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듯 다른 우리 - 유전자, 센트럴 도그마, 인간다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김영웅 지음 / 선율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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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입니다. 그러니 생물학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전혀 몰라도 쉽고 재밌게 읽으실 수 있답니다. 일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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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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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것들, 그리고 고독.

보후밀 흐라발 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고.

‘시끄러운 고독’. 사실, 제목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책이다. 중고서점에 들를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마주쳤던 책. 그러나 나는 이상하리만큼 한 번도 그 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조금은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책을 볼 때마다 내 머리를 스친 생각은 ‘아마도 이 책 또한 과대포장된 제목의 책’일 것이라는, 별 근거 없는 나의 상처 입은 신념이었던 것 같다. 제목에 이끌려 책을 펼쳐보다가 적잖은 실망을 했던 적이 어디 한 두번이던가. 이 책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게다가 저자 이름도 생소하고 해서, 난 그냥 제목만을 읽고 표지만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최근, 평소에 내가 참 좋아하는 필체로 글을 쓰시는 지인이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쓴 것을 보았다. 익숙한 제목과 익숙한 표지, 그러나 낯선 내용. 순간, 내가 중고서점에서 그 책을 볼 때마다 했던 생각이 철저히 틀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주말에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중고서점에 들려 그 책을 구입했다. 다행히 그 책은 비슷한 자리에 꽂혀 있었다. 마치 계속해서 내 손길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 책은 장편소설로 분류되지만, 상당히 짧은 분량의 작품이다. 그다지 큰 집중을 하지 않아도, 두 어시간에 다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의 제목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과대포장된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 한타는 삼십 오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고 있다. 습하고 퀴퀴하며 어두운 지하실에 위치한 그의 작업장에는 압축기 한 대와 수많은 종이 (책)와 쥐들이 산다. 저만치 위에서는 언제나 화가 난 듯한 소장의 불평과 잔소리가 큰소리로 들려온다. 늘 구부리고 일을 하느라 허리가 구부러지고, 가족도 친구도 없이, 마치 시끄러운 세상과는 단절된 듯 고독 속에서 외로이 살아가는 한타.

이야기만이 아닌 글에서 시적 이미지를 떠올려보길 좋아하는 나는 잠시 책을 덮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한타와 그의 작업장을 머리 속에 그려봤다. 꽤 흉측하고 기괴한 그림이 그려졌다. 내 그림 속에서 한타는 마치 꼽추와 흡사했다. 저자가 묘사한 것처럼 잘 씻지도 않는 그의 몸에선 곰팡이 냄새와 쥐 냄새가 나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몰골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그가 즐겨 마시던 맥주를 파는 곳에서 계산할 때 옷 속에서 쥐가 뛰쳐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에피소드까지 읽으니 더욱 내 그림 속의 한타는 처참하고 처절한 인간의 대표가 되어버린 듯했다. 잊혀진 듯한 인물, 그리고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인물.

그러나 한타의 일상은 압축기가 내는 괴물 같은 소리나 쥐들이 은밀하게 내는 조그만 소리, 혹은 소장의 고함 소리만으로 이루어진 시끄러운 세상만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그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폐지를 압축하는 성실한 사람만도 아니었다. 그는 폐지가 되기 직전의 수많은 책에서 추출한 어마어마한 양의 문자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마치 폐지를 압축하듯 고독하게 머리와 몸에 압축하여 흡수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시대가 원하지 않거나 남아돌거나 잘못 만들어진 책들을 파기하는 작업의 맨 마지막 단계를 책임지고 있었기에, 그가 섭렵하는 지식의 출처도 모두 시대가 어쨌거나 파기하길 원하는 책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좋아한 건 고전적인 책들이었고 , 또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시대가 원하는 책들은 그의 냄새 나는 지하실 작업장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테니.

시대가 변함에 따라 고성능의 압축기가 개발되었다. 한타에게는 위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폐지를 압축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 압축되어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는 그 가운데 나름대로의 자존감을 찾기도 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기계는 그가 하루 종일 처리해야 했던 양의 책들을 단 몇 시간만에 해치웠고, 그가 휴가까지 반납하고 몇 푼 안되는 수당을 받으면서 일을 해야만 마칠 수 있었던 일은 멋드러진 유니폼을 입은 젊은 사람들이 희희낙낙거리면서 일을 마치고 어디 놀러갈까 이번 휴가에는 어디 갈까를 지껄이면서 진행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로 변해버렸다.

한타는 말문이 막혔다. 더욱 시끄러워진 기계와 전문성이나 경험 없이도 충분히 자신이 했던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일을 단시간에 처리하는 젊은이들의 시끄러운 지껄임 가운데 한타는 더욱 고독했다. 그는 늙었고, 그가 은퇴 후 사려고 마음 먹었던 그 압축기 또한 이젠 시대에 걸맞지 않은 저사양의 그것이 되어버렸다.

그곳에 한타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습하고 퀴퀴하고 어두운 지하 작업장과 그 안을 언제나 가득 채우고 있던,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책들, 그리고 그와 동반자였던 쥐들이 있는 그 작은 세상이 그에겐 그나마 위로요 안식처였는데, 이젠 그마저도 사라져 버릴 운명에 처한 것이었다.

세상은 더욱 시끄러워졌고, 한타는 한층 더 고독에 잠겼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작업장을 찾는다. 늘 하던 압축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압축기에 넣은 것은 폐지가 아니었다. 자기자신의 몸이었다. 그렇게 그는 죽음이라는 영원한 고독 속으로 생을 마감한다.

다소 끔찍한 책의 마지막 설정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강한 울림이 있었다. 나는 그의 고독에 가슴이 미어졌고, 이해가 충분히 되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왠지 모를 동질감까지 느껴졌다. 내 안에도 한타의 모습이 있는지 모르겠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20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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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17
토마스 만 지음, 윤순식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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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죽음과 삶의 역설

토마스 만 저, ‘마의 산’을 읽고

최근 입사 시험을 마친 한스 카스토르프는 고향인 독일 함부르크를 떠나 스위스 고산지대에 위치한 도시 그라우뵌덴 다보스 플라츠로 향한다. 국제 요양원 ‘베르크호프’에서 폐병으로 요양 중인 사촌 요아힘 침센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그렇잖아도 평소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한스는 마침 전지 요양을 하고 오라는 하이데킨트 박사의 조언을 마음에 두고 있던 차였다. 단 3주 예정이었다. 기분 전환도 하고 요양도 하고 오랜만에 사촌도 만나고 돌아와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3주라는 기간은 한스에게 아주 적절했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3주라는 시간은 마치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점점 늘어나 7년이 된다. 당시 23세였던 한스는 30세가 되어서야 ‘마의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것도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1차 세계대전 발발 때문에.

약 1,500 페이지에 달하는 이 작품은 말하자면 한스 카스토르프라는, 호감이 가지만 매우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한 젊은이가  뜻하지 않게 경험한 요양원 생활 이야기이자, 3주가 7년으로 늘어났던 ‘마의 산’ 위의 세상 이야기다. 머리말에서도, 소설의 도입부에서도, 그리고 소설 전체에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시간에 대한 언급을 한다. 마치 시간이 이 소설을 집필한 중요한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머리말에서부터 토마스 만은 ‘시간이라는 비밀스러운 요소의 의문성과 독특한 이중성’에 대해 언급을 하고, 1장 ‘도착’ 꼭지에서는 다보스도르프 역에 도착한 한스를 마중 나온 요아힘으로 하여금 “3주란 아무것도 아니야. 여기 위의 세상에선 3주란 하루와 같은 거야. 사람들의 개념도 변해 버려”라는 말을 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다. 그 이후로도 소설 전체에 걸쳐 군데군데 마의 산 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기술하며 저자는 시간에 대한 언급을 놓치지 않는다. 또한, 이 작품의 전체 구성을 보면, 한스 카스토르프가 보낸 7년 중 첫 1년이 전체 분량의 약 삼 분의 이 정도를 차지하는데, 이것만 봐도 저자 토마스 만이 이 소설을 쓰면서 시간의 상대성, 즉 시간은 균일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부각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제목 ‘마의 산’이 가진 마력이 어쩌면 시간에 관계된, 이를테면 시간을 다르게 지배하는 어떤 신비한 힘을 상징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시간의 상대성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들여다보면, 작품 속 세상은 필연적으로 산 아래의 세상과 산 위의 세상으로 구분된다. 이 이분법적인 구분은 시간에 대한 상대성만이 아닌 소설 전반에 걸친 여러 상징적인 의미와 중첩된다. 이 감상문은 이러한 상징적인 구분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전개해나갈 것이다.

먼저 시간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산 위의 세상은 산 아래의 세상과 달리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 공간이다. 특히 저자는 4장에 가서 ‘시간 감각에 대한 보충 설명’이라는 독립적인 꼭지를 등장시켜 시간의 상대성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는데, 누구나 시간에 대해 할 수 있고, 또 실제로 하고 있는 생각들을 잘 정리해놓고 있어 독자들은 큰 부담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고 소화할 수 있다. 가령, 정해진 생활을 오래 계속할 때 느껴지는 무기력과 무감각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지루함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특히 지루함의 본질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는 부분은 독자들이 잠시 멈춰서 책을 덮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한 거리가 될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린 보통 내용이 흥미롭고 참신한 경우에는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끼는 반면, 단조롭고 공허한 경우에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느끼는데, 저자는 이것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단조롭고 공허한 것들이 짧은 시간 동안 지속되면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면 오히려 그 긴 시간이 찰나처럼 혹은 무처럼 혹은 한 점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혹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기 때문이다. 반복된 단조로움의 힘이랄까? 이는 산 아래 세상에 속했던 한스의 입장에선 나름대로 길게 잡은 3주라는 방문 기간이 산 위의 세상에 속한 요아힘에겐 하루 혹은 아무것도 아닌 아주 짧은 시간으로 여겨지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반복되고 동일한 일상이 가까이서 보면 지루하게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단 한 점으로 보일 만큼 짧디 짧은 시간으로 비칠 수 있다는 얘기다. 단조로움과 지루함이 가지는 이러한 상반된 시간적 속성은 우리가 기분 전환과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일상에서 잠시 손을 놓고 휴가나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잘 설명해준다. 그리고 이는 3주가 7년이 되어버린 한스의 요양원 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요양원 생활에 적응하느라 보낸 1년이란 기간이 소설 전체의 삼 분의 이를 차지한다는 점, 따라서 나머지 6년이라는 물리적으로 긴 시간이 소설의 삼 분의 일만을 차지한다는 점 역시 토마스 만의 시간에 대한 철학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익숙해지기 위해 적응하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가며, 익숙해지고 난 이후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빨리 간다는 사실을 소설 구성에도 그대로 적용한 셈이 될 테니까 말이다.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것, 무언가에 적응한다는 것, 그에 따른 우리들의 시간에 대한 상이한 감각. 우리의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이러한 생각을 떠남과 정착으로 구성된 우리네 인생으로 확장시켜 생각해본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로 살펴볼 상징적 대비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다. 산 아래의 세상은 우리 대부분이 속해 있는 세상으로써 삶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며, 산 위의 세상은 공기도 희박하고 세균 수도 적고 사람 수도 적지만 요양원의 존재가 증명하듯 아픈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은 세상으로써 죽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인 세템브리니가 한스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산 위를 떠나 산 아래로 다시 내려가라고 강력하게 제안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삶과 죽음의 대비를 엿볼 수 있다. 세템브리니는 이탈리아인으로서 인문주의자이자 문필가다. 그 역시 폐병에 걸려 벌써 수년 간 요양 생활 중이다.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프리메이슨 단원이기도 한 세템브리니는 계몽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도 그려지는데, 그는 그 이후로도 한스에게 수 차례에 걸쳐 요양원을 당장 떠날 것을 제안한다. 그 이유는, 산 위의 세상은 죽음의 공간, 진흙탕 구덩이, 마녀 키르케의 섬이므로 오디세우스가 아닌 이상 산 위에서 무사히 지낼 수 없을 거라고, 머지않아 이성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돼지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니게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순진한 한스를 일깨워주길 자처하는 교육자적인 마인드로써 세템브리니는 더 늦기 전에 한스가 자발적으로 죽음의 세상을 떠나 삶의 세상으로 내려가길 바랐던 것이다. 

산 위의 세상이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는 장면은 세템브리니 한 사람의 철학에서만 드러나진 않는다. 이런 상징은 소설 초반부터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먼저 거의 항상 만원인 요양원에 들어오기 위해 대기 줄이 언제나 길다는 점은 곧 요양원에서 죽어나가는 사람 수가 그만큼 많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요아힘은 우스갯소리로 사람이 죽으면 요양원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 그 시체를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썰매를 태워 산 아래로 내려보낸다는 말까치 서슴지 않고 한다. 게다가 한스가 처음에 배정받은 방은 공교롭게도 바로 이틀 전 미국 여자가 죽음을 맞이했던 방이었다. 죽음의 얼굴은 요양원 생활을 하는 여러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드러난다. 폐렴으로 3년째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차도가 없어 차라리 죽음을 원한다고 자조 섞인 말을 내뱉는 알빈 씨의 존재는 물론, 28호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후유스 소녀가 마지막으로 신부 앞에서 지른 비명 소리, 처음엔 두 아들 중 한 아들만 폐병에 걸렸지만 나중엔 나머지 하나마저 결국 폐병에 걸려 버려 좌절한 나머지 매일 어두운 옷을 입고 혼자 산책을 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항상 “둘 다입니다, 둘 다라니까요”라고 하소연을 하는 멕시코 여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니 실제로 주위에 보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그들이 쓰던 방이 비워지고 깨끗이 소독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 선한 긍휼의 마음이 들어 죽음을 코앞에 둔 위독한 환자 방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위로를 건네고 또 그들의 죽음을 목도하는 한스 카스토르프, 그리고 나중엔 사촌 요아힘마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장면까지, 이처럼 소설 전체에 걸쳐 죽음에 대한 직간접적인 메시지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마의 산’ 위에 위치한 베르크호프 요양원은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는 동시에 온통 죽음으로 얼룩진 공간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너무나 익숙해져 빨리 흐르는 시간, 그리고 어두운 죽음의 세력이 실제로 조용히 힘을 떨치고 있는 공간. 과연 이 둘 간의 상관관계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산 아래의 세상에선 어떻게 될지 문득 궁금해진다.

천 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은 보통 읽기 지루한 구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작품의 경우는 대체적으로 책장이 빨리 넘어가는 구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그만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나로선 처음 읽는 토마스 만이라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물론 그 이유도 있을 테지만 그것보다는 전체 분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철학, 인문학적인 논쟁이 수십 페이지에 걸쳐 여러 차례 지속되는 장면에서 나는 여러 번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만연체의 번역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독자인 나의 부족한 철학, 인문학적인 소양이 이 작품을 깊이 읽어내는 데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이 작품은 철학, 인문학적인 소양이 풍부하고 역사적인 지식과 상식까지 두루 갖춘 독자가 읽는다면 훨씬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나에게도 책장이 빨리 넘어가는 구간이 여러 번 등장했는데, 공교롭게도 한스 카스토르프가 클라브디아 쇼샤라는 러시아 여자에게 접근하는 과정,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도 그중 하나였다. 물론 3류 소설처럼 말초적이고 단순한 연애 사건을 다루는 장면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한스가 쇼샤 부인에게 처음 가졌던 감정은 오히려 부정적이었다. 예의에 어긋나게 문을 쾅 닫는 습관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매 식사 시간마다 천연덕스럽게 반복하는 유일한 여자가 바로 클라브디아 쇼샤였기 때문이다. 한스는 본능적으로 불쾌감과 혐오를 느꼈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언제나 놀랍고 또 예상할 수 없는 법. 한스는 쇼샤 부인의 외모로부터 어린 시절 자신이 동경했던 프리비슬라프 히페라는 소년에 대한 추억을 상기하게 되고 동질감을 느낀 나머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게 언제 이성적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고 말하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 한스가 쇼샤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은 모든 인간에게 충분히 공감을 살 만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마력의 시공간을 가진 ‘마의 산’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이 과정마저도 마법에 걸려 벌어지는 일처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템브리니로 대변되는 계몽과 이성에 반하는 쇼샤 부인은 감각적이고 본능적이며 개인적인 감정에 충실한 사랑을 대변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게다가 한스 카스토르프의 요양원 생활이 3주로 끝나지 않고 7년까지 연장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쇼샤 부인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어쩌면 이성을 비웃고 조롱하는 동시에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것에 이끌리고야 마는 인간의 한계랄까 숙명이랄까 하는 것에 대한 저자 토마스 만의 숨은 메시지를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세템브리니와 쇼샤 부인의 대비를 이성과 감각으로 본다면,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대비는 웅변적인 인문주의와 문맹적인 야만성, 또는 친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 또는 육체와 정신을 하나로 보는 일원론자와 육체란 타락하고 부패한 것이며 정신과 대립된다고 보는 이원론자, 또는 합리성과 건강을 중요시하는 성향과 병과 죽음을 찬양하는 성향 등으로 볼 수 있다. 나프타는 요양원을 나가 근처에서 하숙을 하게 된 세템브리니와 같은 집 다른 층에 사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세템브리니의 천적으로서 모든 논쟁에서 반대 입장에 서게 되는 또 한 사람의 지식인이다.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논쟁은 이 작품 전체를 읽어내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인데, 어지간한 철학, 인문학, 역사적인 지식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아무도 그 부분을 완전히 이해하고 책장을 넘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둘 간의 논쟁은 치열하고 심도 있게 다루어진다. 그러나 논쟁의 내용보다 중요한 건 그 논쟁에 참여하여 귀를 기울이며 듣고 가끔 참여하기도 하는 우리의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입장과 변화이다. 세템브리니는 이성과 합리를 무자비하게 쳐부수는 나프타의 궤변으로부터 한스를 보호하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쓴다. 모든 면에서 반대의 의견을 개진하는 나프타는 세템브리니에겐 천적인 동시에 악마의 화신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한스 카스토르프는 자기를 향한 세템브리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긴 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한스는 나프타와 세템브리니의 양 극단을 모두 옹호하지는 않으며,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각각의 단점과 결점을 파악하고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취할 것은 취하고 취하지 않을 것은 취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한다. 특히 이 작품에서 저자 토마스 만의 핵심 메시지가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는 6장 ‘눈’ 꼭지에서 한스의 깨달음은 극에 달한다.

요양원을 떠나 근처에서 하숙을 하게 된 세템브리니, 사육제 기간 중 한스로부터 덥석 사랑 고백을 받은 다음 날 요양원을 떠나버린 쇼샤 부인, 그리고 완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로 복귀하여 남은 생을 살아가기로 결단하고 산을 내려간 요아힘. 한스는 이 세 사람의 부재로 외로움을 느끼게 되자 요양원에서는 건강 상 금지된 스키를 몰래 배우고 타게 된다. 많은 연습 끝에 어느덧 자유로이 활주를 할 수 있게 된 어느 날, 한스는 어떤 힘에 이끌리어 눈 덮인 높고 깊은 산속으로 혼자서 스키를 타고 오르고 질주한다. 가까웠던 세 사람이 모두 떠난 자리를 가득 채운 외로움은 그에게서 혼자만의 시간마저도 빼앗았다. 스키를 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날, 한스는 고독한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정적,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깊은 세계, 완전히 낯선 감정과 지극히 위험한 감정이 교차하는 세계, 완전무결한 자연이 주는 원초적인 공포를 느끼면서도 한스는 더 깊은 곳을 빠져들었다. 그러다 방향 감각을 잃고 길을 잃게 되는 한스. 생사를 오가며 간신히 어떤 고립된 헛간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다가 비몽사몽 간에 꿈을 꾸게 된다. 그 꿈은 한스에게 깊은 깨달음을 준다. 마의 산에 올라온 지 1년 정도 되는 지난 시절 동안 그를 스쳐 지나갔던 주요한 사람들과 사상들과 감정들이 한꺼번에 정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특히 세템브리니와 나프타가 나누는 논쟁으로부터 해방되는 기회를 맞이한다. 죽음과 삶, 병과 건강, 정신과 자연, 이런 것들이 마치 모순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논쟁하는 두 사람에게 동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 것들은 모순되는 게 아니었다. 죽음의 모험은 삶 속에 포함되며, 그런 모험이 없는 삶이라면 이미 삶이 아닐 거라는 결론에 이른다. 고귀함에 대해서도 인간만이 고귀한 것이며, 서로 대립된 생각 자체가 고귀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이 대립보다 더 고귀하고, 인간이 죽음보다 더 고귀하며, 인간이 삶보다 더 고귀한 존재라는 결론을 맺게 된다. 한스의 깨달음은 다음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다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 한스는 생사를 오가는 한가운데에서, 눈 덮인 높고 깊은 마의 산 위에서, 시간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고 온통 조용한 죽음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었다.

한스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세템브리니와 나프타 말고도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인 7장에서야 등장하는 민헤어 페퍼코른이라는 네덜란드인을 꼽을 수 있다. 페퍼코른은 잠시 요양원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쇼샤 부인과 어느 날 함께 불쑥 찾아온 사람인데, 그는 특별한 인물이었다. 토마스 만은 이 인물을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물로 그려 놓는다. 세템브리니와 나프타가 사상과 논리에서 한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면, 페퍼코른은 삶을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카리스마가 있었고 군중을 휘어잡을 줄 아는 몸짓과 손짓과 표정을 자연스럽게 동원하여 사람들을 압도했다. 페퍼코른 앞에서 두 교육자 세템브리니와 나프타는 너무나도 보잘것없이 지껄이기만 하는 난쟁이 수다쟁이와 같은 존재에 불과했고, 두 논적의 불꽃 튀는 논쟁은 페퍼코른 앞에서 불가사의하게도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페퍼코른은 지배자의 영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이다. 역자는 페퍼코른을 ‘스케일이 큰 인물’이라고 묘사한다. 한스는 자기가 사랑했던 쇼샤 부인을 독차지해버린 페퍼코른을 증오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가 가진 고유한 스케일에 매료되고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스는 마음속으로는 두 교육자보다 페퍼코른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디오니소스적인 니체의 생의 철학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한 인물 페퍼코른을 소설 속에서 저자가 등장시킨 순서가 흥미롭다. 이 작품을 한스의 성장과 변화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가장 핵심 된 부분은 아무래도 앞에서 언급한 6장 ‘눈’ 꼭지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 전체의 약 삼 분의 일 정도를 차지하게끔 하면서 페퍼코른을 주요 인물로 삼는 7장을 마지막 장으로 삼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이는 약 2년 전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스따브로긴의 고백’으로 알려진 ‘찌혼의 암자에서’ 챕터를 읽을 때를 불현듯 생각나게 하는데, 그 이유는 소설이 마치 두 축으로써 애초에 계획했던 소설과 나중에 수정을 가한 소설이 혼재하는 듯한 인상을 ‘마의 산’ 7장을 읽으면서 받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악령’의 주인공은 스따브로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나중에 표뜨르를 주인공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난 이후 전면 개정을 하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토마스 만이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소요되었다는 점에서 나는 토마스 만 역시 도스토예프스키가 ‘악령’에서 가했던 개정 혹은 수정을 ‘마의 산’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러나 원래 의도였든 나중에 수정을 가했든 상관없이 토마스 만이 페퍼코른을 ‘눈’ 꼭지 다음에 등장시킨 이유는 아무래도 세템브리니와 나프타를 통해 얻게 된 한스의 깨달음이 완전하지 않으며 오히려 쉬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은근히 보여주기 위했던 게 아닌가 싶다. 정신적인 깨달음만으로는 진정한 삶을 살아내는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깨달음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스는 페퍼코른을 만나고 나서 그의 큰 ‘스케일’에 압도되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멍청함과 영리함을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의미로서의 ‘인물’이고, 이 불가사의함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멍청함과 영리함보다 더 긍정적인, 최고로 긍정적인, 삶 그 자체처럼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가치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삶의 가치이며, 진지하게 따져 볼 만한 가치입니다.” 즉, 한스는 논리와 이성으로 점철된 깨달음도 결핍을 가지며, 그 결핍은 삶에 대한 긍정, 즉 디오니소스적인 인물 페퍼코른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채워질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면에서 보면 토마스 만은 한스를 통해 인간으로서 온전한 깨달음은 이성과 논리를 양 날개로 삼은 정신적인 깨달음과 함께 삶을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생의 철학을 겸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페퍼코른의 뒤늦은 등장으로 인한 난점을 이런 식의 해석으로 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또다시 막다른 골목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온전함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은 한스가 결국 향하는 곳이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상징되는 마의 산 위의 세상에서 내려와 결국 한스가 나아간 곳이 삶이 아닌 죽음의 현장이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은 아마도 저자 토마스 만의 숨은 의도를 잘 드러내는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해석에서 ‘마의 산’은 끝내 죽음이라는 이미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된다. 한스에게 삶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준 산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또한 생의 철학을 몸소 보여준 페퍼코른은 자살로 스스로의 생을 마감했고, 나프타는 세템브리니와의 결투 끝에 결국 자신의 머리를 쏘며 죽고 말았으며, 그보다 일찍 폐병으로 먼저 죽은 사촌 요아힘, 페퍼코른의 자살 사건 이후 떠나버린 쇼샤 부인까지, ‘마의 산’ 위의 세상은 한스의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이렇게 온통 죽음으로 얼룩져있다. 많은 유럽인들이 죽음을 맞이했던 1차 세계대전 발발과 맞물리는 소설의 결말. 토마스 만은 왜 한스에게 이러한 결말을 맞이하게 만들었을까. 과연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이러한 역설로 그는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마의 산’의 의미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곱씹어보면서 이런저런 해석을 가해보는 건 이 작품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책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토마스 만의 다른 작품들이 은근히 기대가 된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75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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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의미
폴라 구더 지음, 이여진 옮김 / 도서출판 학영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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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인 기다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폴라 구더 저, ‘기다림의 의미’를 읽고

하나님 나라는 시간적인 의미에서 이중성을 지닌다.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소위 ‘이미 (already)’와 ‘아직 (yet)’ 사이에 존재하는 나라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긴장과 갈등이 공존한다. 이미 얻은 변화와 평안만이 아닌, 아직 얻지 못한 변화와 평안도 존재한다. 바울이 권면했듯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시기도 바로 이 시간표에 해당한다. 그 시간표는 곧 현재, 오늘, ‘지금, 여기’이다. 구원을 이미 다 얻은 것처럼, 그래서 마치 더 이상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것처럼 수동적으로 넋 놓고 앉아 막연한 천국을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역동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하나님 나라를 받치는 거대한 두 축인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려고 애쓰면서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내는 자세야말로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다는 것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 

이 경계에 놓인 시간표는 곧 기다림의 시간이기도 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선진들과 마찬가지로 기다림의 시간표에 놓여 있다.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 이 기이한 나라에 속한 백성의 주된 임무는 어쩌면 ‘역동적인 기다림’이라고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왔기 때문에 정착하여 영원히 거류민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 떠날 준비를 갖춘 채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늘 깨어 있어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개인과 사회, 나와 타자와 세상을 함께 돌보는 삶,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기다림의 시간은 단순한 대기 시간이 아니다. 그 자체로써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 ‘기다림의 의미’와 원제 ‘The Meaning is in the Waiting’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영국 신학자인 저자 폴라 구더는 이 책에서 그 기다림의 의미를 유연하고 대중적이며 친숙한 필체로 쉽게 풀어준다. 이 책은 어려운 신학 책이 아니다. 묵상집이다. 특별히 대림절 기간에 맞추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기다림의 역동적인 의미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묵상이 담겨 있다.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4주에 걸쳐 진행되는 대림절에 맞춰진 것이다. 첫째 주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기다림, 둘째 주는 선지자들의 기다림, 셋째 주는 세례 요한의 기다림, 그리고 마지막 넷째 주는 마리아의 기다림. 이 네 가지 서로 다른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선 서로 같은) 기다림의 의미를 저자는 성서학 전공자답게 해당 성경 본문을 인용하고 해석하면서 친절하게 풀어준다. 각 장의 주요 인물은 모두 과거의 사람들이지만, 저자는 그 기다림의 동일한 의미를 오늘날로 불러와 우리에게 적용시켜주는 일을 잊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맥락에서 기다림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여기 미국에는 11월 말 Thanksgiving 주가 지나면 곧바로 크리스마스트리가 판매되기 시작하고, 길거리에 심긴 나무들은 알록달록한 전구들로 이뤄진 옷을 입으며, 라디오를 틀면 캐럴이 들리기 시작한다. “It’s the most wonderful time of the year.”이라거나 성탄을 기뻐하자는 가사의 노래들이 여기저기서 다른 목소리와 다른 버전으로 울려 퍼진다. 마치 오늘이 벌써 크리스마스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12월 25일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할 것처럼 들뜬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러나 이런 광경을 보면서 나는 과연 미국인들이 누구보다 진지하게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기독교 국가로 시작된 미국이라지만, 과연 그 정신이 이런 분위기 속에 아직 살아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크리스마스라는 날은 더 이상 예수의 탄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저 상품화된 휴일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충만한 가운데 나는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기다림은 머리가 아닌 몸의 일이라는, 이 단순하고도 명쾌한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단순히 성탄절의 중요성을 관념적으로 깨닫는다고 해서 대림절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되새기게 된다.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모두 성탄절인 것처럼 호들갑 떠는 행위가 결코 기다리는 사람의 진정성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인지하게 된다. 진정한 기다림은 요란함과 화려함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고요함과 담백함 속에 있다. 미래를 현재로 앞당겨 그날의 기쁨을 미리 맛보려는 동기와 행위는 결코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의 바른 마음이 아니다. 그 사람의 마음 중심에는 현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진정성 있게 기다린다는 것은 현재를 버리고 미래로 대체하는 게 아니라, 현재가 가지는 의미를 과거의 맥락으로부터 견지하는 동시에 현재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랑하며, ‘지금, 여기’에서 해야만 하는 일을 오늘도 성실하고 묵묵하게 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내는 행위만이 현재에 살아있는 자가 될 수 있다. 특별한 하루가 아닌 평범한 일상에 임하는 희미한 구원의 빛을 알아채고 감사하며 늘 깨어 있는 삶. 바로 역동적인 기다림의 삶,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일 것이다.

#학영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71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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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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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성과 불가능성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추억, 그 기억의 파편들

(추억에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인간의 한계와 숙명에 대하여)

 

파트릭 모디아노 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를 읽고

 

지극히 사무적이고 지극히 무미건조한,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사람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차갑기만 한 장부. 누군가에겐 그토록 소중한 의미를 주는 반면, 또 누군가에겐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는, 단 한두 장만으로 만들어진 공식 서류. 여백이 대부분인 그 안은 성의 없는 글씨체로 타이핑된 문자들이 채우고 있다. 결코 많지 않은 글자와 숫자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 혹은 한 가족의 인생이 그 제한된 수의 글자와 숫자들 안에 압축되어 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수십 년에 이르는 세월이 농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 어느 서류보다도 깊은 무게를 지니는 장부. 지금은 사라지고 가족관계 증명서 등으로 대체된, 바로 ‘호적부’다.

 

두 번째로 만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이 작품은 ‘호적부’라는 원제목을 가진다.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라는 번역본 제목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한 사람 (번역가 김화영 이리라. 그는 처음으로 파트릭 모디아노를 한국에 소개한 장본인이다)의 원제목에 대한 해석이다. 하나의 해석은 해석한 자의 관점을 반영하기에 해석 전의 어떤 대상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법. 다 읽고 나니 ‘호적부’라는 원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이 가진 단순하고도 형용할 수 없는 묵직한 의미를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제목 때문에 끌려서 읽게 되는 작품이 아니라, 끝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제목을 이해하게 되는 작품이 가지는 매력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절대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즐거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라는 제목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 느꼈던 파트릭 모디아노만의 고유한 스타일은 그보다 1년 먼저 출간되었던 이 작품 속에도 그대로, 아니 어쩌면 더 진하게 녹아있다. 읽는 도중 끊임없이 궁금해지는 작품. 다 읽고 나서도 무언가 놓친 게 있는 것 같아 그것을 찾기 위해 다시 책장을 뒤적이게 되는 작품. 하지만 그 시도가 매번 실패하고 마는 작품. 총 열다섯 장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장편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시간 순을 따르지도 않고, 그 역순을 따르지도 않으며, 액자 속 이야기로 구성되지도 않고, 연작 소설도 아니며, 심지어 ‘나’라는 주인공이 매 장마다 같은지 다른지조차 묘연한 작품이다. 그러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라는 글귀를 등불로 삼아 이 작품을 비춰보면 비로소 기이하게만 느껴지는, 어쩌면 누군가에겐 어렵다거나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여겨지는, 마치 오래된 기억의 불완전한 파편과도 같은 각 장 사이의 연결점이 보인다. 바로 추억이다. 그 추억을 이루는 기억의 파편들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여느 장편을 대하듯 읽어나간다면 이 작품만이 가진 본연의 맛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중도하차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파트릭 모디아노의 매력을 제대로 느껴본, 혹은 느껴보고 싶은 독자라면 그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의 주인공 직업은 탐정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여러 (?) 주인공 역시 어떤 면에서는 모두 탐정들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어쩌면 정체가 묘연한 작품 속 주인공들은 바로 우리 자신을 대변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린 모두 본능적으로 불완전한 파편들만이 남은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하며, 그것에서 향수를 느끼고, 때론 안정감을, 때론 과거의 망령에 다시금 사로잡히는 생생한 불안과 공포를 평생 살아가면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탐정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그런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기억을 더듬고 추억에 잠기기도 하며, 비록 불완전하고 결코 완성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숙명처럼 누가 시키거나 부탁하지 않아도 스스로 계속해서 기억의 파편들을 수집해나가기 때문이다. 즉, 파트릭 모디아노만의 고유한 스타일은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을 번역한 김화영의 해설처럼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스타일이 주는 매력은 아무래도 ‘유예’인 듯하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궁금해지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보여주지 않는 방법, 즉 ‘끊임없이 유예되는 기대’가 바로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가 아닌가 싶다. 이 때문에 작품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 때문에 인간이 처한 숙명과 한계, 즉 불완전한 기억의 파편들을 수집하지만 결코 완성하지 못할 추억을 찾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과장이나 왜곡 없이 가만히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기표는 기의에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고 했다. 어떤 의미가 기호로 표현될 수 있어도 결코 그 기호만으로는 궁극적인 의미의 전부를 드러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의 파편들을 찾아 나서는 이유도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숙명에 처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기원을 알 수 없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추억을 완성하고 싶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숙명. 즉, 추억은 실체가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고, 적어도 우리가 주워 담는 파편들로는 결코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또 조각들을 찾아 나선다. 궁극의 추억에 닿으려고 애쓴다. 인간의 한계이자 숙명이다. 불완전성과 불가능성. 이는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파트릭 모디아노 읽기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70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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