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폐의 세계사
셰저칭 지음, 김경숙 옮김 / 마음서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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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는 단순한 돈이 아니다. 예술이자 역사의 기억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세계 최초의 동전은 BC.670경 현재의 터키 지역인 메소포티미아에서 사용된 일렉트럼이라고 한다. 금과 은으로 된 동전인데, 겉면에는 곡식의 이삭과 사람 모습의 무늬가 들어가 있다. 어째서 단순한 귀금속 덩어리가 아니라 무늬를 넣은 것일까. 누가 언제 어디에서 발행했는지를 표시하여 화폐의 공인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용 할 때마다 일일이 무게를 달아보고 녹여서 금, 은이 맞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말이다. 지금이야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도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발상이 아니었을까.

                                

세계 최초의 금속 화폐인 일렉트럼 코인.

귀금속이나 동전을 대신하여 종이로 된 돈, 즉 지폐가 처음 쓰인 것은 북송 시절이다. 군사적으로는 허약했지만 중국 역사상 전에 없이 문화와 상업의 발전이 찬란했던 시절이다. 쓰촨 성의 상인들은 지나치게 무겁고 운반이 어려운 동전이나 귀금속, 현물 대신 "교자(交子)"라는 일종의 약속 어음을 발행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가령 쓰촨 성에서 비단 한필의 가격은 동전 2만개에 달했는데, 문제는 그 무게가 무려 120근에 달했다고 하니 비단 한필 사려면 수십kg의 동전을 등에 짊어지고 와야 한다. 무슨 인간 당나귀도 아니고 이러한 '무식한' 방법 대신 귀금속이나 동전을 예탁하고 특수 제작한 영수증으로 대체한 것이 지폐의 시작이다. 지폐에는 발행처와 발행자, 화폐 가치 이외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곡식 창고라고 한다. 지폐를 발행한 상가의 창고에 실물 상품인 쌀과 보리가 있으니 믿고 써도 된다는 뜻이다. 지폐의 가치는 오직 신용에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지폐 시대가 열린 것은 그 후로 300여년이나 지난 뒤인 원나라 시절 세조 쿠빌라이가 ‘지원통행보초’를 발행해 유라시아 전역에 유통시키면서라고 하니 오늘날 우리가 쓰는 지폐란 그저 그림 그려진 종이 조각이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가 담겨 있는 셈이다.

 

평소 인문교양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주목할 만한 신간이 나왔다. <지폐의 세계사>는 세계 각국에서 쓰이고 있는 지폐를 통해 짚어보는 세계사 이야기이다. 저자는 셰저칭이라는 타이완 출신 대중 인문학자이다. 어릴 때 우연찮게 오래된 지폐를 얻은 이후로 평생 지폐 모으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고 한다. 25년 동안 세계 97개국을 돌면서 다양한 지폐를 수집했다고 한다. 우리같은 일반인들이야 지폐가 아니라 돈에 더 관심이 많은데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양반도 돈으로 돈을 버는 셈이다. 지폐를 연구하고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니까 말이다. 나름 부러운 인생이다.

우리는 평소에 돈을 대할 때 액수가 중요하지 지폐에 뭐가 그려져 있는지에 대하여 신경쓰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하지만 돈을 잘 보면 이 또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우리가 '배춧잎'이라고 부르는 1만원짜리를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금액 이외에도 다양한 그림과 무늬가 아주 정밀하면서 깨알처럼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장에는 세종대왕의 인자한 얼굴과 함께 임금이 정사를 보던 편전의 병풍인 <일월오악도>가 그려져 있다. 뒷장에는 세종대왕의 대표적인 발명품 중의 하나인 혼천의(국보 제230호)가 있다. 또한 혼천의 주변에는 복잡한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당시 한국은행에서 도안을 제작할 때 우리 역사상 가장 과학이 찬란하게 발전했던 세종대왕을 강조하여 '과학 대한민국'의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이 돈을 쓸 때 뭐가 그려져 있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따위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지만 말이다.

다른 나라들의 지폐에도 우리처럼 다양한 그림과 무늬가 그려져 있다. 위조 방지의 목적도 있지만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의미도 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다. 독재 국가의 공통점 중의 하나가 돈에 권력자의 얼굴을 넣는다는 점이다. 1950년대 우리 화폐에도 이승만의 얼굴이 있었고 타이완 또한 장제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던 적이 있다. 중국에서 '런민삐(人民幣)'라고 불리는 위안화는 마오 시절에는 노동자, 농민과 소수 민족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집권하고 100위안에 처음으로 마오의 얼굴이 들어간 이후, 1999년에는 건국 50주년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액수와 상관없이 죄다 마오 일색이 되었다.

 

                                

마오 시절의 위안화. 당시에는 권력자의 얼굴을 넣은 경우는 없었다.

                                

지금의 위안화. 마오 성역화의 일환이다. 수백년 전의 인물도 아니고 현대사의 권력자를 화폐 도안에 넣어서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중동이나 태국 같은 왕정 국가에서 흔하게 하는 행태라는 점에서 봉건 타도를 내세워 정권을 잡은 공산당이 도리어 시간을 거꾸로 달리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이런 식은 아니다. 온 국민이 쓰는 돈에 최고 권력자가 굳이 자기 얼굴을 박아넣어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북한, 이라크같은 예가 있는가 하면, 막 독립되었거나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나라들 중에는 지폐를 통하여 희망과 평화, 화합을 기원하기도 한다.

폴포드의 광기가 휩쓸기 이전인 1970년대 초반에 사용된 캄보디아 돈에는 이름 없는 어린 여학생의 환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캄보디아 사람들은 그 미소처럼 자신들의 앞날에는 장미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으리라. 하지만 그런 희망이 무색하게 얼마 뒤 총칼을 앞세워 캄보디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폴포드는 고작 3년 반의 통치 기간 동안 나라를 완전히 절딴내었고 온 국민의 1/4를 죽이는 전대미문의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도안의 주인공이었던 그 여자 아이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싶다.

1970년대에 들어서 네덜란드의 지폐 디자인은 더욱 자유분방해졌다. 1977년부터 1985년까지 발행된 길더 시리즈는 플랑드르 문화의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부분을 드러냈다. 네덜란드 중앙은행은 옥세나아르에게 디자인을 제안하면서 과감한 시도를 요구했고, 옥세나아르도 대중의 기대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에 입각해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 pp.52~53

파푸아뉴기니 지폐의 앞면에 등장하는 새도 바로 라기아나 극락조다. 2007년 이전에 발행된 지폐에서는 전면을 차지하고 있지만, 2008년 이후에는 크기가 축소되어 왼쪽 상단에 자리하게 되었다. 어느 부분에 위치하든 극락조의 기세등등한 자태는 변함없이 파푸아뉴기니 지폐의 주제라 할 수 있다. - p.66

세계 화폐의 발행 품목과 수량을 살펴보면 국경을 초월해 지폐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콜럼버스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다. 1874년 미국 퍼스트은행이 발행한 1달러 지폐의 앞면에는 콜럼버스와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가 인쇄되어 있다. 미국은 콜럼버스를 남의 땅을 강제로 차지한 인물로 여기는 동시에 중남미에 대한 미국의 의도와 야심을 널리 선포하는 인물로 생각하는 듯하다. - p.107

미신 때문에 네 윈은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전대미문의 소동, 즉 화폐 개혁을 일으켰다. 1985년부터 미얀마 군사정부는 20, 50, 100차트를 회수하고 75차트 신권을 발행해 네 윈의 75세 생일을 경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2년 후 군사정부는 또 예고 없이 25, 35, 75차트의 발행을 중지하고 오로지 45, 90차트 지폐의 유통만을 허락했다. 두 숫자는 9로 나누어 완전히 떨어지는 동시에 네 윈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였다. - p.146

1995년 발행한 50파운드 지폐는 의외의 큰 파문을 일으켰다. 쥘 베른이 반란의 상징으로 묘사했던, 매우 변덕스럽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지브롤터의 원숭이가 여왕의 머리 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비록 반항적인 행동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경건하지 못한 구도와 디자인은 보수 인사들의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 p.167

1,000리엘이 과거 지폐와 크게 다른 점은 앞면의 도안이다. 앞면에는 또 다른 미소가 등장한다. 바로 희망이 가득하고 낙관적인 기개가 돋보이는 여학생의 미소다. 여학생은 자신감과 긍지가 충만한 얼굴로 침착하면서도 긍정적인 광채를 발하고 있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빛나는 미래가 머지않았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 p.208

이 책에는 42개 나라의 지폐에 얽혀 있는 비화가 담겨 있다. 18세기 로코코 시대 스페인을 대표하는 유명한 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의 화려한 필체가 담겨 있는 스페인 지폐부터, 1970년대 최악의 홀로코스트가 벌어졌던 남아프리카의 부룬디-르완다의 지폐에 담긴 두 민족의 화합과 평화에 대한 기원, 독재자의 광기가 담겨 있는 북한과 이라크, 리비아의 지폐 등 세계 각국의 다양한 지폐 이야기가 있다.

지폐에 담긴 비사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그보다도 이 책의 진짜 별미는 컬러풀한 지폐 사진들이다. 우리가 평소에 별 생각 없이 사용하던 돈이 사실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던가 싶을 정도이다. 지폐는 단순히 교환 수단이 아니다.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새겨져 있는 상징물이자 위대한 미술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을 보노라면 저자가 어째서 그토록 지폐 모으기에 빠져 들었는지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300여 페이지의 많지 않은 분량에 부담 없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딱딱하고 골머리 아픈 전문서적에 파묻혀 있다가 이런 책을 읽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고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역사를 밑줄 좍좍 그어가면서 배울 필요는 없으리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것이 역사 이야기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42개국 중에서 북한과 일본은 있는데 우리나라는 없다는 점이다. 저자가 보기에 우리나라 돈은 별로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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