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평전 - 현대 중국의 마지막 절대 권력자
알렉산더 V. 판초프.스티븐 L. 레빈 지음, 심규호 옮김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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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주석이 1956년에 죽었더라면 그의 업적은 불멸로 남았을 것이다. 만약 1966년에 죽었더라면 과오는 있지만 여전히 위대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1976년에 죽었다.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천윈(陳雲)

 

마오 시절 중국 국무원 부총리이자 중국 공산당 8대 원로의 한 사람인 천윈은 공산당 초창기 멤버이다. 1930년대에는 대장정에 참여하였고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하여 그가 소련 유학파 지도부를 몰아내고 주도권을 차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평생 마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했던 천윈의 평가만큼 신랄한 것도 없으리라. 

적어도 마오쩌둥이 정권을 차지한지 첫 10년 동안의 성과는 경이로왔다. 국공내전에서 우세한 장제스에게 완승을 거두었다. 1년뒤에는 한반도에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강렬한 어퍼컷을 먹임으로서 중국이 예전의 종이 호랑이가 아님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비록 장비와 화력은 여전히 빈약했지만 맥아더의 미군을 상대로 중국 공산군이 보여준 군사적 역량은 겨우 몇년 전만 해도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북양 군벌과 장제스의 군대를 기억하고 있었던 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더 이상 중국인들은 전쟁에 서툰 민족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중국의 부흥에 착수한 마오쩌둥은 소련식의 경제 건설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다. 마오 정권의 지도자들은 국가 경영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첫번째 5개년 계획(1953년~1958년) 동안 연 10% 이상의 경이적인 경제 성장률을 달성했으며 장제스가 1936년에 달성했던 중국 경제의 정점을 단숨에 갱신하였다. 게다가 이 실적은 국제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중국이 거의 자력갱생만으로 획득했다는 점이었다. 중국은 여전히 낙후되고 가난한 나라였지만 미국, 소련조차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천윈의 말대로 그 이후의 10년은 재앙이었다. 처음 10년의 성공에 고무된 마오쩌둥은 지나친 욕심을 부렸다. 2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고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면서 시작한 대약진운동은 겨우 2년만에 중국 경제를 거의 결딴내어놓았다. 당장 1959년부터 중국 전역에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악의 기아가 닥쳤다. 마오가 죽은 뒤 덩샤오핑 시절 정부에 의해 조사된 공식 통계만도 약 2천만명이 아사했다고 집계되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지나치게 낮게 잡은 것이며 일부 학자들은 3천5백만명에서 4천5백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당시 중국 인구가 약 6억명 정도였다는 점에서 인구의 5~8%가 굶어죽은 셈이다. 왠만한 중위권 국가의 인구와 맞먹는 숫자이지만, 이조차도 마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숫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는 공공연히 "핵전쟁으로 중국인이 수억에서 수천만명으로 줄어든다고 해도 중국 민족은 살아남을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더 많아질 것이다."라고 떠들었다. 그런 마오쩌둥에게 대약진운동은 한낱 실험에 불과했고, 실험이 '조금' 실패하여 4천만명이 죽었다고 해서 뭐가 대단할 것인가.

대약진운동이 마오의 "실수"라면 다음 10년은 마오의 "광기"였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마오는 정치 일선에서 잠시 물러났다. 그 뒤를 이은 류사오치, 덩샤오핑은 마오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지 결코 중국의 흐루시초프가 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마오의 편집광증인 의심병은 이들에 대하여 증오심을 품게 하였다. 그는 대약진운동의 기억이 어느 정도 희석될 무렵, 적절한 기회를 포착한 후 어린 10대 학생들을 부추겨 중국을 소위 "문화대혁명"의 광기로 몰아갔다. 마오의 한마디에 중국을 건설한 혁명 원로들은 하루 아침에 몰락하여 손자뻘에 불과한 아이들에게 온갖 수모와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왜 이들은 저항하지 못했는가. 중국의 이인자였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미국을 상대로 용맹함을 보여주었던 펑더화이, "국민의 총리"라 불리었던 저우언라이조차 감히 마오에게 맞서지 못하였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도 마오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면서 관용을 빌었다. 이는 소련에서 벌어진 스탈린 격하 운동과 대조적이다. 스탈린은 생전에는 절대 권력자이자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막상 그가 죽자 말자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그에 대한 비판에 앞장 선 사람들은 소련 국민이 아니라 흐루시초프를 비롯하여 그동안 스탈린 옆에 서서 숨죽이고 있었던 공산당 간부들이었다.

하지만 스탈린과 달리, 마오는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중국 사회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다. 마오가 부린 광기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던 덩샤오핑은 흐루시초프가 되는 대신, "공7과3(공이 7이고 실수가 3이다)"라는 말로 적당히 무마하였다. 마오는 중국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남겼음에도 그의 과오는 "죄"가 아니라 한낱 "실수"가 된 것이다. 오늘날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을 모르는 중국인은 없지만 모두 "지나간 과거" 쯤으로 치부할 뿐이다. 오히려 마오의 고향이나 그가 머물렀던 장소, 옌안의 토굴은 중국인들에게 신성한 장소로서 매년 수십만명이 방문하는 관광지가 되어 있다.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물론 중국은 북한이 아니며, 우리 사회가 막연하게 생각하듯 중국에서 마오를 비판한다고 무조건 체포되거나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마오에 대한 욕설을 함부로 하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이다. 더욱이 고위 관료나 당 간부, 언론인, 대학 교수들이 마오를 직접적으로 비판할 경우 엄청난 국민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리에서 쫓겨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는 북한이나 시리아 등 여느 독재 국가들처럼 단순히 국가에 의한 우상 숭배가 아니라 중국인들 스스로 마오를 예수나 석가와 동등한 신성 불가침의 존재이자 정신적인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낙후된 중국 사회의 봉건성을 보여준다. 중국은 외형적으로는 현대화되었지만 의식은 전근대적인 봉건 시대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오의 권위는 스탈린조차 능가했다. 스탈린도 정치적 위기가 여러번 있었으며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무시함으로서 최악의 패배를 당했을 때 그는 다른 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잃을까 공포에 질리기도 했다. 하물며 문혁은 스탈린이라면 도저히 흉내낼 수조차 없는 일이다. 반면, 마오는 단순히 독재자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의 황제였다. 황제가 곧 중국이었듯, 그가 곧 공산당이고 중국 그 자체이기도 했다. 공산당이 있고 마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오가 있기에 공산당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마오가 없으면 공산당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를 거역할 수 있겠는가.

중국 역사에서 황제가 폭정을 휘두르는 일은 늘상 반복되어 온 모습이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다음 황제가 들어서면 폭정은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어도 백성들 앞에서 선대 황제가 저지른 행위를 비판하거나 진솔하게 반성하는 법은 없다. 과거의 일은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황제는 항상 신성 불가침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수는 인정할 수 있어도 죄를 물을 수는 없다. 이것이 중국인들의 뿌리깊은 가치관이다. 덩샤오핑이 마오의 과오를 덮어버린 것도,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이 마오의 과오를 묻지 않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록 덩샤오핑이 중국의 개혁개방을 추진했지만 어디까지나 경제에 국한되었을 뿐, 정치와 사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 사회를 이해하려면 중국인들의 사고 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중국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우리는 중국을 잘 모른다. 중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많아도 중국을 공부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시중에 중국에 관련된 책은 하늘의 별만큼 쏟아지지만 대부분 중국에서 어떻게 돈벌이를 할까, 중국 관광 문화를 소개하는 등의 단편적인 교양서적이나 시진핑, 리커창 등 몇몇 주요 지도자들을 소개하는 것에만 치중하고 있다. 정작 중국 현대사를 다룬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마오쩌둥에 대한 제대로 된 평전조차 여지껏 없었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중국에 무관심한지 보여준다. 그렇다보니 중국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여전히 "우물안 개구리"에 머무른다.

얼마 전 민음사에서 <마오쩌둥 평전>이 출간되었다. 원제는 "MAO: The Real Story"로 저자는 러시아 출신의 학자인 알렉산더 판초프 교수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그동안 국내에서 마오쩌둥을 다룬 책은 많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마오쩌둥 평전"이라고 할만한 책이 있는가 싶다.

대표적으로 해리슨 E. 솔즈베리의 <새로운 황제들>나 중국의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인 왕단 교수가 쓴 <중국 현대사>, 대약진운동과 문혁기에 성장기를 보내면서 마오의 폭정을 몸소 체험해야 했던 전리군 교수의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프랑크 디쾨터 교수의 <마오쩌둥 삼부작> 등은 1949년 이후 마오쩌둥이 통치 과정에서 저지른 온갖 실정을 적나라하게 까발리지만 "그가 이러이러한 행동을 했다"라는 결과에만 주목할 뿐, 그가 왜 그렇게 했는가에 대한 것은 없다. 

마오쩌둥은 왜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졸속적인 대약진운동을 강행했는가. "참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그의 말 한마디에 수천만명이 참새 잡기에 매달렸는데, 마오쩌둥은 참새가 사실은 이로운 새라는 최소한의 상식조차 없었던 것인가. 문혁의 광기는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마오쩌둥이 가지고 있던 모순과 부조리함, 극단적일 만큼의 편집광적인 사고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여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마오의 성장과정, 그 시절의 중국 사회가 처해 있는 현실,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으며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근본적으로 짚어보지 않으면 안된다.

오랫동안 서구 사회에서 마오쩌둥의 이미지는 중국의 민족주의자이자 진정한 혁명가였다. 이런 시각이 형성된 것에는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가 스노의 책임이 크다. 뉴욕 선 잡지의 극동 특파원이자 당시 30대의 젊은 저널리스트였던 그는 1936년 여름 중국 공산당의 심장부였던 옌안을 방문하였다. 외부 세계와 완전히 고립된 이 가난한 촌락에 서방인이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정부군의 폭격을 피하여 토굴에 살던 공산당 지도부는 그를 크게 환영하고 선전 대상으로 삼았다.

에드가 스노는 결코 친소 공산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자유분방하면서 권위적인 정부와 자본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던 여느 젊은 미국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는 공산당 통치 구역을 여행하는 동안 "장제스 정권의 통치 구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봉건적인 모습을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공산당 간부들은 열의에 가득차 있으며 농민을 착취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인 생활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이 먹을 것은 자기 손으로 만든다"라면서 극찬하였다. 에드가 스노 외에도 시오도어 화이트를 비롯하여 비슷한 또래의 미국인 저널리스트들 역시 중국에 체류하면서 장제스 정권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그 반대 급부로서 중국 공산당에 대한 환상을 만드는데 앞장섰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사에서 "직접 현장을 돌아보면서 과연 공산당이 선전하는 것이 사실과 부합하는지, 조금이라도 거짓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고 썼지만 과연 그러했는가. 같은 시기 옌안에 체류하던 소련인 고문들은 중국 공산당의 폭력적인 행태를 목격하고 모스크바에 보고했음에도 어째서 미국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가. 또한 고작 며칠에서 몇주 동안 체류하면서 어떻게 자신들이 모든 것을 낳낳이 안다고 굳게 단언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 스노는 중국에서 기근이 절정이었던 1960년에 중국을 방문하고 직접 현장을 돌아보았음에도 귀국한 후 "나는 중국에서 기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목격하지 못했다. 이것은 서방의 날조에 불과하다고 믿는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이들은 상대가 보여주는 것만 보면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었을 뿐이다. 그게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마오쩌둥 평전>은 마오쩌둥의 집안 환경과 성장기, 혁명에 가담하게 된 배경, 그리고 권력 투쟁을 통하여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고 나아가 중국 지도자가 되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약 80여년의 시간을 되돌아 본다. 이를 통하여 저자인 판초프 교수는 마오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에서 그가 왜 모순적이고 극단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은 어찌 그리 똑같은가? 그들은 모두 사회 평등을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다른 이들과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 대중 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 p.59

"그렇다면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 친구도 죽여야 한단 말인가? 샤오위가 놀라서 소리치자 마오쩌둥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샤오위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야망 속에서 (권력을 위하여 과거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동료들을 모두 죽였던) 유방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 p.71

"중국의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 역시 자신의 역량이나 심지어 존재까지도 전적으로 군대의 역량에 의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총구에서 나오는 거 ㅅ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어찌 자신의 군대를 일본군의 공격 앞에 내세울 수 있었겠는가?" - p.450 

"당연히 합작화를 가속시키기 위하여 동원된 간부들은 폭력을 사용하거나 잔혹한 명령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당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전횡을 저질렀다. 합작사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농민들은 몇시간, 심지어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에 서있어야 했다."   -p.592

"'핵전쟁이 일어나면 절반은 죽고 절반은 살 것이며 제국주의는 영원히 사라지고 전 세계가 사회주의가 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구 27억명은 회복될 것이며 어쩌면 그보다 더 많아질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가 마오쩌둥에게 물었다. '마오쩌둥 동지! 핵전쟁에서 살아남을 이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마오쩌둥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무도 없을 것이요. 이탈리아인들이 인류 발전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이오?'"   - p.631

"마오쩌둥은 당내 지도부에서 적대적인 쌍방의 평형을 유지하면서 권력 균형을 통제하는 능력만큼은 잃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조정 능력이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파벌의 지도자들이 오로지 마오쩌둥을 통해서 진리를 찾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 p.807

이 책이 기존에 나온 마오쩌둥 관련 서적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것은 러시아의 시각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역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물을 바라봄에서 어느 한가지가 아닌 다양한 시각, 다양한 가치관에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중국인이고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몸소 체험한 당사자라고 할지라도 100% 옳은 것은 아니다. 또한 미국인은 미국인의 가치관에서 중국을 바라본다. 사료가 반드시 진리도 아니고 모든 것을 얘기해 주는 것도 아니다. 역사 연구란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거리는 것과 같다. 한 가지 잣대로만 접근한다면 고정관념에 빠지게 되며 실제와는 동떨어지기 쉽다.

저자는 그동안 중국과 서방에서 나온 출간물 이외에도 러시아에서 기밀이 해제된 방대한 기록들을 찾아서 마오와 스탈린의 관계를 새롭게 파헤친다. 과거 마오에 대한 시각은 그가 스탈린과 거의 대등했으며 아무런 도움도 없이 전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중국 혁명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을 보면 오히려 마오는 스탈린에게 의존했으며 그의 지시에 복종하였다. 스탈린은 마오에게 항상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며 마오 역시 종종 스탈린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지만, 대체적으로 마오는 스탈린을 상전처럼 떠받들면서 마치 부하처럼 행동하였다. 이 점은 소련의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유고의 지도자 티토와 다른 점이다.
 
저자 판초프의 눈에 비친 마오쩌둥은 단순히 위대한 혁명가도, 폭군도 아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어느 한가지로 평가할 수 없으며 그야말로 다양한 면을 가진 모순적인 인간이다. 그는 농담을 즐겨 했으며 누구나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에드가 스노가 마오의 매력에 빠져든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동시에 마치 종교 지도자와 같은 경건함도 있었다. 1971년에 마오를 만난 키신저는 마오의 뒤에 아우라가 보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매우 권위적이고 딱딱하고 엄격하여 거의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던 장제스에게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겉모습과 달리 속으로는 매우 격정적이었으며 일단 마음 속으로 누군가에 대한 증오심을 품으면 언제까지고 기억해 두었다. 또한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변덕스러웠기에 측근들조차도 마오의 기분을 종잡을 수 없었다. 한번 그의 눈 밖에 나거나 의심을 품게 한 사람들은 누구도 용서가 없었다. 펑더화이, 류사오치, 가오강, 천이, 린뱌오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또한 장제스에게는 없는 모습이다. 장제스가 마오보다 더 관대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궁지로 몰아서 비참하게 죽이는 일은 없었다. 그런 점이 어떤 의미에서는 장제스가 마오에게 패배한 이유이기도 하다. 원래 권력이란 비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여느 2류, 3류의 독재자들처럼 자신의 권좌에만 눈이 먼 독재자가 아니다. 그는 더 나은 중국 사회를 꿈꾸던 이상가이자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쉽, 행동력을 갖춘 지도자였다. 아편전쟁 이래 덩치만 클 뿐 외세의 먹이에 불과했던 나약한 중국을 다시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한 것은 마오쩌둥의 역량이다. 그는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 문제는 그 믿음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자신은 항상 옳다는 절대적인 믿음과 어떠한 오류와 무지함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독선이 자신은 물론이고 중국 인민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어떤 역사적 위인을 평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 공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말은 실상 과오가 큰 인물에 대하여 작은 공을 내세워 큰 과를 덮으려는 것에 불과하다. 애초에 공과라는 것이 무엇인가. 뭐가 공이고 뭐가 과인지 어떤 잣대로 나눈단 말인가. 더욱이 공이 있다고 해서 죄를 덮을 수 있는가. 마오쩌둥 역시 마찬가지이다. 덩샤오핑의 "공7과3"이라는 평가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발언일 뿐, 객관적인 근거나 설득력 있는 논리가 뒷받침된 것도 아니다.

마오의 과오는 분명하다. 그는 폭력과 기만으로 중국을 통치하였으며 의도가 어떠했건간에 마오가 죽었을 때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낙후되고 가난한 나라였다. 또한 마오는 중국이 서구에 비하여 뒤떨어지게 된 가장 큰 장애물이 중국 사회의 뿌리깊은 봉건 문화 때문이라면서 "우파 투쟁"을 반복했지만 그렇게 해서 얼마나 봉건 잔재를 없앴는가. 신분제 문화나 관료들의 권위주의, 극심한 빈부 격차, 허황된 미신은 마오쩌둥이 죄악이라고 규정했지만 아직까지도 중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는 마오가 봉건 잔재를 없앤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바로 봉건 잔재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의 황제였다. 그런데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이것이 마오식 개혁의 한계였다.

그렇다면 마오의 공은 무엇인가. 그는 공산당의 천하를 만들었다는 것 외에 아무런 공이 없는가. 그의 가장 큰 공은 중국인들에게 "중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의미가 있다. 원래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소위 "중화주의"란 왕조와 소수 지배계층의 사상일 뿐, 대다수 민중과는 상관없다. 솔직히 농민들 입장에서 지배자가 한족이건 이민족이건 뭐가 다른가. 그런데 20세기에 와서 처음으로 중국 민중에게 "중국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준 것은 쑨원이었다. 쑨원의 뒤를 이은 장제스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국민 전쟁을 수행하였다. 중국 역사에서 반복된 주변 이민족의 침입은 왕조와 이민족의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들에게 봉건적인 개념에서의 이민족과의 항쟁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싸움으로 인식케 하였다.

그리고 마오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싸워 무승부를 이루어내면서 중국이 더 이상 외세에 무력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지금 중국이 세계 무대에서 당당하게 주장하는 대국굴기, 중국인들의 콧대 높은 중화사상은 다름아닌 마오가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중국인들이 마오를 "영웅"으로 평가하는 이유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중국은 많은 대가를 치루어야 했고, 주변국들에게는 중국식 제국주의로 비추어지지만 말이다.

1천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이조차도 마오라는 인간에 대하여 알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많은 중요한 부분이 수박 겉핡기식으로 넘어가는 느낌이다. 전반부는 주로 마오가 정권을 쟁취하는 과정에서의 권력 투쟁을 다루고, 후반부는 그의 삽질을 다룬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드물게 보는 마오 평전이기에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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