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5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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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기계성 뒤에 숨은 인간의 이기성,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는 인간다움

존 스타인벡 저, ‘분노의 포도’를 읽고

독서란 일차적으로 유희이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유희가 목적인 독서는 그것이 닿을 수 있는 깊이의 반의 반도 이르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맴돌 가능성이 크다. 무엇을 하든 그것을 충분히 즐기면서 지속하기 위해서는 재미만이 아닌 깊이와 풍성함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나는 가끔 독서에도 비장한 마음으로 임하게 된다. 이때 독서는 단순한 ‘읽기’가 아닌 ‘이겨내기’의 의미를 띠고, 책은 ‘노는 장난감’이 아닌 ‘극복할 대상’이 된다.

언젠가부터 휴가를 맞이할 때면 평소엔 엄두를 못 내던 장편소설을 손에 든다. 이른바 ‘벽돌 깨기’다. 처음엔 백 퍼센트 도전정신으로 시작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이 벽돌들을 깰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반은 부채감, 반은 의무감에 찬 비장하고 전투적인 마음이었다. 그에 따라 하는 수 없이 나는 편한 옷을 입고 소파 위에 올라타 기지개나 켜고 있는 고양이가 아닌 갑옷을 입고 창과 칼을 든 용사가 되어야만 했다.

몇 년 전 헤세의 마지막 작품 ‘유리알 유희’로 시작했던 이 단기 전투는 해를 거듭하며 나의 즐거움이 되었고, 이젠 다음 휴가 땐 무슨 작품과 함께 할지 기대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이 전투의 상대는 알고 보니 벽돌 책이 아닌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성장했고, 그 대가로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독서의 깊이와 풍성함을 맛보았으며, 그것을 더욱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번에 일주일 채 안 되는 짧은 휴가 동안 읽었던 작품은 민음사 판본으로 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두 권으로 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였다. 유럽 고전 문학에 심취하여 그 깊은 우물 안의 물을 길어 먹던 나는 미국 문학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과 같았다. 최근 몇 작품들을 읽으며 유럽 문학과 비교되는 미국 문학만의 독특한 맛을 알게 되었고, 그만큼 나의 독서는 지경이 더 넓어지게 되었다. 11년째 미국에 거주하기 때문일까. 미국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면 무언가 공감되는 면이 크다. 부분적으로는 미국 문화와 합법/불합법적으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차별 문제와 그 배후에 있는 견고한 자본주의의 힘을 나도 보고 듣고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존 스타인벡의 작품 ‘생쥐와 인간’을 몇 달 전에 읽었던 탓인지 ‘분노의 포도’는 도입부부터 분위기가 그것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친숙하게 다가왔다. ‘생쥐와 인간’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려보던 이미지가 고스란히 이 작품에도 투영되었다. 그 이미지는 궁핍과 허무였다. 알고 보니 두 작품 모두 1930년대 경제 대공황 시대에 써졌고, ‘분노의 포도’는 ‘생쥐와 인간’ 출간 후 2년 뒤에 출간된 작품이다.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인 것이다.

모든 물질적인 것들의 바닥을 뚫고 들어가면 정신적인 그 무엇에 닿을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풍족할 땐 생각조차 못하던 어떤 것의 ‘의미’랄까 하는, 다소 철학적이고 인생/인간 저 깊숙한 부분에 관련된 것들을 궁핍에 처할 때에야 비로소 체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무언가의 의미를 묻고 그 이면을 궁금해하는 자는 언제나 그 무엇에 굶주린 사람이다. 배부른 돼지는 묻지 않는다. 필요 이상을 가진 자들의 유일한 걱정은 ‘어떡하면 뺏기지 않을까?’ 일뿐이다. 그들은 그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악마화 시키고 차별, 배제, 혐오의 대상으로 둔갑시킨 뒤 공론화한다. 수십수백 명의 가난한 자들이 여러 날동안 먹고살 수 있는 돈의 몇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그들은 그들을 ‘합법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사용한다. 자본주의의 승자독식이 만들어낸 웃지 못할 ‘합리적’인 폭력의 현장이다.

배부르고 영악한 돼지들은 이런 비가시적 폭력에 만족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부랑자로 내몰린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해충 쓸어내듯 눈앞에서 쫓아내고 싶어 한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목 하에 말이다. 그것도 자기들이 만든 나름대로의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래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배후에서 유혈사태를 조장하기도 한다. 가난한 자들을 선동하여 그들이 봐도 불법적일 수밖에 없는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 덫과 같은 잔인한 계획이 성공할 때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다렸다는 듯 가시적인 폭력을 맘 놓고 휘두르고 그들의 운명을 심판한 뒤 생사를 좌우하기까지 한다. 마치 인간 위에 인간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는 게 당연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다. 필요 이상 가진 것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아직 뺏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미리 가난한 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고 응징한다는 이 모순 가득한 비극. 나는 이런 일련의 순서로 진행되는 비극적 과정을 이 작품 ‘분노의 포도’에서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보며 다시 한번 그것이 가진 잔인한 기계성에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인간다움이 사라진 이기성,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대표되는 인간 본성에 이르는 답 없는 질문에 쌓인 채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멍하니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은행과 트랙터로 상징되는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오클라호마에서 몇 대째 삶의 터전을 잡고 착실하게 살아가던 톰 조드 가족 일행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닥친 끔찍한 재앙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집도 땅도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부랑자 신세가 되어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간신히 구한 고물 트럭에 생필품만을 싣고서 서부 캘리포니아를 향한 먼 길에 올랐다. 캘리포니아에 가면 과일이나 목화를 따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으며,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부푼 희망에 찬 채로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어렵사리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지만 (오는 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죽음을 맞이했다), 톰 조드 일행은 수요와 공급의 논리가 이처럼 명징하게 드러나는 시기가 또 있었을까 싶은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전단지에 적힌 수백 명의 일꾼을 구한다는 광고가 새빨간 거짓은 아니었지만, 수요에 비해 과공급된 (너무나 과잉 공급된) 동부로부터 몰려온 부랑자 신세의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수를 그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기 땅에서 성실하게 땀 흘려 농사를 짓고, 그것을 팔아 돈을 벌고, 풍족하진 않지만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그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던 시대에 속했던 톰 조드 일행에겐 너무나 갑작스럽고 가혹한 전환이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농장 주인이나 지주들의 입장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계산법이 있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20년 남짓된 지금의 시점으로 (이 작품이 출간된 지 거의 100년이 지난 현재) 보면 당연한 논리로 보일 수 있고 표면적으로는 흠잡을 곳이 별로 없는 계산법이었다. 예를 들어, 100명에게 시간당 1달러를 주며 일을 시킬 수 있는데, 예상외로 500명의 일꾼이 몰려들게 되면 그들에게 시간당 20센트만 주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면 100달러라는 동일한 금액의 돈이 들면서도 몇 배나 빠른 시간 내에 일을 끝낼 수 있기 때문에 농장 주인 입장에선 더 많은 일꾼을 고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상황을 500명의 일꾼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에 하루 먹고살 수 있는 최소 금액이 시간당 50 센트라는 전제가 깔린다면, 시간당 20센트의 돈은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금액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대두되는, 어떤 한계치를 넘어서는 순간인 것이다.

저자 존 스타인벡은 자본주의의 병폐를 이렇게 작품 속에서 톰 조드 일행의 서부로의 반강제적 이동, 캘리포니아 입성, 노동력의 착취와 차별과 혐오의 현장을 통해 신랄하게 보여준다. 비록 어떤 해결책을 내놓지도 않고 조금은 낭만적으로 그려놓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 게 바로 소설만이 할 수 있는 힘이 아닌가 한다. 허구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이 말하지 못하는 현실의 이면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힘. 문학의 힘.

이 작품을 읽게 된다면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충분히 생각에 잠겨보라고 권하고 싶다. 하나는 톰 조드 일행의 관점으로, 다른 하나는 그들을 착취하는 캘리포니아 농장 주인의 관점으로. 물론 이 작품 속엔 톰 조드 일행과 같은 목적으로 캘리포니아로 이동한 수십 만의 이주민들이 등장한다. 요즘 말로 하면 모두 홈리스들인 셈이다. 그들은 천막을 짓고 물이 있는 곳에 둥지를 틀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데에 있어 그들 사이에 경쟁이 붙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즉, 같은 부랑자 신세가 된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 역시 저자는 놓치지 않고 충분한 개연성을 부여하여 그려놓는다. 그렇다면 첫 번째 관점을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농장 주인들을 향한 눈, 다른 하나는 같은 동지들을 향한 눈. 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작품을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지만, 이런 관점들만 나열해놓고 봐도 이 작품은 시대와 문화는 우리와 달라도 똑같은 인간과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우린 금세 알아챌 수 있다. 참고로, 톰 조드 일행에겐 자기만 살려고 하는 부랑자들과도, 그들을 착취하며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된 농장 주인이나 그들과 상부상조하며 캘리포니아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캘리포니아 이주민들을 배제하는 정부 관련 인간들과도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다움이었다. 그들은 배고파도 더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는 등 끝까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과 상치되는 곳에 저자는 ‘인간다움의 존속’을 놓아두며, 그것이 희망의 씨앗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와 인간다움의 대립. 언뜻 보면 말도 안 되는 싸움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이것이야말로 바로 고전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내재한 기계성과 그것을 무기로 삼고 부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이기심. 그리고 그것들에 저항하여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는 인간다움의 정신. 문학이 아니면 꿈꿀 수도 없는 이 기막힌 장면들의 묘사.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살아내는 현실을 다시 쳐다볼 수 있고 그 이면을 생각해볼 수 있으며 보다 나은 인간과 보다 나은 인생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느 고전 문학처럼 개별적인 상황을 그리고는 있지만 개별성을 넘어 인간과 인생의 보편성에 이르는 통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저자인 존 스타인벡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데에 현격한 공을 세웠던 작품이기도 한 이 책 ‘분노의 포도’를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이 계시다면 일독을 권한다. 아무 죄 없이 차별당하는 굶주린 톰 조드 일행의 눈에 비친 잘 익은 캘리포니아 포도가 ‘분노의 포도’로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공감하며 나는 안타까워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1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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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4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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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기계성 뒤에 숨은 인간의 이기성,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는 인간다움


존 스타인벡 저, ‘분노의 포도’를 읽고

독서란 일차적으로 유희이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유희가 목적인 독서는 그것이 닿을 수 있는 깊이의 반의 반도 이르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맴돌 가능성이 크다. 무엇을 하든 그것을 충분히 즐기면서 지속하기 위해서는 재미만이 아닌 깊이와 풍성함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나는 가끔 독서에도 비장한 마음으로 임하게 된다. 이때 독서는 단순한 ‘읽기’가 아닌 ‘이겨내기’의 의미를 띠고, 책은 ‘노는 장난감’이 아닌 ‘극복할 대상’이 된다.

언젠가부터 휴가를 맞이할 때면 평소엔 엄두를 못 내던 장편소설을 손에 든다. 이른바 ‘벽돌 깨기’다. 처음엔 백 퍼센트 도전정신으로 시작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이 벽돌들을 깰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반은 부채감, 반은 의무감에 찬 비장하고 전투적인 마음이었다. 그에 따라 하는 수 없이 나는 편한 옷을 입고 소파 위에 올라타 기지개나 켜고 있는 고양이가 아닌 갑옷을 입고 창과 칼을 든 용사가 되어야만 했다.

몇 년 전 헤세의 마지막 작품 ‘유리알 유희’로 시작했던 이 단기 전투는 해를 거듭하며 나의 즐거움이 되었고, 이젠 다음 휴가 땐 무슨 작품과 함께 할지 기대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이 전투의 상대는 알고 보니 벽돌 책이 아닌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성장했고, 그 대가로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독서의 깊이와 풍성함을 맛보았으며, 그것을 더욱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번에 일주일 채 안 되는 짧은 휴가 동안 읽었던 작품은 민음사 판본으로 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두 권으로 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였다. 유럽 고전 문학에 심취하여 그 깊은 우물 안의 물을 길어 먹던 나는 미국 문학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과 같았다. 최근 몇 작품들을 읽으며 유럽 문학과 비교되는 미국 문학만의 독특한 맛을 알게 되었고, 그만큼 나의 독서는 지경이 더 넓어지게 되었다. 11년째 미국에 거주하기 때문일까. 미국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면 무언가 공감되는 면이 크다. 부분적으로는 미국 문화와 합법/불합법적으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차별 문제와 그 배후에 있는 견고한 자본주의의 힘을 나도 보고 듣고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존 스타인벡의 작품 ‘생쥐와 인간’을 몇 달 전에 읽었던 탓인지 ‘분노의 포도’는 도입부부터 분위기가 그것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친숙하게 다가왔다. ‘생쥐와 인간’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려보던 이미지가 고스란히 이 작품에도 투영되었다. 그 이미지는 궁핍과 허무였다. 알고 보니 두 작품 모두 1930년대 경제 대공황 시대에 써졌고, ‘분노의 포도’는 ‘생쥐와 인간’ 출간 후 2년 뒤에 출간된 작품이다.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인 것이다.

모든 물질적인 것들의 바닥을 뚫고 들어가면 정신적인 그 무엇에 닿을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풍족할 땐 생각조차 못하던 어떤 것의 ‘의미’랄까 하는, 다소 철학적이고 인생/인간 저 깊숙한 부분에 관련된 것들을 궁핍에 처할 때에야 비로소 체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무언가의 의미를 묻고 그 이면을 궁금해하는 자는 언제나 그 무엇에 굶주린 사람이다. 배부른 돼지는 묻지 않는다. 필요 이상을 가진 자들의 유일한 걱정은 ‘어떡하면 뺏기지 않을까?’ 일뿐이다. 그들은 그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악마화 시키고 차별, 배제, 혐오의 대상으로 둔갑시킨 뒤 공론화한다. 수십수백 명의 가난한 자들이 여러 날동안 먹고살 수 있는 돈의 몇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그들은 그들을 ‘합법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사용한다. 자본주의의 승자독식이 만들어낸 웃지 못할 ‘합리적’인 폭력의 현장이다.

배부르고 영악한 돼지들은 이런 비가시적 폭력에 만족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부랑자로 내몰린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해충 쓸어내듯 눈앞에서 쫓아내고 싶어 한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목 하에 말이다. 그것도 자기들이 만든 나름대로의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래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배후에서 유혈사태를 조장하기도 한다. 가난한 자들을 선동하여 그들이 봐도 불법적일 수밖에 없는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 덫과 같은 잔인한 계획이 성공할 때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다렸다는 듯 가시적인 폭력을 맘 놓고 휘두르고 그들의 운명을 심판한 뒤 생사를 좌우하기까지 한다. 마치 인간 위에 인간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는 게 당연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다. 필요 이상 가진 것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아직 뺏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미리 가난한 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고 응징한다는 이 모순 가득한 비극. 나는 이런 일련의 순서로 진행되는 비극적 과정을 이 작품 ‘분노의 포도’에서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보며 다시 한번 그것이 가진 잔인한 기계성에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인간다움이 사라진 이기성,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대표되는 인간 본성에 이르는 답 없는 질문에 쌓인 채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멍하니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은행과 트랙터로 상징되는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오클라호마에서 몇 대째 삶의 터전을 잡고 착실하게 살아가던 톰 조드 가족 일행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닥친 끔찍한 재앙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집도 땅도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부랑자 신세가 되어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간신히 구한 고물 트럭에 생필품만을 싣고서 서부 캘리포니아를 향한 먼 길에 올랐다. 캘리포니아에 가면 과일이나 목화를 따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으며,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부푼 희망에 찬 채로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어렵사리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지만 (오는 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죽음을 맞이했다), 톰 조드 일행은 수요와 공급의 논리가 이처럼 명징하게 드러나는 시기가 또 있었을까 싶은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전단지에 적힌 수백 명의 일꾼을 구한다는 광고가 새빨간 거짓은 아니었지만, 수요에 비해 과공급된 (너무나 과잉 공급된) 동부로부터 몰려온 부랑자 신세의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수를 그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기 땅에서 성실하게 땀 흘려 농사를 짓고, 그것을 팔아 돈을 벌고, 풍족하진 않지만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그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던 시대에 속했던 톰 조드 일행에겐 너무나 갑작스럽고 가혹한 전환이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농장 주인이나 지주들의 입장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계산법이 있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20년 남짓된 지금의 시점으로 (이 작품이 출간된 지 거의 100년이 지난 현재) 보면 당연한 논리로 보일 수 있고 표면적으로는 흠잡을 곳이 별로 없는 계산법이었다. 예를 들어, 100명에게 시간당 1달러를 주며 일을 시킬 수 있는데, 예상외로 500명의 일꾼이 몰려들게 되면 그들에게 시간당 20센트만 주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면 100달러라는 동일한 금액의 돈이 들면서도 몇 배나 빠른 시간 내에 일을 끝낼 수 있기 때문에 농장 주인 입장에선 더 많은 일꾼을 고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상황을 500명의 일꾼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에 하루 먹고살 수 있는 최소 금액이 시간당 50 센트라는 전제가 깔린다면, 시간당 20센트의 돈은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금액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대두되는, 어떤 한계치를 넘어서는 순간인 것이다.

저자 존 스타인벡은 자본주의의 병폐를 이렇게 작품 속에서 톰 조드 일행의 서부로의 반강제적 이동, 캘리포니아 입성, 노동력의 착취와 차별과 혐오의 현장을 통해 신랄하게 보여준다. 비록 어떤 해결책을 내놓지도 않고 조금은 낭만적으로 그려놓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 게 바로 소설만이 할 수 있는 힘이 아닌가 한다. 허구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이 말하지 못하는 현실의 이면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힘. 문학의 힘.

이 작품을 읽게 된다면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충분히 생각에 잠겨보라고 권하고 싶다. 하나는 톰 조드 일행의 관점으로, 다른 하나는 그들을 착취하는 캘리포니아 농장 주인의 관점으로. 물론 이 작품 속엔 톰 조드 일행과 같은 목적으로 캘리포니아로 이동한 수십 만의 이주민들이 등장한다. 요즘 말로 하면 모두 홈리스들인 셈이다. 그들은 천막을 짓고 물이 있는 곳에 둥지를 틀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데에 있어 그들 사이에 경쟁이 붙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즉, 같은 부랑자 신세가 된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 역시 저자는 놓치지 않고 충분한 개연성을 부여하여 그려놓는다. 그렇다면 첫 번째 관점을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농장 주인들을 향한 눈, 다른 하나는 같은 동지들을 향한 눈. 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작품을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지만, 이런 관점들만 나열해놓고 봐도 이 작품은 시대와 문화는 우리와 달라도 똑같은 인간과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우린 금세 알아챌 수 있다. 참고로, 톰 조드 일행에겐 자기만 살려고 하는 부랑자들과도, 그들을 착취하며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된 농장 주인이나 그들과 상부상조하며 캘리포니아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캘리포니아 이주민들을 배제하는 정부 관련 인간들과도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다움이었다. 그들은 배고파도 더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는 등 끝까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과 상치되는 곳에 저자는 ‘인간다움의 존속’을 놓아두며, 그것이 희망의 씨앗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와 인간다움의 대립. 언뜻 보면 말도 안 되는 싸움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이것이야말로 바로 고전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내재한 기계성과 그것을 무기로 삼고 부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이기심. 그리고 그것들에 저항하여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는 인간다움의 정신. 문학이 아니면 꿈꿀 수도 없는 이 기막힌 장면들의 묘사.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살아내는 현실을 다시 쳐다볼 수 있고 그 이면을 생각해볼 수 있으며 보다 나은 인간과 보다 나은 인생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느 고전 문학처럼 개별적인 상황을 그리고는 있지만 개별성을 넘어 인간과 인생의 보편성에 이르는 통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저자인 존 스타인벡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데에 현격한 공을 세웠던 작품이기도 한 이 책 ‘분노의 포도’를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이 계시다면 일독을 권한다. 아무 죄 없이 차별당하는 굶주린 톰 조드 일행의 눈에 비친 잘 익은 캘리포니아 포도가 ‘분노의 포도’로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공감하며 나는 안타까워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1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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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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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기억과 집착이 만든 섬


모니카 마론 저, ‘슬픈 짐승’을 읽고.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 낮은 곳에서 용기 내어 나선 길. 그 길 위에서 좋은 길잡이를 만난다는 건 반가운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설 즈음, 마치 사춘기를 다시 시작하듯 발걸음을 뗀 독서 여정에서 나에게 신형철은 그런 존재가 되어 주었다. 약 2년에 걸쳐 그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추천한 작품 중 열 권을 읽어 오면서 어느새 내 안에선 조용히 그에 대한 신뢰가 생겨 버렸고, 급기야 나는 책 뒤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추천도서 이외에도 그가 각 꼭지에서 다룬 작품 중 마음에 와 닿았던 것부터 하나씩 기회가 되는 대로 읽어나가고 있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도 그 새로운 여정에서 만난 작품 중 하나다. 아마도 신형철이라는 길잡이를 못 만났다면 평생 내 손에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신형철은 1부 ‘그녀, 슬픔의 식민지’라는 꼭지에서 이 작품을 다루었다.

이 작품은 자기 나이도 잘 기억하지 못할 만큼 처절하게 섬이 되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다.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건 단순히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거나 기억상실에 걸렸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기억도 무한히 반복해서 되새기면 변형이 되는 법. 확실한 것은 점점 사라지고,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혹은 무엇이 실제 일어났던 일인지 무엇이 일어나길 바랐던 것인지 시간이 갈수록 묘연해지게 되는 것이다. 기억이 집착을 만나면 환영이 되는 이유도 아마 이런 기작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과거에 경험했던 불꽃같던 사랑을 조금씩 기억해낸다. 부정확하고 불연속적인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들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녀의 독백들. 기억의 파편 하나하나에는 슬픔이 진득하게 배어있고, 그 슬픔은 서서히 그녀를 점령해버리고 말았다. 수십 년 전 이야기 속에 집을 짓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는 그녀. 집착이라는 소름 돋는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할 만큼 그녀는 오늘도 프란츠와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그녀의 이야기가 처절한 슬픔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프란츠도 그녀도 각각 가정을 가진 상태에서 만나는 은밀한 관계였기 때문이고, 보다 거시적인 이유는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이 모두 ‘기이한 시대’를 거치며 일어났기 때문이다. 동독과 서독으로 나눠진 독일. 작가 모니카 마론은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성장했고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다시 통일된 독일. 그녀는 한때 서독으로 이주해 있다가 통일이 된 이후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작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시대가 작가를 통과하면 작품이 되는 법. 그 ‘기이한 시대’를 모두 통과한 모니카 마론은 한 평범한 서독 출신의 남자와 한 평범한 동독 출신의 여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그 기이한 시대가 남긴 흔적과 상처를 평범한 사랑과 집착, 불안과 기다림, 그리고 슬픔이라는 단어로 응축해낸다. 마치 거대한 역사가 결국 스며드는 곳도 바로 우리네 평범한 일상임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작가는 소설 속의 ‘나’를 기이하지만 평범한, 그러나 처절한 슬픔 속에 잠기게 한다. 섬이 되게 한다. 신형철은 이를 ‘식민지’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사람이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 말은 소설 속 ‘나’가 프란츠를 만나고 그녀 안에 꿈틀거리던 사랑을 해방시킨 말이기도 하다. 그녀가 프란츠를 선택한 게 아니었다. 그녀 안에 있던 사랑이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행동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기이한 시대’가 끝나던 무렵이었다.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사랑을 죄수로 만들었고, 통일이 그 종신형 죄수로 하여금 감옥을 부수고 나오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해방으로 인해 만난 사랑도 결국엔 헤어짐으로 끝나고, 그녀에게 남은 건 오로지 슬픔뿐이었다. 그녀는 책의 마지막에서 프란츠와 함께 누워있곤 했던 침대에 크고 작은 짐승들과 함께 눕는다. 그녀의 슬픔은 환영까지 불러온 것이다.

읽고 나면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비록 강하진 않지만 오래 남는 작품이다. 저자의 글쓰기에서 나는 저자가 처한 시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그녀가 느꼈던 감정들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나를 통과하면서 과연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고 책을 덮으며 조용히 생각하게 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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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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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프리모 레비 저,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2차 세계대전’ 하면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아우슈비츠’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단어는 반지성적인 우생학에 기반하여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신봉했던 ‘히틀러’나 ‘나치’가 아닌, 그들에 의해 실행된 유대인 대학살, 이른바 ‘홀로 코스트’이다. 악의 발현, 아니 악 그 자체라고 표현해도 여전히 충분하지 못한 것 같은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아닌, 그들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희생당한 유대인들이 왜 나에겐 먼저 떠오르는 것일까. 유럽 각지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은 하루아침에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짐승보다 못한 고깃덩어리로 전락했고, 엄청난 수가 도살되듯 강제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나에게 아우슈비츠는 세상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피의 심연이다. 또한, 그곳은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가장 명징하게 보여준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그 아유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저자는 이를 ‘운이 좋아서’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이 책의 첫 문장 첫 단어로 등장한다) 소수의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책의 저자 ‘프리모 레비’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의 귀중한 수기인 셈이다. 허구는 하나도 없다. 모두가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다. 역사책으로 배우는 아유슈비츠 수용소의 역사적 존재와 기능을 거뜬히 넘어서 우린 죽음의 집, 비인간화의 집, 즉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의 실상을 이 책을 통해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저자의 절제된 필체는 애써 참았던 울분과 끝이 보이지 않는 허망함과 먹먹함에 끝내 불을 지르고야 만다.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을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깊은 절망이 덤덤하게 기술되어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될 때 느껴지는 초탈함일까. 아니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문자화 되면서 감정이 소진되어 버린 것일까. 아우슈비츠가 어떤 곳인지 이미 알고 있는 독자에겐 그 끔찍한 실상을 무신경한 것처럼 써 내려간 부분이 오히려 날카로운 비수보다 더 아프게 다가온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자신이 경험했던 실제 감옥 생활을 기반으로 하여 ‘죽음의 집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지만, 그 시베리아 옴스끄 지방의 감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다. 비록 도스토옙스키는 억울한 이유로 감옥 생활을 해야만 했으나, 감옥은 어디까지나 감옥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감옥은 범죄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새 터전이다. 그러나 수용소는 범죄자이든 아니든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 철저히 그 수용소를 짓고 사람들을 가두고 인간 이하의 존재로 다루는 인간 말종들의 적이라면 누구나 (특히 유대인들) 강제로 수용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혐오와 차별과 배제가 권력이라는 갑옷을 입고 그 힘을 마음껏 휘두르는 장소가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산둥 수용소’의 저자이자 저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제자였던 랭던 길키도 2차 세계대전 중 중국에서 거주할 때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수용소로 보내졌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산둥 수용소’ 작품 역시 그의 수용소 생활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수기인 셈이다. 그 작품에서도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살펴볼 수 있다. 책의 부제가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라는 것은 이를 잘 드러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모 레비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기인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와 비교하면 그 타격이 약화되는 감이 없지 않다. 철학과 신학에 기반한 엘리트 학자의 눈에 비친 수용소 사람들에 대한 분석이 위주가 되었다는 건 저자 랭던 길키에게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정신이 남아있었다는 반증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모 레비의 경험은 보다 직설적이고 일상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쩌면 그에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책의 제목이 ‘이것이 인간인가’이지만, 이성과 논리보다는 훨씬 더 깊고 인간의 중심에 가까운 그 무언가를 건드리며 독자 눈과 마음을 집중하게 만든다. 

인간이 어떤 좁은 장소에 밀집되고 격리되었을 때, 그래서 장기간 외부와 차단되었을 때, 너무나 당연하던 의식주 문제가 죽고 사는 문제가 되었을 때, 과연 인간이 어떤 존재로 바뀔 수 있는지는 실화를 기반한 위의 세 작품 말고도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100% 허구이지만 인간의 본성을 깊게 파고들어 그 민낯을 생생하게 까발린 역할은 위의 세 작품과 비슷한 정도로 톡톡히 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구는 허구일 뿐이다. 

그렇다. 프리모 레비의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는 실화이며, 운 좋게 죽다 살아남은 자의 생생한 수기이며, 무엇보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간의 잔인함이 극대화된 장소로부터의 회고록이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비록 살아남아 이 책을 쓰고 40년에 걸쳐 증언을 해왔지만, 그의 불안과 절망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깊어졌던 것 같다. 1919년생인 그가 68세가 되던 1987년 4월 11일, 프리모 레비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 위에 언급한,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그 어떤 책들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까닭은. 살아남은 자의 자살. 한참 생각에 잠겼던 나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다. 그가 말하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이 비단 히틀러와 나치 세력들만을 향하지 않게 된다. 그가 자살을 선택했던 이유. 비인간화의 극치에서 인간다움을 지켜냈던 생존자가 최후로 선택한 행동이 스스로 소중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니! 그리고 나는 히틀러와 나치를 넘어 프리모 레비까지 포함하여, 오늘 접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더 큰 범주에서 묻게 된다. ‘이것이 인간인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돌베개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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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세계문학의 천재들 1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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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운명적인 일탈: 지금 나는 어디에.

파스칼 메르시어 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필연은 없다고, 모든 게 우연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언젠간 운명 같은 만남을 갖기 마련이다. 지난주 목요일,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이 책은 그렇게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다. 오프라인 서점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스릴 넘치는 현장감은 사전에 아무런 계획 없이 손에 붙잡히는 대로 책을 고르고 훑어보다가 마음에 꽂히는 문장이나 작가의 문체 등에 이끌려 즉흥적으로 구매할 때 최고조에 달한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작가, 평소에 즐겨 읽지 않는 현대문학. 이 두 가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난 일주일 남짓 나와 매일 동행하며 나를 매혹시켰다. 나는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온 사건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 믿기로 한다. 책을 다 읽고도 여전히 책을 도로 책장에 꽂아놓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여전히 무언가를 알고 싶은 것처럼, 이제 막 다시 읽기 시작할 것처럼 망설이는 모습이다. 나는 이 책을 손에서 놓기가 못내 아쉽다. 책 표지 그림을 가만히 쳐다본다. 내가 기차역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인생이라는 기찻길의 한 정류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만 같다. 어딘가로 떠나려는 것인지, 어딘가로부터 도착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나는 그저 떠나가는지 다가오는지 모를 기차를 바라보며 서 있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리스본. 이 책을 읽고 이곳에 대한 이상한 동경이 생겨 버렸다. 세계지도를 꺼내 리스본의 위치를 찾아본다. 대륙의 끝,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의 서쪽,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해안에 위치해 있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서쪽으로 태평양을 끼고 있지만, 리스본은 서쪽으로 대서양을 끼고 있다. 언젠가 보스턴에서 바라봤던 동쪽 대서양의 이국적인 모습이 떠오른다. 그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은 어떤 느낌일까. 한국에서 바라본 태평양과 캘리포니아에서 바라보는 태평양의 차이만큼일까. 땅끝의 나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사막의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대서양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문득 나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스위스 베른에서 포르투갈 리스본, 편도 1,250마일을 가려면 비행기나 기차를 타야 한다. 작품 속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5주 간의 포르투갈 여행의 시작과 끝을 기차로 장식했다. 의미심장한 일탈의 시작과 끝이 되어 주었던,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 된 리스본행 야간열차. 그의 인생에서 가장 깊고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안내한 마법의 기차.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장거리 기차 여행의 낭만을 떠올려본다. 즉흥적인 이끌림에 몸을 맡긴 채 홀로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상상해본다. 그 외국어들은 과연 노랫소리로 들릴까.

비 내리던 어느 날, 수십 년 간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릴 정도로 익숙했던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그레고리우스는 낯선 한 여자를 운명처럼 만난다. 그는 고전문헌학 교수다. 여느 때처럼 수업을 하기 위해 학교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다리 중간에서 난간 위로 팔을 뻗치며 미끄러지던 순간 그레고리우스는 그녀가 뛰어내릴 거라는 본능적인 생각을 했다. 놀란 심정으로 그는 들고 있던 우산을 순간적으로 내던졌고 덕분에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책은 이미 빗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왔다. 주머니에서 사인펜을 꺼내어 그레고리우스 이마에 숫자를 몇 개 적었다. 전화번호를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는데 마침 종이가 없기 때문이랬다. 그녀는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걸어서 그가 강의하는 교실까지 들어와 잠시 앉아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 조용히 빠져나가 떠나 버렸다. 그레고리우스는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 그녀에게 모국어가 무엇인지 물었었다. “포르투게스.” 그녀의 답변이었다. 그레고리우스에게는 지상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멜로디였다. 하루 종일이라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마에 전화번호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린 그녀는 그레고리우스의 인생에 깊은 창을 찔러 넣은 셈이었다. 아니, 그녀가 아니라 포르투갈어의 그 묘하고도 신비한 노랫소리 같은 발음이 그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낸 것이었다. 수업을 마치지도 않고 그는 책과 가방을 그대로 교탁 위에 두고 유유히 학교를 빠져나왔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용기가 생겼다. 그레고리우스는  57년 간 안정적이었던 학자로서의 삶을 이제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불안과 해방감이 묘하게 섞인 기분을 느꼈다. 모든 게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인생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세상도 모두 새로운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찾은 에스파냐 책방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운명의 책을 만난다. 포르투갈어로 쓰인 책이었다. 제목은 ‘언어의 연금술사’. 마침 책방 주인은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알았다. 주인이 그를 위해 몇 문장을 읽어주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글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모든 것이 달라진 그날 오전을 위해 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확신에 차서 책을 구입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책의 안 표지에 나온 저자의 사진을 보며, 이 포르투갈 사람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고 움직이는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포르투갈에 꼭 가야 할 것 같은 운명을 느꼈다. 책방에 가서 포르투갈 어학 교재를 사고 공부를 했다. 책 일부분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은 빠르게 진동했다. 교장 선생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메일을 써서 우체통에 넣었다. 현금을 찾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고 모든 게 운명에 이끌리는 것 같았다. 일탈의 시작이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레고리우스가 운명처럼 갖게 된 책의 저자 아마데우의 일생을 톺아보며 그 흔적을 좇는 여정이다. 아마데우는 이미 뇌출혈로 죽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아마데우의 글은 그레고리우스가 가진 책 이외에도 이곳저곳에 많이 산재해있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일생을 좇는 여정은 그의 글을 좇는 여정이라 할 수 있고, 그 여정 가운데 등장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등장하는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며 텍스트 이면에 있는 콘텍스트까지 읽어나가면서 글을 깊고 풍성하게 이해해나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아마데우의 가족과 친구, 연인 등의, 이제는 모두 죽었거나 노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차례대로 만나가면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을 포르투갈이라는 낯선 땅으로 이끌었던 그 운명 같은 만남의 주인공 아마데우의 삶을 추적해 나간다.

아마데우는 언어의 연금술사였다. 아니, 언어 그 자체였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글쓰기로 자신의 사상과 감정, 속마음 등을 모두 털어놓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탁월한 지력을 가졌던 아마데우도 어쩔 수 없이 시대의 한계에 속한 유한한 인간이었다. 문학자가 아닌 아버지의 뜻에 맞추기 위해 의사가 된 아마데우는 어느 날 독재 정부의 하수인 격인 멩지스를 죽을 고비에서 살려준다. 독재에 대항하는 포르투갈 국민으로서가 아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던 한 의사로서의 숭고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아마데우의 인생을 크게 한 번 뒤트는 사건으로 자리매김한다.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멩지스로 인해 고통받는 포르투갈 국민들의 설움과 고통을 외면하고, 오히려 독재 정권을 옹호한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아마데우는 속죄라도 하듯 독재 정부에 저항하는 운동에 발을 담그게 되고, 인생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한다. 그러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또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이 발생하며 아마데우의 삶은 점점 그를 내면으로 침잠케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침잠이 그의 글로 번역되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아무나 쓸 수 없는 글, 아마데우가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글을 그는 그의 뜻밖의 인생의 심연에서 퍼올리게 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의사가 아닌 문학가의 삶을 뜻하지 않게 살아낸 사람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왜 아마데우라는 사람에게 그토록 집착하게 되었을까? 이방인에 불과한 아마데우라는 한 사람의 과거 흔적을 샅샅이 좇으며 그레고리우스는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단순한 운명의 이끌림으로만 설명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바람처럼 왔다 가는 전율의 순간은 지속력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그런 자리로 내몰았을까? 모든 시간과 모든 돈과 모든 건강을 다 소진하면서까지 낯선 이의 삶의 흔적을 좇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레고리우스와 아마데우의 공통점이 언어와 글쓰기에 기반한다는 점이 실마리가 될 수는 있을진 몰라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남는다.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흔적을 좇아가는 과정에 일개 과학자에 불과한 나조차도 몰입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의문은 더욱 진하게 남는다. 그저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와 운명을 목격하고 그것에 저항하거나 순응하는 여정에서 나의 공감을 샀나 보다, 하며 나는 석연치 않은 결론을 내릴 뿐이다. 어쩌면 그것을 알기 위해 나는 여전히 이 책을 책장에 꽂아 놓지 못한 채 이렇게 답례라고 하듯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기차역에 서 있는 것 같다. 답을 모른 채로 덩그러니 그렇게.

#들녘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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