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비교역사 문화총서 2
강만길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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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는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던 근대사의 지식으로만 파악하기는 매우 어려운 책인 것 같았다. 책 속에 단순히 한국의 근대사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근대사까지 다루었으며, 게다가 그 다루는 연구 내용에서는 다양한 학문의 범주까지 넘나들었다. 일단 역사를 안다고 해도 당시 사회학적인 배경이나 정치적인 상황까지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역사라는 것이 크나큰 사건과 중요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시대에는 그 시대만이 가지고 있던 하나의 대세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것을 이해하고 가지 않을 경우 많은 어려움에 봉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 생활을 했다는 점에 넘어 이 식민지 생활과 더불어 다른 국가에서는 어떻게 식민지를 통치하고 그들은 어떻게 우리와 다른가까지 판단하는 것은 많은 학술적인 자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은 외국의 경우다. 물론 일본이 행하던 조선의 불법침해 행위도 중요하나 그것이 어떻게 외국과 다른가라는 사실이다. 영국에서는 인도, 프랑스에서는 베트남, 미국에서는 필리핀이다. 현재 이 모든 나라들은 자치적인 주권을 가진 국가이나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들은 국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하고 통치받던 그들은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가졌다.

 

물론 그들이라고 억압을 받고 학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 나라 모두 잔혹한 탄압을 거치고 있었으며, 당시 세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유입에 따라 국내 경제와 사회가 피폐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우리보다 덜 한 탄압을 받음 셈이다. 가령 서구사회에서는 비서구적인 문명권인 동양, 아프리카, 제3세계에 대해 아주 우월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고 한다. 이런 오리엔탈리즘에 따른 영향으로 서구사회는 자신들이 속한 '서양적'이라는 것에 대해 '과학적,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이라는 단어나 이미지를 떠올리고 동일시하는 반면에, '동양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서양식’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논리적, 비이성적, 명상적, 신비적' 이라는 단어나 이미지를 떠올리는 서구 중심적이고 이분법적인 편견이다.

 

그런 오리엔탈리즘에 따른 서양문화가 동양문화에 접할 경우 이들은 모두 미개하고 열악한 문명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이들은 서양문화에 어울리는 동양 속의 서양을 만들기를 바랐다. 영어, 프랑스 등을 전파하여 이들이 자신들의 언어적으로 납득하도록 하게 했으며, 이런 언어의 소통을 통해 자신들에게 필요한 인적자원을 유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이 존재하므로 자신들의 우월한 문화적인 요소를 상대방에서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 보았다.

 

게다가 서양문화는 동양문화와 많은 차이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동양 자체적인 문화를 인정하였다. 그 인정은 너무 상이한 문화적인 영역권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지형적인 위치와 그동안 살아온 풍습들을 강제로 따르게 하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오히려 그들을 후퇴한 문화를 내버려두고 유지함으로서 그들의 반감을 사지 않고, 단지 경제적인 이익을 바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셈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많이 달랐다. 일본은 서양국가와 달리 동양문화권의 나라가 동양문화권 속의 나라를 침탈했기 때문에 비서구적이라는 동일한 공통특성이 있었고, 더 중요한 부분은 자신들은 메이지유신으로 통해 서구문화를 일찍 받아들인 국가인 만큼 서구화가 가장 먼저 이룬 동양국가이었으나 한편으로 서구에서 가장 먼저 벗어나야 할 국가였다. 자신들이 서구화를 받아들여 그것에 동조되어 군국주의적인 침탈행위를 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존재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일본의 망언 같은 군사 및 외교전략 중에서 아시아의 탈서구화라는 것이다. 즉 대북아공영이라는 허울 좋은 망상에 젖어 서방국가를 지키기 위해 조선을 침탈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것이다. 조선침탈에서 중요한 사실은 일본은 조선이란 국가와 비교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좋은 점을 부각한 반면 조선인에겐 자신과 전혀 반대되는 것만 부여했다. 정한론에서는 조선을 침탈하여 지배하는 것이어야 말로 일본과 조선을 위한 길이라는 사실이란 허구적인 요소를 집어넣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후반에 엉뚱한 일들이 생긴다. 1937년 대동아전쟁에서 일본군들은 계속 전쟁에 병력을 투입하기 위해 조선인들은 일본군으로 보낸다. 이때 일본군은 조선인들을 믿음도 없고 게으르고 나태한 존재로 봤다. 그러나 갑자기 황국신민관을 내세워 조선인들은 일본인과 일치한다는 내선일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통하지 못한 점은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처음부터 배격하고 차별대우했기 때문이다.

 

결국 서양에서 넘어온 국가들은 처음부터 인종의 차이에서 괴리감을 인정했다. 머리색, 피부, 동공, 키, 골격, 언어권까지 말이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금 달랐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그렇게까지 많이 닮은 것은 아니나, 적어도 머리색, 동공, 피부색, 언어권에서 한자를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물론 동양권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하여 집단적인 군국주의 교육을 실시했지만, 중국과 대만에 비교하여 조선이란 국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치밀하고 잔혹하게 굴었다는 사실이다.

 

본래 일본은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굴지 않았으나 1936년 2월 26일 군부쿠데타가 일어나서 일본 정치권에 군사적인 형태로 발달하고, 이들은 전쟁을 일으킨 전범자로 변경된다. 문제는 이들이 되고 나서 한국어 즉 조선어에 대한 탄압과 창씨개명, 황국신민화라는 파시즘적인 군국주의에 물들어간다. 이전에는 조금 다른 사실이 발견되어 조금 흥미롭다고 할까나? 왜냐하면 군국주의에 빠져 전쟁을 일으키는 파시스트의 국가에서 맨 처음 조선인들의 의식 해체가 너무 이율배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Bentham, Jeremy)의 공리주의(功利主義)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自由論)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自由主義)를 외친 것이다. 이 두 명의 철학자는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로서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철학을 설파한 사상가이다. 그렇지만 존 스튜어트 밀은 동인도 주식회사에 근무했고, 문화수준이 낮은 인도에 대한 영국통치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까지 잔혹하게 무력의 탄압보다는 무역으로 통한 경제적인 정책을 중용했다.

 

즉 자유주의라는 것은 인권에 대한 자유주의가 아니라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자본주의국가에서는 자본의 크기에 따라 자유가 다르다는 것처럼 자본자유주의였다. 그래서 그들을 문화적으로 탄압하는 것보다 그들과의 교역에 따른 이익이 더욱 좋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존 스튜어트 밀은 인권적인 부분에서 인간생명의 가치를 중시했다.

 

그런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를 강조한 영국의 철학사상이 어떻게 한지 일본에서 조선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런 이유는 일본이 조선이 가진 사상 즉, 유교사상을 해체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군주가 존재하는 국가에서 조선인들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중시하면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지고,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지면 애국심이 약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약간 이상한 흐름으로 연결되어 일제에 오히려 역으로 다가온 일이 있었다.

 

1919년 3월 1일에 열린 평화시위 삼일절행사를 본다면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면서 고종 독살의혹에 대한 의심과 일제의 조선인에 대한 탄압에 따른 반발행위가 삼일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운동 자체가 일제에 대한 반발의식 근본에 자유주의가 있었다. 인간은 그 누구에게 침해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천부인권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게다가 1919년의 2년 전에 러시아에서는 차르왕족이 레닌-트로츠키에 의해 무너지는 큰 혁명이 발생하여 거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차르왕족을 전복시킨 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레닌과 트로츠키이었으나, 그들은 자신이 혁명의 지도자로서만 있었지, 혁명의 주체는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군인과 여성들이었다. 무능한 왕족을 무너뜨린 러시아 혁명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 내지 사회주의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 따라서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는 민족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의 다양한 부류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더 이상 조선인들을 무력통치로서 상대하기보다는 무력 이외의 문화통치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정적인 순간들이 바로 1937년 이후고 1942년 태평양 전쟁에 전황이 급할 때 더욱 심각했다. 일본이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의 괴뢰정부 만주국과 만주국 넘어 중국, 대만, 미얀마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그 교두보가 조선이었다.

 

군수기지 및 시설의 유지와 철도와 도로를 통한 물자이송에서 조선만큼 좋은 전략지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은 반도형 국가 즉 섬과 대륙을 연결하는 교두보이기에 큰 착취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가령 미국의 경우 필리핀을 정복했으나 2차 대전 이전에 철수하려 한다. 그 이유는 필리핀에다가 미국식 자본주의 경영을 도입하려 했으나, 그것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너무 멀리 있다는 점과 거기에 투자를 해도 원금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군사적인 전략기지로서 효용이 없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필리핀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태평양 중앙에 군사전략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게 되고, 태평양을 관통하여 미국본토로 적군이 올 수 있다는 예상이 있었다. 따라서 필리핀에 경제적인 투자와 수탈, 군사적인 배치를 실시하지 않았다. 단지 시간벌기 식의 군사적인 조력만 했을 뿐이다.

 

이와 다르게 영국은 인도인들을 이용하여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토록 한다. 영국인들은 인도에게 자치권을 준다는 약속을 하고, 많은 인도병사를 선발하여 전장에 참전하여 수 십 만 명이 죽게 했지만, 그 약속을 어긴다. 인도의 평화주의적인 독립운동가 간디가 영국에 대항하여 반폭력 시위가로 활동했으나, 1차 대전 시에 영국의 약속에서는 무력참전을 동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참전 후에도 인도인 군사들에게 큰 혜택이 가지 않자 아주 소수의 초급장교를 인도인으로 올려놓고, 인도라는 국가는 다양한 종파와 세력이 있어서 이들을 각각 다른 군대에 편입하여 서로간의 경쟁심을 올리고, 심지어 인도 카스트 계급사회까지 이용하여 서로 분열시키려고 했다. 이런 방법들은 일본 역시 사용했다.

 

물론 군대 안이 아닌 착취의 수단으로 말이다.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지만, 일제가 조선을 통치할 때도 일본이나 조선 안에도 제3차 공산주의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 일명 코민테른(Comintern) 조직원이 활동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내의 노동자는 매우 열악했다는 점이다. 가령 공장 내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노동시간을 보면 조선인이 1일 12시간 이상이 많았고, 급료도 일본인에 비해 훨씬 저렴했다.

 

게다가 공장법까지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인 차별을 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작은 월급, 심한 착취, 심각한 노동환경에 대해 조선인들이 파업했으나 일제는 경찰과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저지했으며, 이것보다 더한 방법으로 중국에서 건너온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조선인들과 경쟁을 붙였다. 중국인들은 조선인보다 더 작은 금액에도 일했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동원되어 공장에서 근무했는데, 어린아이의 경우 어른의 25%를 주어도 아직 어리므로 반항하지 않았으며, 심각한 노동착취를 해도 문제되지 않았다. 아이와 여자의 노동으로 남성노동자의 가치가 저하되어 1인 남성의 월급으로 2~3명의 여자와 어린아이를 고용할 수 있었다. 이런 부분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도 나온 내용으로 당시 마르크스가 자본을 저술할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일제시기에 통용되고 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마르크스주의가 조선에 유입되어 독립운동을 한 것만 아니다. 일본 내에서도 군국주의와 더불어 자본주의가 활성화되어 거대한 자본가가 영세농민의 토지를 수탈하여 일본 내의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조선인들은 그 일본인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한 노동착취를 당한 점이다.

 

이런 문제를 일으킨 사실에선 교육도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한글을 사용할 경우 심각한 탄압을 실시했다. 게다가 일어를 국어로 하였고, 각종 일제식민사상을 주입했으며, 교육의 기간도 일반 일본인과 달리 적게 하도록 하여 조선인들에게 중요한 기술이나 학문을 배우지 못하도록 했다. 단지 일제에 충실하고 무식한 조선인만 원한 것이다.

 

그런 불평등을 기초로 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2등 국민인 조선인들에게 동일한 전쟁용사로 참전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자기가 스스로 자원하여 장교로 임관한 사람도 있겠으나, 대부분 사병으로 억지로 끌려 나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합리화하여 파시즘적인 군국주의를 실현하려 했으나, 결국 패망한다. 물론 패배의 원인은 연합국과 미군의 참전도 있지만, 전쟁의 수행에 있어서 황국신민을 강조하던 일제가 겉으로는 강요해도 결국 차별화한 것 자체가 모순이란 점이었다.

 

이에 반해 유럽과 미국의 식민국에서는 겉모습이 다르고 문화적인 이질감이 크기 때문에 처음부터 내선일치를 강조하지 않았고, 그냥 그 나라의 풍속에 자신들의 문화를 주입하는 식이었다. 결국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서구와 다른 것을 같다고 말하면서 결국 다르게 차별한 일본의 식민통치 방법에서는 일제가 이중적인 통치방법이 결국 자신들의 모순으로 이어졌다. 서구의 경우 그 민족 자체를 말살하기 보다는 그 민족의 국가를 경제적인 교육으로 이익을 도모했지만, 일제는 그 민족 자체를 제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거는 모두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 종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종으로 삼으려 해도 동일시하자는 구호는 역으로 반발감을 주었다는 점이 이 책에서는 강한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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