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스쿨 DxD 3 -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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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하이스쿨 DXD 3번째 권을 보면서 이 말이 생각났다. “신은 죽었다” 라고 말이다. “신은 죽었다” 라는 말은 어디에서 흔히 들어본 간단한 문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원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온 말투다. 조로아스터교의 차라투스트라는 인물을 내세워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낸 철학도서다. 일반 학생이나 대중들이나 볼만한 라이트노벨에 생각해도 머리가 매우 아픈 철학을 끄집어 낸 것도 뭔가 아닌듯 하나, 그것도 서구철학의 모든 것을 배반한 니체에서 꺼내온 것 역시 위험한 수준일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책 표지일러스트를 바라보면서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시아 아르젠트, 그는 본래 수녀였고, 가톨릭교회에서는 한 때 성녀라고 불릴 정도다. 그녀의 치료능력은 성모마리아의 은총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1권에 나올 적에 수녀복을 입은 시스터였다. 그러나 3권은 조금 다른 시스터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악마날개를 펼쳤다. 그것도 교복도 아닌 수녀복으로 말이다.

 

이미 여기서 선과 악이란 이분법적 사고는 벌써 해체가 되어버렸다.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온 서구철학에서 이분법적 대립은 선과 악, 너와 나라를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 버린다. 문제는 그 주관이란 존재가 과연 옳고 정당한 존재인지 수긍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격해진 것이다. 그런 문제는 1권에서 아시아가 가톨릭교회에서 이단자로 몰려 타천사에게 억지로 끌려간 사건과 그리고 3권 째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한 키바 유우토의 과거 역시 그렇다. 이 책에서 왜 신은 죽었는가라는 의문은 여지없이 폭로한다.

 

물론 신은 그러하지도 혹은 그 이상으로 난폭할지 모른다. 신이란 존재가 있다고 믿기에 인간들은 스스로 양심을 지키며, 또한 신이 있는데도 세상 어딘가에서 매우 부당하게 사라지고 있다. 신은 과연 있는가? 물론 서양종교보다 다소 동양적인 종교관에 가까운 본인입장에선 신은 자연이라고 여기는 점에서 신은 어디에나 있다고 여길 뿐이다. 나는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지 않음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하이스쿨 DXD 3권은 그런 신에 대한 관념에서 매우 충격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물론 순전히 작가의 사고 아래 생성된 하나의 세계이나, 그 세계는 너무나도 끔찍하고 잔인한 사고를 나타낸다. 전편들을 살펴보면 악마, 천사, 타천사 3부류들은 서로 간의 경쟁에 모두 큰 피해를 입은 채 암묵적인 휴전에 들어간다. 그런데 겉으로 전쟁만 끝이지 그 전쟁 자체를 위한 하나의 과정은 살아있었다. 천사를 믿는 인간들은 자신들의 절대적 선을 만들기 위해 그 궁극의 미를 추구하려 했다. 문제는 미의 추구에서 이것은 도덕적 관념, 즉 천사의 이름으로 타천사와 악마의 제거이지, 그 이후에 대해 전혀 생각한 바는 없었다. 오로지 그 하나를 위해서는 절대적 미를 추구하면 어떤 것도 희생을 감수해도 무방한 점이다.

 

과연 종교란 절대적 교조주의 즉 dogmatism으로 이루어진 폭력의 정식화인가? 아서 쾨슬러 소설인 <한낮의 어둠>에서 루바쇼프라는 주인공은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의 주역임에도 불구하고 넘버원에 의해 숙청된다. 그가 교도소에서 수감 중에 친구였던 이바노프와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에서 역대 유럽역사에서 기독교 종교를 가진 국가가 한번이라고 기독교의 진실한 진리로 대중을 통치했냐는 것에 의문에서 없었다 라는 것이다. 물론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다보면 더욱 확연한 것이 나온다. 15~17세기 사이에 유럽에선 마녀사냥이란 이름으로 50만 명에 가까운 죄 없는 자를 무참히 살해했다. 이것은 그 사회가 가진 하나의 정당성이고 정의이고, 진리인 종교의식이었다.

 

그래서 맨 처음 니체의 “신은 죽었다”에서 왜 신은 죽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종교라는 거룩한 이름아래 자행해온 폭력의 역사는 결국 신이 인간을 구원이 아니라 망친 것이다. 물론 정말 신은 인간을 망치지 않았다. 단지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그 추종자들의 맹신적인 전투적 메시아가 비극을 초래했다. 따지고 보면 키바나 아시아 모두 그런 추종자들에 의해 희생된 존재다. 키바는 타락천사를 증오하고, 거기에 매수된 타락한 신부 역시 증오했다. 그 중오로 얼굴이 성난 짐승처럼 일그러진 키바에겐 죽음이란 고통, 죽음 이후 악마로서 삶은 살아가고 있으나, 당시 같이 희생되어야 했던 친구들의 희생을 평생 혼자 안고 살아간 것이다.

 

바르퍼의 실험에서 키바는 모든 것을 잃었다. 꿈, 희망, 친구, 삶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잊지 않았고, 분노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복수를 숨겼으나, 그 숨겨진 분노 대신 그의 얼굴에 거짓된 미소로 위장했다. 하지만 그의 거짓된 미소 아래 감추어진 분노의 복수는 그의 모든 것을 삼켰다. 바르퍼와 싸우던 키바가 불리하자, 바르퍼는 매우 간악한 모습으로 키바에게 결정체를 던진다. 그 결정체는 엑스칼리버를 다루기 위해 키워진 아이들의 생명력을 닮은 도구였다. 그 결정체에 키바의 손이 가자, 주변에 키바의 친구들이 나타나고, 키바는 그들에게 축복과 삶에 대한 의지를 받는다.

 

악마인데도, 분명히 성가를 부르면 심한 고통이 오는데도, 키바는 유령처럼 나타난 친구들과 같이 성가를 부른다. 그 성가는 마치 너무 따뜻하고 아름다워서 세상이 모두 아름답게 보일 정도였다. 잇세이는 그 장관을 보면서 머리가 아플 것이란 생각 대신 오히려 기분이 좋고 매우 포근했다. 성가를 부르는 악마, 그리고 마검이 성검과 합쳐 성마검이 되었다. 악과 선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일까? 본문에 이런 리아스의 대화가 나오는데 그 문장이 매우 인상 깊다.

 

“그들 교회관계자들은 우리 악마를 사악한 존재라고 말하지만, 인간들의 악의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존재이지 않을까” 이 말은 과연 옳았다. 아시아가 수녀이면서도 악마가 된 원인은 아시아의 순수한 이타심을 부정하고,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은 인간이다. 키바와 그 친구들은 힘들고 고된 실험에서 신에 대한 찬양과 기도, 그리고 마음 속 깊이 우러나온 성가로 그 힘든 나날들을 견뎌왔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일까? 죽음, 비난, 절망, 우울, 저주 등등 인간들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악의를 받아들이고 뿜어야 했다.

 

작품 표지 타이틀에는 “우정과 열혈, 그리고 굉장한 번뇌로 선사하는 학원 러브코메디 배틀 판타지 망상 질주!” 라고 되어 있다. 물론 잇세이와 키바, 코네코의 우정은 소중했고, 잇세를 두고 리아스와 아시아, 거기에 아케노의 가세는 분명 하렘왕국의 주인으로 보이나, 잇세이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야한 것만 밝히나 그의 내면에는 리아스에 대한 존경과 동경심에서 야한 생각도 하고 그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어도 막상 그 순간이 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입장이고, 아시아에 대해서는 언제나 마음 속 깊이 죄를 지었다는 양심의 가책 아래 아시아에 대한 모든 것을 지켜주려 했었다.

 

따라서 야한 것은 나오되, 그의 야한 것은 하렘과 무관한 번뇌로 치부된다. 물론 야한 장면은 작가의 서비스라고 본다. 후기에 보면 “담당 편집자 H님, 매번 에로 어드바이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점점 야시시한 아이템이 떠오르는 에로에로한 작가가 되어갑니다. 수정 부분이 지적이 없었더라면 이 작품은 연령제한이 붙었을지도 모릅니다.” 라고 되어있다. 이번 3권의 제일 중요 포인트는 잇세이의 활약보다는 키바의 활약이고, 그 활약 뒤에는 어두운 선의 과거에 숨어있다. 폭력이 미화되어 그것이 하나의 정당성이 되어버리면 우리가 흔히 가장 멀리하고 싶은 “파시즘”이 된다. 파시즘이라면 가까운 일본의 대동아전쟁의 군국주의,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 히틀러와 같이 전쟁을 일으킨 무솔리니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파시시트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국민 역시 같았다는 점이다.

 

그런 절대적 맹목 앞에 아무리 악마라고 해도 잇세이의 어린 시절 친구인 시도 이리나는 잇세이가 인간이 아닌 이유로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제노비아 역시 과거의 [선배]인 키바와 전투를 벌였다. 악마이기 전에 인간이었고, 인간 시절 그 누구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으며 심지어 매우 좋은 인간성을 가진 그들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선악의 이분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고대 천사, 악마, 타천사의 전쟁에서 4대 마왕과 신이 모두 소멸했듯이 말이다. 붉은 용제가 잇세이에게 힘을 가진 용에겐 추종자와 도전자 모두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잇세이는 그런 것보단 오히려 여자를 밝히고, 그것보단 리아스에게 모든 것을 던지려 한다. 차라리 그런 도덕적 관념으로 이루어진 폭력보단 단순하고 솔직한 자신을 보임이 훨씬 인간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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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 후마니타스의 문학
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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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이란 문학소설은 예전에 모리스 메를로 퐁티라는 프랑스 현상학자가 저술한 <폭력과 휴머니즘>이란 도서에서 알았다. 메를로 퐁티의 <폭력과 휴머니즘>을 보고 있을 당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은 후였다. 메를로 퐁티가 그런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 이유는 바로 스탈린의 집권이다. 주인공 루바쇼프는 마치 1938년 정치적으로 암살당한 부하린을 연상하게 한다. 레닌과 더불어 10월 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많은 일들을 해온 사람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닌의 사후 러시아의 유명은 달리한다. 바로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갈등이다. 이 소설에서 보그로프라는 자가 매우 중요한 인상을 풍기는데, 그는 유명한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작품 1가지 제목과 동일한 “전함 포템킨”의 수병이었다. 그의 사형이 집행된 후 루바쇼프의 옆 동인 406호 옛날정부에 충실한 장교가 보그로프의 사망소식을 알려준다. ‘미하엘 보그로프, 전함 포템킨의 전직 선원, 동부 함대 함장, 첫 혁명 훈장 nt여자. 사형되다’

 

따지고 러시아혁명에서 보그로프나 루바쇼프나 모두 매우 중요한 인물이고, 넘버원이라고 불리는 사나이 옆에서 루바쇼프는 같이 사진도 찍었을 정도다. 아니 같이 식사와 대화도 하고 그의 업무를 받아 외교와 공작업무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의 총알이다. <한낮의 어둠>에서는 이런 스탈린에 의해 독재화되어버린 소비에트 연방의 현실을 아주 현학적인 질문으로서 비판한다. 작가인 아서 쾨슬러 역시 헝가리 출신 공산당원이였으나, 그가 활동하면서 그는 공산당을 아주 저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보그로프의 죽음과 관련 있다. 보그로프는 잠수한 건조에서 매우 크고 강력한 잠수한 1대를 선호했으나, 넘버원은 작은 잠수함 3대를 원했다. 결국 보그로프는 반역자로 몰리고, 갖은 고문과 허위날조로 고문당한 채 생을 마감한다. 그의 1대의 잠수함은 소비에트 연방의 일국사회주의가 아닌 연속적 혁명을 의미했고, 넘버원은 작은 잠수함 3대로 자국을 보호하기를 원했다. 결국 넘버원의 반대들은 모두 배신자 내지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채 목 뒤 언저리에 구멍을 내어버렸다.

 

그런 짓은 물론 루바쇼프도 조금 거들었다. 그도 좋은 동료와 전우들을 소비에트 연방 정치의도에 따라 숙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당을 위해서란 생각도 했으나, 한편으로 이미 돌아간 그 어른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넘버원에 대한 반항심도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이름의 가치는 매우 중요했다. 러시아혁명을 이끈 혁명영웅을 몇 번의 조작으로 배신자라는 낙을 주었기 때문이다. 영웅들을 사라지게 하는 이유는 그 영웅들이 결국 넘버원에게 치명적인 방해꾼으로 되기 때문이다. 루바쇼프가 그 넘버원의 크고 넓은 엉덩이를 그냥 의자에 앉았다는 말처럼 혁명 후 21년이 지난 1938년은 혁명이란 그저 역사적 사실보단 신화적인 존재로서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계속 혹독하게 고문하던 클레트킨을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루바쇼프는 생각했다. 혁명은 분명 역사적 진보이나, 도리어 역으로 퇴행했다. 혁명 후에 나온 사람들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지혜의 인간이 아니라 네안데르탈인이란 무지의 동물이었다. 바로 넘버원에겐 호모 사피엔스는 필요 없고 비판적 생각 없이 살아가는 네안데르탈인만 필요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자코뱅당의 영웅적 혁명가인 당통이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듯이 과거를 청산하던 자들은 모두 청산당한 것이다.

 

이런 굴레들을 왜 오는가? 이 책을 보면서 인간에게 언제나 인류를 위한 희생이 필요했다. 국가라는 체계와 사회라는 조직도 모든 것이 희생이 필요했다. 존재하기 위한 존재불가함을 지정한다는 아이러니에서 말이다. 이 책에서 이런 비슷무리한 문구가 나온다. 죽음을 없애기 위해 죽어야 하고, 양들이 죽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양을 죽이야 한다. 결국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목표에서 폭력으로 이용한 폭력제어라는 하나의 공식이 성립된다. 메를로 퐁티가 이 소설을 인용한 것도 다 폭력으로 폭력을 제어함은 결국 폭력이 되는 아이러니가 있다는 점을 밝혔다.

 

혁명은 성공했다. 하지만 혁명은 실패했다. 당시 대중들은 러시아 차르체제에 지치고, 그들을 몰아내도 케렌스키와 백위군이 존재했다. 이 모두가 레닌을 중심으로 한 적위군이 활약하였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레닌의 정부는 가난과 빈곤으로부터 러시아를 벗어나게 하지 않았다. 조직의 구성만 교체될 뿐, 그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미 성립된 것이 있기에 그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 이미 모든 것을 존재하고 이루어짐에 대한 자기착각에서 말이다.

 

이 책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든 혁명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추구하나 모두 실패한다. 대중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한 것이다. 이 책의 후기에 번역한 문광훈 교수가 에릭 홈스봄의 <극단의 시대>에서 발췌한 글이 있다. 나는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 대신 <폭력의 시대>를 인용했다. 전자는 20세기를 다룬 도서라면, 후자는 21세기를 다룬 도서다. 그러나 폭력과 테러리즘에 대한 근원적인 영역은 일치하는 점은 많다.

 

“무제한적 폭력을 부르는 더 위험한 요인이 있다. 1914년 이후 국가 간 내부 세력 간의 분쟁 둘 다를 지배한 이념적 확신이다. 그것은 자신을 선(善), 상대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명분은 너무나 정당하고 상대의 명분은 너무도 형편없기 때문에, 패배를 면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어떤 것도 동원해야 하고, 동원되는 모든 수단은 정당하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그런 확신을 가지면 정부군이나 반군 모두 어떤 야만적 행동도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 글은 어느 나라에 대한 내전에 대한 이야기다. 정부군이나 반군이나 따지고 보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극단적 대치이다. 그렇다면 <한낮의 어둠>에서 말하는 폭력은 왜 다시 돌아오는가? 처음 루바쇼프는 소비에트 연방국가 사람이라면 모두 알 만한 사람이나, 마지막 장의 문법적 허구에서는 그의 공개재판을 두고 신문기사의 내용이 인상 깊다. 많은 대중들이 그에게 야유와 분노를 표출하는 점을 말이다. 결국 대중들은 누가 옳고 그른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 자신들이 옳기를 만다는 존재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존재들도 역시 스탈린의 광기어린 폭정에 죽어갔다. 어제 나는 타인을 쏘아 죽였으나, 이제 그 총이 나에게 돌아온다. 루바쇼프도 그렇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운 것은 오로지 자신의 가치라는 생애의 허무와 부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젊은 세대의 기수로 보이는 루바쇼프의 네안데르탈인 글레트킨은 사실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글레트킨은 네안데르탈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것을 알았고, 루바쇼프는 글레트킨과 지금의 대중에게 사라져야할 존재임을 확인한다.

 

“글레트킨과 새 네안데르탈인들은 머리에 번호 적힌 세대의 과업을 완결했을 뿐이라고 루바쇼프는 수백 번 홀로 되풀이했다. 동일한 원칙이 그들 입에서 말해질 때 그리고 비인간적으로 변하는 것은 순전히 시대 풍조 때문이었다. 이바노프가 똑같은 주장을 할 때 그의 목소리에는 사라져 버린 세계를 잊지 않음으로써 과거에 남겨진 희미한 빛깔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사람은 자기의 어린 시절을 부정할 수 있어도 그것을 지울 수는 없다. 이바노프는 최후까지 자신의 자기를 질질 끌고 다녔다. 그래서 그가 하는 무슨 말에나 장난기 어린 우주의 빛이 서려 있었다. 글레트킨이 그를 두고 냉소주의자라고 부른 이유는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글레트킨의 무리에게는 지워야 할 어떤 것도 없었다. 그들은 어떤 과거도 안 가졌기 때문에 과거를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탯줄도 없이, 경쾌함도 없이, 우울도 없이 태어났다.”

 

즉, 러시아의 새로운 대중들에겐 혁명이란 그저 이름만 들어본 존재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당시의 열정과 죽음을 넘나든 사선을 그들에겐 낯선 이름이다. 루바쇼프의 심문관이나 이내 총살형을 당한 이바노프는 혁명의 아픔으로 한 쪽 다리를 잃었다. 그에겐 다리란 하나의 고통이고 상징이다. 과거에 지닌 그 모든 것들이었다. 이 책에서 혁명에 직접 참여한 위원들은 보통 학자나 교수보다 더 학문의 영역이 높았다. 그러나 이제 혁명이 완료되자 이들은 그저 구세대로 될 뿐이다. 과거의 단절은 결국 일어나고, 그것은 러시아의 네안데르탈인이란 신인류를 탄생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넘버원이 있었다. 자신의 적도 적으로 죽이고, 자신의 친구도 친구로 죽이고, 그 친구를 죽인 친구마저 그는 죽였다. 그 죽음에서 루바쇼프는 자신의 죽음마저 그렇게 숙청되는 사실마저 하나의 당위성으로 받아들인다. 역사라는 인류라는 거대한 이름에 모든 것을 바친 그에게 고문이란 통하지 않았다. 클레트킨은 잠을 재우지 못하거나 눈부신 형광등을 이용해 정신적 고문을 가했지, 무력으로 그를 굴복하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무력에 의해 굴복하지 않은 채 죽으면 그는 하나의 순교자가 되기 때문이다. 루바쇼프에게 거짓 범죄를 씌운 언청이인 키퍼의 아들은 과도한 폭력으로 신념을 잃은 지가 오래다. 루바쇼프의 만남과 그의 발언을 증언할 때 그의 기억력은 오류를 나타냈다.

 

루바쇼프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어떤 당의 가치나 혁명에 대한 위업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것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을 주는 것이다. 그가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자신이 살아온 흔적이다. 구제해야할 대중들을 구제해도 돌아온 것은 되돌이표라는 것을 루바쇼프는 알고 있지만, 적어도 그것에 40년 동안의 인생마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지금의 넘버원의 계략이었다. 그 부정을 지우지 못하기에 루바쇼프는 넘버원의 암살계획에 거짓서명을 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2방의 권총사격이다. 그러나 그 죽음을 부러워한 이도 있다.

 

옆방 402호의 장교는 앞으로 5,000일이 넘는 기간을 이 감옥에서 보낸다고 했다. 20년 동안 감옥살이에서 앞이 보이지 않을 바에 차라리 죽음이란 해방이 필요할지 모른다. 인간이 제일 중요한 게 생명이나, 여기선 생명보단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성이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아왔냐는 것이다. 그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게 어긋나도 그것을 망가뜨리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버린다는 의미이니, 인류의 아이러니는 그렇게도 흘러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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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한 혁명
레온 뜨로츠키 지음, 김성훈 옮김 / 갈무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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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관료집단의 인격화이다. 실제로 관료집단은 그이 정치적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이 문장은 1936년 레온 트로츠키가 저술한 “배반당한 혁명”에 나온 문구다. 트로츠키는 평생을 파시즘에 대항하여 싸웠고, 이긴 적도 있으나 결국 그 파시즘에 의해 죽고 만다. 그의 이름은 조지 오웰의 <1984>의 골드스타인이나 혹은 <동물농장>의 스노볼처럼 모든 평화를 깨는 원흉이자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역사적으로 패배라고 판단했을지 모르나, 21세기에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경쟁에선 결국 트로츠키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 쪽은 1940년 8월 피켈에 의해 살해당했고, 한쪽은 1953년 3월에 나이가 들어 죽었다. 그 전자의 죽음은 당연히 스탈린이 고용한 자객에 의해서이다. 프랑스 최고배우인 알랑 드롱이 출연한 영화 <트로츠키 암살사건>에서 나오듯이 트로츠키의 죽음은 매우 준비된 죽음이란 점이다. 트로츠키가 죽음으로서 스탈린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고, 또한 스탈린의 죽음은 한국의 동족잔상비극인 625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 2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큰 여파를 줄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스탈린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트로츠키의 존재는 알 수 없다. 그 만큼 트로츠키의 영향력은 없어 보이나, 그를 진정으로 알아본다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줄 알 것이다. 그것은 <1984>에서 윈스턴 스미스가 오브라이언과 대화하면서 빅 브라더가 두려워할만한 골드스타인의 저작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그 책은 바로 <배반당한 혁명>이다. 이 책이 왜 이렇게 무서운 도서인가?

 

일단 <배반당한 혁명>의 저술목적은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차르체제에 불만을 품어 혁명이 일어난다. 전자의 원인은 러일전쟁이고, 후자의 경우는 1차 세계대전이다. 전쟁과 혁명이 연결되는 이유는 전쟁의 모든 폐해를 지도상층부가 아니라 하층서민들이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 롤즈가 <만민법>에서 주장하듯이 전쟁의 모든 책임은 정치가와 장교에게 있어야 하며, 사병에게 그 대가를 물으면 안되는 점이다. 그 이유는 전쟁의 발단은 정치가와 장교들에 의해서고 사병에겐 전쟁에 대한 개전권이나 응전권이 없다.

 

그들에게 존재하는 것은 단순히 전쟁에 참가하여 적에 향하여 총알을 날릴 수 있는 권한이다. 즉 사람을 직접 앞에서 죽이거나 혹은 죽임을 당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인 것이다. 전쟁은 바로 누군가의 자유를 선사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자유를 희생하여 자신들만의 자유를 실현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유를 위해 타국에 지원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 자유를 짓밟는 행위가 되었다. 멀쩡한 국가에 침공해 그 나라의 이념적인 부분과 문화적인 영역에 대립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전쟁이야말로 진정한 통치권을 확실히 굳힐 제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이 필요할 때도 있다. 자기국가에 대한 주권확립을 위해 외국의 침입이나 불법적인 군사쿠데타에 대한 위협에서 가능하다. 트로츠키의 러시아혁명에서는 차르체제의 해체와 동시에 차르체제 아래 호사를 누린 백위군들이 외국세력의 지원을 받고 다시 러시아 내전을 벌일 때, 그 전쟁은 진실로 러시아 국민을 위해 해야 할 과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부터 문제였다. 트로츠키는 군대라는 조직이 결국 특권층을 형성하게 될 것이란 점이다. 그런다고 전쟁의 위기에 군대가 상실되면 안 된다.

 

단지 군대란 계급을 나누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주권확립을 위한 체계라는 점이다. 전쟁에서 가장 큰 희생양은 당시 유럽에서는 농민과 노동자다. 이들에겐 지휘권이 없으면 병사로서 그저 뛰어들 뿐이다. 1917년 2월 혁명의 동기는 바로 1차 세계대전의 문제다. 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은 무능한 지휘관 덕분으로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수백만 명이나 희생당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전쟁물자 동원이란 명목아래 거리에 식빵을 구하기 위해 여성들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시골의 경우 문맹과 제도의 혜택마저 박탈당했다. 특히 식량원조로 곡식과 가축을 약탈당하고, 남자들마저 징집되니 불만이 쌓이는 것은 당연하다.

 

혁명의 원인은 바로 애국심이 아니라 조국에 대한 증오에서 시작된다는 레닌의 말처럼, 정치적인 능력과 판단력은 국민들로 하여금 어떤 사태가 이어지는지 보여주는 게 러시아 혁명이다. 그런데 그 혁명에서 레닌은 더 어려운 과제를 맡았다. 혁명 이전과 이후의 러시아는 여전히 가난하고 척박하며, 외국에 의한 침략에 불안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더라도 서방국가에서 정치적 불안감과 파시즘은 계속 지속되는 점이다. 그런 와중 레닌이 1924년 뇌일혈로 사망하고, 레닌이 혁명 실행할 러시아 재건계획은 위기를 맞이했다.

 

레닌 사후 스탈린은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를 두고 트로츠키와 경쟁을 했다. 트로츠키가 처음 경제성장정책으로 시작하려한 공업화는 농민의 반대가 일어나 실패했고, 이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농민을 억압하는 자로 몰고, 농민 및 자신들의 추종자들의 도움을 받아 트로츠키를 추방해버렸다. 웃긴 점은 트로츠키가 추방 후에 스탈린이 추진한 경제정책에서는 분명히 공업화를 추구했고, 특히 중공업을 추구했다. 문제는 공업화 실행에선 농민이 희생되어야 하고, 처음 트로츠키를 내칠 때 동조하는 척하다가 이후 쿨라크라는 러시아부농의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처음에는 민주적인 정치를 위해 강제부과는 반대한 그가 쿨라크의 모든 것을 빼앗고, 90%를 강제노동에 보낸 것이다.

 

이들 대부분 노역으로 죽거나 아니면 끝없이 시달려야 했다. 특히 1936년~1938년 사이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수많은 러시아인들과 외국인까지 죽였다. 스탈린이 진정한 추구한 정치제는 바로 그런 관료주의였다. 하지만 스탈린의 경우 조금 달랐다. 자신의 숙적은 제거하는데, 스탈린주의 일부를 이용했고, 나중에 그들까지 처분했다. 또한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사지로 몰아넣고, 자신이 진정한 레닌의 후계자라고 선언한다.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후 20세기에 빼놓을 수 없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고, 그는 러시아 문체도 제대로 적지 못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어느 시인에 대해 찬사를 보내자, 소비에트 모든 책에 그 시인에 대한 내용이 실렸다고 한다. 단지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반응하는 저 독재자의 세계는 마르크스의 교훈은 상관없었다. 그저 스탈린이 추구한 민주적인 소비에트는 관료주의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평등이란 가난과 굶주림이었다. 혹은 평등하게 비밀경찰 손에 암살되든지 말이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보다시피 그의 숙청은 모든 것을 트로츠키와 연결시킨다. 트로츠키의 이름과 연결시키면 그 어떤 것도 죽음의 낫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의 악랄한 서적 본문에 소개된다. “1936년 1월에 개최된 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인민위원회 의장 몰로토프는 선언했다. ‘소련 경제는 사회주의화되었다(박수).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계급의 일소라는 문제를 해결했다(박수). 그러나 과거부터 우리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닌 분자들인 구지배계급들의 잔존세력들이 남아있다. 더욱이 집단농장의 농부, 국가공무원, 심지어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가끔 피라미 투기꾼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은 집단적 재산과 국가재산을 뜯어먹는 사기꾼, 소비에트 연방에 해악을 끼치는 수다쟁이 등으로 불린다. 이 결과 독재체계는 더욱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엥겔스의 견해와는 반대로 노동자국가는 잠들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더욱더 경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엥겔스의 견해처럼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는 엥겔스였다. 당시 스탈린이 지시한 마르크스주의 연구는 완전히 오도되었고, 심지어 본래 취지도 어긋난다. 마르크스주의자인 레닌조차도 노동자의 권위를 위해 볼셰비키에 교양 있는 노동자를 영입하려 했지만, 스탈린 집권 시기에 점차 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만 살아야 했고,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를 감시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누가 더 사기꾼이고, 누가 잔존세력이 되었는지는 자신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생각해보면 답은 이미 나왔다.

 

레닌이 한참 정치에 신경 쓰던 시기에 그는 이런 의견을 내놓았는데, 매우 명확했다. “(1) 권력층의 특권, 지위, 전용상점 등이 불러오는 부패, (2) 舊 귀족계급 및 부르주아지의 잔존세력과 권력층의 화해, (3) 신경제정책의 부패적 요소가 끼치는 영향력, (4) 부르주아지의 도덕과 이데올로기가 가하는 유혹 등 해악적 요인들로부터 당과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이 당 지도부의 임무였다.”

 

심지어 레닌은 제3인터내셔널인 코민테른 창시할 때, 국내인 소비에트 연방뿐만 아니라 세계제국주의에 침략 받은 식민지국가 및 제3세계까지 지원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소비에트 연방에서 코민테른 의회가 열렸을 때 한국 독립 운동하던 사람들이 실제로 레닌과 만났고, 그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의 공포정치로 인해 그들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스탈린은 다른 국가의 독립이나 자주권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일국사회주의로 향하고, 코민테른은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허수아비로 변질된 것이다.

 

그 덕분에 마르크스주의가 심하게 오염될 뻔했으나, 트로츠키의 활동으로 오명을 피했다고 한다. 역설적이지만, 트로츠키는 미국하고의 정치적인 관계가 불편했으나, 그의 저서 모두가 미국 하버드대학교 트로츠키 연구소로 기증되었다고 한다. 또는 미국의 철학자 겸 교육자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날린 존 듀이의 법정에서 진술은 큰 여파를 남기고, 그가 이때까지 행해온 정치적 투쟁이 무죄로 판명 나게 했으며, 영국의 철학자 겸 수학자인 버트런드 러셀과 지식인으로서 편지를 주고받은 것에서 그의 정치적인 안목은 매우 뛰어난 것이다.

 

<배반당한 혁명>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만 향한 비판만 날리지 않았다. 당시 유럽과 아시아까지 예측했으며, 스탈린이 독일의 히틀러와 동맹할 것이란 예언은 적중했다.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은 이미 소비에트연방은 더 이상 레닌이 남긴 유산을 남기지 않음을 공식적으로 증명했다. 그런 예언을 날린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이야말로 스탈린에게 눈에 가시고, 그 책을 만든 트로츠키가 최고의 적이란 점이다. 그 정도로 이 책에 담긴 정치적, 사회적, 외교적 분석은 매우 탁월하다. 정치라는 것은 결국 역사적 사실에서 사회과학적인 분석과 철학적인 사유로 통해 분석과 대안을 찾아간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명하기를 관념론과 유물론에서 끊임없는 대립으로 통해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생기는 것이고, 그 철학은 철학으로서 생산되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마르크스주의는 거짓이 아닌 진실을 추구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한다. 형이상학적 인식에서 인간은 늘 자신에게 쌓인 관념에 따라간다. 물론 인간이 살아온 환경이나 배경에서 그런 한계점은 이해하나, 그것을 깨닫고 현실을 살아가야할 존재가 인간이다. 역사란 왜 배우고 이해해야 하는가?

 

지나간 일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시간이란 존재를 비가역적 존재로 본다. 이론적으로 평행이론이라던지 혹은 문학,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에 존재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요소로 볼 수 있겠으나, 현실에선 증명되지 않으면 결국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비슷한 일들은 지역, 인종, 상황, 시간은 다르더라도 비슷하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왜 트로츠키가 테르미도르 반동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자코뱅당이 왕당파를 대항해 자유를 쟁취했다고 하나, 오히려 당통과 롤랑부인은 단두대 아래 이슬로 사라진 아이러니를 보인다. 그 후에 나타난 보나파르트적인 정치체는 어떠한가? 트로츠키의 추방은 프랑스혁명에서 보인 테르미도르 반동이란 새로운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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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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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라이언이 윈스턴 스미스에게 준 “그 책”을 나는 지금 읽으려는 참이다. 문학소설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제목도 없고, 표지도 없지만, 그것이 오세아니아국가에게 매우 치명적인 내용이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책은 오세아니아의 빅 브라더의 숙적인 골드스타인이 만든 서적이 아니라, 오브라이언이 직접 만든 도서였다. 그는 똑똑하고 치밀한 내부당원이었고, 그의 함정에 말려든 윈스턴은 외부당원으로 오세아니아 관료였다.

 

사실 골드스타인이 만들었다고 하는 그 책은 다른 도서로 통해 알아본 결과 레온 트로츠키의 <배반당한혁명>이란 고전이다. 1936년 트로츠키가 망명 도중에 저술한 것으로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한 것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을 가한 책이다. 당시로는 모두에게 멸시받던 그였지만, 트로츠키가 죽고, 스탈린이 죽고, 어느덧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후로는 그의 서적과 사상은 새로운 연구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그 책은 비록 오브라이언이 만든 것이나, 오브라이언은 그 세계 자체가 틀린 것도 알고 있었으며, 그게 잘못된 것을 알아도 오히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완벽한 감시망을 갖춘 비밀경찰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세아니아의 영토는 대부분 유럽과 인접한 것이고, 이 국가는 동아시아와 전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아사이와 말고도 유라시아라는 국가가 있었다. 이 세계는 단 3가지 국가만이 존재했다.

 

따라서 1984의 세계는 전쟁이 항상 일어나고 있는데, 국민들은 정말 전쟁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정확한 정보를 모른 채 텔레스크린으로 비추어지는 영상으로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판단한다. 이 텔레스크린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마 지금으로 따지자면 컴퓨터로 이용한 화상전화기를 보는 기분이다.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 것에 모자라 이쪽이 아닌 저쪽에서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이른바 aura라는 것을 뛰어넘은 것이 되어 버렸다. aura는 누군가 자신을 촬영한 영상물을 계속 복제하여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면 그 상대방도 같이 자신의 전달메세지에 동조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미 1984의 세계는 aura의 관념을 넘어선 극사실의 결정체였다. 문제는 그 현실세계는 모든 것이 감시와 미행이었다. 주인공 스미스는 그런 통제된 공간에 왠지 모를 의문과 박탈감을 시달렸다. 그 의문은 과연 빅 브라더는 살아있을까? 사람들은 보이지 않은 존재에 대해 영상을 시청하며 누가 그 대상이 되든지 증오의 분출은 막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증오의 대상 1위는 당연히 골드스타인이다. 책에서 보면 스미스가 본 그의 인상은 “그 유태인의 얼굴을 야위었는데, 후광처럼 넘실거리는 하얀 머리카락에 가느다란 염소수염까지 기르고 있어서 쾌 지혜롭게 보였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선천적으로 비열한 듯한 일상을 풍겼다. 게다가 길쭉한 코끝에다 안경을 걸친 모습에는 노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우매함마저 서려 있었고, 얼굴과 목소리는 영락없이 염소를 닮아 있었다. 골드스타인은 여전히 당의 강령에 독설을 퍼붓고 있었는데, 내용이 지나치게 과정 되고 신랄해서 어린아이도 그 속내는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미스가 상주하는 오세아니아는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이나, 적어도 골드스타인의 인상은 영락없는 트로츠키였다. 그가 <1984>를 발표하기 전에 명작소설인 <동물농장>을 내놓았다. 그런 다음에 <1984>를 내놓았으니,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조지 오웰 입장에서 스페인 내전의 아픔과 1940년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살해된 것에서 트로츠키의 무고함과 비참함을 다시 담은 느낌이었다.

 

아무튼 조지 오웰이 그려간 미래의 정보사회는 유토피아라는 기술의 혜택이 인간에게 축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술 그 자체가 인간을 억압하고 통제하였다, 전자동 통제방식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에서 만약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하게 될 경우 오세아니아 당국에 의해 그의 존재는 없어진다. 현재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마저 사라지게 되는 점이다. 새로운 신어를 개발 중인 사임은 자신의 능력과 영민함에 집착하게 되어 결국 사라지게 된다. 문제는 같은 사무실에 존재해도 그 사람이 없어지는 자체를 알 수 없다.

 

아니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런 기본적인 인식조차도 불감증이었다.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하는 것은 이제 서로를 망각하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그런 심각한 증세는 윈스턴 옆집에 살던 파슨즈의 일화다. 그는 자기 집에 어린 아이가 2사람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열렬한 빅 브라더의 지지자다. 어린 아이인데도 수상한자가 있으면 미행하여 고발하고, 심지어 아버지가 잠꼬대를 열쇠구멍으로 들어 감시국에 고발할 정도다. 빅 브라더에 대한 불만을 누구 입에서 나오면 바로 잡아가는 공포정치인 것이다.

 

이런 일들은 소설이라고 하나, 마치 주변에 있었던 일처럼 보인다. 한국이든 혹은 모든 대부분 나라이든 국가가 권력을 지나치게 독점하여 그것이 하나의 이권으로 변질될 경우 국민에 대해 감시와 처벌을 내린다. 몰래 도청하고 미행하여 그들을 납치 후에 감금, 폭행, 성추행, 살인 등과 같은 행위를 아무 망설임 없이 실행한다. 최근에 민간인 불법사찰에서 국민들에게 충격을 준 일들도 있었다.

 

예전에 아르망 마틀라르의 <감시의 시대>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개인정보가 적법한 절차나 보호도 없이 노출되고, 거리의 감시카메라는 개인의 사생활마저 침해한다.

범죄를 방지하고 예방해야할 국가조직이 오히려 범죄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이 소설은 1949년에 발표했으나, 지금은 그렇게 낯설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중간에 빅 브라더와 빅 브라더가 행방도 모르면서 오세아니아 슬로건 3가지가 언제나 사람들에게 강요하듯이 외치고 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전쟁으로 평화를 지키고, 자유를 봉쇄하는 것이고, 지식을 없애는 것이야 말로 강한 것이라고 한다면 자유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조지 오웰이 살거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던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이 소설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최헌 교수의 <부시맨과 레비 스토르스>에서 부천경찰서사건을 예로 든 것이다. 그것은 원래 사건의 본질을 감추고 단순히 경찰서에 있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경찰서에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성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당시 권인숙이란 여성에 대해 2차례나 성폭행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보통 여성들도 성폭행 사건을 말하기가 그러하나 25년 전이라면 더 심각했다. 당시 신문사들은 여성의 성적인 부분을 이용하여 경찰과 국가를 농락하는 행위라고 힐난을 했다. 하지만 문귀동이란 경찰관은 불법적으로 성폭행한 것이 사실이었고, 당국은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권인숙 성폭행사건을 언어순화한다는 명목으로 부천경찰서사건으로 바꾸었다. 조지 오웰이 말한 <1984>의 신어는 바로 그런 것과 같은 목적을 담은 통제력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단어만 말하게 하여 사고와 관념을 멈추게 한다는 것은 곧 생각할 수 있는 범주가 짧고, 정해진 것만 실행하는 인간이 되는 점이다.

 

인간을 통제하는데 있어서 언어의 통제는 막대한 것이다. 언어는 지식을 생산하고, 지식은 다시 언어를 생산하고, 언어는 권력을 생산하기도 한다. 결국 언어, 지식, 권력을 모두 통제하여 일부 지배특권에게 부여한다는 점에서 독재국가의 모든 정당성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독재조차도 그것이 정말 독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오세아니아의 그런 과격한 통제와 폭력은 윈스터인 오브라이언의 계략에 고문당한 모습에서 보다시피, 2+2는 무엇이냐는 것에서 우리는 분명 4라고 하나, 오브라이언은 5라고 한다.

 

윈스턴이 4라고 말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 내내 심각한 고문을 가한다. 그의 고문의 마지막에선 윈스턴의 몸무게는 25㎏라고 말해준다. 머리는 모두 빠지고, 치아는 모두 너덜너덜하며, 등을 휘었으며, 온몸이 멍과 상처로 쌓인 채 살아있는 인간보단 언제 죽을지 모를 위기에 있었다. 윈스턴은 자기가 죽을 운명이라 생각했으나, 오브라이언은 죽이지 않았다. 죽인다는 사실은 죽은 사람이 그 사회에 대한 불만과 배반심이 있다는 점이고, 그의 이단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통해 그 사회의 현존성에 문제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과거 프랑스의 앙상 레짐을 보면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가 존재한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왕을 시해하려던 남자는 왕과 비슷한 위치로서 그 형을 받는다. 온갖 고문으로 천천히 죽이는 것이다. 그는 생체적으로 인간이나 지위적으로 왕과 대등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오브라이언은 그렇게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앙상 레짐의 시대는 사형수가 부당함을 주장하거나 혹은 그 느낌을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어느 사형수의 사형집행에서는 군중들이 몰려와서 사형을 방해하고, 사형수를 구출했다고 한다.

 

<1984> 세계는 그런 게 통용되지 않았다. 죽을 것이든 죽지 않을 것이든 모든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하나의 양심고백으로 통해 그 사회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죽어가야 했던 것이다. 즉 죽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았고, 차라리 죽음을 요구하게 만든 것이다. 심각한 고문은 그 사람을 억지로 없는 거짓말로 통해 진실인양 밝히는 것이 아니라 고문을 가하는 그 자체가 고문의 이유다. 폭력이란 이름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양심이 있든지 말든지 말이다. 윈스터은 자신과 동물처럼 성행위를 나눈 줄리아를 폭로하면서 그녀와의 만남과 성행위, 대화까지 모두 오브라이언에게 털어놓는다.

 

마지막에 그가 제일 싫어하는 쥐가 나올 때 그는 자신의 몸을 쥐가 먹는 것보다 줄리아가 대신 먹히기를 바란 것이다. 죽음보다 무서운 그 공포로서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을 무력화한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랑의 배신은 줄리아 역시 그렇다. 다시 재회한 줄리아의 모습을 본 윈스턴은 아름답고 건강한 그녀가 아니라 다른 느낌인 그녀였다. 그녀를 품에 안고 성행위를 하려고 해보았으나, 그것마저 되지 않았다. 오세아니아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것을 금지했다. 그것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통제에 큰 위험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최소한으로 성행위를 해야 하고, 그것을 하는 순간 불쾌한 존재고, 게다가 아이들은 여자가 낳는 것이 아니라 인공 수정한 시험관에서 나와야 하는 점이다. 만약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고 애정이 생기면 가족마저 고발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들끼리 서로 통제하고 감시하는 세계에서 디스토피아의 극치를 보여주게 된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그 행위를 속이려고 하는 것까지 눈치 채고, 가장 소름 돋는 부분은 원스턴이 비밀일기를 적은 후에 누가 볼까봐 석회가루로 표시했는데, 그 석회가루까지 완벽하게 복원한 것이다. 게다가 그 사진까지 찍어 윈스턴에게 보여주었으니, 더 이상의 희망은 없어 보인다.

 

오세아니아의 국가 체계는 <1984>를 읽은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그래도 너무 뻔뻔하고도 어이없는 아이러니의 극치를 보여준다. “평화부는 전쟁을, 진리부는 거짓말을, 애정부는 고문을, 풍요부는 굶주림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은 우연한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의미와 위선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신중한 ‘이중사고’에서 나온 행위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이런 모순들을 조화시킴으로써만 영원히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위하는 것이 오히려 자유를 억압하고, 진리를 찾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며, 사랑하는 것이 오직 자신들의 사랑만 존재하고 다른 영역의 존재들은 모두 배척되고 있으며, 풍요롭다고 말하는 사회는 역으로 가난과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오로지 TV나 선전물에서만 아이러니 겉만 완전하다. <1984>에서는 개인의 사유화를 인정하지 않으나, 국가의 공유화에서 그 권력관료들이 그 물질적 혜택을 당연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층민들은 여전히 착취로 당하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1984>만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또 어디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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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이원기 옮김, 김동택 해제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폭력의 시대>의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중요한 키워드를 잘 찾아내었다. <홉스봄이 다루는 정치적 주제들은 “21세기의 전쟁과 평화”, “세계 제국들의 과거와 미래”, “민족주의의 성격과 변화”, “자유민주주의 앞날”, “정치적 폭력과 테러이다. 에릭 홉스봄이 이 서적을 내 놓을 시기는 20세기가 물러나고 새로운 21세기의 도래이다. 그 도래의 결정은 후쿠야마가 선언한 자유주의 승리다. 1990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갈림길에서 자유주의가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것을 돌아보면 단지 그것은 시장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의 대립에서 전자가 이긴 셈이다. 스탈린이 집권한 일국사회주의 파시스트 정권에게 처음부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만든 공산당 선언과는 완전히 상반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어째든 그런 역사적, 정치적 흐름을 어떻게 되었든 현실의 모습에서 분명 (시장)자유주의가 승리한 것은 분명하고, 더 이상의 냉전으로 인한 불안감을 없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재앙의 도래였다. 세계적으로나 혹은 국내 상황적으로나 인간들은 모두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힘겨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1세기에 냉전의 종식은 전쟁이란 큰 위기감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다른 전쟁에 부딪히고, 그것이 또 다른 경제와 사회적 불안으로 연결된다. 전쟁이 일어나면 기본적으로 난민과 이민이 발생하고, 경제적으로 약한 나라의 국민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한 국가로 넘어온다. 그러면서 국가는 단일민족의 모임체계가 아니라 여러 민족들이 같이 존재해야 하는 다민족 체계로 들어선 것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도 외국인 출신자가 국회의원이 되듯이 외국인이라도 다른 나라에서 한 사람의 정치적 행위와 참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선진국에서 정치적 참여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프랑스에선 어느 높은 관료가 한국인이란 사실만으로 이미 전 세계의 국가는 그 나라의 민족만으로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만큼 타 민족과의 교류가 늘어나는 만큼 충돌도 늘어난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체의 대한 권리>에서 프랑스 우익정부의 외국인 불법체류자에 대한 행위는 윤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제로 비행기에 태워 추방하는 당시, 비행기 탑승객 중에 곧 출산을 앞둔 임산부가 있다는 점이었다. 상대방이 누구든 생명이 위급한 사람에 대해 비인격적 대우는 국법을 둘째 치고 과연 제네바에서 의결한 국제법도 따르고 있을까라는 점이다. 하지만 대부분 전쟁이나 테러행위에서 보듯이 현대사회의 전쟁과 테러는 더 이상의 위대함이나 숭고함 따위는 없다. 단지 죽이기 위해 다시 태어난 전쟁도구이고, 그 전쟁도구는 원래 인간이었던 자이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점에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 따위는 없으며, 오로지 이상주의적 관념에 따라 움직인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숭고한 완장을 차고 있으나, 그들의 행위란 불법적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포로를 잔인하게 고문하는 것이다. 본래 포로를 잡아도 즉결처분 내지 비인격적 고문을 가하면 안 된다. 그들의 행위는 오로지 포로에게는 상대진영의 정보를, 그리고 민간인의 학살에는 심리적인 압박을 가한다. 어차피 상대국가에 침공하여 어느 민가에 들어갈 경우 그 민간인들이 결국 자신이 싸워야 할 대상과 같은 민족이기에 무차별적 폭력이 가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전반만 하더라도 군인들은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했다.

 

20세기 초반까지 살해의 대상은 왕, 정치관료, 고급장교 등과 같은 정치, 외교, 군사적으로 높은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대상은 점차 민간인이 되었고, 전쟁은 목적과 관계없이 수단에 의존하는 테러 그 자체로 변한 것이다. 그 테러에서 폭력은 오히려 자신들만의 이상을 추구하는 성전으로 변모했다. 안 그렇다면 자살폭탄테러를 계속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슬람 과격무장단체들은 자살폭탄테러로서 많은 불안감을 조성한다. 문제는 그 대상이 점차 군대나 정치조직이 아닌 민간인이란 사실이 분명하고, 거리와 버스 안에서 폭탄테러로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하는 점이다.

 

이런 문제들은 다 근본이 있기 마련이다. 왜 테러를 하느냐이다. 정말 테러를 일으키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에서 우리는 국제적으로 보이는 힘의 대결이다. 이 힘의 대결은 자신들만의 도덕적 관념에 빠진 것에서 문제시 된다. 가령 자신의 인종적이나 민족적 우위로서 다른 민족들을 침공하던 독일이나 일본은 결국 파시스트로서 낙인찍힌 채 2차 세계대전에 패망했다. 하지만 문화적 도덕적인 이유로 싸우는 것은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어떤 날조와 위조로 통한 정보조작으로 모든 원인제공을 상대편에게 넘겨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폭력의 정신은 그 폭력을 하나의 미()로서 만들어 버린다. 이 책에서 언급하기를 무제한적 폭력을 부르는 더 위험한 요인이 있다. 1914년 이후 국가 간 내부 세력 간의 분쟁 둘 다를 지배한 이념적 확신이다. 그것은 자신을 선(),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명분은 너무나 정당하고 상대의 명분은 너무도 형편없기 때문에, 패배를 면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어떤 것도 동원해야 하고, 동원되는 모든 수단은 정당하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그런 확신을 가지면 정부군이나 반군 모두 어떤 야만적 행동도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비단 그것은 내전을 다루는 부분에서 반군과 정부군의 폭력행위만을 꼬집는 말투가 아니다. 20세기부터 시작된 전쟁의 공포부터 시작하여 내부 치안단속이라는 정치적 압박도 마찬가지다. 물론 20세기 전쟁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이 18700만 명에 이른다는 점만 해도 충격이나, 전쟁의 특수성에서만 이런 극단적 위기만 오지 않는다. 정치적인 이권과 평화라는 슬로건을 위해 사회적 약자나 국민, 심지어 외국인까지 살인과 폭력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시 민주주의 역사에서 많은 민주화 투사가 죽었고, 또한 북한과의 대치에서 북한군의 테러행위에서도 많은 희생을 거두었다.

 

또한 625 동란은 결국 내전이란 비극으로 우리 민족 역시 비이성적인 광기가 합리적인 도구가 되어 많은 민간인 살상이 일어났다. 그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이 정신병적인 기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비이성적인 대처로 인해 그렇게 된다는 점이다. 마치 니체가 집단에 있으면 광기에 말려간다고 하듯이 말이다. 이런 폭력이 계속 진행되면 폭력을 받은 이들이 다시 다른 형태로 폭력을 시도하고, 원초에 폭력을 행한 그들이 그 폭력을 받게 되면, 분노의 폭력으로 응징을 가한다.

 

이때가지 제노사이드 혹은 홀로코스트라고 지명해도 아깝지 않은 죽음의 향연은 바로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와 자신들의 도덕적 관념을 고집이다. 분명 20세기 2차 세계대전은 최소한 인종과 민족의 우월성으로 생긴 전쟁이기에 시민의식으로 구성된 군인들이 많았으나, 1960년대 베트남전쟁부터 1980년대의 중동지역의 전쟁, 21세기의 이라크 전쟁은 더 이상 전쟁이 시민의식으로서 대처할 행위가 아님을 증명했다. 국민들이 점차 국가적 전쟁행위에 동조하지 않은 만큼 또한 전쟁의 잔인성은 커지고 있다. 전쟁이 예전처럼 국가 정치나 외교적 최후 무력수단으로 행하기보다는 다른 이유로서 시도되는 것이 늘어가는 이유다.

 

20세기가 전쟁의 시기라고 해도 무방하나, 지금은 그 전쟁의 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오히려 테러가 계속 일어나는 시기다. 제국주의 강제통치를 받은 제3국도 내전으로 서로 피를 흘리며, 그 내전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폭력단체에 대해 어느 강대국 일부는 원조까지 하는 실정이다. 그런 것들은 1983년 레바논전쟁이나 스페인의 프랑코의 독재 그러하다. 그 이유는 무력으로서 자유를 주겠다고 하는 유토피아조차도 될 수 없는 자기들만의 평화의식에 오늘도 내일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할 수 있는 게 과연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하지만 폭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자신의 폭력을 정의와 선으로 가득한 하나의 진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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