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선 기자블로거

cafe.chosun.com 2007/06/12


   10년 전 캄보디아에 출장을 갔다가 내전이 일어나 발이 묶였다. 어느 날 아침 지축을 울리는 둔탁한 소리에 잠이 깼는데, 그건 멀리서 들려온 포성이었다. 그날 새벽 공항 근처에서 반군과 정부군 간의 교전이 벌어져 공항이 폐쇄됐다고 했다. 전화는 불통됐고, 창밖으로는 화염에 휩싸인 건물이 보였다. 


   호텔 밖 거리에는 피란민의 행렬이 물결처럼 이어졌고, 호텔 직원도 유니폼을 벗어 던지고 달아났다. 외국인 직원과 관광객만 남은 호텔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 가까이에서 총성이 들렸다. 호텔 측에서 일러준 주의사항은 단 한 가지. 로켓탄이 날아들 수 있으니 창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전날 조금만 더 부지런을 떨었어도 이 나라를 떠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목숨을 남의 나라 내전에 맡기게 된 내 신세를 한탄했다. 경비가 느슨해졌으니 호텔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반군이 들이닥칠지 떼강도가 몰려들지 포격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작은 배낭에 여권과 지갑, 카메라, 호텔 냉장고에 있던 과자와 초콜릿, 생수병을 집어넣었다. 몸만 달아나야 한다면 들고 뛸 수 있는 부피와 무게였다. 두 번째 가방에는 노트북 컴퓨터와 녹음기, 출장 중에 모은 취재자료를 넣었다. 사정이 허락돼 조금이나마 내 물건을 갖고 갈 수 있다면 꼭 챙기고 싶은 것들이었다. 나머지 물건은 큰 트렁크에 마구 던져 넣었다. 가져가도 좋고 버려도 상관없는 것들. 옷과 핸드백, 구두, 화장품 등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내가 무의식중에 세 그룹으로 나누어 정리한 가방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그 분류기준은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순간에 판단한, '사는 데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답이었다.


   특히 세 번째 트렁크! 내가 할부금을 갚아가며 사들였던 옷, 손에 넣기만 하면 인생이 완벽하게 충족될 것 같았던 멋진 핸드백, 패션의 완성은 구두라는 말을 믿고 샀던 하이힐 등등….


   내가 뼈빠지게(까지는 아니지만) 일해서 번 돈으로 고작 저런 것을 사들이며 좋아하고 있었다니 기가 막혔다. 생사의 기로에서 그 물건은 다 짐이었다. 발로 차서 쓰레기통에 처넣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저런 헛되고 헛된 것을 위해 살아왔다니! 이번에 살아 돌아가면 절대로 이렇게 살지 않을 테다.'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일주일 후 내전은 끝났다. 내가 총리를 인터뷰했던 장소인 관저는 포격을 당했고, 내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만났던 한 신문기자는 취재 중 폭도들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미국인 관광객은 호텔 앞에서 귀고리를 빼앗으려던 강도와 싸우다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캄보디아에서 무사히 빠져 나온 후 나는 생활을 단순하게 정리했다. 옷과 화장품은 필요한 것만 남기고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동안 쓰지도 않으면서 아깝다고 끌어안고 있던 것도 다 버렸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순간에 이게 짐일까 아닐까를 생각하면, 생활의 거품을 걷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순하다는 것은 기본에 충실하다는 뜻이다. 그걸 알지만, 살다 보면 또 헛된 것이 마음을 홀린다. 그래서 지나치다 싶을 때는 '캄보디아의 그날'을 생각한다. 니체는 "세상에는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들어내는 다수가 있다"고 했다. 니체가 말하는 멍청한 다수가 되고 싶지는 않다. 이번 주말에 집 정리를 하면서 또 한 번 왕창 버려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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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6-15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서재에도 정리를 좀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언제 시간을 내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