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바다 창비시선 403
도종환 지음 / 창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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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저녁

 

끓어오르며 소용돌이치던 것들을

찬물에 헹구어 채반 위에 얹어놓고 나니

마음도 국수 타래처럼 찬찬히 자리를 틀고 앉았습니다

애호박을 싸박싸박 채 썰어 밀어놓는 동안

마음 한쪽이 그렇게 소리를 내며

잘려나가는 듯한 초저녁

묵은 김치를 더 잘게 썰어 얹어 한그릇의

국수를 비우는 동안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산 위로 짙은 쪽빛의 시간이

잉크처럼 번져 내려오듯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아릿한 것이

명치끝을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승에서 이렇게 애틋함과 슬픔을

한그릇씩 나누어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찔레꽃에게 말하고

한세상 사는 동안

좋은 사람과 함께 호젓한 풍경이 되어

저물 수 있던 날을 고마워하며

찬물에 젓가락을 씻어 물방울을 털어내다가

잠시 뼈와 살 사이가 시큰해졌습니다

일어서기 전에 듣고 싶어하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오늘 처음 붓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는 그이의 발소리를 붙잡지도 못하였습니다

밤에도 검은등뻐꾸기는 울고

북두칠성 일곱 별은 그가 가는 길을 따라

몸을 틀며 별자리를 조금씩 옮기고

아까시꽃이 향기의 긴 꼬리를 그으며

별자리 뒤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불빛 하나 고개를 넘어가다 잠깐 눈물처럼

반짝이며 떨어지고 난 뒤 사방은 더 어두워졌고

호랑지빠귀가 한숨을 길게 쉬는 듯한 울음을 내뱉는 걸

숲은 다 듣고도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ㅡ14 / 15 쪽에서 ㅡ

 

【도종환 시인 ㅡ사월바다 중에서 】

 

 


 

 

다 저녁에 오라비에게 일요일 오후에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달력을 보며 , 어김없는 날들에 조금 웃다가 오라비는 없는데

그이가 좋아하는 잔치 국수를 말아 저녁을 대신하며

일찍 보아둔 이 시를 옮겨봐야지 그랬습니다 .

내일은 오라비의 생일이고 , 윤의 친할머니 생신이기도 합니다 .

서울에서 교회의 일과가 끝나면 함께 식사나 하자며 엄마가

내려올 것입니다 . 우리가 다시 연락하고 만나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오라비의 생일은 놓치지 않고 꼬박 꼬박 챙기고 있고

그 덕에 한번 더 살아 있는 날들의 추억을 만듭니다 .

 

시인의 시집이  「사월바다」인 이유를 처음엔 계절도 아닌데

하며 의아해 하다  ,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아있고 없는 이의

차이를 손금보듯 짚어내곤 탄식을 했습니다 .

무얼 말하려는지 알아졌다고 해야겠지요 .

 

우리는 살아서 , 꾸역 꾸역 저녁거리를 만들어 먹으며 오늘의

하루 컨디션을 , 안부 챙기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 .

누군가는 영영 할 수 없는 , 어째 볼 수도 없는 일이 되버린 것을

 

잊은 것은 아닌지 ,

 

그러니 설령 미뤄둔 인삿말이 있거든 , 꽃이 피었노라 대신하지 말고

달이 곱다고 말을 돌리지도 말고 , 더 날 것 그대로

사랑한다 . 고맙다 . 미안하였다 .

전하는 날이 되시기를 ......

 

2016,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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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6-11-30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맘에 쏘옥 들어서, 읽고 읽고 또 읽고 그랬습니다.
그동안 이 곳에 적조하셨던 님이 되돌아 오신것도 같고,
침체기를 떨고 일어나신것도 같고 말이죠.

설레발 같아서...자주 표현하지는 못했었는데,
오늘은 이 페이퍼가 참 좋다고,
가슴에 꼬옥 꼭 내리적어 놓았다고 고백해 봅니다요~^^

[그장소] 2016-11-30 17:45   좋아요 0 | URL
아~ 이보다 더 기분 좋은 말은 없을것 같아요!^^ 양철나무꾼님~

뭐가 좋든 , 시가 너무 좋았던 탓입니다 .
채써는 소리, 싸박싸박..
물기를 털고 잘게 김치를 썰어넣는 소리의 말들이 그대로 현실적이어서 , 시집제목이 주는 이질감을 더 감동으로 다가오게 하더라고요.. 반겨주시니 그 고백이 더 감사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