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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믿을 것인가 - 시대의 지성 김형석 교수가 전하는 올바른 신앙의 길
김형석 지음 / 이와우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신영복>의 책들을 읽을 때 그랬다.
이런 분이 나의 아버지이거나, 나의 남편이거나, 나의 형제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원(願)이
그렇게 많이 올라왔었다. 지금 또 한 분이 그런 지극한 願을 가지게 만든다.
어찌하여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남편이나 형제 중에는 이토록 내가 따르고, 본받고 싶으며,
배우고 싶은 많은 것들을 가진 분이 없을까 싶은 안타까움이 더욱 절절해진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는 또 어떤가. 그 많은 선생님들 중에는 어찌하여 이런 한 분을
만나뵙지 못했을까.
이 책은 종교인이라면, 신앙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내용으로,
무엇하나 뺄 것 없이 모두 새겨서 가장 바람직한 종교생활로 이끌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우리 모두가 어떤 종교를 가지건 상관없이 이렇게만 종교생활을 할 수 있다면
적어도 종교로 인한 전쟁이라는 어불성설에서만큼은 벗어날 수 있을텐데...
십일조에 대한 의문도 해소가 되었으며, 점점 비대해져만 가는 공간적인 大교회에 대한
시선도 정리가 되었다. 교인들의 제사에 대한 나의 생각도 확고하게 정리되었다.
저자야말로 하느님의 가르침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계신 분이며,
가장 그 분이 원하시는대로 행하고 계신 분인 것 같아 가슴 뻐근하게 존경과 흠모의
마음이 올라온다.
큰 산, 또 하나의 울창하고 거대한 산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가장 경건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듯한 이 느낌이 너무나 좋다. 이 큰 산에 비하면 나는 무척이나
작지만, 그렇다고 작기만 한 내가 주눅이 들거나, 의기소침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자랑스럽다. 나는 이 큰 산 앞에 있으며, 이 큰 산을 나는 볼 수 있으니까.
*지금 우리나라에는 지나치게 큰 교회와 지나치게 작은 교회가 너무 많다. (...) 여러가지
면에서 보았을 때 신도 수가 500명에서 700명 정도 되는 규모의 교회라면 좋을 것 같다.
이 정도면 목회자들도 목회하기에 알맞고 교인들도 질적으로 정돈된 교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홉 사람이 고민하는 문제는 내버려두고 교회에 오는 한 사람을 붙들고 신앙운동이 가능
할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폐쇄적이다. 말씀과 진리는 하늘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교회를 키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가 큰 예배당을 지었다든지, 교인들의 수가 많이 늘어서 몇 차례의
예배를 드린다는 자랑은 하지만 교회의 신앙적 전통이나 교회에서 어떤 지도자들이 배출
되었다는 사실은 소개하지 않는다. (...) 훌륭한 목사는 자신이 목회자로 성공했다는 칭찬을
받기에 앞서 우리 교회에서 이런 지도자들을 키웠고, 고마운 인물을 배출했다는 사실을
더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적어도 크리스쳔이라면 물질적인 소유가 목적이 아니라 건전한 일 자체가 목적임을 깨닫
도록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주어야 하며,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을 위한 봉사에
있다는 가치관을 확고히 가져야 한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인격적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채워가며
외롭게 사는 독신자들이 새로운 사랑의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자체가 교회의
책임 아니겠는가. 신앙은 예배와 교회행사라는 사고와 신앙은 생활이라는 생각 중 어느 편이
더 현실적이며 소망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가.
*자기를 본존하려는 사람은 잃게 되고 자기를 내주는 사람은 보존케 된다는 지혜도 진리인
것이다. 모든 것은 이웃을 위해서, 나는 그들을 돕기 위해서라는 신념이 곧 신앙인의 인생관
이 되어야 한다.
*신부와 수녀들이 개인적인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면 교회도 재산을 소유하는
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십일조 문제도 그렇다. 구약시대에는 종교세금이 지배층의 수입으로 되어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도 그 십일조의 혜택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버림받은 서민들이, 정치는
부패하고 가난에서 구출될 길이 없으므로 수입의 십 분의 일을 잘 바치지 않았다. 그 상황이
구약 말기인 말라기 시대에는 더욱 심했다. 그래서 세금을 받는 여러 가지 방법의 하나로
'십일조'를 잘 바쳐보아라.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너희 창고가 넘치도록 보답해 주실 것이다'
라는 호소를 했다. 그것이 십일조에 관한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의 견해다. (...) 만일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얻은 수입의 십일조를 그리스도를 대신해 쓸 수 있다면 우리는
경제적으로 궁핍함이 없는 복지사회를 유지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인 봉사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는 기여의 경제관을 신도들에게 심어주어 주님의 뜻이 신도들을
통해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오해 없길 바라나, 경제는 인간을 위해
쓰여야 한다. 인간을 위해 경제적 축복이 있는 것이지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도 경제적 도움을 사회로부터 받기보다는 사회에 경제적으로 이바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시픈 것은 크리스천들의 생활에 사치와 낭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는 신념이다. 세상 사람이라면 내가 번 돈은 내가 쓰고, 많이
벌었기 때문에 많이 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간접적으로 사회경제를 도울
수도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에게는 유감스럽게도 그 뜻이 허락되지 않는다. 예수와 같이
가난하게 살 수는 없지만 부자와 같이 호화롭게 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인간생활의 손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경제적으로 검소하게 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으며, 소유를 즐기기보다는 봉사를 택하기 때문에 은총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생각을 한다면 중산층 이상의 낭비와 사치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배치될 수도 있다.
(...) 귀중한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며, 기업 정신을 봉사 정신
으로 이끌어줄 경제관이다. 우리가 내는 세금이 교회에 헌금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세금도 헌금과 같은 의미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 가치는 그 결과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을 위해 값있게 쓰임이 옳은 것이다.
(...) 모든 교인과 가난한 근로자들이 세금을 내고 있는데 우리는 성직자이기 때문에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는 안 된다. 선의의 선택에 따라 낼 수도 있고 내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가 더 많은 세금을 냈다고 해서 잘못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개신교에서도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죄다 아니다는 식의 구속을 주기보다는
그런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어떻게 하는 것이 조상들의 선한 유지를 받아들이는 길인가를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고, 신앙이 생긴 후에 스스로 선택하는 방법이 옳을 것이다.
신앙적으로 무엇은 죄가 되고 무엇은 죄가 안 된다는 것은 신앙인 된 후에 스스로 선택하고
해결 지을 문제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지만 선조들의 선한 뜻을 저버리는 사람보다는
제사를 드려서라도 선조의 고마운 봉사를 이어받는 후손들이 옳다고 믿고 있다. 그 생각이
교회와 다르다고 해서 죄악의 책임을 묻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이에 비하면 오늘날 교회가 저지르는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죄악은 얼마나 많은가. 황금만능
주의는 얼마나 만연해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인격이나 인간성을 모독하는 죄악은 얼마나
많이 범하고 있는가. 남의 눈의 티는 나무라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어디보다 교회 안에서 더 많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이슬람 교도들이 기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면 우리는 조용히 침묵을 지킬 것이다.
문제 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 보거나 그리스도의 정신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예수는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재림해 있으며 그리스도의 뜻이 역사 속에 머물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예수의
재림은 앞으로 올 것이거나 미래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개인과 역사의 현재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실재는 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지 않으며 성경의
뜻과 능력은 현재 속에 영원을 성취하는 책임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권하는 것은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서나 기독교를 이해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류의 생활과 사상에 끼친 성경의
위력과 역사적 영향력을 알기 위해서라도 성경은 읽어야 한다. 논어를 읽어야 하는 것은
유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으뜸가는 정신적 고전이기 때문이다. 살의 가치와 역사적 유산을
찾기 위해서는 누구나 논어를 읽어야 하며, 오히려 그 책을 읽은 적이 없는 크리스천이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역을 읽은 적이 없는 교양인과 지성인은 생각할 수 없지 않겠는가. 역사상
최고의 고전인 성경을 읽지 못했다면 그것이 곧 지성적 성장의 결함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정당하게 얻은 수입의 십 분의 일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쓸 수 있다는 경제관을
갖고 생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교회 재정의 어려움을 풀기 위해 십일조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성경의 전체적인 교훈이 아니다.
*기독교의 특성은 기도하는 신앙생활에 있다. 유교의 중심은 자기반성에 있고 불교의 정신은
禪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매우 큰 독립기념관을 세웠다. 좁은 한국 땅 중에 180만 평을 차지했는가 하면 건축
자재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역사를 왜곡시켜서 그 대응책으로
장만한 것이었다.
미국 같으면 그런 방대한 규모의 기념관은 짓지 않았을 것 같다. 다른 방법을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었을 것이다. 일본 같으면 작은 기념관을 지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공간적 전시성이
너무 강하다.
지금은 기념관의 인건비를 충당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라 하니 기념관 건립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쿧고 싶어진다.
예술의 전당만 해도 그렇다. 큰 집을 짓는다고 해서 예술이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술적
기능이 풍부해졌으니 집도 있어야겠다는 것이 정상적인 성장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