진동시키며 꿈의 파라다이스(물론 지들 기준에서)을 실현할 것 같았던 태평천국의 멸망도 초읽기에 들어가는데.

태평천국 천왕 홍수전의 머리속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지난날의 리즈 시절.

홍수전 죽기 전 수십 년 뒤 마오의 등장을 예언하다. 마지막 유언으로 "천국으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천병을 청할 테니 하늘에서 병사들이 내려와도 놀라지 말라." "공수부대인가?"라는 부하의 드립.

그렇게 지상에서 천국을 꿈꾸었던 그가 결국 죽어서 천국의 문을 두드리러 가는데. 난징은 함락되고 잔여 세력들마저 정리되고 죽을 놈들 죽고 이것으로 파란만장했던 태평천국 편은 끝. 하지만 그 와중에 등장한 또다른 녀석들. 한떼의 고양이 무리(왜놈들) 상하이에 나타나다.

"산 채로 썩어간다"라는 다카스키 신사쿠의 맞말 퍼러이드. 너무 맞말이라 반박이 불가.

중국보다 한발 늦게 개항했지만 흘러가는 모양새는 그다지 다르지 않는 일본. 막부가 근대화다 서구화다 어쩌구 하면서 정신 없는 와중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썩어빠진 세상 엎겠다고 달려드는 불만분자들과 뒤에서 부채 들고 바람 날리는 지방 번주들.

비록 이빨 다 빠진 신세라지만 막부 또한 나름대로 제 세상을 앞으로도 틀어쥐기 위하여 노력 중.

막부세력과 토막세력의 대립은 결국 1864년 7월 19일 킨몬(禁門)의 변으로 폭발. 신선조와 사이토 하지메도 나왔는데 켄신도 어딘가에서 등장하지 않으려나. 다음 편은 막부의 조슈 정벌을 시작으로 무진 전쟁과 메이지 유신 차례가 될 듯.

세간에 이름난 굽본좌의 야심작답게 이번 편 역시 온갖 기발한 역드립이 난무한다. 전편이 난장판이 된 중국이었다면 이번편은 열도의 난투극이다. 팬더와 고양이, 수탉, 사자 등 의인화된 동물들이 펼쳐 나가는 파란만장한 역사 이야기, 중간중간 등장하는 재치있는 패러디와 독자의 허를 찌르는 유머. 이 나이 되어서 평소에 만화 따위 보지는 않지만 이 책은 정말 재미있는 책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아무래도 깊이가 다소 부족하다는 점은 어쩔 수 없다. 지식 전달보다 개그가 우선이다보니 재미는 있지만 학생들 입장에서 역사를 배울 만한 책은 아니다. 킬링 타임에 적격이다. 게다가 요즘 젊은 세대의 트랜드에 맞춘 탓인지, 나처럼 그 트랜드에 익숙치 못한 노땅 세대 입장에서는 솔직히 뭔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세대 따지지 않고 누구나 부담 없이 읽으면서 피식 웃을 수 있는 책이다. 시중에는 <이야기 일본사>를 비롯해 다양한 일본사 개설사가 있으므로 곁들어 읽는다면 재미가 200%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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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의 세계사
셰저칭 지음, 김경숙 옮김 / 마음서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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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는 단순한 돈이 아니다. 예술이자 역사의 기억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세계 최초의 동전은 BC.670경 현재의 터키 지역인 메소포티미아에서 사용된 일렉트럼이라고 한다. 금과 은으로 된 동전인데, 겉면에는 곡식의 이삭과 사람 모습의 무늬가 들어가 있다. 어째서 단순한 귀금속 덩어리가 아니라 무늬를 넣은 것일까. 누가 언제 어디에서 발행했는지를 표시하여 화폐의 공인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용 할 때마다 일일이 무게를 달아보고 녹여서 금, 은이 맞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말이다. 지금이야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도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발상이 아니었을까.

                                

세계 최초의 금속 화폐인 일렉트럼 코인.

귀금속이나 동전을 대신하여 종이로 된 돈, 즉 지폐가 처음 쓰인 것은 북송 시절이다. 군사적으로는 허약했지만 중국 역사상 전에 없이 문화와 상업의 발전이 찬란했던 시절이다. 쓰촨 성의 상인들은 지나치게 무겁고 운반이 어려운 동전이나 귀금속, 현물 대신 "교자(交子)"라는 일종의 약속 어음을 발행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가령 쓰촨 성에서 비단 한필의 가격은 동전 2만개에 달했는데, 문제는 그 무게가 무려 120근에 달했다고 하니 비단 한필 사려면 수십kg의 동전을 등에 짊어지고 와야 한다. 무슨 인간 당나귀도 아니고 이러한 '무식한' 방법 대신 귀금속이나 동전을 예탁하고 특수 제작한 영수증으로 대체한 것이 지폐의 시작이다. 지폐에는 발행처와 발행자, 화폐 가치 이외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곡식 창고라고 한다. 지폐를 발행한 상가의 창고에 실물 상품인 쌀과 보리가 있으니 믿고 써도 된다는 뜻이다. 지폐의 가치는 오직 신용에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지폐 시대가 열린 것은 그 후로 300여년이나 지난 뒤인 원나라 시절 세조 쿠빌라이가 ‘지원통행보초’를 발행해 유라시아 전역에 유통시키면서라고 하니 오늘날 우리가 쓰는 지폐란 그저 그림 그려진 종이 조각이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가 담겨 있는 셈이다.

 

평소 인문교양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주목할 만한 신간이 나왔다. <지폐의 세계사>는 세계 각국에서 쓰이고 있는 지폐를 통해 짚어보는 세계사 이야기이다. 저자는 셰저칭이라는 타이완 출신 대중 인문학자이다. 어릴 때 우연찮게 오래된 지폐를 얻은 이후로 평생 지폐 모으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고 한다. 25년 동안 세계 97개국을 돌면서 다양한 지폐를 수집했다고 한다. 우리같은 일반인들이야 지폐가 아니라 돈에 더 관심이 많은데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양반도 돈으로 돈을 버는 셈이다. 지폐를 연구하고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니까 말이다. 나름 부러운 인생이다.

우리는 평소에 돈을 대할 때 액수가 중요하지 지폐에 뭐가 그려져 있는지에 대하여 신경쓰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하지만 돈을 잘 보면 이 또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우리가 '배춧잎'이라고 부르는 1만원짜리를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금액 이외에도 다양한 그림과 무늬가 아주 정밀하면서 깨알처럼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장에는 세종대왕의 인자한 얼굴과 함께 임금이 정사를 보던 편전의 병풍인 <일월오악도>가 그려져 있다. 뒷장에는 세종대왕의 대표적인 발명품 중의 하나인 혼천의(국보 제230호)가 있다. 또한 혼천의 주변에는 복잡한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당시 한국은행에서 도안을 제작할 때 우리 역사상 가장 과학이 찬란하게 발전했던 세종대왕을 강조하여 '과학 대한민국'의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이 돈을 쓸 때 뭐가 그려져 있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따위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지만 말이다.

다른 나라들의 지폐에도 우리처럼 다양한 그림과 무늬가 그려져 있다. 위조 방지의 목적도 있지만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의미도 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다. 독재 국가의 공통점 중의 하나가 돈에 권력자의 얼굴을 넣는다는 점이다. 1950년대 우리 화폐에도 이승만의 얼굴이 있었고 타이완 또한 장제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던 적이 있다. 중국에서 '런민삐(人民幣)'라고 불리는 위안화는 마오 시절에는 노동자, 농민과 소수 민족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집권하고 100위안에 처음으로 마오의 얼굴이 들어간 이후, 1999년에는 건국 50주년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액수와 상관없이 죄다 마오 일색이 되었다.

 

                                

마오 시절의 위안화. 당시에는 권력자의 얼굴을 넣은 경우는 없었다.

                                

지금의 위안화. 마오 성역화의 일환이다. 수백년 전의 인물도 아니고 현대사의 권력자를 화폐 도안에 넣어서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중동이나 태국 같은 왕정 국가에서 흔하게 하는 행태라는 점에서 봉건 타도를 내세워 정권을 잡은 공산당이 도리어 시간을 거꾸로 달리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이런 식은 아니다. 온 국민이 쓰는 돈에 최고 권력자가 굳이 자기 얼굴을 박아넣어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북한, 이라크같은 예가 있는가 하면, 막 독립되었거나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나라들 중에는 지폐를 통하여 희망과 평화, 화합을 기원하기도 한다.

폴포드의 광기가 휩쓸기 이전인 1970년대 초반에 사용된 캄보디아 돈에는 이름 없는 어린 여학생의 환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캄보디아 사람들은 그 미소처럼 자신들의 앞날에는 장미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으리라. 하지만 그런 희망이 무색하게 얼마 뒤 총칼을 앞세워 캄보디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폴포드는 고작 3년 반의 통치 기간 동안 나라를 완전히 절딴내었고 온 국민의 1/4를 죽이는 전대미문의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도안의 주인공이었던 그 여자 아이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싶다.

1970년대에 들어서 네덜란드의 지폐 디자인은 더욱 자유분방해졌다. 1977년부터 1985년까지 발행된 길더 시리즈는 플랑드르 문화의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부분을 드러냈다. 네덜란드 중앙은행은 옥세나아르에게 디자인을 제안하면서 과감한 시도를 요구했고, 옥세나아르도 대중의 기대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에 입각해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 pp.52~53

파푸아뉴기니 지폐의 앞면에 등장하는 새도 바로 라기아나 극락조다. 2007년 이전에 발행된 지폐에서는 전면을 차지하고 있지만, 2008년 이후에는 크기가 축소되어 왼쪽 상단에 자리하게 되었다. 어느 부분에 위치하든 극락조의 기세등등한 자태는 변함없이 파푸아뉴기니 지폐의 주제라 할 수 있다. - p.66

세계 화폐의 발행 품목과 수량을 살펴보면 국경을 초월해 지폐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콜럼버스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다. 1874년 미국 퍼스트은행이 발행한 1달러 지폐의 앞면에는 콜럼버스와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가 인쇄되어 있다. 미국은 콜럼버스를 남의 땅을 강제로 차지한 인물로 여기는 동시에 중남미에 대한 미국의 의도와 야심을 널리 선포하는 인물로 생각하는 듯하다. - p.107

미신 때문에 네 윈은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전대미문의 소동, 즉 화폐 개혁을 일으켰다. 1985년부터 미얀마 군사정부는 20, 50, 100차트를 회수하고 75차트 신권을 발행해 네 윈의 75세 생일을 경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2년 후 군사정부는 또 예고 없이 25, 35, 75차트의 발행을 중지하고 오로지 45, 90차트 지폐의 유통만을 허락했다. 두 숫자는 9로 나누어 완전히 떨어지는 동시에 네 윈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였다. - p.146

1995년 발행한 50파운드 지폐는 의외의 큰 파문을 일으켰다. 쥘 베른이 반란의 상징으로 묘사했던, 매우 변덕스럽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지브롤터의 원숭이가 여왕의 머리 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비록 반항적인 행동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경건하지 못한 구도와 디자인은 보수 인사들의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 p.167

1,000리엘이 과거 지폐와 크게 다른 점은 앞면의 도안이다. 앞면에는 또 다른 미소가 등장한다. 바로 희망이 가득하고 낙관적인 기개가 돋보이는 여학생의 미소다. 여학생은 자신감과 긍지가 충만한 얼굴로 침착하면서도 긍정적인 광채를 발하고 있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빛나는 미래가 머지않았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 p.208

이 책에는 42개 나라의 지폐에 얽혀 있는 비화가 담겨 있다. 18세기 로코코 시대 스페인을 대표하는 유명한 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의 화려한 필체가 담겨 있는 스페인 지폐부터, 1970년대 최악의 홀로코스트가 벌어졌던 남아프리카의 부룬디-르완다의 지폐에 담긴 두 민족의 화합과 평화에 대한 기원, 독재자의 광기가 담겨 있는 북한과 이라크, 리비아의 지폐 등 세계 각국의 다양한 지폐 이야기가 있다.

지폐에 담긴 비사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그보다도 이 책의 진짜 별미는 컬러풀한 지폐 사진들이다. 우리가 평소에 별 생각 없이 사용하던 돈이 사실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던가 싶을 정도이다. 지폐는 단순히 교환 수단이 아니다.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새겨져 있는 상징물이자 위대한 미술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을 보노라면 저자가 어째서 그토록 지폐 모으기에 빠져 들었는지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300여 페이지의 많지 않은 분량에 부담 없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딱딱하고 골머리 아픈 전문서적에 파묻혀 있다가 이런 책을 읽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고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역사를 밑줄 좍좍 그어가면서 배울 필요는 없으리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것이 역사 이야기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42개국 중에서 북한과 일본은 있는데 우리나라는 없다는 점이다. 저자가 보기에 우리나라 돈은 별로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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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4 - 태평천국 Downfall 본격 한중일 세계사 4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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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일본 문화 개방을 처음으로 맛 본 세대이다. 그 때에는 일본 또한 버블이 무너지기 전이었기에 만화 또한 최고의 호황기를 누릴 때였다. 드래곤볼을 비롯하여 대거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 만화는 그야말로 문화적인 충격이었다. 하지만 만화에 대한 우리 사회 특유의 편견 또한 그대로 남아 있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집에서 부모님 눈을 피하여, 야자 시간에 선생님의 눈을 피하여 몰래 만화책을 보다가 걸려서 죽도록 얻어맞은 경험이 아마도 필자 세대라면 누구나 있지 않을까.

요즘은 웹툰이 세대를 막론하고 큰 인기를 누리고 영화로도 제작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웹툰 작가가 되겠다고 지망하는 사람들도 많고 대학에 만화 관련 학과도 있다. 만화를 애들이나 보는 시시껄렁한 물건이라고만 여겼던 우리 때에는 감히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개방되었다는 얘기이다. 평소에 웹툰을 즐겨 보지는 않지만 <마음의 소리>같은 만화를 보면 요즘 젊은 세대는 정말 상상력과 재치가 풍부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성 세대가 가지는 고정 관념이나 프레임에 갇히지 않는다.

이원복 교수의 <먼 나라 이웃 나라>가 있다. 역사 만화의 대표적인 밀리언셀러이면서도 아이들에게 딱딱한 역사를 만화로 가르치겠다고 만들었기에 재미보다는 교육 목적이 우선인, 전형적인 기성 세대의 작품이다. 내용 상 오류도 많을 뿐더러 요즘 젊은 세대의 트랜드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들이야 자녀들의 역사 공부를 위하여 찾는다고 하지만 20년 전이라면 몰라도 일본 만화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의 입맛에 과연 얼마나 맞을까 싶다. 그에 비하면 젊은 여대생 언니가 그렸다는 <조선왕조실톡>이라는 웹툰 만화는 21세기 트랜드이다. 조선시대 유명 인물들이 21세기 사람들마냥 카카오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역사적 사건을 풀어나간다. "ㅋㅋ" "개이득" 등 젊은 세대에 익숙한 카톡식 언어를 쓰다보니 어찌 보면 유치한 감도 없지 않지만 정통 역사에만 익숙했던 내 입장에서는 이런 발상도 있구나 싶을 만큼 파격적이다.

물론 웹툰의 한계 상 많은 것을 다룰 수 없고 깊이 들어갈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재미만 추구하다보면 자칫 엉뚱하게 전달되거나 본의 아니게 역사를 왜곡할 수도 있다. 하지만 권위와 격식에 빠져 있던 기성 세대가 놓쳤던 것을 젊은 세대는 보고 있다. 역사는 더 이상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즐겨야 한다는 사실이다. 꼭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역사를 굳이 머리 싸매고 줄 그어 가면서 외우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가. 가만히 있어도 '헬 반도'라는 우리네 세상이다. 웃고 즐길 수 있으면 좋지 아니한가. 이것이 요즘 시대의 트랜드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쓸데없이 너무 일찍 태어나서 손해 본 느낌이다.

 

대한민국 역사 만화계의 본좌 중 하나로 불리는 굽 선생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4편이 나왔다. 태평천국의 몰락 편이다.

이 양반 만화의 특징 중 하나가 그 나라를 상징하는 동물을 의인화하는 것. 조선은 호랑이, 영국은 사자, 프랑스는 수탉, 이탈리아는 비둘기, 러시아는 백곰, 미국은 독수리, 일본은 고양이, 그리고 이번 화의 주역인 중국은 판다. 100여년 전 난징의 랜드마크였던 금릉 대보은사탑 앞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인증샷 찍고 있는 관광객들. 이런 재치는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태평천국의 진정한 수혜자였던 이홍장과 좌종당. 나중에 정치적 라이벌이 된다. 그나마 청말 부패하고 무능한 조정에서 가장 유능한 명신들이었으며 양무운동을 야심차게 주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나게 된 것은 이들이 서로를 질시하고 경쟁했던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이 만화에서도 두 사람의 은근한 시기와 질투를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제2차 아편전쟁의 폭발. 도장이냐, 대가리냐. 양자 택일을 강요하는 영국군 수장 호프 제독의 포스 작렬. 하지만 무모하게 닥돌하다가 뜻밖의 역공을 당하는데.

음 이건 뭐의 패러디인지.

굽본좌의 만화 덕력을 증명하는 장면. 어디서 익숙한 아이템들이 보이고 있음.

크림 전쟁을 한 컷으로 정리하다. 칠면조(오스만)의 목을 비틀고 있는 백곰(러시아)을 사방에서 다구리 치는 사자(영국), 수탉(프랑스), 비둘기(샤르데나).

서양인 용병대 "양창대"(나중에 상승군으로 개명)의 창설. 군대라기보다 건달과 양아치들 무리.

석달개 敗. 청군의 반격으로 벼랑으로 밀려나는 태평천국.

사방 팔방에서 연전연패하는 와중에도 난징 깊숙한 곳에 쳐박혀서 정신줄 놓고 해괴한 주문을 외우면서 히키코모리 코스프레 중인 태평천국의 상제 홍수전. 이렇게 하여 태평천국의 운명도 초읽기에 들어가는데.

센스 있으면서 재치 넘치는 비유와 패러디가 보는 내내 손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보다도 단순히 웃고 넘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저자의 풍부한 역사 상식과 배경 지식이 돋보인다. 어떤 자료를 참고했는지 모르겠으나 제법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루고 있다. 국내에는 청사를 다룬 책이 거의 없는데다, 이야기 중국사만 하더라도 태평천국의 난을 겨우 페이지 몇장으로 설명하고 끝내는데 말이다. 역시 굽본좌는 진정한 역사 마스터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역덕이 아닌 사람도 역덕이 될 것같은 느낌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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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의 책 생각
Team BLACK 지음 / 책과강연 / 2018년 11월
평점 :
품절


앉아서 고민하기만 하기보다 뭐라도 쓴다.
그러다보면 결국 생각이 보인다. 게으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주변에서 생각의 원천을 묻는다. 그런게 있을 리가 있나.
생각날 때까지 생각하는 게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아무나 할 수 있다. 벽에 부딪치는 것만 겁내지 않는다면.  

  - 「기획자의 책 생각」  중에서

인터넷과 SNS이 우리 주변의 수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지만 글쓰기도 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작가가 된다는 것은 꽤 장벽이 높은 일이었다. 그 시절에는 내가 쓰고 싶다고 쓰는 것이 아니라 직업으로서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우리 여건 상 작가가 될 수 있는 등용문 자체가 아주 좁았기 때문이다. 지금 40대, 50대이면서 로맨틱한 사람이라면 학창 시절 방송국에 자기 사연을 보낸 뒤 라디오 앞에 앉아서 진행자가 내 글을 읽어주기를 학수고대하추억을 가진 사람도 있으리라. 몇 줄에 불과한 글이나마 사람들에게 읽혀질 수 있는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요즘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글을 쓰고 싶고 작가가 되기를 원한다면 굳이 어딘가의 공모전에 출품하지 않아도 SNS를 이용하여 내가 좋아하고 관심있는 이야기를 얼마든지 풀어내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쓸지는 내 마음 먹기 나름이다. 내 주변에 일어난 일상 이야기, 시나 소설 또는 만화, 영화, 게임, 여행같은 취미에 대한 글을 쓸 수도 있다. SNS 상에서는 학위 하나 없는 일반인이면서도 어지간한 전문가 뺨치는 글을 쓰는 사람도 많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어떠한 구속이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로이 내 마음이 가고자 하는 대로 글을 쓸 수 있는 곳이 SNS이다.

그렇다고 해서 글쓰기가 결코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어떤 글이건 제대로 쓰려면 그만한 시간과 공력을 투자해야 하는 법이다. 관련 자료도 모으고 발품도 팔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대충 쓴 글은 우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몇 번이나 고쳐 쓴 끝에 비로소 남들 앞에 내놓게 되지만 그래도 다시 보면 뭔가 이상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반드시 있다. 이리 고치고 저리 손 댄다. 여전히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그렇게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누군가의 공감을 얻는 것은 꽤 즐겁고 뿌듯한 일이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어지간히 중독성이 있는 것이 글쓰기이다. 누가 말했던가. 한번도 하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해 본 사람은 없다고. 글쓰기 또한 그렇잖은가.

SNS에 연재했던 글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면 출판할 기회도 생긴다. 더 이상 책은 교수나 프로 작가들같은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초등학생 소설가, 배낭 하나 매고 여기 저기를 여행하는 대학생,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육아 일상을 블로그에 올리는 전업 주부, 고양이를 키우는 20대 직장 여성. 누구나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글로 쓰고 책으로 만들어서 남들과 공유할 수 있다. 글 대신 만화나 일러스트를 그려서 웹툰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비록 무명 작가의 작품이지만 프로 못지 않은 수준에 내용도 꽤 재미있다. 요즘은 이외수 같은 원로 작가들 또한 원고지 대신 SNS에 올린 글을 책으로 내기도 한다. 요즘은 글쓰기도 탈권위의 시대이다보니 사람들은 딱딱하고 어려운 전문서보다 쉽고 부담없는 책을 찾는 분위기이다.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책보다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책이어야 한다.

한편으로, 일반인도 쉽게 작가가 될 수 있다보니 여기에 편승하여 허황된 소리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책쓰기가 인생 역전의 기회라는 둥, 누구는 책 쓰기로 수 억 짜리 스포츠카를 끌고 다니더라는 둥. 소위 "책 코칭"이라 하여 자기에게 책 쓰기 수업을 받으면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남의 밥벌이를 함부로 폄하할 수야 없지만 실제로 책을 써보거나 출판계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실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소리이다. 그런 양반들이 과연 본인들은 책을 팔아서 번 돈이 더 많을까, 멋 모르는 사람들에게 대박 꿈을 주고 끌어모아서 수업료랍시고 받은 돈이 더 많을까 궁금하다. 책을 몇 십권을 냈다는 둥, 두달 세달만에도 책을 썼다고 온갖 자랑을 하는데 책쓰기를 얼마나 얕보고 있는가 싶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책을 낼 수 있지만, 누구나 남들이 읽어주는 책,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책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0년, 20년, 어쩌면 평생이 걸려야 할 일이다. 부단한 노력, 타고난 재능, 그리고 운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책 코칭 운운하는 양반들의 이력을 보면 작가가 된 지 겨우 몇 년이다. 고작 도서관에서 몇 년 살았다고, 몇 년 글을 썼다고 마치 자신이 공지영, 이외수, 조정래 급의 프로 작가라도 되는 양 으스대면서 내가 했으니 당신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떠든다. 알맹이도 없는 책 몇 권 내고 "세상에서 책쓰기가 제일 쉬웠어요." 하는 꼴이다. 실로 오만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 그런 양반들에게 비싼 돈을 내고 수업을 받은 사람들이 과연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책을 쓸까. 언젠가 그런 책을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책의 2/3는 자신의 신변 잡기와 왜 책을 써야 하는가 따위의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헛소리로 분량을 채워놓았더라. 정작 본론은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다. 자기 계발서인지, 에세이인지, 광고인지 의문스럽다. 저자 자신은 자기 돈을 내고 자기가 쓴 책을 사보겠는가 묻고 싶다. 실제로 어떤 유명 책 코칭 강사는 허위 광고와 사기죄, 저작권 침해로 고발당한 사례도 있다.

책쓰기를 돈벌이로 여겨서는 안 된다. 작가는 예나 지금이나 배고픈 직종이다. 누구나 아다시피 연예인 지망생은 수십만명이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작가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일을 하면서 나의 꿈을 남과 공유할 기회를 가지는 것, 그게 책쓰기이다. 글쓰기를 배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책쓰기를 배우겠답시고 사기꾼들에게 거금을 갖다 주는 사람은 솔직히 이해가 안 된다. 호구다.

그런 점에서 책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눈 여겨 볼만한 책이 나왔다. 책과 강연 출판사에서 나온 <기획자의 책 생각>이라는 책이다. 저자는 기획 컨설팅만 장장 15년이라고 한다. 실제로 출판계에 뛰어든 것은 1년 남짓이라고 하는데, 그것치고는 책쓰기가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여느 책코칭 서적들마냥 내가 도서관에서 어떻게 인생을 바꾸었으며 당신도 책을 쓰면 대박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둥의 허황된 소리는 찾아볼 수 없다. 크기는 손바닥만한 포켓 사이즈에 겨우 20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인데, 막상 읽어보면 그 정제된 글쓰기에서 책의 깊이와 저자의 오랜 내공이 와닿는다.

기획이란 무엇인가?’ 참 쉽고도 어려운 질문이다. ‘아는 것’과 ‘안다고 믿는 것’은 다른 차원이어서 간혹 이런 질문 앞에 사람들은 당황한다. 기획이란 사람과 사물,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의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 중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기획된 것이다. 이 책은 지난 1년간 45종의 책을 기획해가며 통찰한 기획자의 생각을 담아냈다. 15년째 콘텐츠기획자로 살아오면서 책을 기획해본 지난 1년간의 경험은 무척이나 특별했다. 내게 있어 ‘책이란 무엇인가?’라는 낯선 질문은 ‘기획이란 무엇인가’라는 익숙한 질문과 다르지 않았다. 

최근 ‘책을 써서 성공하라’는 카피를 여기저기서 목격한다. 기획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건 난센스다. 한 해 출간되는 책이 7만 5천여 종에 달한다. 한 달 사이에 6천3백여 종의 책이 서점 평대 위로 쏟아진다. 책에는 저마다의 신간 수명이 있는데 대개는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서가로 사라진다. 인세와 강연 수입을 통해 성공하라는 주장은 출판 통계 자료만 보더라도 그 논리가 얼마나 박약한지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책을 내본 저자들을 만나보면 대게 ‘한번 써봤다’는 식으로 말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단순히 지면 위에 옮겨놓은 수준이다. 사용자를 생각하지 않은 상품에 관심을 가져줄 만큼 시장은 너그럽지 않다. 책은 철저히 기획되어야 한다. 무엇을 쓸 것인지(출발점), 누가 읽을 것인지(도착점)를 잇는 선명한 일직선을 그을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작가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콘텐츠 크리에이터란 개념으로 책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는 책을 쓰는 직업인이지만, 크리에이터는 작가의 개념을 포괄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창작자이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터의 관점에서 출판을 정의하자면 책을 잘 쓴다는 개념 자체가 확대될 수밖에 없다. 작가라고 하면 한곳에 머물면서 억척스럽게 원고에만 매달리는 상투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작가는 오로지 자신의 글에만 충실하면 됐다. 기획, 마케팅, 영업은 당연히 출판사 고유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책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작가와 독자가 참여하여 만들어가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작가가 설정한 독자의 캐릭터가 구체적일수록 책은 독자의 삶에 밀착된 내용들로 채워진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상대에 대한 정보가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대화는 헛돌지 않는다. 작가는 독자의 욕구를 예리하게 파고들며 공감할 만한 실마리를 풀어내야만 한다. 책을 마치 한 사람과 1대 1로 대화한다는 감각으로 써보라. 이렇게 독자층을 좁혀놓으면 과연 읽을 사람이 있겠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읽을 수 있는 두루뭉술한 책을 쓰는 것보다, 독자를 구체화하여 책을 선택할 분명한 이유를 만드는 것이 판매에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개인이 강력한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다. 책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대외적으로 확대해나간다. 유튜브크리에이터 ‘대도서관’처럼 개인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책을 내는 경우도 있다. 역시 관심이 집중되는 곳에 기회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소셜미디어를 상징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연결(Link)’이다. 나에게서 타인으로 확장되는 연결을 통해 콘텐츠의 최초 생산자를 중심으로 밀도 높은 브랜드가 만들어지게 된다.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이 모두가 타인과의 연결이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해야 할지도 모른다. ‘모든 링크의 합’이라고 말이다.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 콘텐츠는 발견되지 못한다. 아무리 콘텐츠가 훌륭해도 발견되지 못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작가의 이름값만으로 100만 부를 팔아치우던 시대는 갔다. 출판시장에 드리워진 불황의 그늘은 여전히 짙기만 하다. ‘Social’이라는 미디어 환경 안에서 자기만의 글 세계를 구축해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젊고, 감각적이며, 깊다고 볼 수 없을지는 모르나 최소한 대중의 코드를 읽어내는 ‘feel’만큼은 충만하다. 대중들은 어려운 종이책을 집어 드는 대신, 그들의 몽글몽글한 언어에 기꺼이 손을 내민다.

당신의 미래는 더 이상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연결에 의해 결정되고, 연결의 강도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인력이 작용할 때에만 연결이 일어난다. 인력(끌어당김)이란 타인의 관심이 당신을 향하게 하는 힘이다. 

이 책은 책쓰기 요령이나 기획서 쓰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알려주는 전문적인 개론서와는 거리가 멀다. 다른 사람들의 원고를 봐주고 그것을 어떻게 상품화할 수 있을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지 기획하는 컨설턴트로서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쓰고 있다.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마따나 아무리 훌륭한 내용이라고 해도 제대로 다듬어 옥석으로 만들지 못하면 돌맹이에 지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어떻게 예쁘게 다듬는가에 따라서 남들이 돌맹이라고 여겼던 것을 옥석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돌맹이를 옥석으로 만들기도 어렵지만 돌맹이 중에서 옥석이 간혹 끼어 있는 것이지, 모든 돌맹이가 옥석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돌맹이 중에서 무엇이 옥석인지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기획자이고 돌맹이인 줄 뻔히 알면서도 옥석으로 만들 수 있다고 속인다면 그건 사기꾼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돌맹이가 아닌 옥석을 만들 수 있는지, 애초에 무엇이 돌맹이이고 옥석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우리가 알고 싶은 건 그런 것이다.

SNS 상에서 남들이 쓴 글을 읽다보면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어진다. 이 정도 글은 쉽게 쓸 수 있을 것같다. 하지만 막상 써보려고 하면 막막하다. 당장 첫줄부터 막힌다. 뭘 써야 할지 머리 속에는 있는데, 그걸 꺼내기는 어렵다. 나 또한 장장 20년 째 취미 삼아서 글을 쓰고 있고 역사 서적을 한번 내 본 적이 있는 아마추어 작가이지만 솔직히 일상의 짧은 이야기를 쓰는 것조차 쉽지는 않다. 글을 쓰는 것은 꽤나 스트레스이다. 글을 쓰는 게 부담된다기보다 잘 써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다. 무작정 생각나는대로 적으면 그건 글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똑똑한 교수들조차 의외로 글쓰기에는 서툰 경우를 많이 본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아도 그걸 글로 정리하기란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쉽고 친절하여 한 눈에 요점이 파악되는 글, 잘 다듬어지고 감칠맛나면서 때로는 인상적인 글귀로 다 읽은 뒤에도 여전히 뇌리에 남을 수 있는 글, 그런 글이 남들이 읽어보고 싶은 글이다. 그런 글은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고 소위 책 코칭 강사에게 비싼 돈 들여서 속성 과정으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쓰고 또 써봐야 한다. 처음에는 머리 속이 정리되지 않아도 쓰다보면 자연스레 정리가 된다. 필력도 늘어난다. 다른 사람들의 글도 많이 읽어봐야 한다. 흔히 작가 지망생들은 유명 작가들의 책을 100번이고 200번이고 그대로 필사하면서 그들의 글쓰는 방법을 익힌다고 한다. 어디에서도 그저 쉽게 얻을 수 있는 길은 없다.

저자는 책을 쓰고 싶은 사람들의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지는 않는다. 분류는 자기 계발서라지만 「기획자의 책 생각」이라는 제목 그대로 기획일을 하는 사람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에 더 가깝다. 하지만 책을 기획하고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작가 지망생이라면 이 정도는 알았으면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담고 있다. 읽다보면 와닿는 부분, 공감 가는 부분이 많다. 책은 쓰고 싶지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망설이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라.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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