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
날
고립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층집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네
봄이면 조팝꽃 제비꽃
자목련이 피고
겨울에는 뒷산에 눈이 내리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고니가 떠다니는 호수는
바라지 않지만
여울에 지붕 그림자가 비치는
곳이면 좋겠네
아침기도가 끝나면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고
못다 읽은 책을 읽으면
좋겠네
파도처럼 밀려오는 소음의
물결에서 벗어나
적막이 들판처럼 펼쳐진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네
자작나무들과
이야기하고
민들레꽃과도 말이 통하면
좋겠네
다람쥐 고라니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고도
평화롭게 하루를 살았으면
좋겠네
낮에는 씨감자를 심거나
남새밭을 일구고
남은 시간에 코스모스 모종과
구근을 심겠네
고요에서 한계단 낮은 곳으로
내려가
단풍 드는 잎들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살았으면 좋
겠네
나무들이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곳에서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이들과
어울려 지내면 좋겠네
울타리 밑에 구절초 피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굽은
길이면 좋겠네
추녀 밑에서 울리는 먼 풍경
소리 들으며
천천히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네
짐을 조금 내려놓고 살았으면
좋겠네
밤에는 등불 옆에서 시를
쓰고
그대가 그 등불 옆에 있으면
좋겠네
하현달이 그믐달이 되어도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듯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묻지
않으며
내 인생의 가을과 겨울이
나를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벽난로의 연기가 굴뚝으로
사라지는 밤하늘과
나뭇가지 사이에 뜬 별을
오래 바라보겠네
ㅡ본문 12 / 13
쪽에서ㅡ
도종환 시집 [사월바다] 에서
ㅡ
고립에서 더 들어간 곳 , 더 고요해지고 더 적막하려면 얼마나 필요할까
ㅡ 와 ,
얼마나 버려야 할까 중 , 시인은 그 둘을 다 원하는 게 아닐까
버리는 것이 가지는 것에서 가능하단 것을 비밀처럼 물으며 , 그정도는
삶에서
바라는 게 죄 되지 않을 세상이 되면 어떨까
다 좋다 , 하는 성탄의 밤에 놀다 들어 온 건지 이웃 집 아들내미
명랑한 소리에
이얘 , 너는 낮의 폭력을 모르니 참 좋겠구나
나는 얼마나 더 먼 ,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맘이 진정이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