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김형석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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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에 대한 맹세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세 권째 김형석 교수님의 책을 읽고 나니 <국기에 대한 맹세>가 떠오른다.

이 맹세도 일부 구절이 달라져있던 것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아마도 교수님이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맹세로써 가슴에 새길 수 있는

마지막 분이 아니실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정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할 수 있는 마지막 어른.

 

우리는 너무 안일하게만 살아서 내가 국가를 위해 해야 하는 일보다

국가가 내게 해 주어야 하는 것에 더 민감한 시대에 살고 있지 싶다.

 

교수님의 100년 인생은 정말 대한민국의 역사였다.

 

윤동주 시인은 너무나 옛날 옛적 사람이었는데, 세상에나, 교수님은 윤동주 시인과

같은 학교 학생이었다니, 김일성과 같은 마을이었다니!

 

살면서 가끔은 가치관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 모르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동성애 같은.

 

<물론 우리는 이웃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에 절대적인

부정적 가치판단과 제약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더 선하고 고귀한 가치판단과 선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소수의 우리가 좋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의 전체적 질서까지

훼손하거나 거부할 수는 없다. 사회질서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더라도

사회는 성장할 수 있으며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가치와 질서는 보존, 육성되어야 한다.

동성애의 문제도 그렇다. 세상 모든 사람이 동성애를 하는 것이 옳으며 그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믿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동성애를 반대는 하지 않아도 선한 가치와 질서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p.300 >

 

이 구절을 읽는데 맞아, 내 생각도 바로 이것이었어! 라고 무릎이 탁 쳐지는 것이다.

또하나의 애매했던 나의 관점이 확연히 정립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순간들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 때문에 책을 읽는다.

 

앞으로의 나의 삶이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가 보인다.

지역사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또한 나는 무엇을 남기고 죽을 것인가?

 

고귀하고 훌륭한 본보기가 계시니 이 어찌 고맙지않으랴!

 

 

 

 

 

 

 

 

 

 

*나 혼자 남았다.

모친과 아내까지 떠나간 집은 비어 있는 공간이다.

아내를 보낸 뒤, 얼마 동안 여행을 했다. 미국에 있는 세 딸들의 집도 방문했다. 두 달

가까이 걸렸다.

인천공항에 내렸는데 갑자기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가고 싶은 곳이 없어졌다. 

내 인생의 책임은 다 끝냈다. 모친과 아내는 아쉽지 않게 보내드렸다.

그런데 내가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내 마음의 집이 비어 있는 것이다.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다. 버스나 택시를 탈 때는 반드시 승하차 시에 인사를 한다.

내가 친절과 감사의 뜻을 표하면 그들도 친절과 교양을 쌓아갈 수가 있다. (...) 나는 지금도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대신 해주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린다. (...) 나는 교인이다.

그러나 교회를 위한 기도는 별로 드리지 않는다.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위해야

하며 교회보다도 민족과 국가를 위해 기도드리는 정성과 시간이 더 많아야 한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학(미국 오스틴 대학)에서는 150년 동안 시험 감독은 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였다.

학생들은 비록 이 과목때문에 실격하거나 학교를 떠나게 된다고 해도 자기를 믿고 있는

교수와 친구를 배반하는 부정행위는 자기 인격에 대한 배반이기 때문에 범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모두가 갖고 있었다. 나는 그런 점이 아메리카의 벍은 장래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부인은 어린애도 없는 자기가 아무 일도 없이 집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민망하고

자기도 일을 하지 않으면 무책임한 시민 같아 미음이 편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도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랐는데 교회에 헌금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세금을 더 내는 것이 사회와 가난한 사람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

즐겁다는 얘기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하는 말을 통해 이 가정은 미국 사회를 생각하고,

미국 정부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버릇이 없다는 뜻은 배우지 못했다, 본받을 만한 것을 보지 못했다, 예의범절을 모른다,

공경심이 없다, 더불어 살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정신적 가치와 질서를 모르거나 해친다,

독선적 사고 때문에 더 고귀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인격과

선한 노력을 폄하하거나 해친다 등등의 인간관계와 그 규범을 말하는 것 같아, 찰학적

용어를 빌리면 인간애의 정신을 훼손시키며 사회의 선한 질서를 악화시킨다는 뜻이다.

 

*그분(스코필드 박사)은 박정희 정권 기간을 한국에서 지냈다. 박 정권의 좋은 점을 얘기

할 때는 우리와 함께 편히 얘기를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단점이나 마땅치 않게 여겨

지는 정책을 말할 때는 반드시 "나, 대통령에 대한 불만스러운 얘기를 해도 괜찮겠어요?"

라는 양해를 구하곤 했다. 나는 그에 비하면 제자격인 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나라 대통령에 대한 예의는 꼭 갖추곤 했다. 나도 배우고 싶은 면이 많았다.

 

*구체적이고 필수적이면서 실천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청소년기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사의 체험을 터득하도록 이끌어주는 일이다. 봉사의 실천이 사랑의 정신을 키워주며

그것이 곧 행복과 인생의 보람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 봉사정신이 없는 지도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인생이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은 이웃과 사회를 위해 무엇을 남겼는가

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이기도 하다.

 

*우리는 때때로 존경하는 사람들의 동상이나 기념관을 대하는 때가 있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우리들을 위해서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뜻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자녀들에게 상속해주는 것은 법적으로 용납하지 않는다.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과 제도라고 믿고 있다. 그 세금이 후대들을 위한 복지 혜택으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죽음은 누구나 찾아온다. 그러나 죽음을 체험해본 사람은 없다. 죽음은 순간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후에는 삶이 끝났기 때문에 죽음도 사라진 뒤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죽음은 관념적으로 삶과 더불어 있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삶이 없으나

삶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영결식에 가보면 그때마다 꼭 알려지는 식순이 있다. 그 사람의 태어남부터 죽음까지의

경력이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주어졌던 유일하면서도 전체적인 삶과 그에 대한 평가다.

그 안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았는가'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는가'다. 그 내용에 따라 그의 일생이 나타나며 평가된다.

 

*죽음의 의미도 그러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 뜻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주어진 삶을 다

바치고 싶은 무엇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죽음을 극복하는 참되고 영원한 삶의 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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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나 - 미로 찾기 접지 속지
론 클레멘츠 외 감독, 드웨인 존슨 외 목소리 / 월트디즈니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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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피티의 심장을 마우이가 훔쳤고,

그 심장을 잃은 테피티는, 세상에나! 테카였다니!!

테피티이면서 동시에 테카일 수도 있는 우리들,

우리들의 삶을 보는 것 같았다.

 

마우이는 훔친 심장을 다시 테피티에게 돌려주었고,

테피티는 마우이의 I am sorry! 한 마디에 그를 용서한다.

우리도 이리 회개해야 할테고,

우리도 용서가 이리 쉬워야 할텐데...

 

눈썹조차 초록이던 테피티는 너무 아름다워서,

말 한 마디조차 없는데도 그 위엄과 사랑을 어쩌면 그렇게 잘 표현했는지,

그녀가 다시 초록의 섬으로 자세를 바꾸는 장면은 과연 압권이었다.

 

우리의 인생도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악과 싸워서 이겨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은 모아나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평온,

그녀의 평온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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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음악가의 음악 이야기 - 개정판 ㅣ 마음이 쑥쑥 자라는 세상 모든 시리즈 2
유미선 지음, 최상훈 그림 / 꿈소담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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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베토벤만 편애해서 듣다 보니 다른 음악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 덕분에 하이든의 종달새, 천지창조도 들어보고,

브람스의 대학축전 서곡의 활기와 기상, 기개에도 빠져보고,

아주 오랜만에 안익태의 한국환상곡도 들어보게 된다.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일본 기생이었고,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은 푸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들리던, 미사 중간에 불려지던 무반주 노래가 그레고리오 성가이며,

그레고리오 교황의 어깨에 비둘기가 앉아 성가를 불러주고,

그것을 교황이 다시 서기에게 불러주었다니,

그레고리오 성가, 노래로 하는 기도, 말조차도 참 아름답다.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여서인지, 브람스는 평생 클라라만 바라보며 독신으로

살았다는 이야기같은 것은 실려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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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 김형석 교수의 신앙과 인생
김형석 지음 / 두란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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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아름다운 삶이란 어떤 삶일까 싶었다.

저자의 인생과 종교가 가득한 이 책에서, 기대했던 대로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접하게 되니,

나도 그를 본보기로 본받고 따라서, 내 삶도 역시 선하고 아름다운 시간들로 채워나가야겠다

하고 다짐하게 된다.

가장 바람직한 종교인의 자세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겐 무척 큰 수확이었다.

진정한 종교인은 내 것만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 것이 아닌 다른 것은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믿으라, 믿으라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믿고 있을 뿐이다.

 

"저물어 가는 저녁,

석가님의 옆에 서서 이야기를 들으며 산 밑의 마을로 걷고 있는 자신을 생각해보라.

(..) 감람산 웅기중기 솟은 바윗돌 모퉁이에 가지런히 누워, 들려오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잠드는 제자들의 한 사람으로 자처해보라."

                                                                   - <영원과 사랑의 대화(김형석)> 중에서

 

저물어 가는 저녁,

나는 김형석 교수님의 옆에 서서 흐트러짐 없는, 차분하고 겸손한 음성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산 밑의 마을로 걷고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해 본다.

'나를 위해 한 일은 남는게 없어요.' 라던 그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일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안내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오히려 그것이 나 자신의 신앙과 성경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고, 신학자도

목회자도 아닌 내가 나름대로 신앙과 성경적인 신학을 터득하게 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죄악이란 무엇인가? 어떤 교리나 율법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것이

죄악이다. 만일 많은 종교인과 그리스도인들이 이웃과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것이 죄악이라는 뜻을 가르쳤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훨씬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의 희망이 밝아졌을 것이다.

 

*조선 왕조 초기에 우리는 주자학을 신봉해 왔다. 그것은 독일의 관념 철학과 성격이 비슷한

논리의 관념성, 즉 형식논리에 속하는편이다. 그리고 불교를 멀리하고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유교의 윤리성이나 도의적 가치보다는 교조주의로 수용하면서 형식적으로 교화했던 것이다.

이 둘, 즉 형식 논리와 교조주의가 합쳐지면서 불행하게도 흑백 논리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흑과 백은 이론상으로는 추정할 수 있으나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흑과

백의 중간인 회색이 있을 뿐이다. 백에 가까운 밝은 회색과 흑에 가까운 짙은 회색이 있을

뿐이다. 경험주의자들은 짙은 회색에서 밝은 회색을 찾아가고, 합리주의자들은 흑백을

구별하며 백색을 택하는 방법을 따랐다. 그런데 우리는 나와 우리 것은 백이고 너와 너희들 것은

흑이라는, 중간을 배제한 이론을 전개시켰다. 유림과 학문을 노하는 사대부들의 사고방식이

그러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흑백 논리 위에 권력을 독점하려는 집단 이기주의까지 가세하면서

파벌 위주의 대결과 싸움이 해소되지 못했다. (...) 노사가 협력보다는 투쟁을 일삼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지극히 작은 대립에서도 결사반대나 결사 투쟁을 예사로이 내세우는 풍토도

그러하다.

 

*딸은 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겸손하고 성실하며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어 보여도 성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믿고 사랑할 수

있어도, 나와 같은 신앙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가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멀리하게 된다. (...)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보다는 겸손하고 성실한 인간성을 갖춘 사람이 주님의 뜻에 더

가깝다고 나는 믿는다.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부모를 위하며 존경하게 되어 있다. 효는 존경과 위하는 뜻으로

채워진다. (...) 가족 관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위해 주는 삶이다.

자녀들이 먼저 부모를 위해 주는 것이 순서가 아니다. 부모가 먼저 아랫사람들을 사랑하고

위해 주면, 아랫사람들은 그것을 배우고 따라가게 되어 있다.

 

*가장 소중한 사고력은 어떻게 키워 주자는 것인가. 어렸을 때의 성적으로 일생을 평가하거나

지식의 축적량으로 인물을 결정짓는 교육계에서 어떻게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소망스러운

교육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내 후배 교수들이 무리를 해 가면서도 자녀들을 외국으로

보내는 이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행복과 장래를 위해서라면

교육 이민을 나쁘다고만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모든 자녀가 성공과 행복을 찾아 누릴 자질과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좌절

시키거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오늘의 우리나라 교육이다. 왜 이런 후회스러운 걱정을

하는가. 개성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다.

 

*인생의 황금기는 과연 언제인가? (...) 우리가 얻은 결론은 60에서 75세까지였다는 공감대

였다. 50부터인가 하고 생각해보았으나 그 기간에는 일은 열심히 했으나 아직 인간적인

미숙함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했다. 그래도 60이 되면서부터는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어,

지도자의 품격을 갖출 수도 있고, 사회인으로서의 자신감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도 그랬던 것 같았다. 60 이전에는 인간적으로 아직 철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인했던

셈이다. 그리고 60부터 75세쯤까지는 모든 면에서 성장을 계속할 수 있는 나이였던 것 같다.

그 60에서 75세까지가 인생의 황금기였던 것 같다는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언제쯤이 가장 좋은 나이였는가 하고 물으면, 75세 정도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란 무엇인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교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을 받아 영광을 더하는 차원의 존재가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이웃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는 사랑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에

궁극적인 해답을 주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확신을 주어야 한다.

세상 사람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종교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것이 진리인 것이다. 기독교

의 높은 뜻이 있다면, 그 진리는 우리의 연구나 지혜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였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 교훈이 우리 모두의 인생관이 되고, 가치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중심 되는 목표는 교회를 통해 참 신앙을 가진 많은 주님의 일꾼을

사회 모든 분야로 보내는 책임이다.

전 인격을 갖추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며 새로운 사명을 갖고

하늘나라 건설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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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사랑의 대화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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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제일교회에서 김형석 교수님의 강의가 있었다.

100세 노인의 모습이 아니라,

100세 노교수의 모습이었다고 말하는게 더 나를 흡족하게 하는 표현일 것 같다.

어쩌면 그리도 당당하신지, 어쩌면 그리도 말씀이 바르고, 진솔하신지,

어쩌면 그리도 흐트러진 모습 하나 없으신지,

자신의 제자들을 이를때는 꼭 "내 사랑하는 제자가~~"라고 말씀하실 때는

제자를 향한 스승의 사랑이 그대로 내게 다가왔다.

앞으로의 나의 인생에 귀감이 되실 분 같았다.

독서하라, 일하라, 이 두가지 외에도 내 가슴을 울리던 말씀은,

나를 위해서 한 일은 남는게 없더라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내 선한 이웃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은

무척 귀한 것이 되어서 나의 가슴을 채웠다.

 

교회에 모인 대부분의 청강자들은 노인들이었는데, 내 보기에 이런 강의는 노인들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30 ~ 60대의 사람들이 들었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오래 전에 김형석 교수님의 책 제목들에 이끌렸던 적이 있었으나

책읽기로 이어지지는 못했는데, 이번을 계기로 그의 책들을 읽게 되어서

여간 고맙고 기쁘지 않다.

 

이 책,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무척 재미나게 읽었다.

아쉬운 점은 각 수필마다에 그 글을 적은 연도를 표시해두었더라면

시대나 상황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더 많이 되었을텐데 라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 넣어 두신 어느 지인의 사랑이야기는,

이 책 전체의 교수님의 잔잔하지만 울림있는 수필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어서

없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 지인을 생각하는 교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자니, 충분히 이해가 됨직도 했다.

 

오래 전,

자신의 종교인 기독교를 어떻게 표현하셨을까,

신앙을 어떤 시각으로 보셨을까가 무척 궁금했었는데,

역시 교수님은 시대의 본보기이자 귀감이신 분이시며,

말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강의하시던 모습에서,

자신의 학생들에게도 높임말을 사용하는 것에서,

거듭 어떤 100년의 삶을 보내고 계시는지 느껴졌다.

 

내 앞에 거대한 산이 있어서,

거센 태풍은 막아주고,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은,

부드러운 미풍은,  

나를 더 즐겁고 건강한 삶으로 이끌어주며, 격려해주며, 위안을 준다.

오늘도 그 큰 산 하나를 가슴에 품었다.

 

 

 

 

 

 

*종교계의 성자들은 문제 삼을 필요가 없이 인류의 벗이라고 곧 느껴진다. 저물어 가는 저녁,

석가님의 옆에 서서 이야기를 들으며 산 밑의 마을로 걷고 있는 자신을 생각해보라.

공자님을 모시고 식탁에 둘러앉아 잔을 나누며 그 원만한 인품에 접하고 있는 위치에

스스로를 놓아보라. 감람산 웅기중기 솟은 바윗돌 모퉁이에 가지런히 누워, 들려오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잠드는 제자들의 한 사람으로 자처해보라.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나? 옳다고 믿는 대로 살면 곧 뜻대로 될텐데!"

 

*청년기는 근면과 더불어 활동의 기간이다. 가장 많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 큰 수고와

노력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청년기는 언제나 분투와 고생의 기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삶의 목적인가?' '이러기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악을 이겨나갈 수 있는가?' (...) 사람의 일생을 등산에 비교한다면 정신적인

면에서는 등산의 수고가 곧 악에의 항쟁인 것이다. 높은 산정에서의 즐거움과 행복,

그것은 악과 싸워서 승리한 사람에게 주어진 만족과 행복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건강한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건강이

유일한 조건도 아니며 절대의 여건도 못 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병을 통하여 인생의 뜻을 깨닫기도 하며, 건강치 못한 사람은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이론도 성립되 못한다. 건강은 소망스러운 조건이다. 그러나 절대의 유일한 조건과 목적은

되지 못한다.

 

*인간은 결국 자기 인격의 성장만큼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인격이 50이면 그 사람은

모든 면에서 50의 생활 이하에 머문다. 인격 이상의 삶을 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릇의 크기만큼 물건을 담을 수 있다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남이 소유하는 것은 다 버려도 남이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내 것으로 하자고 마음에 타일렀다.

 

*오늘 우리는 전 세계의 기독교 특히 카톨릭교회의 초대 대표자인 예수의 제자 베드로를 안다.

베드로는 어부였다. 고기를 잡아 몇 식구의 식생활을 해결해야 하는 초라한 늙은이였다.

이미 수십 년을 물고기잡이에 다 허송해버린 인생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그의 늙은 육체, 보잘것없는 심중에는 새로운

불길이 타올랐다. 그는 마침내 전 세계를 불사르는 새로운 역사의 혁명을 이룩하고야 말았다.

(...) 공연히 불필요한 후회로 한숨을 지을 때가 아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 인생의

게임을 다시 시작하자. 최선의 노력으로 다시 출발하자. 역사는 언제나 이런 인간을 찾는

것이며 신은 항상 이러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제3의 부류가 있다. 그들은 늙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며 죽음이 눈앞에 당도

할 때까지 젊은이다운 신념과 희망을 가지고 꾸준히 일하는 사람이다. 노년기에 이를수록

더욱 성스러워지며 나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의를 보다 깊이 발견해 나아가는 사람들

이다. 항상 어린이 같은 고운 마음씨와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더 남겨주고 싶은 심정에서

노년기를 보내는 이들이다. 이런 사람의 수가 아주 많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실망할

정도로 그 수가 적은 것도 아니다. (...) 그러나 지금 이야기한 제3의 노년기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송죽과 같이 항상 푸르며 노년기를 가장 충만한 행복과 영광으로

맞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거기에는 앞에서 말한 두 종류의 노년과 근본적으로 다른 조건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종교와 신앙, 내세관의 유무인 것이다. 이것이 있고 없음이, 그것을 가지고 못 가짐이 인생의

노년기를 절대적으로 지배해버리는 것이다. (...) 신앙과 내세관을 확고히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을 맞이하는 즐거움이 있다. 기대를 가지고

노년을 준비하기 때문에 보다 귀한 업적을 남길 수 있는 기간을 보내게 된다.

 

*"(...) 나는 이런 체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세를 아무리 얘기해도 필요가 없다고 봐요.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또 이미 체험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설명도 필요가 없을 거에요.

그래서 파스칼이 '세상 사람들은 철학자를 보고 놀라나 철학자들은 기독교인을 보고 놀라게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요. 내 이성이 내 신앙에 놀라는 때가 있으니까요!

이런 체험을 한 사람에게 내세를 의심하라는 것은, 물건을 사다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아들에게 어버지의 약속을 믿지 말라는 것과 같지 않을 까요.

(...)"

나는 지금도 종교는 체험이라고 믿는다. 체험에 의한 내적 확증이 없는 곳에 신앙적 진리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 종교를 생각 속에서 비판만 하는 사람은 어는 종교든 택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을 체험하는 사람은 하나의 종교를 택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므로 파스칼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철학자나

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진정한 종교와 참다운 신앙을 위햐여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건전한 인격과 무게 있는

이성이다. 먼저 신념 있는 도덕적 주체성을 지닌 이성인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간이 스스로의 전 인격과 삶의 과제를 가지고 종교의 문을 두드리며 신과의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비로소 신앙은 자라는 것이며 신은 우리들의 인격적 호소와 관심에

응해주는 실재로 나타난다. 진정한 종교는 이렇게 자라왔으며 앞으로도 그 생명은 이러한

위치와 사실을 통하여 계승 발전될 것이다.

진정한 이성인의 체험이 못되면 타당성을 가질 수 없으며, 완전한 인격적 사실이 아니면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적 위치에서 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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