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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4 - 태평천국 Downfall ㅣ 본격 한중일 세계사 4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일본 문화 개방을 처음으로 맛 본 세대이다. 그 때에는 일본 또한 버블이 무너지기 전이었기에 만화 또한 최고의 호황기를 누릴 때였다. 드래곤볼을 비롯하여 대거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 만화는 그야말로 문화적인 충격이었다. 하지만 만화에 대한 우리 사회 특유의 편견 또한 그대로 남아 있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집에서 부모님 눈을 피하여, 야자 시간에 선생님의 눈을 피하여 몰래 만화책을 보다가 걸려서 죽도록 얻어맞은 경험이 아마도 필자 세대라면 누구나 있지 않을까.
요즘은 웹툰이 세대를 막론하고 큰 인기를 누리고 영화로도 제작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웹툰 작가가 되겠다고 지망하는 사람들도 많고 대학에 만화 관련 학과도 있다. 만화를 애들이나 보는 시시껄렁한 물건이라고만 여겼던 우리 때에는 감히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개방되었다는 얘기이다. 평소에 웹툰을 즐겨 보지는 않지만 <마음의 소리>같은 만화를 보면 요즘 젊은 세대는 정말 상상력과 재치가 풍부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성 세대가 가지는 고정 관념이나 프레임에 갇히지 않는다.
이원복 교수의 <먼 나라 이웃 나라>가 있다. 역사 만화의 대표적인 밀리언셀러이면서도 아이들에게 딱딱한 역사를 만화로 가르치겠다고 만들었기에 재미보다는 교육 목적이 우선인, 전형적인 기성 세대의 작품이다. 내용 상 오류도 많을 뿐더러 요즘 젊은 세대의 트랜드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들이야 자녀들의 역사 공부를 위하여 찾는다고 하지만 20년 전이라면 몰라도 일본 만화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의 입맛에 과연 얼마나 맞을까 싶다. 그에 비하면 젊은 여대생 언니가 그렸다는 <조선왕조실톡>이라는 웹툰 만화는 21세기 트랜드이다. 조선시대 유명 인물들이 21세기 사람들마냥 카카오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역사적 사건을 풀어나간다. "ㅋㅋ" "개이득" 등 젊은 세대에 익숙한 카톡식 언어를 쓰다보니 어찌 보면 유치한 감도 없지 않지만 정통 역사에만 익숙했던 내 입장에서는 이런 발상도 있구나 싶을 만큼 파격적이다.
물론 웹툰의 한계 상 많은 것을 다룰 수 없고 깊이 들어갈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재미만 추구하다보면 자칫 엉뚱하게 전달되거나 본의 아니게 역사를 왜곡할 수도 있다. 하지만 권위와 격식에 빠져 있던 기성 세대가 놓쳤던 것을 젊은 세대는 보고 있다. 역사는 더 이상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즐겨야 한다는 사실이다. 꼭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역사를 굳이 머리 싸매고 줄 그어 가면서 외우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가. 가만히 있어도 '헬 반도'라는 우리네 세상이다. 웃고 즐길 수 있으면 좋지 아니한가. 이것이 요즘 시대의 트랜드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쓸데없이 너무 일찍 태어나서 손해 본 느낌이다.
대한민국 역사 만화계의 본좌 중 하나로 불리는 굽 선생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4편이 나왔다. 태평천국의 몰락 편이다.
이 양반 만화의 특징 중 하나가 그 나라를 상징하는 동물을 의인화하는 것. 조선은 호랑이, 영국은 사자, 프랑스는 수탉, 이탈리아는 비둘기, 러시아는 백곰, 미국은 독수리, 일본은 고양이, 그리고 이번 화의 주역인 중국은 판다. 100여년 전 난징의 랜드마크였던 금릉 대보은사탑 앞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인증샷 찍고 있는 관광객들. 이런 재치는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태평천국의 진정한 수혜자였던 이홍장과 좌종당. 나중에 정치적 라이벌이 된다. 그나마 청말 부패하고 무능한 조정에서 가장 유능한 명신들이었으며 양무운동을 야심차게 주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나게 된 것은 이들이 서로를 질시하고 경쟁했던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이 만화에서도 두 사람의 은근한 시기와 질투를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제2차 아편전쟁의 폭발. 도장이냐, 대가리냐. 양자 택일을 강요하는 영국군 수장 호프 제독의 포스 작렬. 하지만 무모하게 닥돌하다가 뜻밖의 역공을 당하는데.
굽본좌의 만화 덕력을 증명하는 장면. 어디서 익숙한 아이템들이 보이고 있음.
크림 전쟁을 한 컷으로 정리하다. 칠면조(오스만)의 목을 비틀고 있는 백곰(러시아)을 사방에서 다구리 치는 사자(영국), 수탉(프랑스), 비둘기(샤르데나).
서양인 용병대 "양창대"(나중에 상승군으로 개명)의 창설. 군대라기보다 건달과 양아치들 무리.
석달개 敗. 청군의 반격으로 벼랑으로 밀려나는 태평천국.
사방 팔방에서 연전연패하는 와중에도 난징 깊숙한 곳에 쳐박혀서 정신줄 놓고 해괴한 주문을 외우면서 히키코모리 코스프레 중인 태평천국의 상제 홍수전. 이렇게 하여 태평천국의 운명도 초읽기에 들어가는데.
센스 있으면서 재치 넘치는 비유와 패러디가 보는 내내 손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보다도 단순히 웃고 넘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저자의 풍부한 역사 상식과 배경 지식이 돋보인다. 어떤 자료를 참고했는지 모르겠으나 제법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루고 있다. 국내에는 청사를 다룬 책이 거의 없는데다, 이야기 중국사만 하더라도 태평천국의 난을 겨우 페이지 몇장으로 설명하고 끝내는데 말이다. 역시 굽본좌는 진정한 역사 마스터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역덕이 아닌 사람도 역덕이 될 것같은 느낌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