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스스로가 뭘
한 거냐고 물어도
딱히, 답은 나와
있지만......
그것들을 하나하나
들어서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해요.
스스로 의
일이었다는 것.
자신을 거쳐간
감정과 시간임에도
어쩐지 나와는
상관없이 그런데로 흘러가 버린 것만 같아서
나이가 그만큼
들어도 여전히 인간은 불안정한 존재라는 것
누굴 살리고
죽이고하는 존재 따윈 아니라는 것
그런가하면 또,
여전히 인간은 그래서 강하기도 하죠.
사랑이 아니면,
존재를 증명받았다고 ,
인정을 받고 싶은
그 나이 또래에 흔한 열망의 충족을
거부 받는, 그
즉시에 살고 죽음을 스스로가 바로
병의 요인으로
받아들여 버리는 순수성의 집약체이기도 하니
얼마나 불안한
시기에 있던 건지,
피오나는 그 소년이
좀더 건강해진 것인지,
얼마나 밖의 많은
경험을 통했는지는 생각안했죠.
경험이 부족한
소년의 폐쇄적 세계를 알면서도 모른척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에 바빠서 그녀가 살린 생명은 몰라라
해버린
..비난의 대상은 아니에요. 그녀는 그만한 위치에 있으니까요.
조그만 실수에도
그녀의 법조인으로서의 위치는 금방이라도
할퀴어지기 쉬운
사방의 먹잇감을 노리는 그런 위치란 것을
모르는 건
아니예요.
다만, 아주 약간의
인내심과 조바심이 아닌 설명을 해주었다면
과연 소년이 그토록
극단적으로 따라다니는 일을 했을까.
그리고 또,
소년이라면, 아이도 없는 집에 남편과 유대를
같이 쌓는 것도
가능할 텐데, 그녀는 분명 혼자 앞서가고 있었죠.
그 흔한 여자의
감각으로만 생각한 것과 그녀 혼자 음미하고 팠을 비밀
그리고, 심리적인
복수의 의지도...그러니 남편과의 화해도 가능했을터..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고 하기엔, 성숙하지 못한 대처가
내내 맘에 걸릴 것
같아요.
아무 것 아니게
만들면 되는건데.
마치 뭔가 있는
듯이 군것은 피오나 스스로임을..
그녀는 알아야
했겠죠.
나빴어요.잔인했죠... 그 어린 소년의 순수를 이용하다니,
소년이 절망하고
그리 된데에 확실히 그녀는 자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저 다시
살아갈테지만,
젊고 늙음의
어리석음이 아니었어요.
언제 어디서나
인간은 어리석다는걸...
그럼에도 자주 그
사실을 잊음으로 나아지고있다고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는 오만을 저지른다는 것을
이 소설은 짚어내
주고 있는 거죠.
뭐, 속죄가 뭐가
그리 대단해..생각했는데..그 소설의 힘은 뒤척임에 있어요.
잠 못드는 날의
뒤척임마냥 자꾸 기억 속을 헤집고 불쑥 들어와선 떠올리게
만들더군요..불시에
그러는데, 당할 재간이 있어야죠..그래서 아, 이 소설이
가진 힘이
그것였구나..뭔가..자꾸 건들이는 거야..일상에서도 스스로 버리곤
하는 양심이 있을
적마다, 누군가를 기만한다 싶을 적마다, 혹은 나 스스로
기만에 넘어가려 할
적마다, 떠오르는 거죠..부표같이..쑤욱..부력을 받은 것을
어쩔 수 없는
냥...
그런 반면, 이
소설에선 꾸욱꾹 마지막 장까지 감정선을 눌러 담아가는 예민함과
섬세한
압력조절...마지막에 가서야 숨을 놓듯이 오열이 터져나오도록...피오나의
감정이 얇은
피부막을 비치는 정맥처럼 푸르게 도드라지는 그런 울컥거림에 있다.고
실컷 참다 울고
나서의 그 순해지는 지점처럼...그런 감정을 맛보게하는 소설이네요.
얼마후 또 어떤
느낌을 기억하게 될지..저 자신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이 작가
멋진 작가라는 것을 이젠 인정하고말아야겠어요.
다음 이 사람의
책들을 뒤질 차례인거죠...늘 그랬듯이...
살아서 함께
노래하였으면 더 좋았을 애덤 헨리,
나이가 더 들어서도
여전히 인간은 어리석음을 알게 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정말 좋았던
순간들은 편집후기에도
그렇듯 저역시 지금
열심히 ,누군가는 진부해 할 지도 모르는,
바흐의 파르티타를
듣는 이즈음이 또 다음 음반을 듣고자 앨범을 고르는
순간들이 마냥
행복했는데, 책에서 함께 음악이 풍부해 더없이 즐거웠다는 점.
좋은 음악영화가
있음 보고 싶단 생각이 막 갈증처럼 났으니,
그 또한 작가에게
감사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