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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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고전, 빠른 출간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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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
이해영 지음 / 사계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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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할 계획이 없다"

▶ 2022년 2월 24일 새벽 5시 50분, 우크라이나에서 '특별군사작전'을 선언한 푸틴. 어디까지나 돈바스의 친러 주민들을 우크라이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제한전이라는 그의 말과는 달리, 러시아군은 처음부터 키이우를 비롯한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를 무차별 폭격하여 많은 민간인의 피해를 초래했다. 더욱이 단순히 돈바스 주변에서 우크라이나군을 밀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수도 키이우를 노렸다는 점에서 푸틴의 진짜 속셈은 젤렌스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속국으로 삼겠다는 얘기였다.


세상에는 음모론이라는 것이 있다. 대표적으로 진주만 기습 유도설. 루스벨트가 유럽 전쟁에 끼어들기 위해서 일부러 일본을 도발했고 일본이 진주만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면서 모르는 척했다는 것이다. 즉, 일본은 루스벨트의 덫에 걸렸다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한 버전으로 미국에 의한 남침 유도설이 1980년대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창 유행하기도 했다. 물론 통킹만 사건처럼 냉전 시절 미국이 정신줄 놓고 자작극을 벌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대개의 음모설이란 그럴싸하게 포장하면서도 핵심적인 증거는 내놓지 못한 채 정황적인 추론과 논리 비약, 확증편향적인 끼워맞추기식 결론이다. 여기에는 공통된 논리가 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우리를 속이고 있으며 진실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람들의 의심을 자극할지는 몰라도 근거가 부족하기에 비판받기 일쑤이다. 무엇보다도 의도가 어떠하건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꾸어 놓고 전쟁 발발의 책임을 물타기 한다는 점에서 실로 무책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 사이 전황은 적어도 세번은 바뀌었고 어느 쪽도 주도권을 쥐지 못한 채 교착 상태에서 국지전을 반복하는 형국이다. 작년 이맘 때만 해도 어느 누구도 전쟁이 이렇게 길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듯 하다. 서방 측 언론들은 사흘이면 키이우가 함락될 것이라고 떠들었고 심지어 미국은 젤렌스키더러 폴란드로 망명을 권고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주먹을 치켜 들기만 해도 간단히 이길 거라고 여겼던 푸틴이 베이징 올림픽을 망치지 말라는 시진핑의 비위를 맞추느라 침공을 연기하는 바람에 우크라이나군에게 대비할 시간을 준 것도 있지만, 젤렌스키가 끝까지 수도에 남아서 결사 항전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은 겨우 반년 전 아프간에서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보여준 것과는 그야말로 대조적이었다. 가니는 탈레반의 게릴라 군대가 수도 카불로 진격하자 정부 금고를 털어서 가족과 함께 제일 먼저 달아남으로서 아프간 군대가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었다. 남베트남이나 아프간의 사례를 보더라도 단순히 미국이 퍼준다고 해서 스스로 싸울 의지가 없는 이상 나라를 지킬 수 없음은 분명하다.


개전 다음날인 2022년 2월 25일 키이우에서 sns로 자신의 건재를 알리는 젤린스키. 그 전에만 해도 개그맨 출신의 아마추어 지도자로만 여기던 그의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우크라이나의 영웅으로 거듭났다. 푸틴 눈치를 보느라 강건너 불구경하던 국제사회가 뒤늦게 지원에 나선 것도 단순히 약자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젤렌스키의 매력 덕분이었다. 제아무리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등뒤에서 지지했다고 한들, 남베트남의 응우엔 반티에우나 아프간의 가니같은 '개자식'이었다면 전쟁은 대번에 우크라이나의 패망으로 끝났을 것이다.


평화로울 때 권좌에 앉아서 부귀영화를 탐하는 자는 많아도 국난의 순간에 국민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지도자란 결코 흔치 않다. 20세기를 통틀어 영국 본토 항공전의 처칠과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다비드 벤구리온 정도일까. 멀리 볼 것 없이 당장 우리 현대사만 해도 말로는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며 큰소리치다가 정작 적이 쳐들어오자 제일 먼저 튀었고 외세의 힘으로 돌아와서는 비열하게도 미처 달아나지 못한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아서 처단했던 지도자가 있지 않았던가. 


개전 초반 우크라이나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질 것이 뻔한 싸움에 판돈을 걸 수 없다는 식으로 눈치 보기만 하던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군이 의외로 잘 싸우자 비로소 조금씩 원조를 시작했다. 하지만 서방의 원조가 본격화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부차 학살 사건이었다. 4월 초 키이우 전투에서 패배한 러시아군이 철수한 자리에서 온갖 약탈은 물론이고 군인 포로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대량 학살한 증거가 만천하에 공개되었기 때문이었다. 국제 사회의 여론은 러시아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다. 푸틴의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천하의 악당이 된 것은 미국의 악선전 탓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가 자초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학살극과 전쟁 범죄가 러시아군의 만행이 아닌 우크라이나의 자작극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상 말이다.


2022년 4월 6일 부차에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시신을 옮기는 우크라이나 경찰관들. 물론 미국 역시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민간인들을 오폭한 예는 많이 있지만 적어도 미국인들은 이런 행태를 용납하거나 옹호하지는 않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민간인을 상대로 조직적인 학살을 벌였으며 푸틴은 관련자들의 처벌은 고사하고 어떠한 진상조사조차 거부했다. 그가 국제사회를 설득하기보다 오히려 핵으로 위협하는 것은 스스로도 명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는 얘기이다. 심지어 러시아인들조차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오히려 그게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심각한 모럴 해저드를 보여주었다. 한 러시아 병사가 아내와 통화한 내용에서 우크라이나 여자를 강간해도 좋다는 말이 공개되면서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서방 일각에서는 한쪽 편을 드는 것에 반감을 드러내면서 남들과 똑같은 응원을 하지 않겠다는 자들도 있다. 푸틴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맞지만 푸틴만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원조가 오히려 전쟁을 장기화하여 희생자를 늘린다고 비난한다. 그 놈의 주권이 사람 목숨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말로는 세계 평화를 들먹이지만 속내는 분명하다. 너희 우크라이나 때문에 엄한 우리한테까지 불똥 튀게 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이들에게 우리 같은 대중은 서방 언론들의 거짓 뉴스에 놀아나는 우매한 존재이며 우크라이나가 눈 딱감고 푸틴에게 영토를 내주면 만사가 원만하게 해결될 것인데 젤렌스키 한 사람의 똥고집 탓에 전 세계가 제3차 세계대전의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고 여기는 듯 하다. 우리 눈에는 지금이라도 손 털고 물러서야 할 쪽은 푸틴인데 말이다. 말 안 통할게 뻔한 푸틴보다는 젤렌스키가 아무래도 만만하기 때문일까. 원래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것이 냉엄한 국제 현실이고 세상 인심이라고 하지만 연신 두들겨 맞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로서는 "때리는 시엄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고 할 성 싶다.


얼마 전 국내에서도 음모론 냄새가 물씬 나는 책이 나왔더라. 우크라이나 전쟁의 감독은 미국이고 젤렌스키가 연기했다나. 정작 푸틴의 배역을 쏙 빼놓다니 무슨 들러리 취급도 아니고 우리의 푸틴 기분 나쁠 듯. 저자는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미국이 감독하고 젤렌스키가 연기하는 드라마'인가. 저자의 주장을 몇가지로 정리하면 대략 이러하다. 


  1.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푸틴의 영토욕 탓이 아니라 우크라이나가 민스크 협정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2. 그동안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공공연히 도발했다. 그 뒤에는 러시아를 견제하는 미국 네오콘이 있다.

  3. 유로 마이단 사건 이후 우크라이나 지도부는 네오 나치가 장악하고 있다.

  4. 미국과 서방은 나토를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무시하여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했다. 

  5. 돈바스와 크림반도 등 우크라이나 영토의 태반은 원래 러시아 영토였지만 구소련 시절 억지로 뺏겼다. 

  6.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돈바스의 친러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7. 러시아군이 키이우에서 패퇴했다는 것은 서방의 날조이다. 푸틴은 성동격서의 전략을 썼을 뿐이다. 

  8. 러시아군이 전선에서 삽질하고 있다는 것은 죄다 가짜 뉴스이다. 지금 박살나는 쪽은 오히려 미국이 양성한 우크라이나 군대이다. 

  9.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원조하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전쟁을 일부러 장기화하여 러시아를 무너뜨리기 위한 책략이다. 러시아군을 이길 수 있는 최신 무기를 주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10. 세계 여론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부차 학살 사건의 진상은 아직 알 수 없으며 전쟁이 끝나고나 따질 일이다.

  11. 우크라이나도 돈바스에서 학살과 만행을 저질렀으므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자격이 없다 등등....


러시아는 침략 반대 및 주권과 영토의 불가침을 규정한 국제법 최고 강행규범을 위반했다. 하지만 동일한 규범은 우크라이나 내 소수 민족인 돈바스 민중의 '자결권' 역시 확고하게 승인하고 보장한다. 심지어 이들의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의무이다. 이런 관점에서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지만 포로셴코와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 내 돈바스를 침략했다. - p.24


민스크 협정은 결코 이행되지 않았다. 포로셴코의 말처럼 우크라이나는 협정 이행에 진정성을 보이지 않았다. (중략) 어쨌든 러시아는 이 협정으로 갈등을 봉합했다고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즉 병합의 대상을 크림에서 돈바스까지로 확장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중략) 푸틴과 라브로프가 이 전쟁은 강요된 결정이었다고 말하는 이유-우크라이나가 민스크 협정을 이행했다면 전쟁은 안 일어났다-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 p.122~123


전쟁은 2014년에 시작되었다. 지금은 그때부터 이어진 전쟁의 한 경과점이다. 또한 이 전쟁은 미국이 감독하고 젤렌스키가 연기한 드라미다. 과거 소련에게 그랬던 것처럼 미국은 이번에도 러시아의 약점인 경제를 공격해 주저앉히려 했다. 아프가니스탄전쟁 10년 만에 소련이 붕괴되었다. (중략) 전쟁은 이미 예견되었다. 우크라이나가 갑자기 당한 것도 아니고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군이 갑자기 밀어닥친 것도 아니다. 미국과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적어도 독일과 프랑스도 이미 오래전부터 전쟁을 예측했다. 그러기에 당연히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막지 않은 것이다. - p.124~125


양대 분리 공화국에 대한 우크라이나 군대의 대량 학살, 전쟁 범죄 및 인종 청소 등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러시아는 돈바스 시민에 대한 보호 책임에 근거하여 군사 행동을 불가피하게 개시했다. (중략) 젤렌스키기의 나토 가입 시도는 우크라이나 영역 내 러시아를 겨냥한 핵미사일 배치로 귀결될 것이고 우크라이나의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러시아가 적의 공격을 검증하고 반격할 시간을 박탈한다. (중략) 결론적으로 러시아의 군사 행동은 유엔헌장 제51조에 규정된 집단 자위권에 해당한다. - p.127


키예프 전장에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을 단순히 기만한 것이 아니라 적의 대병력을 수도에 고착시켰다. 이 작전의 목표는 적의 돈바스 지원을 막는 것이다. - p.138


미군이 세계 최강이라는 말은 근거 없는 신화에 불과하고 나토가 훈련시킨-사실상 나토군인-우크라이나군은 현지 실정에 맞지 않는 전투 교범 때문에 러시아군의 포병 중심 기동전에 속절없이 무너졌다는 말이다. - p.154


우크라이나의 진지전은 압도적인 화력 지원을 받는 러시아군의 기동전에 속수무책이다. 경제전을 통한 압박도 푸틴의 노련한 대응과 러시아의 경제력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위태로워진 쪽은 서방의 지도자들이다. 요컨대 남은 방법은 외교를 통한 해결 뿐이다. - p.162


부차 사건이 발생했을 때 키예프 방면의 러시아 부대는 전략적 후퇴 중이었다. 상부의 지시가 있거나 과거의 나치 총살부대처럼 명백한 이데올로기적 동기가 있는게 아니라면, 대개 저런 학살극은 지휘체계가 붕괴된 채 퇴각하다가 낙오된 병사들이 저지른 일탈이다. (중략) 유감스럽게도 이런 사건의 진상은 교전 당사국 중 한쪽이 무조건 항복하거나 국가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되어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는 한 어렵다. (중략) 부차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잠정적이다. 친러시아 부역자의 존재를 확인하고 우크라이나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을 가능성이 방송된 것은 진실로 가는 교두보 하나를 확보했다고 할 만 하다. - p.200


러시아 연방에 가입한 돈바스 양대 공화국을 러시아, 시리아에 이어서 북한이 세번째로 법적 승인하고 그 결과 우크라이나가 북한과 단교한 것은 우리 현대사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북한은 이번 빅스텝으로 전 세계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브릭스 플러스와 글로벌 사우스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반면, 한국은 세계 인구의 15%에 불과한 집단 서방에 속해 있다. 그 결과 친미, 친젤렌스키 진영에 속한 한국은 경제적, 군사적 이유로 어정쩡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 p.278~279


북한은 기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서 발을 뺐거나 뺄 것으로 보인다. 대신 유라시아 프레임워크를 바라보든지 일대일로에 올라타든지, 아니면 새로운 중러 전략 협력과 중러 대 미국의 경쟁으로 발생한 저 바다처럼 넓은 틈새 공간을 만끽하든지 그 사이에서 행동을 결정하려 할 것이다. 즉, 새로운 선택지를 찾고 있다. 누구보다 빨리 돈바스 양대 공화국을 승인하고 노동자 파견을 타진한 것으로 봐서 그렇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낡고 현실성 없는 옛날 레코드판만을 틀고 있다. - p.300


300여 페이지에 걸친 장황한 설명의 결론은 한마디로 나쁜 건 푸틴이 아니라 미국이고 젤렌스키라는 것. 하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납득가지 않는다. 저자의 논리는 푸틴도 잘못이 있지만(어쨌든 그가 전쟁을 일으킨 것은 부정할 없는 사실이므로) 젤렌스키도 잘한 건 없다는 식의 전형적인 양비론이자 물타기이다. 게다가 그 근거가 대부분 푸틴 입장을 대변하는 '카더라'식 추론이라는 점이다. 과연 이번 전쟁은 미국이 기획했고 푸틴은 뻔히 알면서 눈 뜨고 미국 손아귀에 놀아나는 어리석고 수동적인 존재인가. 그러면서도 푸틴은 적절하게 대처하고 있고 그런 푸틴에게 휘둘려서 쩔쩔 매는 쪽은 미국이라는 것이 저자의 모순된 주장이기도 하다. 명색이 국제관계학부 전문가라는 양반이 열강들의 전략적 대결을 한낱 장기판 수싸움 쯤으로 여기는 것 아닌가.

▣ 우크라이나가 민스크 협정만 잘 지켰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푸틴 지지자들이 '전가의 보도'마냥 들먹이는 것이 민스크 협정이다. 민스크 협정이란 러시아와 벨로루시의 중재 아래 2014년 9월 5일 우크라이나에서 분리 독립에 나선 돈바스의 두 친러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간의 총성을 멈추기 위한 평화 협정이다. 그러나 이 협정은 어디까지나 전투 중지에 목적이 있었을 뿐, 근본적인 해결책보다는 우크라이나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이었고 따라서 깨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우크라이나인들 입장에서는 외부의 강요에 의한 것이기에 자국의 주권을 침해한다는 점, 무엇보다도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이전부터 돈바스 공화국의 뒷배 노릇을 하고 있던 러시아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약도 두지 않은 반쪽짜리 협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협정을 어긴다고 비난했지만 그 역시 돈바스 친러 공화국이 우크라이나에 맞설 수 있게 원조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싸움을 부추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애초에 우크라이나에서 민족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돈바스가 분리 독립에 나선 배후에 푸틴의 손길이 없었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단적으로 마이단 봉기로 쫓겨나 러시아로 망명한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명색이 한 때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었음에도 러시아가 제 나라를 침략하고 제 국민을 학살하는데도 푸틴더러 항의는 커녕 입도 뻥끗하지 않는다. 그가 처음부터 푸틴과 내통한 첩자인지 누가 알겠는가. 푸틴은 본질적으로 권위주의 정권의 독재자이며 정적에게 방사능 홍차를 선물로 보내어 암살하는, 김정은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니까 말이다.


야누코비치가 쫓겨난 후 공개된 그의 초호화 궁전. 그는 친러, 반러를 떠나서 지도자로서 기본 자질 자체가 없는 인간이었다.


저자는 젤렌스키가 야당을 탄압한 비민주적인 지도자라고 비판한다. 그렇다고 친들 20년 넘게 장기집권하는 푸틴과 비교한다면 적반하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푸틴이 정말로 평화를 운운할 생각이었다면 우크라이나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협정을 지키라고 위협할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돈바스에서 손을 떼야 했고 돈바스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원칙적으로 인정하면서 어디까지나 우크라이나가 자치권을 용인하는 선에서 중재해야 했다. 평화 협정은 서로의 신뢰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가능한데 푸틴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자신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 러시아의 무력 개입은 우크라이나가 돈바스의 '자결권'을 침해했기에 정당하다?


세상 어느 나라가 제 나라 영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용납한다는 말인가. 중국만 하더라도 국제사회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의 독립 운동을 가차없이 탄압함은 물론이고 사실상 별개의 나라인 타이완에 대해서도 제 나라의 일부라면서 남들이 입도 대지 못하게 만든다. 저자는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의무라고 하는데 그러는 러시아는 체첸을 박살내지 않았던가. 당장 푸틴이 옐친의 눈에 들 수 있었던 것도 수년 채 지지부진하던 체첸 독립운동을 사정없이 진압한 공 덕분이었다. 제1차 체첸 전쟁에서 어설픈 작전으로 체첸군에게 완패했던 러시아는 체첸의 자치권을 인정키로 약속했지만 새로이 권력은 잡은 푸틴은 제2차 공세에 나섰고 수도 그로즈니를 말그대로 초토화시킴으로서 전쟁을 끝냈다. 체첸에서 러시아군이 저지른 만행은 돈바스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저지른 것과는 비교할 바가 아닐 정도였다. 그런데 과연 누가 누구더러 자결권을 운운한다는 말인가. 적어도 푸틴은 그럴 자격이 없을 듯 하다. 저자는 푸틴이 언제부터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위해 투쟁하는 박애주의자가 되었다는 말인가. 한번 물어보고 싶다.


러시아군의 공격 전과 공격 후의 그로즈니. 러시아군은 체첸군이 시가전을 하지못하도록 아예 시가지를 철저히 박살냈다.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약 100만명 정도였던 체첸인구 중 20만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럼에도 러시아를 상대로 감히 '자결권'을 운운하는 나라는 없었다. 푸틴이 말하는 자결권이란 어디까지나 러시아인들을 위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 돈바스와 크림 반도는 원래 러시아 영토이니 러시아가 가질 권리가 있다?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이 한창이던 2022년 9월 23일 러시아는 서방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루간스크, 도네츠크, 헤르손, 자포리자에 대한 주민 투표를 강행하여 자국에 병합했다. 시간을 들여서 충분한 명분을 쌓아도 부족할 판국에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점령지를 강제로 병합하는 것은 푸틴도 어지간히 다급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푸틴 말마따나 제아무리 그 동네에 러시아계 주민들이 많다고 한들, 과연 그 주민투표라는 것이 북한의 선거보다 더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푸틴은 돈바스와 크림 반도가 러시아 땅이었지만 구소련 시절 레닌과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에게 넘긴 것이고 자신들의 것을 되찾아 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일리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무력 침략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 따지면 19세기 러시아가 그 땅을 빼앗기 전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는 사실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터키에게도 똑같은 권리를 줘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이 세상에는 영토를 놓고 서로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나라들이 얼마든지 있다. 당장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다. 푸틴의 논리는 결국 힘 있는 놈이 장땡이라는 말 아닌가.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미국이 먼저 약속을 깨뜨리고 나토를 동진시켰기 때문이다? 

저자는 냉전 종식 당시 미국은 소련에게 나토를 확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 그 약속을 먼저 깨뜨렸으며 러시아는 자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예방전쟁'으로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면 나토의 핵무기가 배치될 것이기 때문이란다. 나로서는 몇가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한 나라가 이웃 강대국의 위협에 맞서서 자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집단안보체제에 가입하고 말고는 그 나라의 주권 문제가 아닌가. 러시아의 안보만 중요하고 그 러시아의 위협을 받는 약소국의 안보는 알 바 아니라는 말인가. 애초에 강대국들이 자기들끼리 세력권을 정하기 위해서 약소국들을 놓고 야합했다는 것부터 제국주의 시절의 구태의연한 행태이며 비판받을 일이다. 설사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을 시도했다고 한들 러시아로서는 굳이 무력을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저지할 방법이 있다는 점에서 어불성설이다. 나토로서는 러시아의 반발을 살 것이 뻔한 줄 알기에 우크라이나를 받아들일 수 없을 뿐더러, 나토 가입국 중 한 나라만 반대해도 가입을 거부당하기 때문이다. 나토 국가들 중에서 헝가리, 터키를 비롯하여 푸틴과 친한 나라들이 여럿 있지 않은가. 실제로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나토 가입을 거부당하고 있다. 친 서방이 곧 반러도 아닐 뿐더러, 나토 가입이 러시아를 위협하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나토에 가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나토의 핵무기가 배치된다는 것도 논리 비약이다. 만약 푸틴 입장에서 미국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미국을 상대로 따질 일이지 만만한 우크라이나에게 화풀이하는 것은 실로 비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미국은 러시아의 대항마로 삼기 위해서 우크라이나에게 엄청나게 퍼주었다?

저자는 미국 네오콘이 이번 전쟁을 유도할 요량으로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무기 원조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군은 미국식으로 훈련받았고 사실상 나토군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과연 미국은 우크라이나에게 도대체 얼마나 퍼주었다는 말인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긴장이 본격화되는 2014년부터 전쟁 발발 직전인 2021년까지 미국의 군사 원조는 연간 많아야 4억 달러 정도에 불과했다. 8년 동안 합해봐야 도합 30억 달러를 넘지 않았다. 참고로 러시아의 2021년 국방예산은 410억 달러에 달한 반면, 우크라이나의 국방예산은 100억 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여기에 몇 억 달러 쯤 추가되었다고 한들 양국의 밸런스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듯 하다. 서방제 제블린 미사일이 러시아군 전차를 상대로 제법 활약을 했다고 하지만 개전 이후 서방의 원조가 본격화되기 전까지(심지어 지금도) 우크라이나군의 주요 무기는 대부분 구소련 시절의 것이었다. 2014년보다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본문에서 저자 자신도 언급하듯 무기와 장비가 여전히 형편없었다. 미국의 관심사는 당장 죽을 쑤고 있는 아프간과 이라크였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우크라이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공격하지도, 그럴 능력도 없었다. 그럼에도 푸틴이 침공을 강행한 것은 우크라이나가 정말로 러시아를 위협할만큼 강해져서가 아니라 이대로 놔두면 강해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푸틴이 바라는 우크라이나란 구한말의 조선처럼 영원히 허약한 이웃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망친 것은 우크라이나를 손쉽게 조질 거라는 푸틴의 자만심 탓이지, 젤렌스키 탓이 아니다.



▣ 러시아군의 키이우 철수는 패배가 아니라 우크라이나군을 유인하기 위한 푸틴의 의도이다?

저자는 러시아군이 결코 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키이우에서 물러난 것은 숫적으로 열세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주력을 수도에 묶어 두기 위한 전략적 후퇴였다고 주장한다. 모든 것은 푸틴의 계획대로라는 것이다.


얼핏 보면 그럴싸한 주장이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정말로 패배해서 쫓겨난 것인지, 아니면 유인작전인지 저자가 푸틴의 머리속이나 러시아군의 작전 계획서를 직접 보지 않는 한 그걸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그건 전쟁이 끝나고 정보 공개와 사료 연구를 거친 뒤에나 나올 수 있는 얘기이다. 지금 단계에서 성급하게 '푸틴 킹왕짱'이라면서 떠들 일이 아니다. 전쟁이란 속전속결이 원칙이다. 무기와 장비의 우세함만 믿고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군을 제압하겠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으며 푸틴이 전쟁을 모른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공자3배원칙이라는 말이 있듯, 적국을 침공하려면 훨씬 많은 병력과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걸프전 당시 미군은 이라크군보다 질적으로는 물론이고 머리수에서도 훨씬 많았다. 그럼으로서 압승을 거두었다. 푸틴은 그저 미국이 간섭하기 전에 침공을 서두르느라 준비에 소홀했을 뿐이다. 그런데 무슨 유인작전이고 의도적인 후퇴인가. 전쟁이 이토록 장기화되어 뒤늦게 징병령을 선언하여 국민들의 반발을 사고 일선 장군들의 목이 여럿 날라가고 고위 관료들이 의문의 시체로 발견되는 것이 죄다 푸틴의 계획이란 말인가. 

오히려 푸틴이 욕심을 덜 부려서 모든 역량을 돈바스에만 집중했더라면 러시아군과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우크라이나군을 손쉽게 밀어냈을 것이다. 원래 푸틴의 침공 명분은 우크라이나가 민스크 협정을 어기고 병력을 동원하여 돈바스의 탈환을 노리기 때문에 친러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돈바스를 점령하는 것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무력 시위를 하는 것만으로도 젤렌스키가 물러서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우크라이나 전체에 있었다. 또한 이참에 젤렌스키 정권을 전복시켜 친러 정권이 통치하던 2014년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그러기에는 러시아군의 준비가 불충분했고 국제사회를 상대로 설득하려는 외교적인 노력도 없었기에 도리어 궁지에 몰린 쪽은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러시아가 되었다. 저자는 서방의 제재가 러시아에게 생각만큼 큰 타격을 주지 못한다고 항변하지만 굳이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낙인찍히고 푸틴 만이 아니라 러시아인들 전체가 욕을 먹어서 좋을 것이 뭐가 있다는 말인가.



저자는 1979년 중월전쟁 당시 덩샤오핑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상기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덩샤오핑은 단순히 무력에만 호소한 것이 아니라 사전에 미국과 동남아 여러나라를 상대로 중국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말을 듣지 않는 베트남을 혼내주기 위함임을 사전에 설득하여 이들의 경계심을 풀었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쪽은 베트남이었다. 중국군이 베트남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면서 생각처럼 전쟁이 돌아가지 않자 덩샤오핑은 전쟁을 확대하는 대신 미련 없이 철군시켰다. 베트남에게 중국의 힘을 과시한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중국은 미국과 프랑스처럼 베트남의 수렁에 빠졌을 것이고 서방 또한 언제까지고 지켜보지 않았을 것이며 중국의 개혁개방은 완전히 실패했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푸틴보다 훨씬 현명했다. 

푸틴의 행태는 1938년 독일인들이 많이 산다는 이유로 슈데텐란트를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듣지 않으면 무력을 쓰겠다는 히틀러의 판박이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 때에는 서방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위기를 나몰라라 했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구소련의 일원이었던 조지아와 발트3국은 물론이고 폴란드와 루마니아 등 냉전 시절 소련의 압제를 당했던 나라들은 남의 집 불구경할 일이 아니라면서 앞장서서 지원에 나서고 있다. 심지어 핀란드, 스웨덴조차 오랜 중립을 깨뜨리고 나토 가입을 서두르고 있다. 언제 자신들이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될 지 모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푸틴은 세상에서 제일 많은 땅을 가진 주제에 더 가지려다가 댓가를 치르는 셈이지만 저자는 이들의 우려가 죄다 미국의 선동과 가짜 뉴스 탓이라고만 여기는 모양이다. 그런 주장을 하기 앞서 푸틴이 어째서 그토록 주변국들의 불신을 사게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듯.

일일이 지적하자면 끝이 없다.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어느 신문에서 보니까 이런 인터뷰를 했더라.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중국과 러시아를 적대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첨예한 글로벌 사회에서 친구를 만들어야지, 애써 적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하지만 적을 만들지 않겠다고 해서 눈치보고 비위를 맞추는 것은 엄연히 다른 얘기다. 우리가 왜 일본에게 분노하는가. 과거의 망령에 얽매여서거나 좌파의 선동 탓이 아니라 일본이 우리 자존심을 건들기 때문이다. 약소국이 대접받으려면 강대국들 눈치나 보면서 무작정 납작 엎드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잘못된 행동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명색이 교수라는 양반들이 그런 마인드니까 중국이고 일본이고 우리를 만만하게 길들이려고 하는 것 아닌가.


이 교수는 바이든 행정부를 겨눠 “이미 국내 정치는 망쳤고 겨우 우크라이나 하나 붙들고 있었는데 이것도 아주 최악으로 가고 있다”라며 “미국은 2차 대전 이후에 어떤 전쟁에서도 이겨본 적이 없는 나라다. 그런데 또 깨지고 있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라고 꼬집었다.

윤석열 정권의 행보를 두고는 “외교적 ·경제적 자살”이라는 강도 높은 비판이 나왔다. 

이 교수는 윤석열 정권을 향해 “러시아와 중국의 준동맹 관계가 신세계 질서의 한 축을 규정하는 기축적인 요인이다. 이 부분을 우선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라며 “(러시아와 중국이 포함된 국제기구) 브릭스와는 절대로 적대적이거나 대립적으로 가면 안 된다”라고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외교 공간에 시민사회, 대중들이 더욱더 진출하고 개입해야 한다”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 2022. 8. 29일자 자주시보 "이해영 교수 “신세계 질서 재편…중국, 러시아와 적대하면 외교·경제적 자살”" 본문 기사 : http://www.jajusibo.com/60


이 책을 통틀어 딱 한 가지 저자의 말에 동감하는 대목이 있다. "결국 문제는 한국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지정학적 대전환의 소용돌이 한복판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데 흔들림을 느끼지 못하는데 있다. 우리 사회의 '정치계급'들이 말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 정치인들이 바깥 세상 돌아가는데 둔감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한반도 주변 상황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데 여야를 막론하고 선거 때만 되면 누가 미국에 더 충성할 자격이 있는지 편 가르고 서로 싸우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크라이나 대신 돈바스를 선택한다고 더 나은 미래가 열릴 것같지는 않다. 제아무리 "영원한 적도, 우군도 없는 것이 국제사회"라고 하지만 박쥐마냥 어정쩡하게 양다리 걸치는 것만큼 세상에 미움 사는 것도 없는 법이니 말이다.





※ 출처 : [신작도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의 검은손이 벌린 일이다?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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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의 과학 - 리볼버, 피스톨의 구조와 원리가 단숨에 이해되는 권총 메커니즘 해설 지적생활자를 위한 교과서 시리즈
가노 요시노리 지음, 신찬 옮김 / 보누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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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법이지."

(The assault doesn't come from the gun. It comes from the person)


벌써 10여년도 더 전이지만, 우연히 사격장에서 클레이 사격과 권총 사격을 할 기회가 있었다. 여러 종류의 권총이 있었는데 콜드 권총을 골랐던 것같다. 38구경같은 리볼버보다는 자동권총이 멋있어 보였다랄까. 군대에서도 해 본 적 없는 권총 사격인데 괜히 똥폼 잡는 대신 소심한 성격에 두 손으로 손잡이를 꽉 잡고 천천히 그리고 신중히 쏘았다. 생각보다 반동이 제법 있더라. 군대 사격장에서 쓸 때와 다른 커다란 권총용 과녁인데도 과녁에 들어온 것은 대략 절반 정도였다. 처음 쏴본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고전 만화 시티헌터에서는 심지어 날아오는 총탄을 총탄으로 맞추던데 말이다. 스티븐 시걸이냐!

수많은 소년들에게 권총에 대한 로망을 심어준 만화 <시티헌터> 사에바 료가 쓰는 권총은 명품으로 이름난 콜트 파이슨 357. 강력한 위력과 명중률을 자랑한다는데 만화에서는 헬기도 떨어뜨리던가. 스티븐 시걸 맞네.

요금이 비싸서 몇 발 쏴보지는 못했지만 군대 사격과는 또 다른 스릴과 재미가 있더라. 대한민국 남자라면 대부분 군대에서 사격할 기회가 있다. 그것도 무려 공짜로! 하지만 제아무리 민간인 시절 총기에 관심 많은 밀덕이라고 해도 군 사격날을 무슨 소풍이라도 가는 양 신나서 기다리는 인간은 없으리라. 고참들 사이에서 잔뜩 긴장한 채 내 차례가 오기만 기다려야 하니 뭔 로망 따위가 있겠나. 하물며 성적이 신통찮거나 그 놈의 탄피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그 날은 다 같이 끝장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제대하고 예비군 훈련 때 사격 역시 현역 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기분이더라. 내 나이보다 훨씬 오래된 M1 칼빈이 혹시라도 폭발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이 앞선 것도 있지만 군대 사격은 아무래도 의무이기 때문일까. 역시 뭐든간에 돈 주고 해야 제 맛이다. 딸래미가 좀 더 크면 사격장에 데려가 볼까 싶다. 분단 국가에서 여자도 권총 정도는 쏠 줄 알아야.

예전에 레드리버 출판사에서 나온 <글록>이라는 책을 서평한 기억이 난다. 글록이라는 권총을 통해서 미국 사회의 총기에 대한 숭배 문화의 민낯을 파헤친 책이었다. 우리가 미국을 바라볼 때 가장 이해되지 않는 문화가 총기 문화가 아닐까 싶다. 잊을 만 하면 총기 사고가 터지고 어린 아이가 총기 오발로 죽었다거나 살인마가 도심지 한복판이나 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하여 무고한 시민과 학생 수십명이 살해되었다는 뉴스가 나오지만 정작 미국인들은 무덤덤한 느낌이다. 911테러 때 미국 전체가 분기탱천하여 광기에 휩싸였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총기 사고가 날 때마다 총기 반대론자들은 총기를 규제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매번 그 때뿐이다.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국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라는 수정헌법 2조 때문이라지만 우리로서는 그 법 만든 게 몇 백년 전인데 명색이 21세기에 아직도 안 바꾸고 그런 캐캐묵은 얘기를 들먹이나 싶다.

반대로 총기 찬성론자들은 미국은 워낙 넓어서 공권력이 닿지 않는 곳이 많아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무장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총기 협회의 유명한 슬로건이 "총을 가진 악한사람을 막을수 있는건. 총을 가진 선한자 뿐이다"라던가.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여태껏 미국에서 총든 살인마가 무고한 시민들을 쏘아 죽였다는 뉴스는 여러번 들었어도 그 살인마가 무장한 시민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미국에 그렇게 많은 총이 있다하니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권총이든 기관단총이든 하나씩 가방이나 핸드백에 넣고 다니다가 살인마가 살인을 저지르기도 전에 사방에서 총알 세례를 먹여줄 것같은데 말이다. 그 총들은 다 어디 가 있대.

미국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테러와의 전쟁"이라며 어마어마한 국민 세금을 쏟아넣지만 정작 테러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죽는 총기에 대한 규제에는 무관심하다. 아랍인이 미국인을 죽이는 것은 나쁘지만 같은 미국인이 죽이는 것은 상관없다는 논리인지도.

미국은 남미처럼 공권력이 약한 나라도 아니고 미국인들에게 리비아나 아프간 사람처럼 유목민족의 전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맹수가 기다리는 사막이 아니라 대부분 도시에서 거주하는 미국인들 입장에서 총기는 자신을 지켜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위협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은 분명하다. 물론 미국인들 역시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총기 규제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단순히 정치인들이 총기 업체들의 돈을 먹어서도, 신성 불가침의 수정 헌법 때문도, 미국인들의 흔한 믿음 마냥 총이 평등을 상징하기 때문도 아니라(그런 점도 있겠지만) 누구나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로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총은 위험한 살인 도구라고 하지만 디자인이 멋있고 손에 쥐고 있으면 폼이 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잘 생긴 액션 배우가 권총 한 자루로 악의 세상을 평정한다. 이미 그렇게 세뇌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 로망을 포기하겠는가.

국산 K5권총. 이런 권총이라면 나도 하나 소장하고 싶지만 마눌님이 싫어할 것같다. 어차피 집에 놔둘데도 없고.

우리 사회는 미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총기에 대한 규제가 엄격하다. 하지만 우리 역시 마음 한켠에는 총기 로망이 있다. 어릴 때 명절날이 되면 동네 구멍가게에서 딱총 한 자루씩 사서 친구들과 총싸움을 했던 기억은 우리 또래 남자라면 누구나 있으리라. 그 때 맡았던 독특한 흑색화약 냄새는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어린 시절의 총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하여 취미가 모델건 조립인 어덜트들도 제법 있다. 나는 기회가 된다면 권총보다는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이나 미니건을 시원하게 쏘아보았으면 싶다. 돈이 엄청 들겠지만. 유튜브에서는 미국에 실제로 그런 사격장도 있더라. 솔직히 총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총을 팔아먹기에만 급급할 뿐, 제대로 된 관리나 사용법을 가르치는데에는 무관심한 인간들과 미국인들의 안전불감증이 나쁠 뿐.


평소 건프라에 관심 있는 사람을 위한 책이 나왔다. 보누스 출판사의 신작 도서 <권총의 과학>이다. 작년에 나온 <총의 과학>이 장총, 즉 라이플과 서브머신건, 기관총을 다루었다면 이번 책은 피스톨에 대한 것이다. 저자 가노 요시노리는 항공 자위대 출신의 무기 전문가이자 작가로서 지금은 예편했다고 한다. 검색해보니 무기 이외에도 보병 전술이나 항공 전술, 전차 전술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썼더라. 진정한 밀덕인 셈.

이 책에서는 권총의 종류부터 구조, 권총과 소총이 어떻게 다른지, 권총탄의 종류, 조준 장치, 취급법, 사격술, 탄도학 등 말그대로 권총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전문가들이나 알아먹을 법한 딱딱하고 지루한 학술 용어의 향유가 아니라 사진과 그림을 통해서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재미있게 풀어 쓴다.

읽다보면 꽤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당연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액션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들은 대부분 엉터리라는 것. 예를 들어 고전 서부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말 위에서 쌍권총을 쏠 수 없다는 것이나 자동차 차체는 엄폐물로 쓸 수 없다는 점, 제임스 맥어보이 주연의 영화 <원티드>에서 나오는 것마냥 폼 잡는답시고 총을 옆으로 눕혀서 쏘는 것은 '개지랄'에 불과하다는 것 등등. 결론은 권총으로 상대를 맞추기를 원한다면 최대한 근거리에서 제대로 된 자세로 제대로 쏘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사격시 표적의 겨냥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탄복이 실제로 총탄을 얼마나 막아낼 수 있는지, 물속에서 사격을 할 수 있는지, 오래된 탄약은 불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과 같은 평소 궁금해 할 만한 의문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일본 서적들 중에는 군사와 같은 전문적인 분야를 밀덕들의 취미에 맞추어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에 쉽고 재미있게 풀어쓴 책들이 많다. 때로는 이런 분야를 다루어서 도대체 몇 권이나 팔릴까 싶을 때도 있다. 그만큼 독자층이 두껍다는 얘기일 것이다. 출판 시장이 극도로 편중된 국내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이런 점만큼은 일본이 부럽다. 이 책은 평소 사격장을 찾거나 액션 코스프레에 관심 있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군인, 경찰 등 직업적으로 사격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한번 읽어두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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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히어로 - 미 해군 특수부대원의 회고록
마크 오언 외 지음, 이원철 옮김 / 혜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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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스크린을 압도하는 화려한 액션 신은 없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그래서 더 사실적이고 흥미진진한 영화였다. 무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이 감독을 맡았더라. 네이비 실 출신의 베테랑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 상사의 회고록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한다.

크리스 카일은 미 해군 최고의 저격수로, 그가 사실한 적병은 공식적으로만 160명, 비공식적으로는 250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야말로 진정한 인간 병기인 셈이다. 워낙 공포의 대상이라 이라크 반군들은 그의 목에 8만 달러의 현상금까지 걸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존 윅이나 <미션 임파셔블>의 탐 크루즈마냥 주인공이 수많은 악당들을 미친 듯이 쏘아 죽이고 정의를 실현한다는 따위의 말도 안되는 할리우드 식 영웅물이 아니다. <애너미 앳더 게이트>처럼 적 저격수와 대결하는 드라마틱한 긴장감도, 전장에서 꽃피는 로맨스가 있는 영화도 아니다. 따라서 주인공이 영화 내내 몇 명을 사살하는지 따위를 세워 볼 필요는 없다.

영화에서 크리스는 영웅이지만 그렇다고 람보는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총을 쏘는 것은 자신이 정의라서거나 또는 영웅 심리에 사로잡혀서가 아니라 그게 임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또한 주변의 누군가가 죽어나가는 일을 끝없이 경험해야 한다. 언젠가 자신 또한 적에 의해서 그렇게 될 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이 영화에서 영웅은 없다. 국가로부터 영웅이라 불리지만 PTSD(정신 외상)에 시달리는 한 평범한 군인이 있을 뿐이다. 그는 퇴역 후 자신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남긴 상처에 고통받는 참전 군인들을 돕는 일을 하지만 결국 2013년에 한 PTSD 환자에게 살해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보는 전쟁사는 지도자의 전쟁, 장군들의 전쟁이다. 그들이 위기의 순간에 어떤 결단을 내렸으며 군대를 어떻게 지휘하여 적군을 분쇄하고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는가만을 강조하면서 불후의 영웅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그 명령에 복종하여 전장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며 죽어 나가는 존재들은 높으신 분들에게는 한낱 종이 위의 숫자일 뿐이라도, 무기질로 된 장기말이 아니라 똑같이 감정을 가지고 생각을 하는 인간이다. 무명의 군인들이 집을 떠나서 가족과 헤어져 낯선 공간에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적을 상대로 죽기로 싸우는 것은 장군들의 장기말이 되기 위해서도, 영웅이 되기 위해서도 아닌, 그저 그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들은 졸병들의 전쟁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전쟁, 장군들의 전쟁만을 기억할 뿐이지만 말이다.

밀덕이라면 주목할만한 신작 도서가 나왔다. 혜람 출판사에서 나온 <노 히어로(원제 : No hero - the evolution of a navy seal>, 즉 '영웅은 없다'이다. 이 책은 한 군인의 회고록이지만, 흔히 평생을 야전에서 보냈다는 늙은 예비역 장군이 젊은 후대들 앞에서 자신의 인생 역경을 반쯤 미화하면서 공적은 과장하되, 실수는 축소하고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그 때가 좋았지"라는 식의 그런 뻔한 회고록과는 다르다.

저자는 세계 최강의 특수부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미 해군의 네이비 실 출신의 전직 병사이다. 마크 오언은 필명이고 본명은 매트 비소네트(Matt Bissonnette)라고 한다. 그는 네이비 실에서 14년 동안 복무하면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작전에 투입되었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전은 2011년 5월 1일 911테러 이래 아프칸과 파키스칸 산악지대를 이리저리 숨어다니며 10년 동안 미군이 몇 번이나 놓쳤던 빈 라덴의 은신처를 발견하고 사살한 것이었다. 국내에서도 그의 이전 작이자 빈 라덴 사살 작전인 넵튜스피어 작전 당시의 상황을 회고한 <노 이지 데이>가 길찾기에서 출간된 바 있다. 본인은 그 책이 보안 수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한동안 곤혹을 치르고 기밀유출죄로 무려 700만 달러에 달하는 벌금을 물었다고 하던데, 우리 독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그만큼 리얼하고 가감없이 썼다는 얘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벌금만 이 정도라면 도대체 책 팔아서 얼마나 번건지. 역시 미국은 대단함.

전작인 <노 이지 데이>가 빈 라덴 사살 작전의 비하인드를 다룬 책이라면, 신작인 <노 히어로>는 누구나 막연히 동경하면서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 세계 최강 특수부대원으로서 자신과 자신이 이끄는 네이비실 팀원들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삶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다. 하지만 공통점은 누구도 처음부터 영웅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원래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이들은 평범한 일상을 버리고 혹독한 훈련을 거쳐서 일당백의 특수부대원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내면은 남들이 추켜세우는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영웅이라는 것 자체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구의 존재가 아니던가.

저자 자신을 비롯하여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카리스마 넘치는 액션 배우도 아니고,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조차 없이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것같은 킬러들도 아니다. 평소에는 가족들과 안락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임무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다른 부대원들이 작전 중에 사고가 났다고 하면 걱정하고,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던 동료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으면 한없이 슬퍼하며, 책상물림의 높으신 분들이 어거지나 다름없는 임무를 내릴 때마다 불만을 터뜨릴 때에는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개 소시민일 뿐이다. 하지만 임무에 투입되는 순간부터는 진정한 프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개월 동안 정치인들과 언론은 오사마 빈 라덴 임무에 대한 네이비실을 축하해 왔다. "영웅"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돌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영웅"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쉽게 내뱉는 단어가 아니었으나, 지금 우리끼리는 그 의미 자체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이제는 모두가 영웅이었다."

"총알은 택시의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한발이 레이의 목을 깔끔하게 관통했고 다른 한 발은 그의 옆에 있던 다른 네이비실인 레리의 귀로 들어가 코를 통해 나왔다. 택시 운전사는 둘을 태운 채 그대로 병원으로 직행했고 레이는 자신의 셔츠로 피를 지혈하며 직접 응급실로 걸어 들어갔다.

"당시에 나는 그저 네이비실이 되는 것 자체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훈련이 어려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얼마나 어려울지에 대해 머리로 이해하기는 너무 어렸다. 확실한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모든 희생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저 내가 읽었던 책의 주인공들처럼 되고 싶었고 그때 당시에는 그 이유 하나로도 앞으로 나아가기에 충분했다."

"잠영은 지옥주로 불리는 5일 반나절의 혹독한 훈련을 포함해 BUD/S의 첫번째 단계에 해당했다. 지옥주에는 각 교육생이 모두 합쳐서 4시간 정도만 수면을 취하고 300킬로미터 이상을 달리며 매일 20시간 이상 체력단련을 해야 했다."

"직업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며 나는 모든 특수부대가 공통된 마음가짐을 공유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얽혀 있었고 같은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다. 평화로울 때에는 부대들 사이에 경쟁심이 있었다. 그러나 교전이 시작되면 팀워크를 위해 경쟁심을 버렸고 또 만약 우리가 모두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즉 임무를 완수하고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가장 위험한 임무에 자원했고 베크워드가 말했던 것처럼 "훈장, 시신 운구낭, 또는 둘 다"는 공통된 것이었다. 우리 모두 섀클턴이 약속했던 것처럼 "낮은 임금, 냉혹한 추위, 임흑천지에서의 긴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이유는 우리가 실패보다 죽음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후검토를 하며 나는 손가락 사이로 날카로운 파편을 굴렸다. 파편은 내 운 이상의 것을 생각나게 했다. 이는 운보다도 경험이 부족한 육군 대령이 분야별 전문가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 얼마나 쉽게 우리가 목숨을 잃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기관총에서 나오는 총구 화염은 마치 곡사포를 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뒤로 넘어져 등으로 땅에 넘어지는 순간 기관총 총열에서는 1미터 길이의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내 야간 투시경으로 보인느 모든 것들이 빛의 향연이었다. 적이 매섭게 기관총을 쏘아대며 총알이 머리 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번 파병은 나에게 열세번째 파병이었다. 나는 수년 동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인생의 일부를 바쳐왔다. 이는 더 이상 나에게 '이론'이나 '훈련'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때 나는 군 생활에서 처음으로 내가 알래스카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던 시절 꿈꾸었던 네이비실이 되는 목표를 비로소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네이비실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 북이 아니다. 네이비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지, 자신이 조국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했는지 자화자찬하는 책도 아니다.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을 정의의 전쟁이라며 옹호하지도, 그렇다고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의 회고록들마냥 이기적인 정치인들이 벌여놓은 명분없는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야 했는지 따위의 복잡한 정치 얘기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저자는 자신이 왜 네이비실을 처음 선택하게 되었는지부터, 네이비실의 혹독한 훈련을 어떻게 견디어 내었는지, 베테랑 군인이자 팀장으로서 겪었던 일들, 그리고 14년의 복무를 끝내고 제대를 선택하기까지를 얘기한다. 여기에는 한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그 시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들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 그 역시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많은 동료들을 잃었으며 누군가를 살인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저자가 죽는 순간까지 안고 가야할 짐일 것이다. 책의 제목대로 전쟁에서 영웅은 없다.

읽다보면 책의 많은 부분이 검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전작에서 정부의 검열을 받지 않은 덕분에 호된 경험을 한 저자가 이번에는 사전 검열을 받았고 그 바람에 민감하거나 보안에 저촉되는 부분이 일일이 지워졌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해서 읽는데 지장은 없다. 이 책에서 정치인들이나 장군들이 말하는 전쟁 회고마냥 거창하게 포장하거나 한편의 영화같은 드라마틱한 얘기는 없다. 그 전쟁 한복판에 있었던 한 사람의 평범한 군인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전쟁 이야기이다.


미국은 워낙 전쟁을 많이 하는 나라이다보니 참전 군인들의 회고록이 많이 나온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 병사들도 이러한 참전 수기를 충분히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우리가 미군처럼 실제로 최전선에 나서서 실전을 경험할 일은 없지만, 아프간과 이라크 등 곳곳에 비전투요원으로 파병되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해외 파병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들, 아쉬웠던 일, 어떤 일을 앞으로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지 등, 외교관이나 언론인, 장군들이 아닌 평범한 병사의 눈에서 바라본 전쟁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수기이자 훌륭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고록은 높은 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런데 여지껏 초임 장교나 졸병 출신이 이러한 수기를 내었다거나 언론에서 연재물로 다루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단순히 파병 기간이 너무 짧고 딱히 사건 사고가 없어서 글로 쓸만한 얘기가 없어서는 아닐진데 말이다. 필력의 문제인지, 관심의 문제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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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군벌 전쟁 - 현대 중국을 연 군웅의 천하 쟁탈전 1895~1930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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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0여년이나 된 일이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삼국지를 읽은 기억이 난다. 후한 말 황건적의 난과 함께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젊은 시절의 유비, 관우, 장비가 만나서 도원결의를 맺는다. 비록 적수공권의 몸이지만 대장부 셋이 뭉쳐서 천하를  바꾸어 보겠다는 야망을 품은 채 넓은 세상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들은 금새 천하가 얼마나 넓으며 수많은 기라성같은 영웅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조조, 손견, 여포, 공손찬, 원소 등 가슴에 무궁무진한 야심이 가득찬 영웅들은 각자 넓은 대륙의 한 귀퉁이씩을 차지하고 천하 패권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온갖 모략과 술책이 난무하고 대군과 대군이 맞붙이치면서 수십년이 지났을 때 천하에는 조조와 유비, 손권만이 남았고 위, 촉, 위 삼국 정립의 시대가 시작된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어이없게도 그 어느 쪽도 아닌 사마씨가 되었고 사마염이 세운 진나라가 천하를 호령하게 된다. 비록 소설이지만 온갖 개성 넘치는 영웅들의 대결은 너무나 흥미진진하여 매번 읽을 때마다 도저히 손을 뗄 수 없었다. 대략 열번은 넘게 읽은 듯 하다. 서양에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다면 동양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라면 삼국지를 빼놓을 수 없으리라. 

 

삼국지만이 아니라 중국 오천년 역사는 분열과 통일이 반복되는 역사이다. 삼국지는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역사일 뿐, 중국의 왕조가 바뀔 때마다 각지에서 일어난 군웅들이 서로 천하의 주인이 되겠다면서 항쟁을 벌이는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졌다. 이러한 춘추전국시대는 바로 백여년 전에도 있었다.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초기에 이르는 이른바 '군벌의 시대'였다.

 

 

오랜만에 엄청난 책을 발견했다. 미지북스 출판사에서 나온 20세기 삼국지라 할 만한 <중국 군벌 전쟁>이다. 예전에 국내 최초 중일전쟁 통사인 <중일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를 쓴 저자가 5년 만에 낸 책이라고 한다. 당시 전쟁사를 색다른 관점에서 아주 흥미진진하게 서술하여 네이버 역사 카페 등에서 굉장한 센세이션을 불러오기도 했다.

 

처음에 책을 받아든 순간 1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두께에 한번 놀랐다. 그리고 읽으면서 또 한번 놀랐다. 분량은 많은데도 활자가 크고 편집이 잘 되어 있어서 너무 쉽게 술술 읽힌다는 점이다. 또한 저자 특유의 필체로 어찌나 내용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지 일단 한번 책을 펴는 순간 손을 뗄 수 없었다. 청말부터 신해혁명까지 다룬 1부만 해도 왠만한 교양 도서 한권 분량인데 단숨에 읽어 버렸다.

 

 

책 맨 앞에 들어 있는 지도. 신해혁명 당시 주요 사건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맨 위의 투바 공화국은 HOI에서 볼 수 있었던 그 투바가 아니었던가.

 

 

청일전쟁 이후 새로이 편성된 청나라의 신식군대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 보는 만주족 복장의 강시 군대가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서구화된 모습이다. 본문을 보면 청나라가 어떻게 신식군대를 편성하게 되었으며 일본군과 비교한 자료까지 상세하게 나온다.

 

 

청조, 이탈리아군을 물리치다. 본문에는 여느 중국사 책에서 보지 못했던 온갖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다. 저자의 해박하면서 폭 넓은 지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916년 옥좌에 앉으려는 위안스카이를 몰락시키는 차이어의 호국전쟁의 상황도. 공화정이라는 국체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뜻이라고 호국전쟁이라고 한다. 얼마 뒤에는 쑨원이 법통을 지키겠다면서 호법전쟁을 일으킨다. 책에는 중국식 지명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30여장에 달하는 전쟁 지도가 들어 있다. 이것만 봐도 한눈에 이해가 될 정도이다.

 

 

책의 또 다른 묘미는 주요 전투마다 어느 어느 부대가 참전했다는 식으로 이렇게 부대 편제까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마치 2차대전사를 보는 느낌이다. 이 정도면 삼국지처럼 게임으로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책은 청일전쟁 직후 위안스카이가 북양군이라는 신식군대를 만드는 것부터,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건국,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대결, 북양군벌들의 분열, 국공합작, 북벌전쟁과 중원대전에 이르기까지 약 40여년에 걸친 중국 근대사 전체를 아우른다. 여기에는 5.4운동이나 국공합작, 공산당의 창당 등 중국 내에서 있었던 온갖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물론이고, 열강들이 왜 중국을 식민지로 삼지 않았는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중국군의 시베리아 출병, 국민당과 공산당에 이어서 제3의 혁명 정당이자 중국식 민주주의를 외쳤던 중국 청년당의 이야기, 몽골과 티베트의 독립 선언 등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에는 당시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우리 독립 운동가들의 좌절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제스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이외에도 장쭤린, 우페이푸, 펑위샹, 리쭝런, 탕셩즈 등 온갖 기라성 같은 군벌들이 등장하여 천하 패권을 다툰다. 이들의 싸움은 초한지나 삼국지에 나오는 군웅 할거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차이가 있다면 창과 활이 아니라 총과 대포, 항공기와 같은 최신 무기로 싸운다는 점이다.

 

군벌 싸움만이 아니라 외몽골은 독립했는데 왜 내몽골은 독립하지 못했는가, 티베트는 왜 다시 중국의 일부가 되었는가, 만주족을 비롯한 중국 내 소수민족들은 어째서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했는가 같은 누구나 한번쯤은 의문을 품었을 만한 질문에 대해서도 저자는 속시원하게 설명한다. 마치 핵사이다같은 느낌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이 또 한가지 있다. 책 말미에는 부록으로 당시 중국군이 사용했던 각종 총기와 대포, 전차, 군함, 항공기는 물론이고 중국군의 편제, 심지어 군벌들의 독가스 전쟁에 대한 이야기까지 있더라. 평소 중국사에 그리 관심 없어도 밀리터리 매니아라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읽을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정말 읽는 내내 여지껏 이러한 역사서는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중일전쟁에서도 느꼈지만 저자의 어마어마한 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근래 최고의 추천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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