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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바다 ㅣ 창비시선 403
도종환 지음 / 창비 / 2016년 9월
평점 :
은행나무
동짓달부터 이른 추위가 찾아오고
소설 (小雪)에도 눈이 많이 오리란 걸 미리 알았는지
은행나무는 일찍 잎을 내렸다
지금은 화장기 없는 얼굴로 소조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
를 나는
이 골짜기에 들어오고 난 몇해 뒤 늦봄에 만났다
푸르고 풋풋한 이파리를 내게 보여줄 때
이 나무가 그토록 찬란한 내면을 지니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가을이면 이 나무의 미학에 경배하곤 했다
여러해가 지나고 다시 대처를 오가며
여기저기서 더 크고 수려한 나무를 볼 수 있었고
도감에 번듯하게 실린 나무도 만났다
내가 좋아한 은행나무가 가장 멋진 나무가 아니라
여러 나무 중의 한 나무인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은행나무는 자기 생의 여름에서
가을로 옮겨가고 있었다
간절기에는 표피의 색깔도 회색빛이 많아지고
살갗에 실금이 그어지고 있는 것도 보였다
그래도 나는 이 나무를 좋아한다
그늘을 만들어주며 등을 기댄 날들 때문일까
열매를 만들고 그 열매를 버려야 했던 순간 때문일까
늦봄에서 여름까지 여름에서 초가을까지
함께 오는 동안 그 많은 바람을 다 맞은 때문일까
함께 물들어온 시간이 우리 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나는 겨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조용한 숙려의 계절을 앞에 놓고서야
정이 든다는 것이 사랑이라는 과실 (果實) 의
과육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ㅡ본문 22 / 23 쪽에서
ㅡ
도종환 : 사월바다 중 ㅡ 은행나무
.
한해가 이렇게 이울었다는 걸 시집 속에서 발견한다 .
말 그대로 발견이다 . 이제야 제대로 보이는데 그마저도 기억 속의
추억
그에 불과한 , 살아있는 채로는 미처 알지 못한 부분
.
나 만큼 주윌 돌아 볼 새 없던 시인인지 끝맺음 말이 과거형임을 본다
.
돌아본 기억 속의 나무들과 방금 지나온 나무들이 기억이 혼재한
듯한
지난 가을의 날 , 서울의 거리에서 눈처럼 날리는 은행나뭇잎을
보고
아이처럼 좋아했던 것을 기억해낸다 .
겨울이 한참 다가오는 근린공원의 산책로를 온통 노랗게 물들인
것들도
슬쩍 먼 타인 처럼 지나가며 돌아보던 , 은행잎 융단 위를
소리없이
걷던 고양이 한마리 ,
마치 그 돌아봄이 지금의 내가 추억을 돌아보는 듯
찰나이다
바람 속에서 뒹구는 낙엽에 은행의 기억은 몇조각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