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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 성경 행간에 숨어있던 그를 만나다
김형석 지음 / 이와우 / 2015년 9월
평점 :
친구가 성경책을 선물했다.
한 번은 읽어야지 했던터라 반갑고 고맙게 받았고, 구약부터 읽어나갔다.
구약의 하느님은 그야말로 징벌의 신이었다. 본인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죽이는
부분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읽어나가기가 고역이었고 결국 구약의 1/3쯤 읽은 선에서
멈출수 밖에 없었다.
성당에 가면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있는 예수의 상을 보면 너무 잔인하다 싶고,
얼마나 아플까 싶어, 십자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아픔이 일어서 애써 십자가를 외면
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나에게 "예수"라는 제목은 상당히 끌렸고, 내가 알고 싶던 어떤 것들이 분명
이 책속에는 있을 것 같았다.
저자는 역시 神적인 예수보다는 인간적인 예수에 더 포인트를 둔 것 같아 난 좋았고,
종교적인 느낌보다는 역사라는 사실이 더 부각된 것 같아 오히려 그것이 더 예수의 부활을
믿도록하는 설득력을 지녔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활한 예수는 정말 어디에 있을까?
톨스토이의 말처럼 사랑이 있는 곳에 예수는 있는 것일까?
어떠한 모습도 없이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을까?
모두의 모습으로 사랑과 함께 있는 것일까?
십자가는 형벌의 도구였으니, 그 옛날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잔인하게 벌을 주었을까
싶어 부르르 떨린다. 십자가에 못을 박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둔다니, 그에 비하면 총살은
얼마나 신사적인가 싶을 지경이다.
자신의 부활을 알고 있던 예수였는데 그는 어찌하여 그 전에 불안해했을까?
그 불안에서 나는 예수와 좀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도 나처럼 불안해했구나 싶으니 내가 더욱 그의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이 들었다.
여인들이 다음 날 무덤으로 예수를 찾아갔으나 그의 시신은 없었다.
난 예수에 대해서 잘 몰랐거니와 그의 부활은 믿을 수가 없었는데
어쩐지 이 책을 읽고 나니 예수의 부활이 믿어진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어느새 나는 부활한 그가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원수를 가진다는 것은 동등한 가치 판단을 가진 사람들이 이해 관계나 감정 문제로 갈등이
생길 때 발생한다. 그러나 한쪽이 훨씬 높은 가치 판단력을 가지고 있거나 인격이 높을 때에는
상대방이 하는 모든 일이 가엾어 보이며, 그의 행동에 연민을 느끼는 법이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올바른 가치 판단을 내리는 일이다. 가치 판단의 기준은
언제나 뚜렷하다. 모든 것은 인간과 인격을 위해 있으며,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윤리와 도덕은 귀하지만 인간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듯이, 율법과
계명은 중요하나 인간이 그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모두 불행해질 것이 아니냐.
*헌금 자체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생활비 전체를 교회에 바치는 것을 가상스러운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면, 이때 예수는 자기를 과시하려는 많은
헌금보다는 지성으로 바치는 적은 돈이 더 귀하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뜻을 말했던 것이다.
마치 오늘도 가난한 사람들이 불행을 겪고 있는 이웃을 위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듯이.
*역사는 반복된다는 주장이 있듯이 우리들도 비슷한 경험을 한 때가 있다. 필자는 일제
말기를 보내면서 군국주의 일본이 천황을 우상화시켜 종교적 신앙으로 강요하던 시기를
넘기면서 무엇인가 한 시대의 종말적인 비운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껴 보았다. 그 뒤 잘못
된 선택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는지 모른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가야바는 구약 종교를 책임 맡은 성직자였고
빌라도는 로마의 파송을 받은 총독, 즉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은 배반자인 유다와 종교 지도자였던 가야바가 주동 인물이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의 진정한 부활을 증거하는 사건들은 이 비겁하고 무능했던 제자들의 행적과
죽음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예외없이 예수와 같이 죽어 예수와 더불어 영원히 살 것을
믿고 있었으며, 그것이 하늘나라를 위한 사명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의 생애는 무덤과 더불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예를 들어 공자의 "논어"와 무관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교양인도 아니며 지성인의
자격도 상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신적 지도자의 책임을 맡고 있는 신부나 목사가
"논어"는 유교의 경전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사회 지도자는 물론
기독교 이해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 결과 많은 그리스도인이 "논어"와 벽을 쌓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