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물건 - 김정운이 제안하는 존재확인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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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물건? 이 말을 듣는 순간 많은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전에 내가 근무하는 회사와 계속 거래를 하고 있는 인쇄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해당 보고서를 발주처에 납품하기 위해 나는 보고서를 제본하기 위해 인쇄소에 들린 적이 있었다. 거기에 나를 아주 반갑게 반겨주시는 사장님, 그 사장님은 참고로 연세가 60이 이미 훌쩍 넘은 여사님이다. 내가 <남자의 물건>이란 서적을 들고 가니 순간 놀라면서 나에게 이렇게 했다.

 

“이 책 나 사려고 했는데, 너무 야한 것 같아서 안 샀다. 손님들이 여기 와서 이 책이 있으면 이상하게 여길까봐”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전혀 야하지 않다고 했다. 물론 내용 중에서 야한 내용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책 내용 자체만으로 야하다고 보기에는 많음 무리수가 있었다. 가령 그것은 프로이트가 남자는 성욕에 눈이 먼 동물이라고 하여 그가 저술한 <꿈의 해석>과 <정신분석입문>과 같은 도서가 야하다고 볼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인간이란 존재가 무의식 세계의 리비도 즉 성적 에너지를 담아 그것을 표출하려는 본능은 숨기지 못할 요소는 분명하다. 그런다고 하여 그렇게 인간의 성적 무의식 본능을 연구한다고 해서 야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의 야한 것에 대한 것을 제대로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정운 교수가 이번에 내놓았던 <남자의 물건>은 정말 그런 식의 느낌일까?

 

보통 어른이라면 남자의 물건이라면 가수 박상민씨가 부르던 “무기들아 잘 있거라” 내지 혹은 이 노래 제목을 패러디한 어느 팬의 말처럼 “무기 없이 못살아”라는 무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물이라는 물건이다. 즉 인간의 신체구조 상의 기관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 볼 수 있거나 혹은 볼 수 없을 만한 사물들이란 점이다. 인간이 아닌 물체 즉 하나의 도구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왜 남자의 물건인가? 예전에 김정운 교수에 대해 잘은 몰랐으나, 그가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라는 점은 알았다. TV는 시청하지 않은 본인으로서 매스컴의 영향보다는 매스컴 이외의 인터넷과 서적으로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한다. 오히려 일방통행로적인 사고방식은 대중문화의 특성중의 일원화적인 사고와 이원화적인 가치구조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알게 된 김정운 교수는 예전에 내가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코스튬플레이와 같은 하위문화(下位文化) 즉 Sub-culture라는 것을 연구할 때 처음으로 알게 된 문화심리학자이다. 일단 하위문화라는 것이 일반인들에 대해 잘 노출되지 않고 비공개적이고 드러나지 않은 그런 문화들이다. 물론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코스프레만이 아니라 락, 재즈, 블루스, 헤비메탈과 같은 비주류의 음악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하위문화에 대한 나의 시선은 대중문화에 대하여 비교해보면 다른 세계에서 바라보는 점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하위문화라고 하여 그것이 일반적이지 않고, 잘 알 수 없으며, 보통 사람들이 접하기 어렵고 다가가는 것이 어려워서 많이 낯설어 하고 많이 배척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나 한국과 같이 배타적인 문화 관념을 지닌 국가로서는 이런 것을 관심 있게 바라보는 입장에서 이런 하위문화가 배타적인 국내 문화 관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하나의 적대의식으로 표출되기 좋은 문화이다.

 

또한 본인 자체가 만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 때문에 대부분 한국 만화, 애니메이션이 국산 작품보다는 미국과 일본 등에서 유입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많은 만화, 애니메이션 콘텐츠상품들은 미국보다는 일본에서 많이 들어온다.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우며, 언어자체가 한자어가 같이 사용하기에 한국어와 일본어 자체로는 다소 많은 차이감이 들지 모르나, 단어 사용에서 한자어의 사용에서는 분명히 한국인으로서 영문으로 이루어진 미국 문화보다 한자 단어가 들어간 일본어가 훨씬 이해하기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을 이해하고 생각해본다는 것은 단순히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안에 담론하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 그 자체에 대한 문화에 대한 부분도 생각해볼 만한 것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항상 뭔가 멀리 느껴지는 나라, 게다가 직접 옆에서 보면 한국인과 다른 용모나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구인들이 보면 비슷해 보이는 종족이다.

 

또한 과거 한국의 선조들이 일본에 건너갔다는 말도 있고, 일본의 국화인 벚나무가 일본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막상 수목의 원산지는 한국이라고 한다. 그러면 일본의 국화를 상징하는 이른바 사쿠라라는 것이 과연 일본이라고 외치기도 난해하게 보이는 상황이다. 어째든 친하면 친하게 지낼 수 있지만, 이와 반대로 대하기가 어려우면 어려운 게 일본이다. 아니 일본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일본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인지하고 있을까? 그런 문제에 대해 김정운 교수는 <일본열광>이란 책을 저술했다. 문화심리학자가 보는 일본과 일본인이다. 여기서 그의 일본이란 나라는 상당히 특이한 곳으로 보였다. 뭔가 억압된 공간이고, 뭔가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여성에 대한 성적 환타지, 남성이 감수해야할 사회와 압박, 거기에서 피어나는 남자들의 어리광, 서양은 아니나 오히려 서양 같은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의 세계, 일본이란 뭔가 엄청나게 잘 뭉쳐져 있는 것 같기도 한편으로 무척이나 분산되어 있다.

 

아니 아주 작은 분산덩어리가 여기저기 조합되어 하나의 그룹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일본을 다룬 김정운 교수가 이제는 한국을 다루려고 한다. 일본으로 통해 일본인을 알고 그 후에 한국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보게 하여 우리 자신의 현재를 물었다면,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이 정석이 아닌가? 이번의 남자의 물건, 정말 남자의 물건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대략적으로 나는 이 책에 대해 조금의 선입관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김정운 교수가 일본열광에서 남자의 세계로 통해 본 일본문화라고 하나 단순히 일본남자만의 문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일본남자의 문화에서 보이는 남자들의 몰락을 다룬 것이다. 남자가 몰락하니 여자가 힘이 세지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여자가 세진다고 하여 남자와 대등하게 되었다고 하여 남자만 이때까지 누렸던 것을 이제는 여자가 누리지 말라고 하는 법은 없다.

 

단지 조금 아쉬운 점은 남자는 여자가 누리던 것을 누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본열광이나 남자의 물건이나 비슷하고 기본명제를 깔고 가는 주제가 있다. 그것은 남자의 몰락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남자가 몰락한다고 해서 여자가 반대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남자가 떨어지는 만큼 여자 역시 떨어질 수 있다. 모두 그런 것이 아니다. 남자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과거가 좋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을 상실해가면서 남자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이다. 남자는 평생 혼자서 짐을 지고 가야 할 동물이다.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 그리스신화 오이디푸스왕을 아는가?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왕을 죽이고, 그의 아내요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라는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한 그 비운의 왕을 말이다. 오이디푸스는 친부살해와 동시에 모친근친상간이라는 인간의 윤리와 가치를 배반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진실로 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남자는 바로 이 오이디푸스와 같다. 세상도 그러나 오히려 신화의 세계에서 멀어진 지금이야 말로 신화의 제거인 계몽을 넘어 새로운 억압이 우리 남자들을 오이디푸스로 만들어버린다. 집에 가면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이 책에서 김정운 교수는 큰 아들이 자라나면서 처음에는 약한 존재로 보았으나 지금은 키도 자기보다 크고 덩치도 좋다고 한다.

 

순간 아들이 화를 내면 거기에 대적하기 힘들고, 길가는 고교생 무리를 보면 기가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거기서 누가 부른다. “아버지!”라고 말이다. 그 두려운 무리의 존재 중에서 아들이란 혈육이 있다. 아버지란 존재는 언제 자신을 앞서 나갈지 모를 아들에게 위협적인 부담을 느끼고, 자신 앞에 있었던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방황한다. 언젠가는 그 사람이 결국 내가 된다는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남자의 허망함을 깊고 넓은 한탄으로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회사가면 직장 상사와 밑에 후배들의 눈치를 본다. 물론 그 상사와 후배 역시 또 다른 상사와 후배들에게 눈치를 본다. 남자라는 존재는 사회에서 보이지 않은 뭔가의 긴장감을 타고 있다. 항상 긴장을 하고 눈치를 보고 거기에 눌려 산다. 사회라는 것은 다양한 존재가 살아가는 또 다른 아버지이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면서 억압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언어를 아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들에게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을 부여한다.

 

하지만 언어로 통해 권력과 지식을 서로 공유하고 생산하므로 언어를 사용하고 살아가야할 인간에게 언어를 사용할 때 새로운 지식과 더불어 권력에 눌려 살아야 한다. 언어라는 것은 자연적이 못한 인위적인 억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자의 공간을 어디로 두어야 하는가? 직장이라는 공간은 남자에게 하나의 권력세계를 의미하는 바이므로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둘 수 없다.

 

오로지 여기에 반대되던 공간일 뿐이다. 그나마 젊어서는 와이프가 같이 젊기에 서로 열정적인 사랑도 나눌 수 있겠으나, 얼마 후 자녀가 태어나고, 부모들은 서로를 보기보단 자녀들을 더 본다고 한다. 그런 사실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겠으나, 적어도 내 주변에 애를 키우고 있는 직장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내 보는 재미보단 혹은 남편 보는 재미보단 애와 같이 보고 지내는 시간으로 만족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자녀라고 하여도 언제까지 부모의 그늘 아래 있을 수 없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 모두 자녀들이 서로 자기의 품을 떠나 그들만의 사회와 세계에 머물고 있을 때면 자신의 존재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해진다. 그나마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서로 친하게 지내지만, 남자는 쉽게 지낼 수 없다. 나이 들면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이는 반면 남자들은 그렇게 모이기도 어려우나 모여도 그렇게 화기애애하지 않다.

 

그들은 태어나면서 사회에서 싸워나가야 할 존재다. 프로이트는 남자들이 태어나면서 리비도로 통해 성적인 욕망과 더불어 폭력적인 투쟁의식을 가진다고 하나, 이와 반면에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남자는 원래 난폭한 것이 아니라 난폭해지도록 살아야 하는 문화 공간 속에서 난폭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다르지만, 적어도 남자는 항상 싸움과 피할 수 없는 존재임만은 분명하다.

 

그런 그들이기에 그들은 자신을 좋아하거나 혹은 좋아하는 것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하여 남자는 프로이트적으로 리비도의 동물로 성적욕망만 표출할 수 없다. 때로는 새로운 것으로 승화하여 에로스적인 영역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흔히 문학에서 세계를 창조하거나 예술로서 형상화시키거나 이미지로 도출해낼지도 모른다. 예술이 이성의 세계만이 아닌 감성과 무의식 세계라는 눈에 보이지 않은 것 역시 보이게 하는 마법이 있으니깐.

 

그러나 이것만으로 남자가 과연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전혀 아니다. 뭔가 남자들이 집착하고 거기에 얽매이고 싶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물욕적인 페티시즘이 깊숙이 들어갈지 모르나, 안타깝고 슬픈 일이나 한국남자에게 뭔가 좋아하는 게 있냐고 물어보면 어떨까? 나이 먹어 한국남자들이 하는 일들을 보면 대부분 이런 것이 생각난다. 낚시와 등산이라고, 아니면 TV보기 정도?

 

어떻게 보면 상당히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게다가 낚시와 등산은 여러 명에서 같이 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혼자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취미생활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로 남자들이 위안을 삼아야 하는가? 너무 평범하고 일방적이고 범주가 좁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닌 다른 것들도 같이 생각하여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남자의 물건에서 김정운 교수는 이런 한국남자에게 존재확인을 위한 탐사가 시작된다. 그것은 자신부터 먼저 보여준다. 김정운의 모습에서 그의 일반적인 복장에서 만년필을 자신의 입에 살짝 대는 장면이다. 한국의 저명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바로 만년필을 좋아한다. 만년필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만년필이 아니라 상당히 고가에 명품인 만년필을 좋아한다. 몇 십 만원에 모자라 어느 유서 깊은 만년필은 백만 원을 초과한다고 한다.

 

펜 한 대에 거금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계속 모우고 또 모운다. 새로운 물건을 산다는 것에서 그 산 물건들을 보는 것에서 또 다른 물건들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말이다. 한국남자들에게 이런 기대감 내지 편안함 기분을 주는 행동이란 있을까? 내가 볼 때는 거의 없다. 그런 남자들에게 필요한 물건! 그것은 바로 그 남자들이 의지하고 싶은 물건들이다. 자신만의 세계이며, 자신만의 공간이며, 자신만의 위안이 되는 그 남자의 물건 말이다. 김정운이 확인하는 한국남자의 존재란 바로 남자들이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그런 물체에 대한 고찰이다.

 

왜 고찰을 하는가? 남자들은 나이 먹어가면서 정작 자신을 돌아볼 공간이나 기회조차 없다. 오로지 앞만 보다가 달리다가 뒤돌아보는 순간은 이미 늦은지라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이란 점이다. 확실히 그렇다. 아니 30대 지금 내가 봐도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을 바라보면서 주변 남자들에게 주말에 무엇을 하느냐? 아니면 좋아하거나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없다.

 

그저 컴퓨터로 영화 보다가 TV로 드라마 보다가 이다. 남자들의 대화의 단골손님이며,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군대이야기와 축구이야기, 그 절묘한 콤비네이션인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남자들이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감 확인을 해줄 수 있는 하나의 자위욕구가 아닌가 싶다. 자위라는 것이 반드시 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다고 성적인 영역 역시 무시하지 못한다. 항상 억압된 것은 인간의 무의식적 세계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성적욕망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들은 단순히 억압하거나 무시하기보다는 뭔가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 내어 자기 자신을 위안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남자의 물건, 그것은 단순히 남자들이 취미나 취향으로 모우거나 집착하거나 즐기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란 존재가 하나의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한 삶의 증명이기도 하다. 이 책을 보는 본인이나 다른 누군가, 또는 이 글을 보는 어느 누구라도 그런 것으로 생각 한번 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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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하여 동문선 현대신서 119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 백승욱 옮김 / 동문선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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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2011년 3월이었다. 당시 나는 프랑스 사회학자 겸 철학자인 삐에르 부르디외라는 교수의 “구별짓기” 상권을 읽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구분짓기라는 도서는 결국 사회학과 문화학에 대한 담론인 도서로 상당히 구체적이면서도 통계적인 자료도 많았으나, 한편으로 기본적인 철학과 사회학 등 다양한 인문학적 내용을 알지 못하면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도서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책 겉표지에 적힌 <왜 노동계급은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 몰두하는 반면 ‘사회지도층’은 가리고, 삼기고, 절제하는가? 경제자본, 학력자본(학벌), 문화자본, 사회관계자본(인줄) 상징자본의 계급별 구성과 사회적 궤적을 추적하면서 상징이 지배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해부해낸 문화연구 분야의 ‘자본론’>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아직 뚜껑도 열어보지 못한 채 나는 1년이나 이 책을 집에 사두고 방치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선행적으로 읽어야 할 도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당시 우연히 발견한 도서 경희대학교 영미문학전공의 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보면서 단순히 좌파와 우파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넘어 <인문좌파 즉 지금 뭐가 잘못된 현상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이것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논하는 것이 인문좌파이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우리가 생각해야할 철학과 사회학에 대한 부분이 아닐까? 철학이란 학문은 항상 보면 지금이야 우리가 일반적으로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나오는 당시만 해도 이것은 전혀 반갑지 않은 존재이며, 기존 인식에는 상당히 위험한 사고이다. 가령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당시 신을 믿지 않고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그리스 아테네 폴리스의 가치를 따라 독배를 들어 그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플라톤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자신의 신변이 그렇게 좋은 입장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로 그들의 존재는 기존 지배계층이나 권력가들인 소피스트에게 매우 도전적인 인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혹자라면 프랑스 봉건세력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하고,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단두대 아래 이슬로 만든 프랑스혁명의 원죄자를 찾으라면 장 자크 루소가 나온다.

 

당시 루소의 철학적 견해는 봉건사회에서는 위험하고 배척해야할 가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루소의 서적은 철학이나 사회학, 역사학에서 다루어야 하나의 학문으로 변했다. 당시에는 학문적인 가치영역이 아니라 실제로 정치적 여파가 큰 존재다. 그래서 루소의 철학을 민주주의사회의 기원에 설명할 수 있는 지금이나, 당시로서 루소는 혁명적이고 극좌파적인 존재다. 그러면 루소는 좌파인가? 우파인가?

 

그런 이유로 인문좌파라는 것은 이런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인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또한 지금과 미래를 어떻게 보고 듣고 판단해야하는지 사고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이론가이드 도서이다. 말 그대로 인문좌파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좌파의 기원은 어디인가? 흔히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로 보통 보겠으나, 좌파의 근원은 프랑스혁명 후 루이의 목을 베고 난 후에 생긴 자코뱅당이다.

 

봉건적인 권익을 추구하는 우파에 반대하여 좌측에 있어서 좌파로 통한 것이다. 아마 지금 좌파하면 무조건 매도하는 사람으로서 프랑스역사와 철학사 따위는 머릿속에 제대로 인지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진짜 좌파의 기본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실이다. 그런 마르크스주의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9세기에 눈을 감고 후발주자로서 나타난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을 다룬 도서가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이고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그람시, 발터 벤야민, 장 폴 사르트르, 게오르크 루카치, 루이 알튀세르, 자크 데리다, 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젝 등이다. 이중에는 슬라보예 지젝, 자크 랑시에르, 조르조 아감벤은 현재 실존하는 철학자 및 사상가로 21세기를 대표하는 대석학적인 지식인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나는 현대철학과 철학자, 그리고 그들까지 이어져 있던 사람들을 하나 둘씩 알아갔다. 물론 모든 것의 시작은 마르크스의 <자본>과 <공산당선언>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자본은 계속 새롭게 적어지고 교정되어 가야할 도서지만, 공산당선언은 약간 금이 새어가고 있다. 그 도서의 취지와 달리 현실 속에 보이는 현상들은 어긋나 있었다.

 

이런 문제를 초기에 인식한 사람은 시각의 현상학을 저술한 모리스 메를로 퐁티였다. 최근에 읽은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메를로 퐁티는 마르크스주의가 반드시 공산주의가 아니라 반공좌파라는 것을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런 스탈린주의로 변질된 공산주의에 대해 1976년 프랑스 공산당에서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공산주의를 자신들이 추구하던 마르크스주의에서 결별을 선언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생각과 의견을 틀렸는가? 아니면 무엇부터 문제인가? 그런 고민은 남을 수밖에 없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지금 내가 적으려고 하는 루이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하여”는 그런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서 어떻게 루이 알튀세르가 이끌어 가려고 하는지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1부에서 페르난다 나바로라는 멕시코 산 니콜라스 데 이딜고의 미초아키나의 대학의 철학교수와 루이 알튀세르의 대화를 나눈 것이고, 2부는 루이 알튀세르가 편지를 받은 다음 나바로에게 답장을 하는 내용이다.

 

내용을 보면서 생각하는 점은 루이 알튀세르가 기존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메를로 퐁티가 한국전쟁을 보고 비판한 것처럼 그 후에 다가올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미래와 그리고 진정으로 마르크스로 돌아가려 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재미난 사실은 마르크스의 자본은 사실 철학도서가 아니고 사회과학이라는 점이다. 그의 도서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과학적인 시점으로 통해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분석과 비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혁명 성공이후 대부분의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들은 그것을 망각했다. 아니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적인 영역에서 다루고 있으면서도 결코 철학으로 생산하지 않았다. 또한 분명히 마르크스는 철학과를 전공했고, 당시 헤겔청년파에서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헤겔의 변증법을 연구하여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철학적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예전에 내가 알던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대학교 강의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과목은 개설되어 있고, 마르크스주의는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학문과 그에 대한 사상을 소개하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에게 강의를 하던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교수는 마르크스의 이론만 내놓지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적인 면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실천이 아닌 단순히 관념적인 영역에 속한 부류라는 점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 그것은 인간이 가진 모든 관념과 행동 그리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심지어 보일수도 없는 저 너머까지 연구한다. 그런 철학에서 오히려 철학을 말한다는 것이 철학적인가? 아니면 덜 철학적인가? 상당히 난해하다. 왜냐하면 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수철학인 형이상학에서 칸트는 이성으로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순수이성을 논함으로 철학이란 관념적인 부분에 상당히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순수이성비판에서 논리는 윤리가 선행되어야 논리적이라는 점과 후에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듯이 이성이 실천적으로 행함으로서 타인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은 윤리적인 가치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철학은 관념적으로 봐야할 것인가? 아니면 행동적으로 보는 것인가? 참 난해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을 본다면 루이 알튀세르는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인 견해는 관념적일 수고 없고, 유물론적일수도 없다고 했다. 아니라면 두 가지를 동시에 대립하면 꾸준히 발전해 나가야할 가치라고 했다.

 

그런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존재하는데, 그 철학이 철학으로서 생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철학이 그 자체로 움직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철학에서 철학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철학만 논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생애에서는 그는 분명 철학을 많이 알고 있었으나 그는 비판적인 경제학과 사회과학으로서 행동했다. 그런다고 해서 그가 철학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인생 자체는 철학을 논한 것은 거의 없었으나 그의 인생 자체가 철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순된 사회구조와 더불어 그 사회에서 고통 받는 많은 대다수의 약자인 노동자와 농민을 생각했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 행동했다. 마르크스의 행동 자체 하나마다 철학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만 자본을 집필하면서 그는 철학적인 부분 관념적인 부분보단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부분으로 저술했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그렇게 적는 것 자체도 관념적인 부분이 아닌가 싶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처럼 마르크스가 언제나 약자인 노동자와 농민을 생각하며 저술한 것 자체가 하나의 관념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도 싶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관념적으로 철학적으로 저술한 게 아니라 현실을 보고 적은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관념적이거나 합리주의적인 면에 대항하는 하나의 안티테제 역시 관념적인 영역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하나는 분명히 관념적인 부분에서만 나온 것이고, 하나는 유물론적인 부분을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나 정치적 문제를 Yes or No로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원인과 구조를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관념론적 영역과 유물론적 영역을 한쪽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다.

 

왜 스탈린이 정권은 잡은 소비에트가 마르크스주의에게 독이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들에겐 하나의 관념만 사로잡고 있었다는 뜻이다. 자신들이 거기에 얽매여 착취적 자본주의에 대항하고, 게다가 파시스트에게 대항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문제는 자신들이 거기에 대항하였으며, 자신 역시 그러지 않았을까 이다. 분명 그들은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해 대항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렇게 되어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관념이 결국 공포정치로 변화하고, 현실 속의 대중들은 착취에 벗어나지 못했다.

 

스탈린이 레닌에게 선택받은 후계자 6인 중의 한명이라고 하여 그 자체가 하나의 관념적인 영역으로 끝나 버리고,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외쳐도 그는 그 관념 안에서 머물고 있었지 그 후에는 없었다. 바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에 분명히 철학이 있어도 그것인 철학으로 생산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실천으로 철학이 완성되는 것을 망각한 점이다. 노동자와 농민을 억압하는 것에 반대하여 발생한 1917년 2월 볼셰비키혁명이 철학을 내세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철학적으로 되었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끊임없이 현실을 바라보고 비판하고 나가야 할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혁명에 묶여 결국 자신들에게 위기를 안겨준 셈이다.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바라보면서 반면교사하여 새롭게 나갈 것을 권장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적 헤게모니에 대해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헤게모니로 인해 고통 받는 노동자와 농민을 인간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레비나스가 말했듯이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다. 마르크스가 윤리학을 위한 도서를 만든 적은 없으나, 그가 살아온 행동은 상당히 윤리적인 입장이다.

 

하루 12시간 넘게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여성, 하루 12시간 넘게 탄광 속에서 안전 보호 장구도 없이 일하다가 탄광이 무너져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어린아이, 철로를 놓다가 공장에서 일하다 깔려죽거나 폭발하여 죽는 노동자들, 이런 행동들이 지금 도덕적인 가치관에 아니라면 윤리적인 가치관에 옳다고 여기는가? 당시 19세기 유럽의 문제는 단순히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민주자유주의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가치는 그 개인의 존엄성이어야 하며, 그 개인에겐 최소한의 삶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후자는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롤즈의 사상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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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과 폭력 - 공산주의 문제에 대한 에세이 우리 시대의 고전 17
메를로 퐁티 지음, 박현모.유영산.이병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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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도서관에 가서 영국 철학자 브라이언 매기 교수가 저술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라는 서적을 대여하여 읽은 적이 있었다. 당시 이제 막 철학과 사회학 그리고 문학에 대하여 입문할 시절 본인이 직접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철학사와 철학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이 도서를 빌려보았다.

 

당시 프랑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라는 분야를 처음 접하면서 이들의 학문 역시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 소쉬르와 같은 근대철학자만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연결이 된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도서를 읽으면서 그리스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과 그리고 그 이전과 그 외로 하여 시기별로 따라 토마스 아퀴나스, 마키아 밸리, 루소, 칸트, 니체, 마르크스로 점점 따라오다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미국 철학자 러셀과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가 나왔다.

 

메를로 퐁티라는 인물이란 이름을 여기서 처음 보았고, 현상학에 대한 인식 여부와 더불어 현상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했는지도 몰랐기에 사실 당시 메를로 퐁티라는 인물은 상당히 낯선 존재였다. 그러나 인상이 정말 깊은 점은 무엇이냐면, 메를로 퐁티가 1961년 심장병으로 서거하기 전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철학적인 연구와 업적을 남겼는지 그리고 그가 남긴 많고 많은 연구와 업적으로 메를로 퐁티의 장례식에 수 만명의 인파가 몰렸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 메를로 퐁티를 생각해본다면 시각(視覺)의 현상학(現象學)이란 도서를 저술하여 후설과 하이데거를 이은 현상학적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본인은 현상학에 대한 입문을 하지 못했다는 점과, 현상학에서 꼭 다루어야 할 헤겔의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까지도 입문하지 않아 현상학을 뭐라고 딱 표현하기는 어렵다.

 

단지 이 메를로 퐁티라는 사람이 당시나 지금이라도 마르크스주의 내지 신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요소를 어떻게 다시 보았는지가 아주 흥미로운 점이다. 수 만명의 인파가 몰려온 메를로 퐁티의 장례식과 달리 현대철학과 사상, 그리고 인문학 전반에 큰 영향을 준 마르크스의 죽음에는 불과 열 명 내외의 쓸쓸한 배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죽어도, 엥겔스에 의한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 그리고 21세기에 계속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그가 죽을 때까지 저술한 도서였고, 미완성의 명저이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 엥겔스는 죽을 때까지 마르크스의 유지를 이어 받아 마르크스의 글과 사상을 정리하였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마르크스가 시작했으나 그 끝은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딸에 의해 정리된다.

 

완성되었다고 하나, 그것은 미완의 도서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이란 이미 완성된 책이 아니고, 끝없이 적어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집필하던 무렵 영국 도서관에서 애덤 스미스, 리카도 등과 같은 경제학자에 대한 도서를 볼 뿐만 아니라 각종 문학과 철학에 대한 도서까지 참고하여 저술했다. 또한 세계가 움직이고 사회가 조금 유동하는 과정에 마르크스의 자본은 집필 도중에 계속 수정과 추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주석과 첨부내용은 마르크스의 자본은 완성본이 아니라 지금도 오늘 그가 죽은 지 130년이 다 된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자본은 적어나가고 있다.

 

어떻게 마르크스주의 또는 신마르크스주의는 그냥 그대로 끝내거나 한번 요동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을 똑바로 보면서 자신과 사회 그리고 그 세상에 대한 지속적인 과학적, 객관적인 탐구와 비판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상실하고 그것을 망각하는 순간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그저 사이비주의로 전략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이란 이 책은 아마 그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영향이 미친 러시아혁명과 그 후에 이루어진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담은 도서이다. 참고로 이 책의 후반부에 가면 재미있는 말이 있다. 공산주의가 아닌 좌파 지식인이라는 역자들의 후기가 말이다. 그 말의 의미는 아직까지도 좌파하면 공산주의로 보는 한국의 현실과 더불어 공산주의 노선만이 좌파라고 착각하는 많은 인식불가한 자들에 대한 조롱이랄지 아니면 착각이랄지 혹은 아쉬움을 나타낸 것인지, 왠지 모를 다양한 생각을 오고가게 하는 문구가 있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메를로 퐁티의 이 도서의 집필에서 재미있는 이름이 하나 나왔다. 실존주의 철학자이면서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에게 그토록 칭송을 하였던 장 폴 사르트르라는 이름이다. 실존주의적인 장 폴 사르트르는 구조주의 인류학을 만든 레비 스트로스와의 학문적인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그리고 프랑스는 구조주의가 대세를 이룬다. 하지만 레비 스트로스 이전에 장 폴 사르트르는 학문적 동지인 메를로 퐁티와 결별을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의 발발에 의해서다. 기존에 메를로 퐁티는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통한 무능한 차르왕권이 무너진 것을 환영했으나, 러시아혁명 속에 큰 역할을 맡은 레닌이 1924년에 죽고, 1929년 트로츠키가 스탈린에 의해 권력을 잃은 채로 타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때부터 스탈린주의가 시작되고, 레닌이 후계자로 지명한 6명의 후보자 중에서 트로츠키를 포함한 5명은 모두 죽거나 정치적 숙청을 당하고, 오로지 스탈린만이 살아남아 공안정국을 만든다.

 

그 후에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 스탈린은 북한과 손을 잡고 한국 즉 남한을 남친하게 된다. 따라서 메를로 퐁티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든 공산주의에 대해 결별을 선언한다. 문제는 그 공산주의의 환상에 장 폴 사르트르가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후에 장 폴 사르트르는 1968년 프랑스 파리 5월 혁명을 지지함에 따라 구좌파적인 낡은 정신을 비판적으로 보고 잘못됨을 인정했는지도 모른다.

 

단지 문제는 이 메를로 퐁티가 어째서 이렇게 바라보게 되었는가 이다. 메를로 퐁티는 단순히 어느 문제되는 것에 대해 배타적으로 대하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문제로는 어느 문제가 일어날 경우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처음부터 반대하는 개념이 강하다. 그 개념에 대한 이해가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 안했는지 모른 채 자기는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아니라면 “나는 혹은 그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믿지 못하는 것 자체는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처럼 정말 인간은 자신이 믿거나 믿지 못함을 정말 믿고 있다거나 믿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정말 믿는지 혹은 안믿는지 조차도 분간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인간의 인식이란 언제나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와 한도 안에서 판단하려고 한다. 그 외의 것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음이 보통 인간의 인식이다.

 

인간이 그것을 알기 전에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 범주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보편적인 인식 안에서 알고 있다는 것에서 더더욱 심한 편견과 오해가 생긴다. 그런 점은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더 크게 빛을 발휘하게 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폭력이다. 폭력은 분명 타인에 대해 일정한 육체적, 정신적, 소유적인 부분을 훼손 내지 피해를 주는 행위이다. 더구나 폭력의 강도가 강해지면 생명과 존재에 대한 위기감으로 다가온다.

 

이 폭력에 대한 가치와 존재 그리고 거기에 대한 정의, 이 모든 것이 과연 옳고 그런지 혹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주게 된다. 메를로 퐁티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글을 적으면서 기존 차르왕조가 폭력적인 행위 즉 군중억압과 무력사용은 폭력에 의한 정치적 방법이다. 오직 국가만이 폭력의 정당화할 수 있다는 말처럼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 이전 봉건적 국가에서는 국가적인 권력은 곧 군주와 군주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에 대한 정치권력 합리화이므로 국가의 정치적 권력은 하나의 정당성을 가졌다.

 

하지만 권력의 집중은 부패하게 되어있고, 부패된 권력은 결국 폭력을 부르게 되기 마련이다. 러시아혁명은 폭력으로 물든 차르왕권에 대해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군인과 여성이란 하위조직이 부패하고 지나친 횡포로 인해 그들의 차르를 내몰았다. 폭력에 대항하는 혁명이라고 하나 사실 그 혁명조차도 폭력이라는 정당성을 가지게 되었다. 혹은 그런 폭력에 대항하여 폭력을 남용한 혁명가도 이후 다른 사람들에 의해 폭력적인 행위를 당한다.

 

그렇다면 누가 평화와 정의를 위한 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책에서는 “가치, 도덕적, 순수성, 내적 인간에 대한 허세적인 숭배는 폭력, 증오, 환상과 은밀한 유사성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어떻게 본다면 기존 체계에 대한 문제에 대한 반발은 역사적인 주체 당사자에게 당연한 권리이겠지만, 한편 다르게 생각하면 그것에 대한 반항 역시 기존 체계와 더불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전에 가라타니 고진의 도서에서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후진국인 나라에서 그것도 타국의 지배를 받는 나라가 독립을 하려고 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예를 들어 식민지국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조직은 진보적인 존재이고, 그것을 방해하는 존재하는 극단적 인종주의 내지 국가주의적 보수에 가까운 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진보적인 독립 운동가들이 나라를 되찾으면 그들은 진보노선이 아니라 보수노선 특히 민족주의적인 노선을 걷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제 막 세운 국가는 매우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에 의해 건국한 나라는 결국 내외적으로 위험하기 때문에 다소 강압적인 전체주의적인 정치가 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러시아혁명까지의 그 투쟁이 역사는 분명 민주주의적이지 못하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불안을 초래한 차르의 퇴진은 분명 옳은 일이다. 그렇지만 그 이후의 길이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세계는 군국주의와 더불어 식민지 개척을 위하여 끊임없이 세계분쟁이 일어났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과 같은 서구국가들은 대량생산된 공업물품을 팔고, 값싼 원자재가 필요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경제적 식민지는 필수였다. 그런 점에서 땅이 넓고 정치적으로 불안한 러시아는 분명 위기의 국가였을 것이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경험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다른 국가 강대국들의 손실을 막기 위한 총알받이로 출전하였던 러시아군으로서는 아마도 통제라는 수단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스탈린 체제에 들어서면서 러시아혁명의 혁명가들은 점차 숙청되어가고, 소비에트연방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가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렇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이 오히려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했다. 또한 자본주의에 반하는 공산주의라도 경제적인 조건은 필요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중의 하나인 트로츠키는 숙청당하기 전에 그런 점을 고려하여 농업을 육성하려고 했다.

 

또한 다른 지도자 역시 식량을 위한 농업과 무역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였던 트로츠키가 우파적인 정책으로 부농에게 농업을 유지할 것을 권했고, 이에 반대하던 세력은 집단화를 요구했다. 아마 소비에트연방의 가장 큰 실수는 인간은 모두 이상주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개인주의적인 존재가 가깝다는 점을 망각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러시아혁명은 이상주의적인 가치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존에 달린 문제였다.

 

이것에 따라 생각하면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대중, 즉 프롤레타리아의 존재에 대한 강렬한 의지는 분명히 따르고 이에 이들을 제대로 인지시키고 각자의 존재를 알도록 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의무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이란 자신의 이성을 키우기보다는 이미 이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욱 쉽고 편하고 흔하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은 집단주의적인 사고로 전환되어 이른바 파시스트적인 관념으로 발전할 수 있다.

 

군중심리로 통한 파시즘은 비이성적인 사고와 관념이 그것 자체 합리적 이성과 관념으로 변모되어 폭력적이 하나의 미적인 가치로 변하는 순간 즉 광기가 보편적 가치가 되는 순간 파시즘이란 큰 위기가 다가온다. 소비에트연방에서 추구하던 그 혁명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번으로 끝났기에 실패한 혁명이 되었다. 사실 루이 알튀세르가 만들어가고 싶은 마르크스주의란 관념적인 부분과 유물론적인 부분이 끊임없이 서로를 비판하고 존재함으로 그 경향을 찾아 발전을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공산주의는 없어지고, 그나마 남은 북한마저 공산주의국가 아닌 그저 스탈린주의를 모방한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하다. 국가자본주의도 매우 아깝고 아쉬운지 가라타니 고진은 북한 독재체계를 이씨 조선의 연장이라고 한다. 이미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끝나버린 봉건국가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을 유토피아적 망상으로 인간중심이라 하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그것을 합당하게 보이게 하는 폭력만이 존재한다. 물론 그런 폭력적인 부분은 반드시 저런 허황된 유토피아(사실은 디스토피아에 가까우나)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테러리즘이 일어나는 현대사회 국제무대도 마찬가지이다. 테러의 발달은 무엇인가? 테러를 가하는 존재가 소수약자라면 반드시 그 소수약자에 대한 폭력적인 수단이 가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수단에 의해 테러리즘을 일으킨 존재로 인해 피해를 입은 국가나 조직들은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반테러리즘으로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도 테러리즘과 별반 차이 없는 폭력이란 점에서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정치적 행위에는 반드시 폭력을 수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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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
염수균 지음 / 천지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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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존 롤즈의 정의론이란 도서를 본 적이 있었다. 약 700페이지가 넘는 매우 두꺼운 도서에 아주 많고 많은 담론과 철학이 담겨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았으나, 그 내용을 보자면 정말 현대사회의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 이상의 내용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정의롭고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번 지나치면 좋은 도서이나, 그것을 받아들이기의 과정이란 정말로 쉽지가 않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런 도서를 받아들이고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인간이 각자마다 인격이 있고, 존중받아야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런 인간의 존재이기에 존 롤즈가 제시하고자 하는 그 철학적 가치관은 다시 되새겨 봐야 할 가치는 아닐까? 그래도 그 가치를 실재 현실에서 행동으로 보여주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가치관 그리고 이성적 판단과 양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읽어본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는 바로 그런 존 롤즈의 철학적 가치관을 탐구하고 알아보는 도서이다. 그런 도서이기에 이 책에서는 내가 읽어본 정의론 이외에도 “만민법”과 “공정으로서의 정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존 롤즈는 아주 위대한 정치·사상·철학자이지만, 그가 남긴 도서는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그 도서 하나하나의 가치를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를 읽다보면 금방이라도 그의 사상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존 롤즈의 철학을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대하는 방법에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문화적인 부분까지 골고루 이야기하고 있었다.

 

존 롤즈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란 누구나 공평한 기회를 주고, 경제적·사회적 차이가 있더라도 누구나 정치적인 참여에 대하여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화주의적인 요소, 즉 국민 스스로가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공화주의적인 요소를 실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참여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감이었다. 가령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을 옮기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만약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희생을 해서라도 남에게 공공적인 이익을 넘겨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화주의적인 요소에서는 자신만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야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제시한 자유주의처럼 인간은 자신만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로 통해 자신의 윤리적인 가치를 보임으로서 타인과 자신이 서로 잘 원만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존 스튜어트 밀은 그 존재자 대상이 학식과 능력이 높으면 정치적인 권력을 더 부여한다고 생각했으나, 밀의 사상을 수용하던 롤즈는 그런 권력적인 요소보다는 각 개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소수약자나 눈에 보이지 않은 채 외면 받는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적 표현의 가치가 적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롤즈는 언제나 정치적, 사회적 입장에서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기도 했으나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재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최소수혜자에 대한 사회적 보장으로서 그들에게 큰 사회적 지위나 이권을 주지 않겠으나 적어도 그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문화에 대한 향유를 박탈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곧 시민이나 국민들이 주인이고, 그들이 진정한 국민으로서 공화주의적인 가치를 실현할 때 비로소 정의로운 민주적 자유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닌 인간 그 개인마다 정치적인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 자유가 박탈되는 세상은 결코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롤즈는 최소수혜자의 입장에 대해 중요하게 여겼다.

 

민주자유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고 누구나 더 낳은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 롤즈의 입장에서 그것을 이루게 할 수 있는 요건은 바로 교육의 기회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각자의 천성적인 능력은 다를 수밖에 없다. 머리가 아주 뛰어나거나 아니면 다리가 엄청 빠르거나 혹은 힘이 매우 세거나 말이다. 물론 이런 선천적인 행운에 대해서는 누군가의 조작이 아닌 우연적인 일이므로 그 자체로는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 중에서 일반적인 교육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기에 대한 성장이나 발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채 계속 자신의 인생을 더 좋은 미래로 만들 수 없다. 이런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그 사람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으면 좋은 가치관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자신 역시 성장하게 되면 사회에 많은 기여를 제공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발전과 성공으로 통해 사회에 발전이 있다면, 거기에 따른 사회의 발전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에 따라 다시 그 사람이 아닌 타인에게도 좋은 결과가 올 수 있다. 이것은 공공선이란 가치를 떠나 더 높은 공동선이란 영역으로 향할 수 있다. 결국 이 사회를 이루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삶을 지내고 어떤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는 가이다. 결론은 인간의 존재는 경험주의적인 부분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이런 인간의 경험에 대한 롤즈의 철학은 인간에겐 그 자신이 얼마든지 나래를 펼칠 수 있는 하나의 공정함과 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공정과 정의는 말로는 쉬우나 현실을 그렇지 않다. 위에서 말하다시피 인간이란 합리적인 존재이다. 합리라는 것은 이익 추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약 이익을 떠나 윤리적인 가치로 합당한 가치관을 지닌다면 민주적 자유주의는 반드시 도래해야할 사회이다.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위해 그 개인의 영역을 훼손하면 안된다. 하지만 어떻게 본다면 자유주의에서 개인의 재산권과 이권이란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진실의 자유주의는 인간의 부나 권력으로서의 자유가 아닌 천부인권적인 그 가치이다. 민주자유주의에서 부와 권력으로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단지 그것은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것에 불과하다. 단지 자신이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나, 그 많다는 이유로 다른 타인들에게 피해와 불쾌감을 가하는 것은 그것은 민주적 자유주의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태어나면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평등하지 않다. 오히려 불평등이란 명제가 엄격히 존재하므로 평등이란 가치관이 두각될 수밖에 없다. 누구 일정한 기준으로 평등이란 선을 긋게 된다면 그 사회는 분명히 불공정한 사회가 될 것이다. 그 평등선이란 기준에 일치하는 사람보다는 일치하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일치하지 못한 불평등에서 사회적 약자가 그 기준에 계속 도달하지 못한 채 사회적 소외된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세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명히 교육적, 정치적, 문화적 권리를 박탈되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겐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여 노력을 해도 사회적으로 개선되지 않거나 오히려 압박이 가해진다면 저항할 권리가 있다. 롤즈는 그 사회에서 어떤 사회적인 마찰이나 분쟁이 있어서 그것이 사회적 화합을 망치는 순간에 대해 그 문제를 화합을 망치는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만들도록 만든 존재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정치적인 민주자유주의는 그런 부정의한 사회에 대한 충분한 개선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되지 않을 시에는 그 사회에 대하여 바꾸어야 하는 점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적 표현과 다양한 여론이 존재해야 한다고 한다.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롤즈는 어느 다수 및 혹은 특정을 위한 포괄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나 그 포괄적인 민주주의마저 포용하여 그 자체로도 포괄적인 민주주의를 하나의 체제로 봐야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하나의 기준을 잡기보다는 그 기준을 많은 길 중에서 하나라는 점이다. 만약 그 기준만 내세우게 된다면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단순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자신의 권리만큼 타인의 권리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롤즈는 단순히 그 사회에 속한 개인적인 시민에게만 정의를 부여하지 않았다. 롤즈는 이른바 범세계적인 윤리적 가치로서 공정과 정의를 내세웠다.

 

분쟁과 전쟁이란 투쟁보다는 그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하나의 덕목과 자신이 만약 무기를 들고 싸워 나가야 할 때는 오로지 다른 국가가 부정의하게 자신의 나라를 공격할 때이다. 설렁 전쟁이 일어나도 롤즈는 전쟁에 참가한 병사에게 큰 대가를 물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장교와 같은 상급자들은 본래 군인으로서 자기 스스로 활동하는 부류이나, 병사는 자신이 스스로 원해서 군인이 된 것이 아니라 나라가 위험해서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지 책임과 권리를 명확하게 판단하고, 그 책임과 권리를 판단함으로서 전쟁을 물론이거니와 자신 주변의 삶과 사회, 더 나아가서는 국가적으로도 그 공정과 정의가 미쳐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민주사회가 정립되어야 하는 것은 반드시 가야할 가치관이다. 인간은 본래 정치적 내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한다. 그 정치적, 사회적인 존재가 그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의식과 더불어 나 자신을 뛰어넘어 타인과의 원활한 관계가 존재해야지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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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비교역사 문화총서 2
강만길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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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는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던 근대사의 지식으로만 파악하기는 매우 어려운 책인 것 같았다. 책 속에 단순히 한국의 근대사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근대사까지 다루었으며, 게다가 그 다루는 연구 내용에서는 다양한 학문의 범주까지 넘나들었다. 일단 역사를 안다고 해도 당시 사회학적인 배경이나 정치적인 상황까지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역사라는 것이 크나큰 사건과 중요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시대에는 그 시대만이 가지고 있던 하나의 대세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것을 이해하고 가지 않을 경우 많은 어려움에 봉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 생활을 했다는 점에 넘어 이 식민지 생활과 더불어 다른 국가에서는 어떻게 식민지를 통치하고 그들은 어떻게 우리와 다른가까지 판단하는 것은 많은 학술적인 자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은 외국의 경우다. 물론 일본이 행하던 조선의 불법침해 행위도 중요하나 그것이 어떻게 외국과 다른가라는 사실이다. 영국에서는 인도, 프랑스에서는 베트남, 미국에서는 필리핀이다. 현재 이 모든 나라들은 자치적인 주권을 가진 국가이나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들은 국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하고 통치받던 그들은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가졌다.

 

물론 그들이라고 억압을 받고 학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 나라 모두 잔혹한 탄압을 거치고 있었으며, 당시 세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유입에 따라 국내 경제와 사회가 피폐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우리보다 덜 한 탄압을 받음 셈이다. 가령 서구사회에서는 비서구적인 문명권인 동양, 아프리카, 제3세계에 대해 아주 우월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고 한다. 이런 오리엔탈리즘에 따른 영향으로 서구사회는 자신들이 속한 '서양적'이라는 것에 대해 '과학적,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이라는 단어나 이미지를 떠올리고 동일시하는 반면에, '동양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서양식’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논리적, 비이성적, 명상적, 신비적' 이라는 단어나 이미지를 떠올리는 서구 중심적이고 이분법적인 편견이다.

 

그런 오리엔탈리즘에 따른 서양문화가 동양문화에 접할 경우 이들은 모두 미개하고 열악한 문명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이들은 서양문화에 어울리는 동양 속의 서양을 만들기를 바랐다. 영어, 프랑스 등을 전파하여 이들이 자신들의 언어적으로 납득하도록 하게 했으며, 이런 언어의 소통을 통해 자신들에게 필요한 인적자원을 유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이 존재하므로 자신들의 우월한 문화적인 요소를 상대방에서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 보았다.

 

게다가 서양문화는 동양문화와 많은 차이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동양 자체적인 문화를 인정하였다. 그 인정은 너무 상이한 문화적인 영역권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지형적인 위치와 그동안 살아온 풍습들을 강제로 따르게 하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오히려 그들을 후퇴한 문화를 내버려두고 유지함으로서 그들의 반감을 사지 않고, 단지 경제적인 이익을 바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셈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많이 달랐다. 일본은 서양국가와 달리 동양문화권의 나라가 동양문화권 속의 나라를 침탈했기 때문에 비서구적이라는 동일한 공통특성이 있었고, 더 중요한 부분은 자신들은 메이지유신으로 통해 서구문화를 일찍 받아들인 국가인 만큼 서구화가 가장 먼저 이룬 동양국가이었으나 한편으로 서구에서 가장 먼저 벗어나야 할 국가였다. 자신들이 서구화를 받아들여 그것에 동조되어 군국주의적인 침탈행위를 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존재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일본의 망언 같은 군사 및 외교전략 중에서 아시아의 탈서구화라는 것이다. 즉 대북아공영이라는 허울 좋은 망상에 젖어 서방국가를 지키기 위해 조선을 침탈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것이다. 조선침탈에서 중요한 사실은 일본은 조선이란 국가와 비교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좋은 점을 부각한 반면 조선인에겐 자신과 전혀 반대되는 것만 부여했다. 정한론에서는 조선을 침탈하여 지배하는 것이어야 말로 일본과 조선을 위한 길이라는 사실이란 허구적인 요소를 집어넣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후반에 엉뚱한 일들이 생긴다. 1937년 대동아전쟁에서 일본군들은 계속 전쟁에 병력을 투입하기 위해 조선인들은 일본군으로 보낸다. 이때 일본군은 조선인들을 믿음도 없고 게으르고 나태한 존재로 봤다. 그러나 갑자기 황국신민관을 내세워 조선인들은 일본인과 일치한다는 내선일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통하지 못한 점은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처음부터 배격하고 차별대우했기 때문이다.

 

결국 서양에서 넘어온 국가들은 처음부터 인종의 차이에서 괴리감을 인정했다. 머리색, 피부, 동공, 키, 골격, 언어권까지 말이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금 달랐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그렇게까지 많이 닮은 것은 아니나, 적어도 머리색, 동공, 피부색, 언어권에서 한자를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물론 동양권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하여 집단적인 군국주의 교육을 실시했지만, 중국과 대만에 비교하여 조선이란 국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치밀하고 잔혹하게 굴었다는 사실이다.

 

본래 일본은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굴지 않았으나 1936년 2월 26일 군부쿠데타가 일어나서 일본 정치권에 군사적인 형태로 발달하고, 이들은 전쟁을 일으킨 전범자로 변경된다. 문제는 이들이 되고 나서 한국어 즉 조선어에 대한 탄압과 창씨개명, 황국신민화라는 파시즘적인 군국주의에 물들어간다. 이전에는 조금 다른 사실이 발견되어 조금 흥미롭다고 할까나? 왜냐하면 군국주의에 빠져 전쟁을 일으키는 파시스트의 국가에서 맨 처음 조선인들의 의식 해체가 너무 이율배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Bentham, Jeremy)의 공리주의(功利主義)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自由論)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自由主義)를 외친 것이다. 이 두 명의 철학자는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로서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철학을 설파한 사상가이다. 그렇지만 존 스튜어트 밀은 동인도 주식회사에 근무했고, 문화수준이 낮은 인도에 대한 영국통치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까지 잔혹하게 무력의 탄압보다는 무역으로 통한 경제적인 정책을 중용했다.

 

즉 자유주의라는 것은 인권에 대한 자유주의가 아니라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자본주의국가에서는 자본의 크기에 따라 자유가 다르다는 것처럼 자본자유주의였다. 그래서 그들을 문화적으로 탄압하는 것보다 그들과의 교역에 따른 이익이 더욱 좋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존 스튜어트 밀은 인권적인 부분에서 인간생명의 가치를 중시했다.

 

그런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를 강조한 영국의 철학사상이 어떻게 한지 일본에서 조선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런 이유는 일본이 조선이 가진 사상 즉, 유교사상을 해체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군주가 존재하는 국가에서 조선인들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중시하면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지고,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지면 애국심이 약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약간 이상한 흐름으로 연결되어 일제에 오히려 역으로 다가온 일이 있었다.

 

1919년 3월 1일에 열린 평화시위 삼일절행사를 본다면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면서 고종 독살의혹에 대한 의심과 일제의 조선인에 대한 탄압에 따른 반발행위가 삼일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운동 자체가 일제에 대한 반발의식 근본에 자유주의가 있었다. 인간은 그 누구에게 침해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천부인권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게다가 1919년의 2년 전에 러시아에서는 차르왕족이 레닌-트로츠키에 의해 무너지는 큰 혁명이 발생하여 거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차르왕족을 전복시킨 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레닌과 트로츠키이었으나, 그들은 자신이 혁명의 지도자로서만 있었지, 혁명의 주체는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군인과 여성들이었다. 무능한 왕족을 무너뜨린 러시아 혁명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 내지 사회주의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 따라서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는 민족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의 다양한 부류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더 이상 조선인들을 무력통치로서 상대하기보다는 무력 이외의 문화통치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정적인 순간들이 바로 1937년 이후고 1942년 태평양 전쟁에 전황이 급할 때 더욱 심각했다. 일본이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의 괴뢰정부 만주국과 만주국 넘어 중국, 대만, 미얀마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그 교두보가 조선이었다.

 

군수기지 및 시설의 유지와 철도와 도로를 통한 물자이송에서 조선만큼 좋은 전략지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은 반도형 국가 즉 섬과 대륙을 연결하는 교두보이기에 큰 착취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가령 미국의 경우 필리핀을 정복했으나 2차 대전 이전에 철수하려 한다. 그 이유는 필리핀에다가 미국식 자본주의 경영을 도입하려 했으나, 그것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너무 멀리 있다는 점과 거기에 투자를 해도 원금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군사적인 전략기지로서 효용이 없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필리핀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태평양 중앙에 군사전략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게 되고, 태평양을 관통하여 미국본토로 적군이 올 수 있다는 예상이 있었다. 따라서 필리핀에 경제적인 투자와 수탈, 군사적인 배치를 실시하지 않았다. 단지 시간벌기 식의 군사적인 조력만 했을 뿐이다.

 

이와 다르게 영국은 인도인들을 이용하여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토록 한다. 영국인들은 인도에게 자치권을 준다는 약속을 하고, 많은 인도병사를 선발하여 전장에 참전하여 수 십 만 명이 죽게 했지만, 그 약속을 어긴다. 인도의 평화주의적인 독립운동가 간디가 영국에 대항하여 반폭력 시위가로 활동했으나, 1차 대전 시에 영국의 약속에서는 무력참전을 동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참전 후에도 인도인 군사들에게 큰 혜택이 가지 않자 아주 소수의 초급장교를 인도인으로 올려놓고, 인도라는 국가는 다양한 종파와 세력이 있어서 이들을 각각 다른 군대에 편입하여 서로간의 경쟁심을 올리고, 심지어 인도 카스트 계급사회까지 이용하여 서로 분열시키려고 했다. 이런 방법들은 일본 역시 사용했다.

 

물론 군대 안이 아닌 착취의 수단으로 말이다.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지만, 일제가 조선을 통치할 때도 일본이나 조선 안에도 제3차 공산주의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 일명 코민테른(Comintern) 조직원이 활동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내의 노동자는 매우 열악했다는 점이다. 가령 공장 내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노동시간을 보면 조선인이 1일 12시간 이상이 많았고, 급료도 일본인에 비해 훨씬 저렴했다.

 

게다가 공장법까지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인 차별을 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작은 월급, 심한 착취, 심각한 노동환경에 대해 조선인들이 파업했으나 일제는 경찰과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저지했으며, 이것보다 더한 방법으로 중국에서 건너온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조선인들과 경쟁을 붙였다. 중국인들은 조선인보다 더 작은 금액에도 일했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동원되어 공장에서 근무했는데, 어린아이의 경우 어른의 25%를 주어도 아직 어리므로 반항하지 않았으며, 심각한 노동착취를 해도 문제되지 않았다. 아이와 여자의 노동으로 남성노동자의 가치가 저하되어 1인 남성의 월급으로 2~3명의 여자와 어린아이를 고용할 수 있었다. 이런 부분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도 나온 내용으로 당시 마르크스가 자본을 저술할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일제시기에 통용되고 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마르크스주의가 조선에 유입되어 독립운동을 한 것만 아니다. 일본 내에서도 군국주의와 더불어 자본주의가 활성화되어 거대한 자본가가 영세농민의 토지를 수탈하여 일본 내의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조선인들은 그 일본인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한 노동착취를 당한 점이다.

 

이런 문제를 일으킨 사실에선 교육도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한글을 사용할 경우 심각한 탄압을 실시했다. 게다가 일어를 국어로 하였고, 각종 일제식민사상을 주입했으며, 교육의 기간도 일반 일본인과 달리 적게 하도록 하여 조선인들에게 중요한 기술이나 학문을 배우지 못하도록 했다. 단지 일제에 충실하고 무식한 조선인만 원한 것이다.

 

그런 불평등을 기초로 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2등 국민인 조선인들에게 동일한 전쟁용사로 참전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자기가 스스로 자원하여 장교로 임관한 사람도 있겠으나, 대부분 사병으로 억지로 끌려 나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합리화하여 파시즘적인 군국주의를 실현하려 했으나, 결국 패망한다. 물론 패배의 원인은 연합국과 미군의 참전도 있지만, 전쟁의 수행에 있어서 황국신민을 강조하던 일제가 겉으로는 강요해도 결국 차별화한 것 자체가 모순이란 점이었다.

 

이에 반해 유럽과 미국의 식민국에서는 겉모습이 다르고 문화적인 이질감이 크기 때문에 처음부터 내선일치를 강조하지 않았고, 그냥 그 나라의 풍속에 자신들의 문화를 주입하는 식이었다. 결국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서구와 다른 것을 같다고 말하면서 결국 다르게 차별한 일본의 식민통치 방법에서는 일제가 이중적인 통치방법이 결국 자신들의 모순으로 이어졌다. 서구의 경우 그 민족 자체를 말살하기 보다는 그 민족의 국가를 경제적인 교육으로 이익을 도모했지만, 일제는 그 민족 자체를 제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거는 모두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 종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종으로 삼으려 해도 동일시하자는 구호는 역으로 반발감을 주었다는 점이 이 책에서는 강한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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