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케르크 - 세계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 지음, 정탄 옮김, 권성욱 감수 / 교유서가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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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비극적인 사실을 말하려 합니다. 유럽은 히틀러에게 굴복당했습니다. 이제 다음 차례는 영국입니다. 하지만 저는 국민들에게 해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국민의 피와 땀과 그리고 눈물입니다.

앞으로 기나긴 투쟁과 고난한 시련의 세월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의 확고한 정책은 보장되지 않는 기만적인 강화조약이 아닌 전쟁입니다. 수많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쟁을 하는 목적은 승리입니다. 파시즘에 굴복당하지 않는 자유민의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승리해야 우리는 생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의 단결된 힘이 기필코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1940년 5월 13일 처칠이 수상으로 취임했을 때 전쟁은 겨우 3일이 지났을 뿐이지만 상황은 이미 최악이었다. 독일 공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에 네덜란드는 삼일만에 백기를 들었고 벨기에가 "작은 마지노"라고 자랑하던 에방 에말 요새 역시 함락되어 방어선의 한쪽이 무너졌다. 또한 구데리안이 이끄는 독일군 기갑 부대는 프랑스군 수뇌부가 절대 넘을 수 없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아르덴을 단숨에 돌파하여 뫼즈강을 도하한 후 서쪽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전쟁이 시작될 때만 해도 승리는 따놓은 당상인양 기세등등했던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렝은 패닉에 빠진 채 자포자기해 버렸다. 그나마 예비 전력으로 남겨 두었던 프랑스의 3개 기갑 사단은 가믈렝이 축차 투입한 덕분에 각개 격파당하였다. 연합군의 2/3는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에서 갇힌데다 나머지의 대부분도 마지노선에 묶인 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만약 연합군 지휘관 중에 롬멜이나 패튼, 몽고메리, 쥬코프처럼 과감하고 뛰어난 장군이 있었더라면 조직적인 종심 방어로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면서 지나치게 깊숙이 진격한 독일군의 측면을 찔러서 양분시키고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가 가장 두려워했던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또한 4년 후 히틀러가 아르덴에서 미군을 상대로 똑같은 방식으로 도박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전혀 통하지 않은 채 참담한 패배로 끝이 났다.

물론 프랑스군 수뇌부도 반격을 계획했다. 하지만 막상 반격 작전에 필요한 수단이 결여되어 있었다. 공군은 숫적으로 우세했지만 무계획적으로 흩어져 있었고 전차는 보병 사단에 분산되어 있었으며 프랑스군의 부대는 대부분 기동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연합군은 오랫동안 독일의 공격을 기다렸음에도 정작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프랑스군 수뇌부가 대체적으로 나이만 많을 뿐 고루하고 창의성이 부족하며 행동이 느렸기 때문이었다.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연합군의 대응 능력보다 훨씬 빠르게 파고 들어오는 독일군을 저지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독일군이 연합군의 미약한 방어선을 밀어내고 영불 해협에 도착하자 40만명의 연합군의 퇴로가 차단되면서 거대한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5월 22일에는 칼레가 포위되었고 23일에는 볼로뉴 항구가 함락되었다. 연합군에게 남은 것은 덩케르크의 손바닥만한 작은 교두보 뿐이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선봉부대는 이미 덩케르크에서 겨우 15km 떨어진 곳까지 당도하였다. 이제 한발만 더 내딛으면 사상 최대의 포위 섬멸전이 시작될 판이었다. 

상황이 급박하자 영국 해군은 이들의 구출 작전을 처칠에게 건의하였다. 처칠은 스탈린처럼 무조건적인 사수를 명령하는 대신 현명하게도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른바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 이라 불리게 되는 사상 최대의 철수 작전이었다. 참고로 "다이나모"는 작전 회의가 열리던 도버성의 방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5월 26일 일요일 오후 6시 57분 다이나모 작전이 발동되었다.

영국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령 갈리폴리에서 대규모 철수 작전을 수행한 바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해군 장관으로서 갈리폴리 철수를 지휘했던 사람은 처칠이었다. 비록 갈리폴리 전투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륙작전"이라고 불릴 만큼 재앙에 가까운 실패였지만 철수 작전만큼은 매우 질서정연하게 조직적으로 실시되어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덩케르크는 갈리폴리보다 훨씬 불리하였다. 광범위한데 흩어져 있던 영국 해군은 철수 작전에 대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터키군은 추격에 나서지 않았지만 독일군은 당장이라도 덩케르크의 해안가로 들이닥칠 판이었다.

하늘은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영불 해협에서는 유보트들이 승냥이떼처럼 활동하면서 연합군의 선박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게다가 덩케르크는 해안가는 넓지만 수심이 얕아서 대형 수송선이 정박하기에 마땅하지 않은데다 대부분의 항구 시설은 이미 파괴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해안가에서 직접 병사들을 태우고 먼 바다까지 나오는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도박이었기에 처칠과 영국 수뇌부는 그저 전체의 1/10 정도인 4만명 정도만 구출해도 대성공이라고 여기는 판이었다.

상황은 일분일초가 다급했기에 철수에 필요한 해군 선박을 충분히 모을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처칠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서 영국 국민들을 향하여 지금의 위기를 알리고 도움을 호소하였다. 그의 비장하고도 간절한 호소는 놀라운 효과가 있었고 전쟁에 냉담하던 영국 국민을 전례없이 하나로 뭉치게 하였다. 어선, 요트, 구명정, 낚시배, 심지어 관광객들을 위하여 템즈강을 오가던 구식 범선에 이르기까지 수백척에 달하는 선박들이 너나 할 것없이 덩케르크 해안가로 일제히 향하였다.

    

 

영불 해협의 거친 풍랑과 독일 공군의 폭격, 유보트의 위협, 자기 기뢰 등 온갖 장애물과 난관이 있었지만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병사들을 태운 후 영국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영국군 병사들 또한 독일군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음에도 전의를 잃지 않은 채 질서 정연하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결과는 놀라울 만큼 성공적이었다.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9일 동안 구출된 장병들은 무려 33만8천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 영국군이 19만명, 프랑스군이 14만명 정도였다. 덩케르크의 모습은 당시 패닉에 빠진 채 총을 버리고 독일군에게 무질서하게 투항하던 다른 연합군 병사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순수하게 군사적으로 본다면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되고 조직적인 철수 작전이 아니었기에 철수 부대는 거의 모든 장비를 상실했다. 당시 3개 군단 10개 보병 사단, 1개 기갑 사단으로 구성된 영국의 대륙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은 영국군이 보유한 최정예 부대였다. 또한 500대의 영국 공군이 프랑스에 배치되어 있었다.

덩케르크에서 철수하면서 이들이 버리고 온 장비는 야포 880문, 대공포 500문, 대전차포 850문, 기관총 1만1천정, 전차 700대, 차량 4만5천대에 달했으며 그 외에도 막대한 탄약과 유류, 보급품이 있었다. 덩케르크에는 영국, 프랑스군이 남긴 무수한 무기와 야포, 차량이 즐비하게 늘려 있었고 대부분 파괴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독일군의 손에 넘어가 1년 뒤 발칸과 소련 침공 작전에 쓰이게 된다. 영국에는 겨우 2개 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예비 장비가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처칠은 미국에게 도움을 급히 요청하여 미국이 제공하는 "랜드리스"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또한 철수 과정에서도 6만 8천여명에 달하는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마지막까지 철수를 엄호했던 부대는 결국 탈출하지 못한 채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철수 과정에서 6척의 영국 구축함과 3척의 프랑스 구축함이 격침되었고 19척이 큰 손상을 입었다. 또한 474대의 영국 공군기가 격추당했다. 독일 공군의 피해는 132대에 불과했다. 작전에 동참했던 민간 선박들 역시 200여척 이상이 침몰하거나 피해를 입었다. 냉철하게 말하자면 전쟁에 패배하여 빈털털이가 된 채 목숨만 겨우 건져서 비참한 몰골로 돌아온 꼴이었다. 따라서 참패의 원인을 놓고 격론이 벌어지고 처칠은 그 책임을 졌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국민들은 오히려 처칠을 찬사하였고 귀환한 병사들을 따뜻하게 격려하였다. 또한 독일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은 더욱 불타 올랐다.

작전의 성공 여부를 놓고 본다면 덩케르크보다 갈리폴리의 철수 작전이 훨씬 성공적이었음에도 우리는 전자를 기억하고 후자는 기억하지 못하지 못한다. 이것은 덩케르크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처칠은 국민들에게 "아직 우리는 진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었다. 그 힘이 수많은 고통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날까지 영국을 끌고 간 것이다. 뮌헨 회담에서 히틀러에게 굴복한 체임벌린을 "평화를 지켰다"라며 환호했던 영국 국민들은 이제 전쟁에 스스로 동참하였고 전쟁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처칠이 말하는 진정한 "덩케르크의 기적"이었다.

얼마 전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동명 영화와 함께 <덩케르크 - 세계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이 출간되었다. 표지의 사진은 프랑스 해군의 1500톤급 구축함인 브라스크(Bourrasque)의 침몰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덩케르크를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 중의 하나이다. 브라스크는 덩케르크 작전 당시 병사들을 구조하다가 1940년 5월 30일 독일군의 기뢰에 부딪쳐 침몰하였다.

엊그제 필자도 휴가를 이용하여 영화를 보았는데 놀란 감독 특유의 영상미와 웅장하면서도 긴장감을 끌어내는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할리우드 특유의 액션이 거의 없다보니 <라이언 일병>이나 <애너미 앳더 게이트>와 같은 전쟁 영화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다소 실망할 수 있겠지만 다양한 카메라 구도를 통해 마치 나 자신이 당시의 긴박한 전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는 호불호가 갈리면서도 국내에서 꾸준히 1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니 잘 만든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대신 놀란의 영화는 전후 배경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 연합군이 왜 덩케르크에 갇히게 되었는지 왜 여기서 탈출해야 하는지, 선장들이 어째서 자신의 배를 끌고 위험하다는 덩케르크로 향하는지, 내가 살기 위해 전우의 희생조차 마다하지 않는 병사들의 이기적인 모습, "너희 공군은 뭐하고 있느냐" 질타하는 병사에게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떨구는 파일럿. 놀란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관객들을 77년 전 덩케르크의 현장으로 데려다 놓을 뿐이다. 이것이 놀란 감독 특유의 방식이기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거의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본다면 재미가 반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교유서가에서 나온 <덩케르크>는 영화의 배경, 즉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의 상황을 다룬 책이다. 5월 10일 새벽, 독일군의 기갑부대가 일제히 네덜란드 국경을 돌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독일 공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네덜란드, 벨기에 전선에서 벌어진 연합군의 패배, 구데리안의 기갑부대가 아르덴을 돌파하여 연합군의  후방으로 쇄도하였다. 덩케르크의 좁은 포켓에 갖힌 40만명의 연합군. 책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책은 존 키건의 <2차대전사>와 같은 전쟁사 책이 아니다. 장군들이 테이블 위에서 어떠한 작전을 짰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구조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배를 몰고 바다로 나서는 모습, 한번 떠나면 귀환을 장담할 수 없는 긴장감, 어떠한 위험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았던 놀라운 투지, 생사의 갈림길 속에서도 남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의 용기, 마치 영화 <타이타닉>이나 <포세이돈>, <판도라>럼 거대한 재난 속에서 그것과 용감하게 싸우며 그 속을 헤쳐나오는 한편의 휴먼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램지 중장은 프랑스 해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시종일관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신속하게 도버 해협을 건넜을 때 마주한 것은 정유공장과 정유조가 있는 덩케르크 항 서쪽에서 솟구치는 화염과 검은 연기의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16킬로미터에 이르는 모래톱! 모래톱에서 해안선까지는 온통 집으로 돌아가려는 병사들로 새까맣게 채워져 있었다."  - p.101

"독일군 전투기 10여대가 한꺼번에 몰려와 주위를 선회하면서 폭탄으로 조준 타격하고 갑판에 기관총을 난사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몇번이고 이런 공격이 쏟아질 때면 실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같았다. 그럼에도 지옥 구덩이를 간발의 차로 빠져나온 병사들과 배를 잃고 바다 위에서 살려달라고 외쳤던 선원들의 대부분은 놀라우리만큼 침착했다." - p.183

"그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두 다리 모두 무릎 아래가 잘려나간 상태였다. 승조원들은 그를 조심스럽게 갑판에 뉘였고 냉혹한 상황에서도 허용되는 한 편안하게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그의 기백은 육체 속에서 강렬하게 타올랐다. 육체적인 고통도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는 단호하게 일어서려고 몸부림쳤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영국 해군 만세!" 그는 쓰러졌다."  - p.329

이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은 영국의 군사 전문가이자 작가로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4년에 죽었다. 이 책은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결행된 지 1년 후에 써였다고 한다. 영국인으로서 덩케르크는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자 불굴의 의지와 같았을 것이다. 우리로 치면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에 비견될만하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가지는 비중에 비하여 그동안 국내에서는 소홀히 여겨져 온 면이 있다. 2차세계대전사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존 키건 교수의 <2차세계대전사 The Second World War>를 비롯하여 시중의 관련 서적을 보면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대하여 고작 몇 페이지를 할애하여 연합군이 어떻게 철수할 수 있었는지를 간략하게 언급할 뿐이다. 따라서 충분한 배경 지식이 없는 독자들로서는 프랑스 전역과 영국 본토 항공전 사이의 짧은 단막극 정도로 여겨질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좌우했던 덩케르크 철수 작전의 진정한 의미가 가려지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밀덕들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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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전쟁 - 제1차 세계대전부터 사이버전쟁까지, 전쟁의 승패를 가른 비밀들
박종재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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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하지 않는다" - 군사 격언

"많은 임금과 장수 중에서 특출나게 승리를 거두는 자는 적에 대한 정보를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적에 대하여 미리 알려면 귀신에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물을 흉내낼 수도 없으며 짐작으로 추측하여 시험해 볼 수도 없다. 반드시 상대의 사정을 잘 아는 첩자를 써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다" - 손자 용간편

일찍이 손자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적을 알고 나를 알기 위한 정보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무리 적보다 많은 병력과 유리한 상황을 선점하고 있어도 막상 그 사실을 지휘관이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소극적인 지휘관일수록 오히려 내가 불리하다고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나거나 패배를 자초하는 경우도 흔하게 있다. 반대로 적이 얼마나 강대한지 모르고 자신의 용맹함을 과신하여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스스로 사지에 들어가는 예도 있다. 그 단적인 예가 태평양전쟁 당시 버마전선을 담당하였던 무다구치 렌야이다.

그는 일본군이 가장 유리했던 1942년 여름에는 지형의 험난함과 보급 문제를 들어서 인도 침공을 완강하게 반대했다가 뒤늦게 태도를 바꾸어 이번에는 일본군의 사정은 무시한 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격을 강행하였다. 영국군이 허약했던 1942년에 공격했다면 손쉽게 승리했겠지만 1944년의 영국군은 훨씬 강해진 반면, 일본군은 약화되어 있었다. 결국 병력의 2/3를 잃고 참담한 몰골로 철수하였다. 그의 실패는 태평양전쟁을 통틀어 일본이 경험한 최악의 참사였으며 결국 버마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심지어 연합군은 그를 "연합군의 승리에 가장 기여한 일본군 장군"이라고 칭찬했을 정도였다. 무다구치가 실패한 이유는 정보를 무시한 채 자신의 막연하고 관념적인 편견만으로 "이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동서 고금의 전쟁에서 정보의 중요성이란 새삼 말할 것도 없으리라. 고대 서양에서 가장 위대한 전투라고 꼽히는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이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정보력 덕분이다. 그는 상대의 강약에 대하여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하였고 적장의 성향까지 파악하여 허를 찔렀다. 반면, 로마군 사령관인 바로는 그저 숫적인 우위만 믿고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한 채 무작정 공격에 나섰다가 한니발의 함정에 빠져서 문자 그대로 전멸하고 말았다. 23전의 싸움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이순신 역시 일본 수군의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이를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누구나 알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안개(The Fog of War)"라는 말을 사용하여 정보가 얼마나 불확실하며 그 중에서 진짜 정보를 골라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강조한 바 있다. 현실에서는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그 중에서는 적이 의도적으로 흘린 더미 정보도 있고 서로 상충되거나 상식에서 어긋나는 정보도 많다. 설령 뛰어난 정보 전문가가 수많은 쓰레기 정보 중에서 진짜 가치가 있는 정보를 어렵사리 골라내어도 윗선까지 제대로 올라간다는 보장도 없다. 중간 보고 단계에서 버려지거나 전혀 엉뚱하게 왜곡되기도 한다. 정확한 정보가 정확하게 보고되어 정확하게 활용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야말로 행운에 가깝다.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가. 정보를 골라내는 과정에서 사람의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만약 서로 상충하는 정보가 있을 때 냉철하게 판단하여 결정하거나 보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냥 내 입맛에 맞는 쪽을 택한다. 그저 "이랬으면 좋겠다"는 단순힌 희망 사항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해 버린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정보의 중요성을 무시한 예가 다름아닌 임진왜란이다. 히데요시는 조용히 쳐들어오는 대신, "명을 치겠으니 조선은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하라"라고 엄포를 놓았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히데요시의 허세 덕분에 대비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번 셈이었다. 하지만 모든 수단을 다하여 상대의 의중과 군사력, 작전 계획 등 정보를 수집하기는 커녕 그저 의례적인 통신사 두명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그조차도 한 사람은 "쳐들어온다" 또 한사람은 "안 쳐들어온다"라는 완전히 상반되는 보고를 하여 혼란을 부추겼고 무사안일에 젖어 있었던 조정은 "안 쳐들어오겠지만 혹시 모르니까"라는 태평한 생각으로 의례적인 수준의 대비를 했을 뿐이었다. 결국 예상을 훨씬 초월하는 침공에 조정 전체가 패닉 상태에 직면하여 선조는 조중 국경의 끝단인 의주까지 도망쳐야 했다.

히데요시가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는 것은 그저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상황임에도 조정이 이를 무시한 것은 그런 상황 자체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수백년 동안 외적의 대규모 침략은 없었는데 하필 우리 대에 와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귀납법적인 오류, 사실이 아닌 희망에 불과한 가정을 사실로 단정해 버린 채 다른 가능성은 모두 무시하는 전형적인 가정 망각의 오류라 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전쟁사에는 비일비재하다. 한국전쟁에서 맥아더 역시 중공군의 참전을 알려주는 수많은 정보가 있었지만 그 정보 자체가 불쾌하다는 이유로 묵살하거나 자신의 편의대로 해석하였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침공한다는 경고를 외면하여 개전 초반에 500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하는 대참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 군대에 대한 경멸감과 경제적인 부담을 이유로 동원령을 미뤘다가 이집트, 시리아의 기습을 받아 거의 패망 직전까지 몰리는 호된 댓가를 치루었다. 정보를 무시하기는 쉽지만 정보를 무시한 대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얼마 전 전쟁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주목할 만한 신작 도서가 나왔다. <함께 보는 근현대사> <유라시아 견문> 등을 출판한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서해문집에서 나온 <정보전쟁>이다. 마침 해당 출판사에서 필자에게 신작이라면서 선물로 보내왔다. 감사할 따름이다.

저자인 박종재 교수님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 대학에서 전략학 박사를 수료한 후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해군 제1함대, 안보정보비서관실 등에서 근무하는 등 국내에서는 정보분야의 통이라고 하실만한 분이다.

"여러분의 성공은 기억되지 않지만 실패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CIA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정보는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막상 사람들의 이목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성공하면 그저 본전이요, 실패하면 이유 여하와 상관없이 사방에서 두들겨 받는 것이 바로 정보 부서의 운명이다. 아무리 큰 공을 세워도 그들에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없다. 그것은 정치인, 장군들의 몫이다. 007과 같은 스파이들의 멋진 액션은 그저 영화에서나 가능한 얘기이다. 하지만 그림자 속에서 숨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걸고 누구보다도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것이 바로 이들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20세기 현대사에서 정보력이 전쟁사를 어떻게 좌우했는지 다룬다. 가장 먼저 나오는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지키는 미국의 참전을 결정적으로 유도한 이른바 "치머만 사건"이다.

당시 독일 외무장관이었던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관으로 한통의 전문을 보낸다. 독일은 멕시코에 자금과 무기를 대고 만약 미국이 유럽 전선에 참전할 기미가 보일 경우 멕시코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미국은 유럽에 참전하지 못할 것이고 독일이 전쟁에 승리한 뒤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멕시코가 빼앗긴 텍사스, 뉴멕시코, 아리조나 등을 되찾아주겠다는 것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내용이었다.

      
1917년 4월 2일 미 의회에서 참전을 공식 요청하는 윌슨 대통령. 2년전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루시타니아호가 침몰되면서 가뜩이나 독일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데다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치머만 전보까지 공개되면서 더 이상 고립주의자들도 참전을 반대할 명분이 없었고 결국 참전이 결정되었다.

이 전문을 입수한 윌슨은 1917년 2월 27일 <AP통신>을 통하여 언론에 공개하였다. 게다가 어리석게도 치머만 스스로도 이 전문이 사실이라고 인정함으로서 미국이 참전할 명분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4월 6일 윌슨은 정식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유럽으로 군대를 보냈다. 당시 동부전선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서 러시아군이 붕괴되고 영국, 프랑스 역시 니벨의 졸렬한 공세가 전례없는 대참사로 끝나면서 패배 직전에 몰린 상황이었다. 만약 치머만 사건이 없었거나 그 전문이 가짜라고 고집했다면 윌슨은 고립주의자들을 누르고 참전을 강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일은 승리를 목전에 두고 제 무덤을 판 꼴이 되었다.

치머만 전보는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사건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밀 전보가 어떤 경위로 미국 정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 전후 배경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암호화되어 있었던 치머만 전보를 처음 캐치한 것은 미국이 아니라 영국 정보부였다. 암호 해독만도 20여일이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이 핵폭탄같은 기밀 문서를 미국에게 넘기는데 주저하였는데 그들은 독일만 감청한 것이 아니라 미국도 감청하고 있었기에 자칫 이 사실이 미국에게 알려질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설령 넘겨주어도 미국이 과연 이 문서가 진짜인지 믿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전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자 영국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미국에게 넘겼다. 영국의 예상대로 미국 사회는 들끓었고 독일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미국의 참전을 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양쪽 모두 난타전으로 기진맥진한 가운데 그나마 독일이 어느 정도 승기를 잡았음에도 팔팔한 새로운 전력이 끼어들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참호를 사이에 둔 채 몇년에 걸쳐서 수백만명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제1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른 것은 독가스나 전차와 같은 신무기가 아니라 바로 정보전이었던 것이다.

또 한가지, 정보전하면 빠질 수 없는 사건 중의 하나가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었던 미드웨이 해전이다. 만약 미국 정보부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이 어디를 공격할지 알아내지 못했다면 미드웨이 해전은 결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일본 정보부가 미국 해군이 미드웨이로 이동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미드웨이에서 승리한 쪽은 틀림없이 일본 해군이었을 것이다. 물론 미드웨이에서 일본 해군이 이겼어도 결국에는 미국이 승리했겠지만 전쟁은 보다 길어졌을 것이며 오스트레일리아는 틀림없이 일본의 수중에 넘어갔을 것이다. 진주만도 위험해졌을 것이며 루즈벨트는 보다 상황이 유리해질 때까지 태평양을 포기한 채 서부 캘리포니아로 남은 해군력을 철수시켰을지도 모른다. 그 전까지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하던 미군이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미드웨이의 승리 덕분이었다는 점에서 의미는 크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케 했던 보디가드, 포티튜드 작전, 독일군을 농락했던 영국의 더블크로스 시스템, 독일의 애니그마를 해독한 영국의 울트라첩보, 6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스라엘의 첩보전쟁 등 제1장에서는 정보전에서의 승리가 곧 전쟁의 승리로 이어진 사건들을 다룬다. 반대로 제2장에서는 정보전에서 실패함으로서 호된 댓가를 치룬 경우에 대한 것이다. 히틀러의 침공을 무시했던 스탈린, 진주만 기습에 당한 미국, 베트남 전쟁 당시 구정 대공세의 정보를 무시했던 미국,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건들은 우리에게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스레 알려준다.

오늘날 정보전은 더욱 치열하다. 또한 그저 상대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이버전과 해킹을 통하여 적국의 정치, 경제를 마비시키고 엄청난 손실을 입히기도 한다. 총한발 쏘지 않고도 상대를 굴복시킬 수도 있다. 2천여년 전에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승리"라고 하였는데 21세기에 와서 그것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강대국들에 비하여 우리는 정보전에서는 상당히 뒤쳐져 있다. 그동안 전차나 항공기, 미사일, 대포와 같은 유형적인 무기만이 진짜 무기라고 여기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적인 무기는 무기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정보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지만 행동이 뒤따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재래식 전력은 막강하지만 정작 정보전 능력에서는 여전히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미국 없이는 당장 장님 신세가 되는 것이 우리이다.

이 책은 여느 전쟁사 서적처럼 그저 전쟁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정보가 왜 중요한지, 오늘날 강대국들의 첨예한 정보전쟁,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과제에 대하여 언급한다. 국내에서는 그동안 보기 드문 정보전을 다룬 책이라는 점에서 많은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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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언니 부자연습 - 가난한 공주 부자되기 프로젝트
유수진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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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집사람이 문득 이렇게 말했다.
"케이블 방송에서 어쩐지 어른을 봤는데 재태크에 대한 것이 나오더라. 그런데 내가 잘 몰라서 당신이 나중에 함 봐라."
"글쎄, 무슨 내용인데?"
"유수진이라는 여자가 강의를 하는데 우리나라나 선진국은 이미 경제 성장률도 낮고 금리도 낮아서 더 이상 돈 벌기 어렵다, 대신 인도나 베트남같은 개발 도상국에 투자를 해야 한다네."
"펀드? 베트남 펀드 요즘 별로인데"
"아니 펀드 말고. 말로는 설명 못하겠고 그냥 당신이 직접 봐."
집사람의 말에 가우뚱 하면서도 그거 찾아서 볼 짬은 없다보니 그냥 한귀로 넘겼다. 그런데 때마침 카페에서의 서평 이벤트. "당신이 말한 게 이거 아니야?" "맞아"

경제 서적은 몰라도 재태크 책은 거의 보지 않는다. 철없던 젊은 시절에야 돈을 벌어보겠답시고 부지런히 주식이니 경매이니 탐독하던 때도 있었지만, 어차피 본인들 돈 번 얘기이고 나름의 비법이라는 것도 우리같은 내공없는 일반인이 책 한권 보고 덜렁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려 <어쩐지 어른>에서도 나왔다고 하고 집사람의 얘기로는 귀담아 들어볼 부분도 있을 듯 하여 바로 신청.

어제 드디어 기다리던 책이 왔다. 퇴근 후 컴퓨터 앞에 앉아서 과연 어떤 내용인가 페이지를 한장씩 넘겨보았다. 그러기를 한시간반. 앞부분은 "부자가 되면 좋은 이유" "그런데 왜 당신은 부자가 되지 못하는가" 다이어트에 실패한 20대 동생 얘기도 나오고 50이 다되도록 결혼 못한 지인 언니 얘기도 나온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 "그래서 우리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어이 여보시오, 작가 양반, 이거 재태크 책이요? 에세이요? 이 얘기하자고 무려 책의 절반을 쓴거요?

그 다음에는 GDP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나온다. 갑자기 경제 기초 상식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미국 금리가 어쩌고 트럼프가 어쩌고... 이 정도는 그렇다 치자. 재태크 강의가 직업인 언니인데 그동안 상담하면서 투자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상식조차 결여된 동생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겠는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에도 분명히 있을테니 글 모르는 유아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기분으로 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게 전부다. 제3장 마지막에는 "부자 미션"이라면서 GDP 증가율과 경제 지표, 전문가들의 전망, 자본주의의 역사, 화폐의 역사, 근대사를 공부하라고 한다. 그리고 공부한 것을 실전에 대입하면서 노하우를 익혀나가라고 한다. 이걸로 뭐하라고? 뭐하라는거지? 무슨 실전? 화폐의 역사를 공부한 다음 어떤 실전에 대입하여 무슨 노하우를 익히라는건가?

아니야. 여기서 끝은 아닐꺼야. 이미 책의 80% 이상을 읽었지만 아직 나에게는 마지막 제4장이 남았다. 마지막 기대를 걸고 읽었다. 마침 앞서 얘기했던 그 베트남 투자 얘기도 나왔다. 주식에 투자하여 받은 배당금으로 함께 재태크 모임하는 여인들끼리 베트남을 다녀온 모양이다. 자신이 배당금으로 얼마의 수익금을 받았는지 반페이지만큼의 크기로 확대하여 강조한다. 2천만원 투자했는데 시세 차익 200만원에 수익금이 무려 68만원이란다!

"해외여행에서는 참 배울 것이 많다. 단 배당금 받아서 가자. 그리고 다녀와서는 그 나라에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가지로 모색해 보자"

참으로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베트남 가서 쇼핑만 하지 말고 그 나라에 투자할 방법을 찾으라는데, 재태크 책이라면 보통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투자했고 장점과 단점, 이것만은 꼭 알아야 할 유의 사항 등 구체적인 경험담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우리와는 금융 시스템이 전혀 다르다. 초보자가 이 언니 말만 듣고 덜렁덜렁 갔다가는 은행 가서 통장 하나도 못 만든다. 그 전에 돈푼없는 가난뱅이 동생들에게는 언니처럼 베트남 갈 여행경비 만드는 것부터 첫번째 난제일듯. 배당금 주는 주식을 살 돈부터 마련해야 하나.

설령 우찌우찌 베트남까지 가서 통장 만들어서 쌈짓돈 넣었다고 치자. 외국인에게 금융이 개방되어 있지 않아서 넣는 건 쉬워도 빼는 건 어려운 나라이다. 오는 건 니 마음이라도 나가는 건 니 마음대로가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환차손, 수수료 외에도 베트남 경제의 안정성, 정치적 안정도 등 고려해야 할 것이 아주 많다. 그냥 막연하게 개발 도상국이니 앞으로 고도 성장하겠지 묻지마 투자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다. 남자랑 데이트해도 분양 홍보관에서 하라느니, 당신 수중에 10억만 있으면 대출 10억 더 받아서 건물 사서 건물주가 될 수 있다느니, 믿을만한 자산관리사를 찾으라느니, 그 관리사도 100% 믿지 못하니 결국 너 스스로 공부하라느니. 여보시오, 이게 정말로 전부요? 이게 연봉 6억 언니의 조언이란 말이요!

또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책의 편집 구성인데, 쓸데없는 이미지들이 여기저기 페이지를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를 넣는 이유는 내용과 관련하여 텍스트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울 때 시각적으로 돕기 위함인데, 웹사이트를 단순 캡쳐한 사진을 도대체 뭐에 쓰라는 것인가. 게다가 이 책에는 이런 불필요한 이미지가 분량의 상당 부분을 잡아먹고 있다. 교양 서적으로도 그다지 많다고 할 수 없는 고작 250페이지에 불과한데, 설마하니 <어쩐지 어른>에도 출연한 연봉 6억의 달인이 그 분량을 못채워서 이런 정크 이미지로 땜빵질을 했단 말인가. 심지어 어떤 페이지에서는 "재태크"를 설명하면서 "재태크란 재무와 태크놀리지를 합한 글자로...."라는 말로 무려 종이 반장을 차지한다. 이게 무려 반 페이지에 걸쳐서 설명할 만한 내용인가. 세종 서적이라는 출판사가 신생 출판사도 아니고 그동안 꽤 많은 교양 서적을 내었던데 편집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구성했는지 모르겠다. 

집사람에게 책이 이러이러해서 영 실망이다, 라고 했더니 "나도 강의 들어보니까 뭔 말인지 도통 이해가 안되더라고. 그래서 당신보고 좀 보라고 한건데. 당신이라면 나보다는 나을테니까."

여보시오, 마눌님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었소?!

여러모로 자괴감이 들게 하는 책이다. 서평 한두번 써본 것도 아니고 내 입맛에 맞지 않다고 해서 남에게도 그렇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서평을 쓸 때에는 "이 책은 이런 점이 좋지만 이런 오류가 있다. 따라서 어떤 독자가 이 책에 가장 걸맞을 것"라고 나름대로 솔직하면서도 신중하게 적는 편인데, 이런 경우에는 도대체 뭐라고 써야할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 쓸 생각하지 말고 돈 모을 생각을 하라"라는 뻔한 얘기의 나열이다. 팁이나 노하우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경제 서적도 아니고 언니가 그동안 얼마나 험난한 삶을 거치면서 이 자리까지 왔는지 고백하는 에세이도 아니다. 강의는 잘하는데 글에는 서툴러서인가. 모르겠다. 각자 알아서 판단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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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쿠스 2017-07-1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자되는 벙법은 재테크책 써서잘모르는독자에게 파는 겁니다

구데리안 2017-07-19 10:51   좋아요 0 | URL
그런데 다 아는 얘기만 적어놓았으니 문제라는 것이죠... 재태크란 재+태크의 합성어이다, 이런 말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말의 힘'으로 키우는 대화 육아 - 부모의 말이 바뀌면 아이의 미래가 달라진다
오수향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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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MBC에서 한글날 특집으로 말의 힘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먼저 두개의 통에 흰 쌀밥을 각각 넣은 다음, 한쪽에는 "고맙습니다" "아이 예뻐" 같은 긍정적인 말을 들려 주었고 다른 한쪽에는 "미워" "나빠" "짜증나" 같은 부정적인 말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한달이 지났을 때의 결과는 놀라웠다. "고맙습니다"를 들려준 쪽의 쌀밥은 구수한 누룩 냄새가 나는 하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반면, "짜증나"를 들려준 쪽의 쌀밥은 검은 곰팡이가 핀 채 완전히 썩어 있었다.

직접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도 놀라워 했다. 밥에 귀가 달린 것도 아닌데 고작 말 한마디에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이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가 평소 무의식 중에 내밷는 말이 단순한 전달의 역할만이 아니라 감정 그 자체가 실려 있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정치인들이 본다면 함부로 막말을 하지 않을 것같다.

무생물에 불과한 밥도 이럴진데 하물며 귀가 있고 감정이 있는 사람은 어떠할까. 유머러스한 사람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만들 뿐더러, 주변 사람들까지도 행복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어쩌면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보다 아름답게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육아에서도 말은 중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외하고 육아의 90%는 "말"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아이와 대화하면서 칭찬하고 "사랑해"라고 말해주고 때로는 잔소리를 하거나 혼내기도 한다. 솔직히 말을 빼고 나면 육아에서 뭐가 남을까. 위의 쌀밥 실험처럼 부모가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 시간이 지난 뒤, 아이의 모습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고마워라는 말이 구수한 누룩내 나는 밥으로, 미워라는 말이 시커멓게 썩은 밥으로 만들 듯, 말은 아이를 긍정적으로도, 또는 부정적으로도 만들고 자신감과 행동, 사고력에 큰  영향을 준다. 아이의 건강도 예외가 아니다. 어릴 때 병약했던 아이가 부모의 끊임없는 격려 덕분에 어른이 되어서 누구보다도 건강한 사람이 되는 예도 얼마든지 있다.

오수향 교수가 쓴 신작 도서 <말의 힘으로 키우는 대화 육아>는 아이와의 긍정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알려주는 육아서이다. 참고로, 오수향 교수는 EBS <육아학교 PIN>에서 '초보 엄마를 위한 말하기' 강의를 맡았고 각종 온오프라인 매체와 SNS에서 강사로 활동 중인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2015년에는 대한민국 신지식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는 세계 제일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나라이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 사교육비에는 아낌없이 쓴다. 우리 아이가 남에게 조금이라도 뒤쳐질까 노심초사한다. 하지만 부모로서의 역할이 단순히 돈을 버는 기계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언어 폭력으로 아이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다. 화가 난다는 이유로 막 혼낸 다음 후회한다. 대다수 부모들의 모습이다. 왜 그랬냐고 하면 사는데 지쳐서, 내 몸이 피곤해서, 육아가 힘들어서, 라고 변명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우리가 아이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서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권위주의, 가부장 문화 속에서 우리도 그렇게 보고 자랐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배울 기회도, 깨우칠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직장 생활이건 사회 생활이건 가장 어려운 것은 대인 관계이다. 부부 관계나 부모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하다. 아이의 인생을 바꾸는 것은 사교육이 아니라 부모의 말 한마디이다. 이 책에서는 좋은 일화가 나온다. 어릴 때 말 더듬는 버릇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아이가 있었다. 주눅 든 그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네 두뇌 회전이 워낙 빨라서 혀가 따라가지 못하는 거야.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그만큼 네가 똑똑하다는 거 아니겠어? 너는 머리가 비상하니까 앞으로 큰 일을 할거야"

어머니는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칭찬을 해 주었다. 이런 칭찬을 들으며 자란 그가 바로 세계적인 기업 제너럴 일렉트릭의 회장이자 세계적인 명강사로 이름을 떨치는 잭 웰치이다.

여기서 입장을 바꾸어 만약 나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너는 왜 그렇게 모자르냐?" "커서 뭐가 될래?" "걱정이다 걱정" 이렇게 말하면서 아이를 나무래고 질책하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을까. 한국인의 대화법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말을 훨씬 많이 쓴다고 한다. 흔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만 막상 평소에 남을 칭찬하는 일도 없고 칭찬을 듣는 일도 없는 것이 우리 문화이다. 왜 그럴까. 우리가 그만큼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특별히 다른 나라보다 더 힘들거나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

이 책은 저자가 각종 강연과 양육 상담을 통하여 부모들이 일상 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실수하는 부분, 반드시 지켜야 할 아이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다룬다.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부모를 통하여 언어를 배운다. 예쁜 말, 고운 말을 들을수록 아이 또한 예쁘고 곱게 자란다. 요즘 아이들 중에는 초등학생, 심지어 유치원생에 불과한데도 벌써부터 온갖 상스러운 욕설을 달고 산다. 혹자는 TV와 인터넷, 스마트폰, 또래 친구들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부모에게서 배운 것이다. 만약 아이가 부모 앞에서 욕설을 한다면 우선 나 자신부터 욕설을 달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사고력과 어휘력을 높이기 위한 "수다쟁이가 되어라", 자존감과 공감력을 키우기, 자존감이 높은 아이와 낮은 아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아이의 말을 경청하는 요령, 상상력은 "왜?"라는 질문에서 나온다, 아이의 경제관념과 독립심 키우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밥상머리 교육 등.

어찌보면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얘기의 나열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여 육아책이란 누가 썼건간에 알맹이는 어차피 그기서 그기이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중요하면서도 막상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얘기도 된다. 머리로는 알지만 어렵다고, 다 어떻게 지키냐고 그냥 넘겨버리는 것이다. 대화법이라는 것도 단순히 알고만 있다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훈련과 연습이 필요한 법이다. 우리 사회는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면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상스럽게 여긴다. 남들 앞에서 자기 표현이나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 한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묻는 것은 체면이 깎인다고 여기고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묻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긴다. 자신의 주장을 남에게 말하는데 익숙해도 남의 의견을 듣는 것에는 서툴다. 우리 정치인들이 맨날 싸움박질만 하는 것도 경청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헬 조선"이 된 것도 과거 부모세대가 무조건 공부만 잘 하면 된다면서 대화 육아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모가 아이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소홀히 하면 아이의 언어 발달은 당연히 뒤떨어질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언어 발달이 늦어지면 사고력도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집중력, 학습 능력도 떨어질 수 밖에 없고 타인과의 공감 능력 역시 부족하여 사회성과 또래 친구와의 관계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를 육아 도우미의 손에만 맡기거나 TV, 컴퓨터 게임, 스마트폰에 방치했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다고 한다. 대화 육아가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부모와 대화를 많이 한 아이가 말하는 데 적극적이다.
칭찬과 격려를 많이 받은 아이가 일찍 말을 한다.
건강한 아이가 말을 더 빨리 배운다.
지능이 높은 아이가 말을 더 빨리 한다.
권위적인 교육은 말을 배우는 데 지장을 초래한다.
가족이 많을수록 아이가 말을 잘 한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보다 어휘 수가 더 많다.
경제적 여건이 좋은 아이가 말을 더 잘한다.

아이의 미래는 사교육이 아니라 부모가 만든다. 알면서도 그동안 아이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소홀하게 하지는 않았던가. 무의식 중에 내밷은 나의 말 한마디에 나도 모르는 사이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은 아닐까. 새삼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부모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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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평전 - 현대 중국의 마지막 절대 권력자
알렉산더 V. 판초프.스티븐 L. 레빈 지음, 심규호 옮김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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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주석이 1956년에 죽었더라면 그의 업적은 불멸로 남았을 것이다. 만약 1966년에 죽었더라면 과오는 있지만 여전히 위대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1976년에 죽었다.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천윈(陳雲)

 

마오 시절 중국 국무원 부총리이자 중국 공산당 8대 원로의 한 사람인 천윈은 공산당 초창기 멤버이다. 1930년대에는 대장정에 참여하였고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하여 그가 소련 유학파 지도부를 몰아내고 주도권을 차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평생 마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했던 천윈의 평가만큼 신랄한 것도 없으리라. 

적어도 마오쩌둥이 정권을 차지한지 첫 10년 동안의 성과는 경이로왔다. 국공내전에서 우세한 장제스에게 완승을 거두었다. 1년뒤에는 한반도에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강렬한 어퍼컷을 먹임으로서 중국이 예전의 종이 호랑이가 아님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비록 장비와 화력은 여전히 빈약했지만 맥아더의 미군을 상대로 중국 공산군이 보여준 군사적 역량은 겨우 몇년 전만 해도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북양 군벌과 장제스의 군대를 기억하고 있었던 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더 이상 중국인들은 전쟁에 서툰 민족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중국의 부흥에 착수한 마오쩌둥은 소련식의 경제 건설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다. 마오 정권의 지도자들은 국가 경영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첫번째 5개년 계획(1953년~1958년) 동안 연 10% 이상의 경이적인 경제 성장률을 달성했으며 장제스가 1936년에 달성했던 중국 경제의 정점을 단숨에 갱신하였다. 게다가 이 실적은 국제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중국이 거의 자력갱생만으로 획득했다는 점이었다. 중국은 여전히 낙후되고 가난한 나라였지만 미국, 소련조차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천윈의 말대로 그 이후의 10년은 재앙이었다. 처음 10년의 성공에 고무된 마오쩌둥은 지나친 욕심을 부렸다. 2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고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면서 시작한 대약진운동은 겨우 2년만에 중국 경제를 거의 결딴내어놓았다. 당장 1959년부터 중국 전역에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악의 기아가 닥쳤다. 마오가 죽은 뒤 덩샤오핑 시절 정부에 의해 조사된 공식 통계만도 약 2천만명이 아사했다고 집계되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지나치게 낮게 잡은 것이며 일부 학자들은 3천5백만명에서 4천5백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당시 중국 인구가 약 6억명 정도였다는 점에서 인구의 5~8%가 굶어죽은 셈이다. 왠만한 중위권 국가의 인구와 맞먹는 숫자이지만, 이조차도 마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숫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는 공공연히 "핵전쟁으로 중국인이 수억에서 수천만명으로 줄어든다고 해도 중국 민족은 살아남을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더 많아질 것이다."라고 떠들었다. 그런 마오쩌둥에게 대약진운동은 한낱 실험에 불과했고, 실험이 '조금' 실패하여 4천만명이 죽었다고 해서 뭐가 대단할 것인가.

대약진운동이 마오의 "실수"라면 다음 10년은 마오의 "광기"였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마오는 정치 일선에서 잠시 물러났다. 그 뒤를 이은 류사오치, 덩샤오핑은 마오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지 결코 중국의 흐루시초프가 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마오의 편집광증인 의심병은 이들에 대하여 증오심을 품게 하였다. 그는 대약진운동의 기억이 어느 정도 희석될 무렵, 적절한 기회를 포착한 후 어린 10대 학생들을 부추겨 중국을 소위 "문화대혁명"의 광기로 몰아갔다. 마오의 한마디에 중국을 건설한 혁명 원로들은 하루 아침에 몰락하여 손자뻘에 불과한 아이들에게 온갖 수모와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왜 이들은 저항하지 못했는가. 중국의 이인자였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미국을 상대로 용맹함을 보여주었던 펑더화이, "국민의 총리"라 불리었던 저우언라이조차 감히 마오에게 맞서지 못하였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도 마오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면서 관용을 빌었다. 이는 소련에서 벌어진 스탈린 격하 운동과 대조적이다. 스탈린은 생전에는 절대 권력자이자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막상 그가 죽자 말자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그에 대한 비판에 앞장 선 사람들은 소련 국민이 아니라 흐루시초프를 비롯하여 그동안 스탈린 옆에 서서 숨죽이고 있었던 공산당 간부들이었다.

하지만 스탈린과 달리, 마오는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중국 사회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다. 마오가 부린 광기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던 덩샤오핑은 흐루시초프가 되는 대신, "공7과3(공이 7이고 실수가 3이다)"라는 말로 적당히 무마하였다. 마오는 중국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남겼음에도 그의 과오는 "죄"가 아니라 한낱 "실수"가 된 것이다. 오늘날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을 모르는 중국인은 없지만 모두 "지나간 과거" 쯤으로 치부할 뿐이다. 오히려 마오의 고향이나 그가 머물렀던 장소, 옌안의 토굴은 중국인들에게 신성한 장소로서 매년 수십만명이 방문하는 관광지가 되어 있다.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물론 중국은 북한이 아니며, 우리 사회가 막연하게 생각하듯 중국에서 마오를 비판한다고 무조건 체포되거나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마오에 대한 욕설을 함부로 하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이다. 더욱이 고위 관료나 당 간부, 언론인, 대학 교수들이 마오를 직접적으로 비판할 경우 엄청난 국민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리에서 쫓겨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는 북한이나 시리아 등 여느 독재 국가들처럼 단순히 국가에 의한 우상 숭배가 아니라 중국인들 스스로 마오를 예수나 석가와 동등한 신성 불가침의 존재이자 정신적인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낙후된 중국 사회의 봉건성을 보여준다. 중국은 외형적으로는 현대화되었지만 의식은 전근대적인 봉건 시대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오의 권위는 스탈린조차 능가했다. 스탈린도 정치적 위기가 여러번 있었으며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무시함으로서 최악의 패배를 당했을 때 그는 다른 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잃을까 공포에 질리기도 했다. 하물며 문혁은 스탈린이라면 도저히 흉내낼 수조차 없는 일이다. 반면, 마오는 단순히 독재자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의 황제였다. 황제가 곧 중국이었듯, 그가 곧 공산당이고 중국 그 자체이기도 했다. 공산당이 있고 마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오가 있기에 공산당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마오가 없으면 공산당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를 거역할 수 있겠는가.

중국 역사에서 황제가 폭정을 휘두르는 일은 늘상 반복되어 온 모습이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다음 황제가 들어서면 폭정은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어도 백성들 앞에서 선대 황제가 저지른 행위를 비판하거나 진솔하게 반성하는 법은 없다. 과거의 일은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황제는 항상 신성 불가침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수는 인정할 수 있어도 죄를 물을 수는 없다. 이것이 중국인들의 뿌리깊은 가치관이다. 덩샤오핑이 마오의 과오를 덮어버린 것도,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이 마오의 과오를 묻지 않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록 덩샤오핑이 중국의 개혁개방을 추진했지만 어디까지나 경제에 국한되었을 뿐, 정치와 사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 사회를 이해하려면 중국인들의 사고 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중국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우리는 중국을 잘 모른다. 중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많아도 중국을 공부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시중에 중국에 관련된 책은 하늘의 별만큼 쏟아지지만 대부분 중국에서 어떻게 돈벌이를 할까, 중국 관광 문화를 소개하는 등의 단편적인 교양서적이나 시진핑, 리커창 등 몇몇 주요 지도자들을 소개하는 것에만 치중하고 있다. 정작 중국 현대사를 다룬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마오쩌둥에 대한 제대로 된 평전조차 여지껏 없었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중국에 무관심한지 보여준다. 그렇다보니 중국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여전히 "우물안 개구리"에 머무른다.

얼마 전 민음사에서 <마오쩌둥 평전>이 출간되었다. 원제는 "MAO: The Real Story"로 저자는 러시아 출신의 학자인 알렉산더 판초프 교수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그동안 국내에서 마오쩌둥을 다룬 책은 많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마오쩌둥 평전"이라고 할만한 책이 있는가 싶다.

대표적으로 해리슨 E. 솔즈베리의 <새로운 황제들>나 중국의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인 왕단 교수가 쓴 <중국 현대사>, 대약진운동과 문혁기에 성장기를 보내면서 마오의 폭정을 몸소 체험해야 했던 전리군 교수의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프랑크 디쾨터 교수의 <마오쩌둥 삼부작> 등은 1949년 이후 마오쩌둥이 통치 과정에서 저지른 온갖 실정을 적나라하게 까발리지만 "그가 이러이러한 행동을 했다"라는 결과에만 주목할 뿐, 그가 왜 그렇게 했는가에 대한 것은 없다. 

마오쩌둥은 왜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졸속적인 대약진운동을 강행했는가. "참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그의 말 한마디에 수천만명이 참새 잡기에 매달렸는데, 마오쩌둥은 참새가 사실은 이로운 새라는 최소한의 상식조차 없었던 것인가. 문혁의 광기는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마오쩌둥이 가지고 있던 모순과 부조리함, 극단적일 만큼의 편집광적인 사고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여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마오의 성장과정, 그 시절의 중국 사회가 처해 있는 현실,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으며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근본적으로 짚어보지 않으면 안된다.

오랫동안 서구 사회에서 마오쩌둥의 이미지는 중국의 민족주의자이자 진정한 혁명가였다. 이런 시각이 형성된 것에는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가 스노의 책임이 크다. 뉴욕 선 잡지의 극동 특파원이자 당시 30대의 젊은 저널리스트였던 그는 1936년 여름 중국 공산당의 심장부였던 옌안을 방문하였다. 외부 세계와 완전히 고립된 이 가난한 촌락에 서방인이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정부군의 폭격을 피하여 토굴에 살던 공산당 지도부는 그를 크게 환영하고 선전 대상으로 삼았다.

에드가 스노는 결코 친소 공산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자유분방하면서 권위적인 정부와 자본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던 여느 젊은 미국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는 공산당 통치 구역을 여행하는 동안 "장제스 정권의 통치 구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봉건적인 모습을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공산당 간부들은 열의에 가득차 있으며 농민을 착취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인 생활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이 먹을 것은 자기 손으로 만든다"라면서 극찬하였다. 에드가 스노 외에도 시오도어 화이트를 비롯하여 비슷한 또래의 미국인 저널리스트들 역시 중국에 체류하면서 장제스 정권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그 반대 급부로서 중국 공산당에 대한 환상을 만드는데 앞장섰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사에서 "직접 현장을 돌아보면서 과연 공산당이 선전하는 것이 사실과 부합하는지, 조금이라도 거짓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고 썼지만 과연 그러했는가. 같은 시기 옌안에 체류하던 소련인 고문들은 중국 공산당의 폭력적인 행태를 목격하고 모스크바에 보고했음에도 어째서 미국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가. 또한 고작 며칠에서 몇주 동안 체류하면서 어떻게 자신들이 모든 것을 낳낳이 안다고 굳게 단언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 스노는 중국에서 기근이 절정이었던 1960년에 중국을 방문하고 직접 현장을 돌아보았음에도 귀국한 후 "나는 중국에서 기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목격하지 못했다. 이것은 서방의 날조에 불과하다고 믿는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이들은 상대가 보여주는 것만 보면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었을 뿐이다. 그게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마오쩌둥 평전>은 마오쩌둥의 집안 환경과 성장기, 혁명에 가담하게 된 배경, 그리고 권력 투쟁을 통하여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고 나아가 중국 지도자가 되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약 80여년의 시간을 되돌아 본다. 이를 통하여 저자인 판초프 교수는 마오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에서 그가 왜 모순적이고 극단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은 어찌 그리 똑같은가? 그들은 모두 사회 평등을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다른 이들과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 대중 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 p.59

"그렇다면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 친구도 죽여야 한단 말인가? 샤오위가 놀라서 소리치자 마오쩌둥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샤오위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야망 속에서 (권력을 위하여 과거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동료들을 모두 죽였던) 유방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 p.71

"중국의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 역시 자신의 역량이나 심지어 존재까지도 전적으로 군대의 역량에 의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총구에서 나오는 거 ㅅ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어찌 자신의 군대를 일본군의 공격 앞에 내세울 수 있었겠는가?" - p.450 

"당연히 합작화를 가속시키기 위하여 동원된 간부들은 폭력을 사용하거나 잔혹한 명령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당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전횡을 저질렀다. 합작사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농민들은 몇시간, 심지어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에 서있어야 했다."   -p.592

"'핵전쟁이 일어나면 절반은 죽고 절반은 살 것이며 제국주의는 영원히 사라지고 전 세계가 사회주의가 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구 27억명은 회복될 것이며 어쩌면 그보다 더 많아질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가 마오쩌둥에게 물었다. '마오쩌둥 동지! 핵전쟁에서 살아남을 이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마오쩌둥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무도 없을 것이요. 이탈리아인들이 인류 발전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이오?'"   - p.631

"마오쩌둥은 당내 지도부에서 적대적인 쌍방의 평형을 유지하면서 권력 균형을 통제하는 능력만큼은 잃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조정 능력이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파벌의 지도자들이 오로지 마오쩌둥을 통해서 진리를 찾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 p.807

이 책이 기존에 나온 마오쩌둥 관련 서적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것은 러시아의 시각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역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물을 바라봄에서 어느 한가지가 아닌 다양한 시각, 다양한 가치관에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중국인이고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몸소 체험한 당사자라고 할지라도 100% 옳은 것은 아니다. 또한 미국인은 미국인의 가치관에서 중국을 바라본다. 사료가 반드시 진리도 아니고 모든 것을 얘기해 주는 것도 아니다. 역사 연구란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거리는 것과 같다. 한 가지 잣대로만 접근한다면 고정관념에 빠지게 되며 실제와는 동떨어지기 쉽다.

저자는 그동안 중국과 서방에서 나온 출간물 이외에도 러시아에서 기밀이 해제된 방대한 기록들을 찾아서 마오와 스탈린의 관계를 새롭게 파헤친다. 과거 마오에 대한 시각은 그가 스탈린과 거의 대등했으며 아무런 도움도 없이 전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중국 혁명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을 보면 오히려 마오는 스탈린에게 의존했으며 그의 지시에 복종하였다. 스탈린은 마오에게 항상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며 마오 역시 종종 스탈린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지만, 대체적으로 마오는 스탈린을 상전처럼 떠받들면서 마치 부하처럼 행동하였다. 이 점은 소련의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유고의 지도자 티토와 다른 점이다.
 
저자 판초프의 눈에 비친 마오쩌둥은 단순히 위대한 혁명가도, 폭군도 아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어느 한가지로 평가할 수 없으며 그야말로 다양한 면을 가진 모순적인 인간이다. 그는 농담을 즐겨 했으며 누구나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에드가 스노가 마오의 매력에 빠져든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동시에 마치 종교 지도자와 같은 경건함도 있었다. 1971년에 마오를 만난 키신저는 마오의 뒤에 아우라가 보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매우 권위적이고 딱딱하고 엄격하여 거의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던 장제스에게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겉모습과 달리 속으로는 매우 격정적이었으며 일단 마음 속으로 누군가에 대한 증오심을 품으면 언제까지고 기억해 두었다. 또한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변덕스러웠기에 측근들조차도 마오의 기분을 종잡을 수 없었다. 한번 그의 눈 밖에 나거나 의심을 품게 한 사람들은 누구도 용서가 없었다. 펑더화이, 류사오치, 가오강, 천이, 린뱌오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또한 장제스에게는 없는 모습이다. 장제스가 마오보다 더 관대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궁지로 몰아서 비참하게 죽이는 일은 없었다. 그런 점이 어떤 의미에서는 장제스가 마오에게 패배한 이유이기도 하다. 원래 권력이란 비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여느 2류, 3류의 독재자들처럼 자신의 권좌에만 눈이 먼 독재자가 아니다. 그는 더 나은 중국 사회를 꿈꾸던 이상가이자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쉽, 행동력을 갖춘 지도자였다. 아편전쟁 이래 덩치만 클 뿐 외세의 먹이에 불과했던 나약한 중국을 다시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한 것은 마오쩌둥의 역량이다. 그는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 문제는 그 믿음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자신은 항상 옳다는 절대적인 믿음과 어떠한 오류와 무지함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독선이 자신은 물론이고 중국 인민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어떤 역사적 위인을 평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 공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말은 실상 과오가 큰 인물에 대하여 작은 공을 내세워 큰 과를 덮으려는 것에 불과하다. 애초에 공과라는 것이 무엇인가. 뭐가 공이고 뭐가 과인지 어떤 잣대로 나눈단 말인가. 더욱이 공이 있다고 해서 죄를 덮을 수 있는가. 마오쩌둥 역시 마찬가지이다. 덩샤오핑의 "공7과3"이라는 평가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발언일 뿐, 객관적인 근거나 설득력 있는 논리가 뒷받침된 것도 아니다.

마오의 과오는 분명하다. 그는 폭력과 기만으로 중국을 통치하였으며 의도가 어떠했건간에 마오가 죽었을 때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낙후되고 가난한 나라였다. 또한 마오는 중국이 서구에 비하여 뒤떨어지게 된 가장 큰 장애물이 중국 사회의 뿌리깊은 봉건 문화 때문이라면서 "우파 투쟁"을 반복했지만 그렇게 해서 얼마나 봉건 잔재를 없앴는가. 신분제 문화나 관료들의 권위주의, 극심한 빈부 격차, 허황된 미신은 마오쩌둥이 죄악이라고 규정했지만 아직까지도 중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는 마오가 봉건 잔재를 없앤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바로 봉건 잔재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의 황제였다. 그런데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이것이 마오식 개혁의 한계였다.

그렇다면 마오의 공은 무엇인가. 그는 공산당의 천하를 만들었다는 것 외에 아무런 공이 없는가. 그의 가장 큰 공은 중국인들에게 "중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의미가 있다. 원래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소위 "중화주의"란 왕조와 소수 지배계층의 사상일 뿐, 대다수 민중과는 상관없다. 솔직히 농민들 입장에서 지배자가 한족이건 이민족이건 뭐가 다른가. 그런데 20세기에 와서 처음으로 중국 민중에게 "중국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준 것은 쑨원이었다. 쑨원의 뒤를 이은 장제스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국민 전쟁을 수행하였다. 중국 역사에서 반복된 주변 이민족의 침입은 왕조와 이민족의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들에게 봉건적인 개념에서의 이민족과의 항쟁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싸움으로 인식케 하였다.

그리고 마오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싸워 무승부를 이루어내면서 중국이 더 이상 외세에 무력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지금 중국이 세계 무대에서 당당하게 주장하는 대국굴기, 중국인들의 콧대 높은 중화사상은 다름아닌 마오가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중국인들이 마오를 "영웅"으로 평가하는 이유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중국은 많은 대가를 치루어야 했고, 주변국들에게는 중국식 제국주의로 비추어지지만 말이다.

1천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이조차도 마오라는 인간에 대하여 알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많은 중요한 부분이 수박 겉핡기식으로 넘어가는 느낌이다. 전반부는 주로 마오가 정권을 쟁취하는 과정에서의 권력 투쟁을 다루고, 후반부는 그의 삽질을 다룬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드물게 보는 마오 평전이기에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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