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합작화를 가속시키기 위하여 동원된 간부들은 폭력을 사용하거나 잔혹한 명령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당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전횡을 저질렀다. 합작사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농민들은 몇시간, 심지어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에 서있어야
했다." -p.592
"'핵전쟁이 일어나면 절반은 죽고 절반은 살 것이며
제국주의는 영원히 사라지고 전 세계가 사회주의가 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구 27억명은 회복될 것이며 어쩌면 그보다 더 많아질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가 마오쩌둥에게 물었다. '마오쩌둥 동지! 핵전쟁에서 살아남을 이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마오쩌둥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무도 없을 것이요. 이탈리아인들이 인류 발전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이오?'" -
p.631
"마오쩌둥은 당내 지도부에서 적대적인 쌍방의 평형을 유지하면서 권력 균형을
통제하는 능력만큼은 잃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조정 능력이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파벌의 지도자들이 오로지 마오쩌둥을
통해서 진리를 찾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 p.807
이 책이
기존에 나온 마오쩌둥 관련 서적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것은 러시아의 시각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역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물을 바라봄에서 어느 한가지가 아닌 다양한 시각, 다양한 가치관에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중국인이고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몸소 체험한 당사자라고 할지라도 100% 옳은 것은 아니다. 또한 미국인은 미국인의 가치관에서 중국을
바라본다. 사료가 반드시 진리도 아니고 모든 것을 얘기해 주는 것도 아니다. 역사 연구란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거리는 것과 같다. 한 가지
잣대로만 접근한다면 고정관념에 빠지게 되며 실제와는 동떨어지기 쉽다.
저자는 그동안 중국과 서방에서 나온 출간물 이외에도
러시아에서 기밀이 해제된 방대한 기록들을 찾아서 마오와 스탈린의 관계를 새롭게 파헤친다. 과거 마오에 대한 시각은 그가
스탈린과 거의 대등했으며 아무런 도움도 없이 전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중국 혁명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을 보면
오히려 마오는 스탈린에게 의존했으며 그의 지시에 복종하였다. 스탈린은 마오에게 항상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며 마오 역시 종종 스탈린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지만, 대체적으로 마오는 스탈린을 상전처럼 떠받들면서 마치 부하처럼 행동하였다. 이 점은 소련의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유고의
지도자 티토와 다른 점이다.
저자 판초프의 눈에 비친
마오쩌둥은 단순히 위대한 혁명가도, 폭군도 아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어느 한가지로 평가할 수 없으며 그야말로 다양한
면을 가진 모순적인 인간이다. 그는 농담을 즐겨 했으며 누구나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에드가
스노가 마오의 매력에 빠져든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동시에 마치 종교 지도자와 같은 경건함도 있었다.
1971년에 마오를 만난 키신저는 마오의 뒤에 아우라가 보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매우 권위적이고 딱딱하고
엄격하여 거의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던 장제스에게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겉모습과 달리 속으로는 매우 격정적이었으며 일단 마음 속으로 누군가에 대한 증오심을 품으면 언제까지고 기억해 두었다. 또한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변덕스러웠기에 측근들조차도 마오의 기분을 종잡을 수 없었다. 한번 그의 눈 밖에 나거나 의심을 품게
한 사람들은 누구도 용서가 없었다. 펑더화이, 류사오치, 가오강, 천이, 린뱌오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또한
장제스에게는 없는 모습이다. 장제스가 마오보다 더 관대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궁지로 몰아서 비참하게 죽이는 일은 없었다. 그런 점이 어떤
의미에서는 장제스가 마오에게 패배한 이유이기도 하다. 원래 권력이란 비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여느 2류, 3류의 독재자들처럼 자신의
권좌에만 눈이 먼 독재자가 아니다. 그는 더 나은 중국 사회를 꿈꾸던 이상가이자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쉽, 행동력을 갖춘
지도자였다. 아편전쟁 이래 덩치만 클 뿐 외세의 먹이에 불과했던 나약한 중국을 다시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한 것은 마오쩌둥의 역량이다.
그는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 문제는 그 믿음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자신은 항상 옳다는 절대적인
믿음과 어떠한 오류와 무지함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독선이 자신은 물론이고 중국 인민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어떤 역사적 위인을 평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 공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말은 실상 과오가 큰 인물에 대하여 작은 공을 내세워 큰 과를 덮으려는 것에 불과하다. 애초에
공과라는 것이 무엇인가. 뭐가 공이고 뭐가 과인지 어떤 잣대로 나눈단 말인가. 더욱이 공이 있다고 해서 죄를 덮을 수 있는가. 마오쩌둥 역시
마찬가지이다. 덩샤오핑의 "공7과3"이라는 평가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발언일 뿐, 객관적인 근거나 설득력 있는 논리가 뒷받침된 것도 아니다.
마오의 과오는 분명하다. 그는 폭력과 기만으로 중국을
통치하였으며 의도가 어떠했건간에 마오가 죽었을 때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낙후되고 가난한 나라였다. 또한 마오는 중국이 서구에 비하여 뒤떨어지게
된 가장 큰 장애물이 중국 사회의 뿌리깊은 봉건 문화 때문이라면서 "우파 투쟁"을 반복했지만 그렇게 해서 얼마나 봉건 잔재를 없앴는가. 신분제
문화나 관료들의 권위주의, 극심한 빈부 격차, 허황된 미신은 마오쩌둥이 죄악이라고 규정했지만 아직까지도 중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는 마오가 봉건 잔재를 없앤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바로 봉건 잔재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의
황제였다. 그런데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이것이
마오식 개혁의 한계였다.
그렇다면
마오의 공은 무엇인가. 그는 공산당의 천하를 만들었다는 것 외에 아무런 공이 없는가. 그의 가장 큰 공은 중국인들에게 "중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의미가 있다.
원래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소위 "중화주의"란 왕조와 소수 지배계층의 사상일 뿐, 대다수 민중과는 상관없다. 솔직히 농민들
입장에서 지배자가 한족이건 이민족이건 뭐가 다른가. 그런데 20세기에 와서 처음으로 중국 민중에게 "중국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준 것은
쑨원이었다. 쑨원의 뒤를 이은 장제스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국민 전쟁을 수행하였다. 중국 역사에서 반복된 주변 이민족의
침입은 왕조와 이민족의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들에게 봉건적인 개념에서의 이민족과의 항쟁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싸움으로
인식케 하였다.
그리고 마오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싸워 무승부를 이루어내면서 중국이 더 이상 외세에 무력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지금 중국이 세계 무대에서 당당하게 주장하는 대국굴기, 중국인들의 콧대 높은 중화사상은 다름아닌
마오가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중국인들이 마오를 "영웅"으로 평가하는 이유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중국은 많은 대가를 치루어야
했고, 주변국들에게는 중국식 제국주의로 비추어지지만
말이다.
1천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이조차도 마오라는 인간에 대하여 알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많은 중요한 부분이 수박 겉핡기식으로 넘어가는 느낌이다. 전반부는
주로 마오가 정권을 쟁취하는 과정에서의 권력 투쟁을 다루고, 후반부는 그의 삽질을 다룬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드물게 보는 마오 평전이기에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