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이후의 제3 인터내셔널 풀무질 신서 10
레온 트로츠키 지음, 정민규 옮김 / 풀무질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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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유명한 영화 1편이 있었는데, 그 영화제목이 <굿바이 레닌>이었다. <굿바이 레닌>의 의미에서 레닌이란 사람은 1924년에 병으로 죽었으며, 그가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에서 가장 선두적인 지식인이자 지휘관이었다. 그런 그가 왜 굿바이가 되었나? 이 영화를 전반적으로 본 것은 아니나, 어느 영화비평 내지 문화연구 도서에서 자주 나오기에 전반적인 흐름을 알고 있다. 1989년 11월에 독일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다음해 1990년 독일은 통일정부를 맞이한다. 문제는 통일된다고 것이 아니라 그 이후가 문제다. 항상 인간의 실수는 무엇을 한다보다는 그 무엇을 하고 나서의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숙고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점들은 이미 한국사나 세계사 전반에 깔린 하나의 테제이다. 세상은 하나만 충족되고 나서 또 다른 하나가 시작된다. 결국 거대한 서사라고 볼 수 있는 이 세계는 그 서사의 시작과 동시에 끝이 또 다른 서사의 시작과 종료를 알리는 극이란 점이다. 그것을 인지하지 않으면 세계의 비극은 멈추지 않은 브레이커 빠진 벤츠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넘어가 왜 이 영화를 내가 언급했는가? 주인공 남자청년은 어머니가 아직도 통일독일을 인식하지 못해서 친구들과 짜고 거짓행세를 한다. 정규TV에는 모두 서독주관 방송국이 퍼지고, 음식물과 공산품마저 서독에서 나온다. 그 청년은 병약한 어머니가 구시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 만약 이 통일자체가 인정될 경우 충격을 받을까봐 거짓행세를 한다.

 

친구들과 짜고 TV뉴스에 동독위주 방송을 하고, 서독 음식과 물건에 동독 과거 가격표를 붙인다. 이미 동독의 화폐는 소용없기에 그들의 행동은 무척이나 코믹하고도 한편으로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모순으로부터 꾸준히 불러내야하는 그들의 아이러니한 세상살이에 많은 고뇌가 있었다. 국가라는 조직체계가 그렇게 한 순간에 무너질 경우 모든 사람들에게 혼돈이 오는 것은 사실이다. 마지막에 모든 것을 어머니는 알게 되나, 그 영화 뒤편에 놓인 시대적인 흐름에 적응하는 인간과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에서 치명적인 실수가 있다. 서독과 동독이 합치기 이전의 서독은 공산정권이라고 하나 - 실은 관료주의 체계이지만 - 이들이 분리된 이유는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해 자본주의진영과 공산주의진영이 서로 분할했기 때문이다. 이때 분할에 참가한 국가가 소비에트연방인데, 당시 소비에트 최고 권력자는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이 독일을 분리했지 결코 레닌이 하지 않았다. 또한 스탈린은 1939년 독일 권력자인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 조약까지 맺은 자이니,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침략하지 말자는 히틀러가 결국 소비에트연방으로 침공하여 소비에트연방은 군사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물론 1937~1938년 사이에 일어난 국가적 대숙청에서 스탈린 옆에 있던 부하린의 죽음이 심각한 원인이었지만 말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굿바이 레닌>에서 <굿바이 스탈린>으로 보는 것이 현명하다. 세계의 모든 공산국가 대부분이 레닌이 만든 체계가 아닌 스탈린이 만든 체계로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가까운 곳으로 북한을 볼까나? 이들은 스스로 인민민주공화국이라 하나, 실상은 관료체제와 독재정권과 거기서 비롯되는 폭력과 억압, 숙청으로 이루어진다.

 

그러고 보니 차라리 여기는 공산주의국가도 아니면서 공산국가라고 한다. 공산주의는 아닌데 공산당만 존재하는 comedy show가 열리는 셈이다. 솔직히 보자면 문명이 조금이라도 들어온 국가라도 아주 예전에 버린 봉건군주제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대통령 후보에게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면서 막상 마르크스주의와 별개인 스탈린주의에 연동하여 색깔론을 펼치는 수준 낮은 정치철학에 경악하는 바이나, 적어도 그런 국내정치 상황에서 이런 문제를 잘 지적한 도서를 발견했다.

 

과거에 레온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을 읽었는데, 이 책은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추방되면서 1936년 멕시코에서 저술한 도서다. 스탈린은 이 도서를 읽은 후에 엄청나게 경악했다고 한다, 그 후 1937~1938년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그렇게 시작했다. 한국역사에서 비추어보면 당시는 항일운동 시기인데, 많은 조선독립 운동가들이 러시아나 중국에 있었는데,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스탈린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혹은 유형을 떠나게 되어 카자흐스탄과 같은 동유럽으로 가게 되고, 이른바 까레이스키라는 러시아어 권에 정착한 해외동포들이 생겼다.

 

백야 김좌진 장군의 죽음 역시 스탈린이 소비에트의 모든 권력을 잡은 시점에서 우리 역사에서 보면 스탈린의 업적은 민폐의 대왕이라고 할 것이다. 어째든 이 스탈린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20세기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 전에는 에릭 홉스봄의 서적명대로 극단의 시대라면, 21세기는 폭력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지난 세기는 이념 냉전이라면 이번 세기는 자본들의 냉전이다. 그런다고 하여도 21세기는 20세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고, 20세기의 철학은 19세기 철학에서 지배받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19세기의 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실정이다.

 

그런 역동의 시기에 20세기의 대표적인 사건은 1차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도 있지만, 러시아혁명 역시 피할 수 없다. 러시아는 1905년 피의 일요일인 혁명, 1917년 2월 차르왕권 붕괴, 1917년 10월 볼셰비키혁명으로 연결된다. 1세기에 혁명이 3번이나 있었고, 그것이 20세기 초반에 몰린 점에서 20세기는 억압과 압제의 폭력과 거기에 대응하려는 폭력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혁명과 그 이후의 일들을 생각하면 그것 역시 무시하지 못한다. 러시아혁명 이후 소비에트연방 창립하여 레닌이 살던 시절까지는 이들은 지금과 같은 폭력국가인 북한을 연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하고, 레닌이 만든 소비에트연방과 공산주의 노동자 국제연합인 communist international 즉 축어로 코민테른이 완전히 정치권력의 도구로 삼았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가르침은 연속혁명적인 관점이었고, 레닌은 그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장에 따라 마르크스주의로 활동하다가 러시아혁명 후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차르왕권의 장교나 귀족, 그리고 관료집단 케렌스키와 같은 부류들이 다시 폭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과거 프랑스혁명에 앙시앵레짐(구체제)을 해체이후에 로베스피에르의 폭정과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인해 프랑스혁명은 어이없이 무너졌다.

 

10월 혁명은 프랑스혁명의 되풀이를 반복하지 않음이지만, 그 후가 문제인 것이 러시아는 차르체제 당시 매우 극빈했다.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빵을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했고, 농촌에서 문맹의 수준은 매우 심각했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에 러시아의 참전으로 많은 군비를 지출해야 했다. 러시아혁명에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공하게 한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정책적 쟁점이다. 레닌은 우선 사회주의국가 노선에서 자신들이 이룬 것은 이제 시작이고,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러시아 이외에 각국의 노동자와 식민지 지배를 받는 약소국가의 국민과 결합하여 새로운 민주주의를 확립하려고 했다. 이와 달리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찬동했고, 거기에 따라 관료주의체계로 소비에트연방을 탈바꿈했다. 결국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소비에트연방의 해체 이전에 소비에트연방이 독재국가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가장 소비에트연방과 대결구도를 나선 것이 미국과 서유럽의 선진국이 아니라 어떤 한 남자라는 것이다.

 

<배반당한 혁명>을 집필한 레온 트로츠키란 점이다. 그도 레닌과 같이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레닌이 살던 시절 NEP(new economy plan)을 기획한 자다. 소비에트연방이라고 해서 자본주의체계에서 실행하던 방법을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 자가 러시아혁명에서 레닌 옆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했고, 혁명 이후 차르정권에서 권력을 누리던 백군에 대항한 사령관이었고, 각종 외교와 내정을 해결한 사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가장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연방의 중심축에 있던 사람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스탈린과의 정치적 경쟁에서 패배하고, 러시아 내의 유형지에서 외국으로 추방당하고, 그 외국조차도 추방과 암살의 위협, 친구들의 죽음을 당해야 했다. 심지어 파시스트를 적대시하던 자들이 트로츠키와 그 일당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파시즘 국가의 동조자라고 할 정도이니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1940년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피켈을 맞고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그런 자의 서적들과 기록, 많은 증거물들이 미국 하버드대학교에 트로츠키 연구소란 곳에 관리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트로츠키가 <레닌 이후 제3 인터내셔널>을 집필하면서 볼 수 있는 것은 스탈린정권과 스탈린주의자들이 하고 있는 오류와 모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레닌이 남긴 유산을 모조리 풍비박산을 낸 것을 비판하고 있다. 레닌은 코민테른 회의에서 세계의 식민지 국가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레닌은 자국만이 아니라 세계의 폭력과 억압을 해체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는 고립된 국가이므로 상대국가와 다른 연합이 조직할 수 없기에 관료조직이 되고, 그것은 과거의 차르체제처럼 되는 것이다.

 

그런 체계가 되어가면서 트로츠키가 집필하던 1929년 유배 및 망명시절에 소비에트는 점차 독립국가 보다는 독재국가로 되어갔다. 관료주의 최고 문제점이 민중들과 소통이다. 소비에트 공산당에는 노동자들이 다수 참가하여 노동자들의 문제점과 국가적 정치방향을 요구했다. 조금 민주자유주의국가와 다른 모습이나 일반 시민이 직접 당원이 되어 국가정책에 요구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서로간의 체계나 구조가 달라보여도 그 의미와 맥락은 비슷하다. 단지 돌아가는 꼴이 서로 뒤죽박죽이란 모순과 왜곡에 의해 엇갈리는 것이 큰 문제점이라 볼 수 있다.

 

점차 소비에트와 코민테른이 노동자를 위한 곳이 아닌 노동자를 억압과 통제로 이어지면서 소비에트는 가난한 국민들이 넘치고, 오히려 NEP-man과 부농인 쿨라크의 이익만 증대되어 가고 있었다. 도시의 노동자들은 임금은 그대로인 반면 물가는 오르고, 일자가 줄어 청년실업자에 교육여건도 악화되어 초등교육 의무까지 불안했다. 농촌에 쿨라크의 이익증대는 반대로 빈농의 증가와 중농의 쇠락을 의미한다. 스탈린이 트로츠키의 경제활동에서 쿨라크에 대한 정책을 비판하면서 쇼비니즘을 자극했다.

 

민족차별주의를 내세워 트로츠키를 맹비난했다는 것이다. 쿨라크의 반대와 더불어 트로츠키의 영향은 위축되었으나, 이후 스탈린의 5개년 경제계획에서 쿨라크들은 모든 재산과 심지어 목숨까지 잃게 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트로츠키는 이런 행위에 대해 예측하고 있었으며, 이 비극이 일어난 것에 대해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안정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탈린과 코민테른을 계속 비판했다. 1927년 전후로 영국과 독일에서 노동자 파업이 일어났고,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코민테른의 연합까지도 비판했다. 스탈린체제는 영국과 독일 노동자운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그들의 총파업은 유혈사태로 끝났다.

 

파업의 원인은 임금문제, 노동권 보장 등과 같은 생존의 권리였으나, 대부분 역사 속에서 보면 많은 파업자들이 몰락과 죽음을 관찰한다. 물론 스웨덴과 같은 국가는 상당히 선진국이면서 복지국가이나 막대한 죽음과 희생에 의해 유지된 점이니, 유혈사태라는 희생의 플롯은 멈추지 않은 또 다른 서사이다. 중국에서 장개석은 항일운동을 위해 중국공산당과 연합하나 뒤에 배신하고, 중국에서 공산당원은 체포즉시 즉결처형이었다. 칼로 목을 베는 참수형의 사진을 보면서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무능함과 방종함 그리고 이기심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셈이다.

 

마오쩌둥이 중국의 혁명으로 통해 공산국가를 만든다고 하나, 지금 중국의 모습을 보면 그저 관료주의국가에 불과하며 소득차별과 민생안정, 게다가 치안상태는 엉망이다. 중국 역시 마르크스주의와 관련 없이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타도하려던 그 모습과 똑같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국제정치 상황에서 트로츠키가 그렇게나 타도하던 스탈린의 영향이 이토록 거대하게 될 줄 누가 감히 상상조차 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트로츠키가 소비에트연방의 문제와 앞으로 대한 정책적 방향을 강조하는데, 그 방향은 세계 어디라도 아니 국내 여야 할 것 없이 국회의원 내지 대통령 후보들이 내놓는 사항들과 많이 일치한다.

 

기본골격은 모든 정치인들이 추구해야할 방향이나 슬로건과 달리 행동이란 서로 다르게 흘러가는 면이다. 항상 정치적 상황을 보면 역사라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인가 라고 의문을 던져본다. 그것은 왜 지금이 지금처럼 되었는가? 그때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그렇게 되게 한 원인이나 동기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은 우리나라 역사도 좋고 러시아나 중국역사도 좋고, 심지어 저 멀리 있는 독일과 프랑스, 영국, 미국 등과 같은 나라의 역사도 좋다.

 

인물과 시간적 공간적 조건은 모두 다르게 일어날 수 있으나 정치적 상황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프로세스라는 하나의 체계성은 유사하다는 점이다. 물론 국가나, 민족, 지리적, 환경적 조건에 따라 변수는 있지만도 기본적인 과정의 구조는 유사하다. 트로츠키가 저술한 <레닌 이후 제3 인터내셔널>은 트로츠키 자신 역시 레닌이 없다는 사실과 최고 타도대상인 스탈린도 죽었고, 스탈린의 권력을 부리던 소비에트연방도 사라졌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 지금의 국제정치역사에서 그 과정적 구조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현재는 과거로 이루어진 현상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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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쇠퇴했습니다 4 - J Novel
다나카 로미오 지음, 야마사키 토오루 그림, 곽형준 옮김 / 서울문화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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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류는 쇠퇴했습니다라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내가 이것이 작품성으로 보면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판단한 것은 바로 라이트노벨 인류는 쇠퇴했습니다의 4번째라고 볼 수 있다. 인류는 무엇으로 살아왔는가? 라는 질문에서 이런 역사적 문명과 사회적인 현상 그리고 이변에 깔린 보이지 않지만 결국 계보학적으로 따지면 찾게 되는 부패한 모습을 여기서 아주 코믹한 메르헨으로 펼쳐진다. 이렇게 지독한 black comedy가 얼마나 존재할까? 그 지독한 패러디 같은 아이러니가 펼쳐지면서 메르헨 속의 현실이란 말에서 오히려 가상적이고,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현실을 찾아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런 맛일 것이다.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meta-physics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meta를 한 번 더 날리게 되면 pata-physics라는 것으로 변모한다. 결국 형이상이상학이란 것이다. 좋게 말하자면 인간이 아이디어가 모든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해낸 어느 이미지가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가령 예전에 <동물농장> 저자 조지 오웰이 결코 원하지 않은 세상이었으나 어느 순간 되어버린 <1984>적인 디스토피아가 우리 현실을 지배한다. 스크린으로 통해 오세아니아 국가의 관료를 관찰하고, 작은 곤충이 알고 보면 감시와 도청을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원스턴 스미스가 빅 브라더에 대한 적개심과 탈사회적 행위, 그리고 그 나라의 배척자 골드스타인에 대한 동정심까지 감시한 것이다. 오죽했으면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처럼 감옥의 역사, 그리고 아르망 마틀라르라는 프랑스 파리8대학 정보 및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가 저술한 <감시의 시대>라는 책이 등장하지 않았는가? 원하지도 않은 상상의 세계가 현실적 디스토피아로 구성된다. SF라는 공상과학영화가 비록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아도 현실처럼 다가오는 것이 바로 현실의 모습을 개연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그 모습을 비틀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특정인물의 이름과 외모, 심지어 조건들을 판을 따서 그대로 그 사람에 대한 비판을 날린다고 생각하면, 그 나라의 영화제작들은 삶의 고충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마련이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4권은 그런 권력에 대한 어두운 모습을 메르헨 세계로서 아주 재밌게 다룬다. 이 작품에서 주요 등장인물이 있으니 바로 UN국장이다. 인간들의 생활에서 자원과 생산력의 저하로 생존이 어렵게 되자, 요정들이 과거 인간이 만든 공장을 개조하여 요정사라는 회사를 만들었는데, 거기 관리인과 공장장이 인간이었다.

 

공장장인 UN국장은 이상한 물건이 마을로 들어오는데도 그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모르고 있었다는 이유로 주인공에게 추궁 받는다. 그 중 주인공이 선택한 키워드가 인상 깊다. “1. 책임 소재는 누구에게 있다는 말씀이시죠?, 2. 문제, 3. 보상, 4 처벌.” 이 말에 대한 국장의 반응은 “우오, 우웃, 으극, 노오!”라고 한다. 대답도 못하고 그저 책임회피 궁리만 찾다가 주인공이 이 공장의 이사진들을 찾아 그들에게 문제제기를 하려고 하자, 국장은 이사진의 문제가 드러나면 그 다음의 직권력을 가진 자신이 이 공장과 회사의 주인이 될 것이라 판단한다.

 

그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마치 정의를 위해 희생하는 정치가의 풍모가 보인다. 나중에 그의 발언은 엉뚱하나 바로 우리의 현실을 가리킨다. 쿠스노기 마을에서 이루어진 이야기나, 다른 세계나 공간도 역시 쿠스노기처럼 인간의 생존력이 감소하고, 문명을 이어갈 과학기술력과 심지어 행정제도까지 소멸되어갔다. 그런데 그 국장의 발언이 문제다. “우선 매 처음 잃어버린 제도를 하나하나 부활시킨다! 백성을 조종하고, 물류를 지배하고, 경제를 조작한다! 그렇게 되면 초 통일국가의 건국은 쉽지! 엘도라도(황금의 나라)는 내가 생각한 최강정치형태인 겉보기 민주주의, 사실은 절대군주제로 다스리는 거야! 렛츠 압제 정치!”

 

안타깝지만 옆에서 주인공과 박사 조수까지 그 말을 모두 듣고 있던 증인이 되었고, 심지어 조수에겐 요정사에서 만든 디지털 카메라까지 있어 충실하게 녹화 중이었다. 이번 사건을 꾸민 가공된 통닭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요정들을 모두 포박하고, 그들의 계략으로 인간의 경제구조와 사회구조를 변모하고, 정치적 행위로 이어갔다. 역시 정치적인 행위에서 최고의 폭력적이고 물리적인 수단은 전쟁임을 잊지 않았다. 요정사의 근로자들을 인간으로 내세우고 뒤에서 무기를 제조해 파괴한다는 전략을 말이다.

 

게다가 그 전복한 뒤에 기다리는 것 역시 기회주의자인 권력자들이다. 생각해보면 프랑스 혁명 때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지성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1789년 루이16세가 미국독립전쟁에서 막대한 예산낭비와 지방자치기구의 폐지에 따른 자금투여, 각종 특권층과 신흥 세력에 대한 세금감면이 프랑스혁명을 만들었다. 이 프랑스혁명에서 자코뱅당이란 좌파가 주축으로 혁명정권에서 큰 주축이 되었고, 그 반대가 왕정당인 지롱드파 우파가 있었다. 지금 메르헨 세계의 이야기에 좌우파 논리를 집어 던지는 것도 웃기지만, 권력의 이전에 대해 생각하면 프랑스혁명이 성공했으나 당통의 죽음, 로베스피에르의 폭정, 테르미도르파의 반동, 그 후의 나폴레옹의 등장을 보면 그렇다.

 

딱히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에서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어디서 눈치만 보던 군인이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지금 이 메르헨의 세계에서 국장은 바로 그런 사람 중에 하나다. 단지 무력으로서 집권하느냐 아니면 경제력으로 집권하느냐 차이다. 지금은 21세기이니 자본주의를 필두로 한 세계 신자유주의에서 자본은 국경을 초월하고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니 경제력으로 정치권력에 막대한 간섭이 가능하다. 현재 국제정치가 경제적인 여건에서 군사력과 외교력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 할 수 있는 발언이다. 물론 옆에는 조수가 폭로하고 있지만 말이다.

 

항상 권력과 음모에 대한 저항은 언론이란 미디어가 있기에 가능한 점에서 이 메르헨 공간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스토리가 오히려 현실적인 상황을 반증하고 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은 너무 잔혹한 코믹동화라서 코믹한 상황에 집착하게 만드는 작가의 집필능력이다. 매우 공손한 말투의 상황묘사에 대사마저도 주인공은 존댓말로서 표현하니 이것만큼 공손한 작품은 없게 보이나, 실상은 매우 도발적이란 점이다. 항상 말이 없고 조용하고 주인공을 잘 따르던 소년 조수가 이번 편에서 다시 활약한다.

 

그가 만드는 동화이야기를 같이 보면 모두 놀란다. 매우 현실적인 부분이다. 동물들의 친구이야기에서 결국 사자가 다 잡아먹고 다른 동물들의 뼈 위에서 자랑스럽게 서 있는 모습은 이것이 현실 속의 사자란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 속의 사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Lion King>처럼 되기를 바란다. 현실의 사자를 우리가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만나면 최대한 멀리 떨어진 게 현명하다. 그런 점에서 조수의 성격이 왜 그렇게 어두운가 라는 것이다. 겉모습과 달리 조수는 암흑적인 성격파탄을 소유한 자다. 요정사에 찾아와 주인공이 요정에게 개체수를 증대해달라고 부탁하나, 요정은 즐거운 것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때 조수의 동화책 “그림책-일곱 명의 어린아이”에서 ‘마을에는 일곱 명의 어린아이, 알란, 베키, 카알, 데라, 에드거, 플로라, 제프, 굉장히 사이좋아. 알랑은 숲에서 굶어 죽고, 베키는 늪에 빠지고, 카알은 마차에 치이고, 데라는 파도에 휩쓸리고, 에드거는 들개에게 냠냠, 플로라는 잘게잘게 통통통, 제프가 모든 일의 범인. 끝.’ 이 이야기를 보던 요정은 완전히 패닉현상에 빠졌다. 게다가 KID의 모습에서 문자텍스트에 상응하는 모습처럼 그림체 KILL 된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이 마음속의 어둠이 생겨나는 걸까요. 하면 고민하면서 조수에게 물어본다.

 

“여의사로군요. 그 의사선생님이 뭔가, 이렇게 사이코한 느낌으로 학대한 거죠? 큐브릭이라든가, 히치콕(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영화 사이코를 제작했다) 같은 노선으로..” 하고 묻자 조수는 오히려 부정하며 주인공에게 시선을 준다. 참고로 조수의 성격은 주인공이 수백명이 되어 주인공이 바라는 조수의 모습에서 결국 그 자체가 조수의 성격과 인격이 되었다. 문제는 주인공은 매우 공손하나 무의식적인 뒷면에는 매우 사악한 점이다. 조수를 만날 때 자신과 같은 소녀를 발견할 때 그녀는 화로를 살피면서 과자를 만들 수 있다고 하고, 주인공은 그 소녀에게 조수가 어디 있을까 라고 묻는데, 그 소녀(분리된 또 다른 자아)는 아마 화로 안에 있을지도 라는 대사를 한다.

 

결국 조수가 화로 안에 갇혀 불타죽을 가능성이 있을지도 라는 발언은 상당히 정신적으로 사악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조수가 겉과 달리 속으로 상당히 어둠이 자라는 것은 주인공의 모든 요소에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조용하고 침착해도 때로는 매우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단지 그 방법이 매우 대책 없다는 점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고 해도 비합리적인 요소로 충만하다. 특히 제일 심각한 존재는 요정이라고 하나 그 요정이 어떻게 보면 인간들이 해온 것들과 비슷하다.

 

도통 논리적이지 못할 일들이 계속 반복된 우리 문명의 역사에서 우리에게 합리적인 인간 즉 휴머니즘을 논할 자격은 있는가? 그런 요소가 이번에 등장한다. 인류가 쇠퇴하자 요정은 불어나는데, 요정이 너무 불어나서 똑같은 모습이 많아 너무 많은 인구밀집은 서로 간에 스트레스가 되었다. 이른바 차별과 폭력, 억압이 생기고, 우리가 언제나 신의 이야기인 신화가 바로 차별, 폭력, 억압에 대한 해방과 욕망으로 이어진다. 메르헨이란 동화는 순수한 이야기가 아니라 순수함에 가려진 어두운 욕망의 검열이다.

 

인간사회도 인구과밀도가 높으면 그만큼 충돌이나 문제가 많아진다. 대신 인구밀집도가 낮아지면 그만큼 낮아진다. 전쟁의 역사에서 농업국가에서 주로 군대의 체계성을 이룬다. 자원의 고갈 내지 자원의 잉여가 그들을 필요에 의해 전쟁을 하거나 혹은 자신들의 소모를 위해 수행한다. 후자라면 더 넓은 농지와 그 농지에 들어갈 인구를 위해 전쟁을 하고, 더욱 더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된다. 그런 점에서 요정 역시 인구과밀을 피할 수 없다. 인간처럼 먹지도 마시지 않아도 생존이 가능하나, 워낙 순간적인 비논리로 돌발행위를 하다 보니 예측이 불가능하다.

 

주인공은 할아버지 명으로 조금 먼 농가 인근으로 가서 정착하려고 하나, 운 없게도 호수 나루터에서 있다가 나루터의 나무가 너무 오래되어 근처 작은 섬으로 흘러간다. 인간은 언제나 자연이란 낯선 환경으로부터 굶주림과 추위, 안전을 위해 투쟁했다. 즉 의식주 문명은 추위에 견딜 옷과 생물학적 유지를 위한 식량, 악천후와 맹수로부터 방어할 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에서 가장 먼저 직면한 자는 주인공이다. 요정들은 그저 가만히 두어도 알아서 번식하고 사라진다. 오직 그들에게 즐거운 것만 있으면 삶의 활약일 뿐이다.

 

문제는 동기라는 점이다. 그 시발점은 무엇인가에서 요정들 스스로에게 그 의문이나 실천에 대한 계기는 없다. 오직 인간에게 받은 임펙트 만이 가능했다. 주인공에게 필요한 것은 식량과 옷 그리고 전기와 식수, 집과 침대였다. 처음에 작은 요정들이 있을 때는 원시적인 생활에서 수 천명에 이르자 마치 한 나라의 여왕처럼 받들어 모신다. 실제로 주인공은 여왕을 군림했다. 여왕으로서 다소 입헌공화국과 같은 체계였으나, 실상은 여왕은 권력보다는 요정들이 하고 싶은 데로 행동할 뿐이다.

 

요정들의 과학기술력은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만드는 물품들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구조에서 그 법칙에 따라 결정한다. 하지만 이들은 법칙에 부탁해보았어요 내지 조금 수정했어요 라고 한다. 결국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법칙을 초월한 것이다. 코코아열매에서 초콜릿 재료가 나오나, 그 열매 자체에서 사탕과 초콜릿이 나오고, 우유도 나온다. 도저히 과학적인 설명이 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의욕은 넘치는데,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섬의 공간은 한정적이고, 자연의 재화는 일정하다.

 

내가 이 책을 보면서 항상 생각난 서적이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다. 그동안 많은 문명을 가진 부족과 나라들이 모두 멸망했다. 심지어 최첨단 기술국가인 미국 내의 어느 지역 역시 사람이 살기가 불량한 지역이 넘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자연의 파괴로 인한 인간의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딱 적중하는 편이 바로 모아이가 있는 이스터섬이다. 모아이라는 석상은 거대한 돌로 인간의 얼굴과 흉부상부를 새긴 것으로 이곳의 과거주민들은 모두 멸종했다.

 

그들이 멸종한 원인은 바로 숲의 상실이다. 숲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무다. 나무라는 것은 물을 저류하고, 비가 오면 토지가 손실되지 않도록 지면의 응력을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무를 계속 베어내면 지면이 불량해지고, 지면의 에너지를 사용하면 그것에 상응하는 지력을 보충해야 하나 그것이 불가능했다. 토양의 유기물이 있어야지 요정들이 만든 식물들을 재배하나 그것에 대한 영양분이 없었다. 토양에 거름을 공급해야 하나 거름에서 인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인간인 주인공이고, 요정은 배설하지 못한다.

 

그들이 배출하는 것은 거의 물과 비슷한 소변이다. 소변이라고 하여 유기물질이 없는 액체다. 결국 모든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법칙을 어긋나더라도 본래의 자연마저 바꿀 수 없다. 문명이란 것은 결국 자연에 대하여 노동으로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노동은 인간에게 착취를 강요할 수 있으나, 요정에겐 놀이에 불과했다. 인간의 노동 요정의 놀이에서 노동은 하면 할수록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이나, 놀이는 하면 할수록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게 된다. 요정이 같은 것에 반복하지 않고, 그들은 항상 새로운 것이 있으면 거기에 우루루 달려든다. 쉽게 모이고 쉽게 해산하는 그들의 특징에서 놀이는 결국 그들에게 삶의 활력소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 활력소는 문명에 건설이고, 문명의 건설에는 반드시 그것을 이루는 유물론적인 토대가 필요하다. 자연의 자원과 에너지는 필수적이나, 지나친 개발로 토양은 황폐화되고, 식수는 오염되었다. <문명의 붕괴>에서 문명이 붕괴한 것은 문명 그 자체에 대한 붕괴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문명의 토대가 되던 자연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노동할 수 없는 인간이 없거나 혹은 노동력이 있어도 노동을 할 수 없는 자연이 없는 것이 결국 인류의 멸종으로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도시국가를 이룬다고 하여 문명국가라고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시는 공기와 물은 어디서 오는가? 결국 자연의 자체적인 운동에서 발생된 것이니, 이들의 순환과정을 과학적으로 본다면 물의 순환이 강우와 증발이란 점이다. 이 물은 결국 하천에 유입되어 취수장을 거쳐 정수장으로 들어간다. 취수장과 정수장은 인간이 노동으로 만든 산물이고, 그렇게 옮겨지는 물은 전기에너지로 옮겨진다. 결국 에너지가 있어야만 모든 문명의 보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에너지의 원천 자체 역시 자연이다. 석유와 석탄으로 해결하는 화력, 바람을 이용하는 풍력, 핵분열을 이용한 원자력발전 등 모든 기본적인 재원은 자연에서 추출한 것들이다.

 

자연매장량이 한정적인 석유, 석탄, 우라늄, 플라토늄이 소모되어 무에 가까운 순간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발견하지 못하면 인류의 문명을 유지할 수 없다. 바로 인류는 쇠퇴했습니다에서 주인공이 말한 전기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상당히 동화 같은 이야기나 그 속에는 매우 과학적인 사실이 있다. 라이트노벨 자체는 모두가 현실이 아닌 가상을 서술한다. 가상을 서술하기에 그것이 가상이라는 사실을 각인하여 오히려 현실적인 요소를 반추하여 들어다 볼 수 있는 점이다. 왜 신화(神話)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도 계속 되풀이 되는가? 생각하면 간단하다. 인간현실에서 직시하지 않으려는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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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쇠퇴했습니다 3 - J Novel
다나카 로미오 지음, 야마사키 토오루 그림, 곽형준 옮김 / 서울문화사 / 2009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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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쇠퇴했습니다 3권은 과학과 비과학의 대립이었다. 과학적인 것이 인간에게 축복을 내렸는가? 아니면 파멸을 내렸는가? 여기서 주인공이 사는 쿠스노기 마을에 human monument 사업이 진행 중이다. 이미 쇠퇴한 인류가 과거 자신들의 조상들이 이룩한 업적을 하나의 상징적인 가치관을 부여하기 시작한 사업이다. 문제는 그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그것조차 복원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 없다는 게 문제였다. 주인공의 할아버지인 박사나 그리고 마을에 몰려온 소년단체 역시 마찬가지다.

 

소년단체는 주인공과 함께 다니는 조수와 비슷한 나이또래가 아니라 주인공 할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들이었다. 그런데도 소년이라니? 탐색과 모험이 될지 모르는 미지의 발굴 유물을 찾는 것조차도 지식의 산물을 가지지 않으면 불가능이란 뜻이다. 지금의 인류는 쇠퇴했기에 지식의 전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사의 마지막 졸업자인 주인공과 그 앞에 있는 노인들에서 그 노인들은 그나마 학사가 건재하지 못해도 어느 정도 유지되던 시기에 다니던 사람이니 이번 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인 것이다.

 

가장 모험적인 사람들이 젊은 층이 아닌 구시대 쪽에 가까운 인물이라니? 인류는 쇠퇴했습니다에서 기술적 진보 내지 문명적 진보는 젊은 층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에 가까운 존재에 가까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번 책에서 주인공이 탐사할 때 절대로 가서 안 될 도시문명 유적지는 지금 이 책을 읽는 독자인 나에게 오히려 21세기 인류의 과학기술문명보다 몇 세기나 지나야 갖출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이 형성된 시기로부터 몇 세기가 지난 시점의 지구라면 대략 서기 3000년 수준?

 

그런데 그 시기에 인류는 번영과 혜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멸종과 쇠퇴의 위기란 메르헨 속에 펼쳐진 암울한 SF와 가깝다. 아니라면 혹성탈출 영화에서 주인공이 탈출할 때 그 혹성에서 벗어나면서 뉴욕에 위치한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한 것과 비슷할 노릇이다. 그 증거는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3권처럼 주인공과 조수가 그 도시문명국가가 있던 곳에 가는 순간 잘 드러난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human monument 사업이 된 까닭은 바로 전기의 사용과 전기로 통한 전자파의 발생이다. 요정들은 전자파가 오면 무서워하고 도망치기 바쁘다. 전기에 의한 전자파의 발생은 바로 과학기술의 원동력이다. 아니 지금 현대사회의 인간들에게 전기란 것은 문명의 모든 것이다. 전기가 없다면 우리는 식사, 직장, 이동, 거주 등 모든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활동이 불가능하다. 문화의 존재적인 근원이 바로 에너지가 된 이상 숲속 밀림에 사는 원시부족이 아닌 이상 전기는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이에 반해 인간이 아닌 요정에게 전기란 공포다. 신화 속에 등장할 것 같은 요정들이 이 세계에서는 현존하는 존재다. 바로 시대적 구분으로 보면 인간의 과학 이전에 신화가 인간을 지배하던 고대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통한 문명사회로 진입하다가 이제 인류가 쇠퇴하면서 신화 속의 요정이 실존적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과거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존재가 다르게 복원한 셈이다. 인간은 원래 신화 속에 갇힌 존재에서 그 신화적 환상을 벗어나게 한 것은 계몽과 과학이다. 물론 교조주의적인 계몽은 또 다른 신화라는 억압으로 환생하고, 과학은 과학이란 맹신 아래 또 다시 인간에게 새로운 억압의 주체가 되었다.

 

쉬운 예로서 과학의 단점인 폐해는 인륜이나 윤리의 부재라는 점이다. 인간이 도구로 되었다는 점,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유물 그 자체로 되었다는 것이 무섭다. 인간이 도구로 되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단지 수단과 목적을 위한 소모품이 된다. 그것이 바로 주인공과 조수가 발견한 도시국가이다. 이 국가의 존립은 EPM 즉 전자파이나, 그 전자파는 단순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는 전자파가 아니라 거대한 외부의 타격에서 발생되던 전자파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이었다.

 

따라서 모든 요정이 사라지고, 주인공이 요정에게 받은 부적 안에 잠든 요정은 전자파로부터 격리된 도시국가에서 생존이 가능했다. 하지만 과거 인간들이 그렇게 격리하고, 그 안에서 절명했다는 사실은 인간의 쇠퇴원인은 문명의 발달에서 언제나 등장하던 전쟁에 의해서다. 도시국가의 설립자체는 책 본문에서 언급하다시피 핵전쟁이 포함된 사실이다. 핵전쟁에서 핵폭탄은 주로 지면에서 폭발하기보단 공중에서 폭발한다. 그것이 효과적으로 인명에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핵폭탄에 의해 먼저 거대한 열에너지로서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산화시키고, 두 번째로 거대한 폭발에너지와 열에너지로 통해 대기 중의 공기에 큰 변화를 주어 거대한 폭풍을 일으킨다. 마지막으로 방사능에 의해 낙진이 형성되는데, 핵폭발 후에 알파, 베타, 감마선과 같은 방사선이 방출되어, 특히 감마선의 경우 인간 DNA 구조변이로 통해 돌연변이 내지 사망을 일으킨다. 그러니깐 도시국가가 전자파와 무관한 이유는 방사능오염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인도어과 사람들로 이어졌으나, 문제는 인도어 사람들은 멸종했다. 왜 멸종했는가? 많은 이론이 있겠으나, 작품을 읽다보면 물이나 식량도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며(물론 수 세기 지난 지금 인간이 섭취할 유기물은 존재하지 않으나), 공기도 어느 정도 신선도를 유지했다는 점과 안의 설비들이 매우 첨단장비란 점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소멸은 외적환경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환경이다. 히키코모리 은둔형 폐인들처럼 자신들끼리 있다고 소멸한 것일지 모른다. 인간은 외부와 소통(언어적이든 물리적이든 육체적이든)을 하지 않으면 말이다.

 

혹은 주인공과 조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물컹물컹한 것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쇠로 된 도구를 녹일 정도의 슬라임이라면 일반적 생명이 생존가능한가? 어떻게 되었든 자신들만 살아볼 것이고 발버둥을 치던 인간들은 모조리 사라진 것만이 결과적인 상황이었다. 적어도 인간들의 소멸에는 분명히 그 위험한 슬라임과 관계있을 것이다. 이번 편에 등장한 피온과 오야지란 2개의 기계인간은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인 것처럼 행동한다. 아니 인간이 아니나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진다.

 

과거 인류의 지나친 개발력으로 명령어에 의해 수행하던 기계들에게 유기정보생명체로서 진화하게 한다. 덕분에 피온과 오야지는 기계인데도 사람형상으로 있으며, 사람처럼 말한다. 단지 자신들이 무엇인지 왜 있었는지 각인하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과거에 만들어낸 인공위성 PIONEER, VOYAZER 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창조주인 인간 이외에 새로운 생명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결국 찾지도 못하고, 인간들도 쇠퇴하여 모두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단지 최근 human monument 사업의 일환으로 전자파가 잡히면서 자신들에게 그 정보가 들어온 것이다. 본래 기계란 마음이 없는데, 특이하게도 이들에게 마음이 생겼다.

 

human monument 사업 기획에서 본래 있었던 문명의 기능성을 재발동하는 것이다. 결론은 PIONEER, VOYAZER 두 위성이 다시 우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에는 더 이상 생명체를 찾을 수도 없고, 거기에 가면 아무 것도 없이 혼자 쓸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반항적인 VOYAZER는 그 어둡고 춥고 외로운 곳이 싫었다. 쓰레기더미 같은 죽은 도시에 사는 것이 오히려 행복이었다. 거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주인공은 VOYAZER와 조수와 짜고 전자파를 생성하는 기계장치를 무력화시켰다.

 

덕분에 애니메이션 1화부터 다 큰 처녀가 긴 머리가 아닌 삭발과 가까울 정도의 짧은 머리가 된 이유가 여기부터이다. 그러나 그 행동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신인류인 요정이 다시 찾아온다는 점이다. 요정은 과거 인류가 만든 폐허가 되어버린 문명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발전된 문명에는 요정이 살 수 없다. 주인공인 조정관으로 임무는 요정과의 관계이고, 한편으로 인간적인 측면에서 외로운 곳에 인간들의 욕심으로 희생되던 그들을 그렇게 방관할 수 없었다.

 

그 무엇인가에 대한 발전은 그 무엇에 대한 희생이고, 그 희생에 대한 구원은 또 다른 자에 대한 희생이다. 결국 주인공은 월급 감봉에 시말서 별도의 근무시간과 여자의 소중한 머리카락까지 희생시킨 것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여자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빼앗는 것만큼 큰 단죄는 못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전환은 요정이 다시 왔다는 점이다. 요정은 과학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류다. 문명도시에서 길을 잃으며 조수와 걷던 주인공은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생존의 위기를 겪는다.

 

주인공과 조수는 생리적인 문제로 고통 받고, 심리적인 압박감에 시달리는 그 묘사란 인간에게 물과 음식은 필수적인 도구다. 그러나 요정들은 필요 없는 존재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삶의 유지가 아니라 절대적인 삶의 재미다. 재미있으면 1명에서 수없이 늘어나는 요정의 불가사의에서 어떻게 과학적 설명이 가능한가? 과학이란 합리성은 과학적 입장에서 유지될 뿐이지 비과학적인 합리성에서 과학은 과학적이지 못한 모순이란 점이다. 문명에서 쇠퇴한 인간들이 이제는 요정들의 가호까지 잃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란 의문에서 요정들이 처음 피신 갈 때 주인공에게 준 도서를 참고하면 충분히 납득한다.

 

요정이 많으면 많은 만큼 요정과 마주치는 사람은 곤란한 일을 겪는 일이 많지만, 그만큼 행운이나 삶의 희망이 커진다는 것이다. 대신 요정이 적어지면 초자연적인 곤란한 일들은 그대로 피해가지 못하며, 초자연적이지 못한 물리적인 위협조차 구원될 수 없다. 어떻게 보자면 구인류인 인간의 쇠퇴, 신인류인 요정의 등장 이 관계에서 무엇을 논의할 수 있을까? 결국 인간이 과학에 의해 문명이 이룩했으면서도 오히려 그것이 인간을 역으로 망친 것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건담에서 샤아 아즈나블이란 전쟁영웅은 거대한 유성을 지구에 떨어뜨려 지구를 살리려 했다. 본래 환경학적으로 지구는 자정정화작용이 있으나, 인간의 문명활동에 의해 자연이 파괴되어 그 자신을 정화시킬 능력마저 상실했다.

 

차라리 자연이 신으로 추앙받던 샤머니즘, 토템이즘, 애니미즘 사상에서 인간의 종속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끔 환경정보에서 자외선, 방사선, 토양오염 등으로 많은 문제가 지구상의 이슈로 드러날 때 우리의 과학기술은 과연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물론 의학기술이나 보건위생학의 발전은 과학의 선물이라고 볼 수 있어도 그런 만큼 피해는 다시 돌아온다. 요정이 늘어난다고 해서 인간에게 특별한 위해나 문제는 없다. 단지 요정의 도래는 신화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인간의 현실이다. 주인공이 다니던 학사는 폐쇄하고 지식의 요람은 사라졌다. 지식에서 과학기술은 전수는 필수적이나 그 전수공간과 심지어 그 전수할 교사나 교수도 없다.

 

인간에게 과학적 지식이 없다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주변 환경에 의지하여 그 속에서 삶의 개척지를 찾아야 한다. 덕분에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에서의 산업구조는 원래 인간이 처음 시작하던 1차 산업으로 변모했다. 농사나 가축사육 혹은 그 이전의 삶의 방식인 수렵이나 채집이다. human monument 사업에 제일 중요한 전기에너지도 없어서 결국 유적지에서 이동차량을 내버려두고 왔다. 전기가 있을 때는 마치 전차처럼 이동차량들이 며칠이나 걸려 도착할 곳은 단 몇 시간에 도달했다.

 

앞으로도 그 도구들은 이 작품에서 영원히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에너지를 잉여적으로 비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잉여의 비축에서 계속 새로운 욕망이 인간에게 더 많은 잉여의 비축을 요구하고, 에너지원이 고갈된 이 작품세계에서 사실 전기가 새로 도입되더라도 그것은 유지할 에너지원이 없다. 어차피 전기 역시 다른 에너지의 소모로 통한 전기에너지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환경공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보자면 이 작품의 세계관은 상당히 미래인간들에게 납득이 간다.

 

문명의 유지는 자연에 대한 노동의 투입이고, 그 자연에서 나올 수 있는 재화는 한정적이니, 지금보다 더 크고 발달된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착취이니, 더 이상 착취적 조건 없는 자연이라면 인간은 자신의 문명으로 착취해야 한다. 결국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만든 도서인 <문명의 붕괴>처럼 인간문명의 붕괴는 자연에 대한 착취에 대한 반증은 분명하다. 그래서 요정들의 문화가 왜 붕괴하지 않은가에서 그들은 물도 음식도 필요 없이 생존이 가능하다. 요정은 자연을 파괴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살아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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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쇠퇴했습니다 2 - J Novel
다나카 로미오 지음, 야마사키 토오루 그림, 곽형준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2권을 열어보면서 역시나 이 책은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읽다가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에서 유명한 시인 워즈워스의 이름이 튀어나올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와 관련된 인물로 존 러스킨이란 예술가는 자연에 접하지 않고, 예술은 태어나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사실 생각하면 모든 미적인 가치를 인간 스스로 관념하면서 만들어간다고 해도, 그 관념이 대상의 시초는 자연이다. 자연이야 말로 모든 인간의 시작이면서 끝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동물로 태어나고,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어떤 방식으로 통해서든 말이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에서 인간의 존재를 두고 매우 자연의 조건에 밀접한 존재로 나온다. 식량이 예전만큼 나오지 않거나 혹은 에너지가 없다거나 말이다. 인간에게 문명이란 시간과 공간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물론 인간의 노동이나 그 노동의 투여대상이 자연이란 점에서 이미 인류의 쇠퇴가 자연적인 원인이란 점도 고려하면 충분하다. 이와 달리 신인류라는 요정은 자연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 식량이 없으면 칼로리 부족으로 생명의 지장을 초래하는 인간들과 달리 그들은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단지 그들은 즐기는 문화를 좋아한다. 유희적인 인간상인 것이다. 덕분에 맛있는 과자와 사탕, 초콜릿이 없다면 그들에게 먹을 것이란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들은 뛰어난 문화기술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 기술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이고 이론으로서 설명이 가능한 정밀함이 전혀 없고, 대신 상상을 초월한 기술 그 자체가 이미 마술과 맞먹는다는 사실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예전에 한국에서 TV가 막 들어올 때 사람들은 TV를 처음 보고 모두 놀라 어쩔 줄 모르거나 TV안의 목소리가 들리니 그것이 직접 자신과 대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착각했다고 한다.

 

TV라는 자체가 엄연히 따지면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의 산물이다. 기술로서 이루어진 그 사물이 어느 순간 마술과 같은 효과로 느꼈을 예전 우리 문화였다. 따지고 보면 요정들이 만들어낸 믿을 수 없는 일들은 모두가 비합리적이고 논리전개가 불가능한 것이나, 그들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하나의 귀결점이다. 논리와 합리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란 가치를 적용해보면 충분할 것이다. 어차피 미학 내지 문화는 그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입지에 따라 다르게 전개된다. 살아가는 공간이 다르면 생각하는 범주도 다른 것이다.

 

게다가 그 공간이 다른 것도 모자라 존재적 차이로서 시간적 관념도 다르다. 우리는 124시간을 모두 공평하게 받아들이나, 어느 대상에게 그 시간이란 모두 같지는 않다. 동양의 낮이 서양에는 밤이고, 서양의 낮이 동양의 밤이다. 지구 남반구와 북반구, 적도와 북극은 같은 시간을 줘도 다른 시간적 패턴을 지닌다. 그렇다면 24시간이 같은 조건으로 줘도 다른 시간처럼 느끼는 인간 이외의 존재들은 어떠한가? 이 작품 주인공인 조정관은 요정들이 만든 요상한 도구에 의해 몸이 작아지게 된다.

 

게다가 그 도구는 인간이 사용하는 숟가락처럼 생겼으며,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숫자가 자신의 지능이었고, 그 지능에 따라 자신의 신체적 구성 지지토대를 결정하는 것이다. 머리에 쑤시니 그대로 튕기고 나오는 게 아니라 머리에 꽂힌 채 밀가루가 나오면서 그 밀가루가 알고 보니 뇌가 가지고 능력과 신체적 능력이었다. 조정관은 자신의 뇌에너지를 소모함에 따라 지능이 떨어짐과 동시에 몸도 작아져 마치 요정처럼 변했다. 그런다고 하여도 요정처럼 신비의 기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

 

특이한 것은 자신은 인간이나 인간이 규모가 작아져서 일반적으로 대화가 불가능한 햄스터와 족제비와 대화가 되고, 평소에 알고지낸 요정 대신 다른 요정들과 말이 통하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변화는 시간적 변화다. 이성이 가진 판단력의 한계는 곧바로 시간의 관념을 124시간이 아니라 그보다 짧은 시간으로 되돌린다. 보통 생물의 수명에서 생물의 몸집이 크면 클수록 오래 사는 것이 통계적인 사례다. 인간이 70~80살 정도 살고, 개와 고양이 같은 작은 포유류는 10~20년 정도 산다. 개의 나이가 15세 넘어가면 인간으로 따지면 할머니 정도 된다고 하니, 그 시간이 비록 인간에게 20년이라도 그들에게는 80년 정도가 되는 것이다.

 

존재에 부여된 시간적 차이가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다를까? 몸집이 작아진 주인공은 자기가 보통 인간일 때의 모습과 작아진 자신에 모습에서 시간과 공간이 너무 다르게 받아들인다. 마치 수 십일이 지난 것 같이 생각했으나, 알고 보면 1일 정도만 지났다는 사실이 퍽 인상적이다. 수명이 엄청 짧은 생물이 자기보다 훨씬 수명이 긴 생물과 비교하여 심장박동수가 비슷하다는 사실에서 절대적인 시간이 아니라 상대적인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그렇다면 이렇게 상대적인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가? 주인공이 몸을 되찾고 나서 이것에 대한 동화 같은 이야기가 펼친다. 이 작품에서 주요인물은 3명이다. 조정관인 주인공, 주인공의 할아버지인 박사, 그리고 이들 옆에서 보조하는 조수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2권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조수와의 만남이다. 마치 시간과 공간을 해체하여 가역적인 일치는 모두 해체와 모순으로 틀어버리는 요정들은 그것을 두고 다정한 공간이라고 명한다.

 

그들에게 합리와 비합리와 구분도 없이 오로지 하고 싶은 것이 하나의 합리다. 이치가 적당하지 않으니, 조수와 만남에서 끊임없이 슬립타임을 하는 주인공에서 존재에 대한 그 각인을 다시금 확인한다. 인간의 오랜 학문 중에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라는 것이 있다. physics란 물리에 관한 것이기에 물리학이고, meta라는 것은 그 너머에 있는 의미다. 즉 사물이 가진 그 너머의 존재라면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은 세계를 다루는 것이 형이상학이란 영역이다. 이를테면 이 라이트노벨이 글자와 그림이란 것으로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눈으로 즉 형이하학적인 관찰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읽고 난 후에 이런 세계가 존재하지 않아도 가상적으로 존재해야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관념으로 빠진다. 생각하면 쉽게 풀이할 수 있으나, 깊이 들어가면 평생을 투자해도 난감하다.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삶과 죽음의 경계에도 눈을 돌리며, 플라톤의 저서 중에서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게 아니라 같이 하므로, 인간의 (생물적인)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idea의 세계에 진리가 있으므로 갈 수 있다는 것처럼, 이런 것을 조금 이해하면 이 책에서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다.

 

바로 조수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조수는 존재감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말을 들어도 그는 생물학적인 존재적 데이터인 키, 몸무게, 혈액형, 혈압, 성별은 식별가능해도 그 이후는 알 수 없다물리적으로 보면 그가 남자아이라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남자아이가 어떤 남자아이인가? 라는 것이다성격이나 생각, 태도, 취향과 취미 모두 알 수 없다. 게다가 그가 옆에 있어도 그가 있는 것을 각인할 수 없다. 여자의사가 조수를 붙잡고 있었고, 또한 주인공도 같이 붙잡고 있지만, 어느 순간 없어졌다. 그가 있다는 존재적 각인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조수라는 존재는 본인 자체에 대해 존재적 각인은 있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같이 개인적 존재적 각인은 완성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모인 사회라는 공간과 시간이 있어야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결국 내가 나로서 있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누군가의 존재로서 통해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고, 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비교대상이 없다면 이것이 무엇이라고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조수는 바로 그런 사회적 동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적 가치를 찾지 못했다. 그가 계속 이리저리 방황하고, 숲에서 돌아다닌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가장 어울리는 질문인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서적의 문구처럼 조수는 물리적 존재로 있지만, 왜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라는 모순적 상황에 놓인다. 하이데거의 설명을 빌려 말하자면, 인간의 눈에 나무라는 존재가 있다. 그러나 나무가 있더라도 그 나무에 대해 우리가 나무라고 불러주지 않는다면 나무가 아니다. 결국 나무가 나무로서 존재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사고에서 태어난 언어적 명명이다. 조수에게 그 언어적 명명으로 통한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드러내지 못했다.

 

거의 무()에 가까운 경지인 그는 자신의 존재적 부여를 위해 계속 고민하고, 이때 요정들의 다과회가 열린다. 요정들은 다과회는 2가의 효과가 있다. 요정들에게 많은 과자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과자를 만들 기술자가 필요하나, 인간에게 과자를 만들 기술마저 상실하기에 쿠스노기 마을에 유일한 과자제조 기술자인 주인공이 많이 필요했다. 요정들에게 인간이 인간으로서 실존적 존재가 아니라 비실존적 존재로서 존재해야만 했다. 인간 본인은 오직 자신 혼자만 있고, 혼자만이 자신의 행동을 실천해야 하는데, 요정들의 시간은 정지된 시간으로 인간이 시간적 존재라는 사실을 해체해 버린다.

 

덕분에 바나나를 먹은 후에 계속 자신의 복제 그 자체가 복제가 아닌 하나의 실존적인 존재가 됨에 따라 주인공은 숲속 다과회에서 수 없이 자신과 조우한다. 문제는 주인공은 자신과 같게 생기고, 게다가 그 많은 아가씨들이 모두 같이 생겼어도 그들이 자신이라고 혹은 그들이 모두 비슷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주인공이 질문을 던지면 모두 생각을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 대답의 방향은 조금씩 달랐다. 주인공의 복제가 진실로 복제가 아니라, 모두 하나의 자신이었다. 단지 자신이 가진 여러 단편적 부분들을 모조리 분리한 셈이다. 심지어 지금의 존재와 앞으로 미래의 존재까지 그 공간에 존재했다.

 

그러면서 대화주제는 조수에 대해서다. 조수에 대해 말하면서 조수가 어떤 사람이면 좋은가? 어떤 사람이길 바라는가? 라는 수다로 이어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인간은 자신의 천성으로 성격과 인품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 경험과 타인간의 접촉에서 비롯된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변증법적인 논리에서 부딪히면 결과론적인 조수의 존재가 형성된다. 건방지고 야한말만 늘여놓고, 남자와 모르는 사람을 꺼리는 주인공에게 장난스러운 조수는 주인공의 가슴과 엉덩이를 만지고, 심지어 볼에 뽀뽀도 한다. 그것에 대해 불쾌하게 여긴 주인공은 많은 자신과의 내면적 대화로 통해 머리칼은 부드럽고, 온순하고, 침착한 아이면 좋겠다고 한다.

 

덕분에 조수는 그런 성격이 되나, 문제는 그런 장난꾸러기 조수의 일면이 조수가 바란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가진 여러 가지 마음과 욕망 중에 하나라는 사실이다. 많은 자신과 조우한 주인공이 조수의 이상적 모습을 그릴 때 때로는 대담이라고 한다. 대담은 조수가 본래 대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 자신의 은연중에 바라는 1가지 속성인 것이다. 인간의 성격은 일관적이고 언제나 같을 수 없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단지 평소에 조수의 모습을 바라는 것이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2권 후반부의 숨은 의미다.

 

주인공의 소망이 간절한지 평소 조수의 모습은 조용하고 침착하고 주인공의 말을 잘 듣지만, 때로는 과감하고 용감하며 무모한 행위도 한다. 인간이란 모두 그런 속성이 들어가 있으니 말이다. 단지 그것은 조수의 그 자체보다는 요정들이 만든 다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주인공이 분리된 각각의 자아에 의해 형성된 점을 생각하면 인간이란 타인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것 자체에서도 존재적 형성이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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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공공장 2015-08-14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님 대박 @_@
천하제일 리뷰쓰기 대회라도 하셨어요? ㄷㄷㄷㄷ

만화애니비평 2015-08-15 22:50   좋아요 0 | URL
http://www.koscas.com/modules/doc/index.php?doc=intro

여기 정회원인데요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1 - J Novel
다나카 로미오 지음, 야마사키 토오루 그림, 곽형준 옮김 / 서울문화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 알게 된 동기는 우연히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봐서이다. 처음에는 소녀에서 벗어나 이제 막 숙녀로 된 머리카락이 긴 아가씨가 주인공에서 단순히 순정물인가 싶었으나, 알고 보니 black comedy 철철 넘치는 아이러니한 메르헨이었다. 그 이유는 인류는 쇠퇴했습니다란 말처럼 정말 인류는 쇠퇴했던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라이트노벨이란 점에서 조금 신선한 충격을 나에게 전해왔고, TV 애니메이션이 모두 12화로 종료되면서 나는 이 원작에 대한 도서를 읽어 볼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먼저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1권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유사한 기본적 맥락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문화인류학에 매우 관심이 많은데, 특히나 문화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문화와 사회 그리고 그곳의 인간에 대한 여러 가지 담론들에 관심을 가졌다. 물론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가 저술한 도서와 레비 스트로스의 서적 몇 권, 그런 학술적인 기본 토대가 되는 원전 텍스트까지 읽는 점에서 인류는 쇠퇴했습니다에 대한 재미는 그 상황이 아니라 작가가 서술해가는 망해가는 인류와 새로운 종족인 요정과의 관계가 무척 재미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私(일본어로 여성이 나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한자어)는 인간의 학문기관인 학사를 졸업한 마지막 학생으로 10년 동안 거기서 다양한 학문을 배운다. 그 중에서 인류학에 대해 배우면서 요정이란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요정이란 존재에 대해 어떻게 봐야할까? 기본적으로 문화인류학에서 특히 문화인류학이 문화유물론적인 관점이 들어간 점에서 메르헨의 주인공인 요정이란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실존적인 존재, 즉 생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학자들이 각 문명에 대한 조사에서 그들의 문화와 그 문화 속의 신화 내지 민담, 전설 등에 대한 구술기록에서 찾는 하나의 미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존재적으로 그 한정적인 영역, 즉 인간 개인이 살아가는 영역이 있듯이 인간과 인간이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역사로 만든 시간적 공간적 영역에서는 그 미신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그래서 요정이란 존재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은 존재이나, 인간이 상상력에 의한 미신세계에선 충분히 인식 아래 존재한다. 그것이 존재하기에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그것이 있다고 여기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존재론적인 각인에서 볼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관념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과 거기에 반대되는 문화유물론적인 적절하게 혼합된 것이 이 작품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라고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이 작품은 상당히 치밀한 사회구조를 밝혀두고 있다. 인간에게 생식력이 감퇴한 것인지 아니면 문화적 능력이 감퇴한 것인지 몰라도 적어도 자본주의구조가 해체되었다는 증거다. 자본주의구조라는 것은 결국 자본력, 현금이 모든 물건들의 지표가 되어 교환이 되고, 그것이 축척이 되어 하나의 소비의 척도와 그 척도에 대한 사회에 미치는 권력성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고전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가 저술한 국부론이 18세기 영국에서 이미 자본주의가 움을 트고 있었으나,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경제구조를 인간에게 주어졌다. 인간에게 경제적 상황은 결국 하부구조로 통해 상부구조로 이어지고, 화폐의 가치가 사라진 그 사회는 오로지 물건과 물건으로서 교환이란 시장문화가 형성된다. 물물교환은 각자의 필요에 의한 경제활동이므로 잉여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은 인간이 정말 재화나 사회적 인프라가 넘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물자부족과 더불어 인류 존립자체에 위기에 따른 생존의식이다.

 

물물교환으로 통해 필요한 것만큼 받아가고, 배급표에 의해 정해진 물건만 받으므로 인간에게 전쟁과 투쟁은 의미 없는 일이다.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로서 그의 연구실 벽에 보면 많은 총들이 걸려있다. 총은 인간에게 전쟁과 약탈의 의미한다. 그런데 그 총이 어느 노인의 취미를 위해 벽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인간에게 잉여적 가치를 탐내어 남을 침략하는 일들은 없다. 기껏 총을 사용하는 일이란 사냥으로 통한 단백질의 공급이다. 그 단백질의 공급원인 동물들도 큰 포유류는 이미 멸종한 상태이니, 이미 인류는 모든 면에서 쇠퇴했다.

 

주인공이 학교폐교에서 자신들에게 교육을 해야 할 교수나 교사들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죽고, 그 지식을 전수하지 못한 채 일부 도서로 의지해야 했다. 교육이란 것은 인간에게 하나의 사회적 기회를 부여함과 동시에 정치적, 경제적 척도에도 매우 중요하다. 학교교육으로 신분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으나, 그마저 정지되었고 문화라는 것은 끊임없이 재생산해야 존속이 가능하나 그 존속마저 위태롭다. 주인공이 고향으로 오면서 이동수단이 트럭이나 그 트럭도 속력을 크게 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트럭은 태양광으로 에너지를 만드는 하이브리드차량이다.

 

차량의 에너지가 석유라는 점에서 이미 석유가 고갈되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석유라는 화력에너지가 없기에 에너지는 비축이 불가능하고 수시로 사용이 불가하다. 절대적인 조건 아래서 가능하다고 하면, 거기에 대체되는 기술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트럭이 고장이 나면 재생 불가 판단이 나올 정도로 인류의 기술력은 소실되었고, 그 기술력의 원천인 교육기관이 재기능을 못하는 것은 재생산의 의미로서 상실한 사회현상을 의미한다.

 

그런 와중에 요정에게는 무한의 세계가 있다. 그들은 우리처럼 먹지도 않아도 살고, 정확하게 거주지가 일정하지 않아도 존재한다. 어디에 얼마나 사는지 수명과 신체적 구조와 기능조차 판단조차 불가하다. 주인공이 맡은 임무는 UN에서 조정관을 수행하는 것이다. 인간과 요정의 매개체로서 그들의 문화를 대하면서 소통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왜 문화인류학인가? 라는 키워드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인류학이란 단순히 원시부족이나 멸망한 모아이석상만 쫓아가는 게 아니라 현대사회의 인간과 그 인간의 문화 역시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객관적인 시점의 문화인류학이 요정이란 전설적 존재와 마주하는 점에서 매우 모순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이 작품은 가치가 보인다. 요정이 하는 행동에서 인간의 행동역사를 매우 단기간으로 잡아낸다. 주인공이 치쿠와라는 요정을 볼 때 그들은 종교의식을 나타낸다. 원시부족 놀이에서 영웅이 마치 군중 앞에 나타나 신에게 선택된 존재라고 하는 제정일치 사회의 샤머니즘에서 종이로 만든 공룡을 죽이고, 그 공룡의 탈을 쓴 토템이즘, 심지어는 애니미즘까지 발전한다.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서 종교는 단순히 신앙심에서 비롯되기보다는 일련의 주술성 내지 놀이에서 비유된다. 어느 특정조직의 통일성과 영구성, 정치사회적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종교적인 기능을 한 것이다. 지금이야 제정분리사회라고 하나, 고대사회는 제정일치 사회다. 그런 모습을 요정들이 심심풀이로 만든 3기 즉 쥐라기 시대다. 4기는 빙하기의 메머드가 나오고, 5기는 포유류의 시기로 나온다. 단지 조금 역설적이나 인류는 메머드가 나온 빙하기와 그 이후에 나온다. 백악기와 쥐라기 시대에 공룡이 활보할 때는 본래의 인간은 없다. 단지 인간에게 투쟁이란 생존본능은 살기위한 존재적 의무라면, 요정에게 재미를 위한 놀이였다.

 

본래 주술과 종교, 사냥의식 등이 결국 놀이로서 이어져 온다. 생각해보면 헬로윈 파티 역시 처음에는 서양시대에 마녀와 관련된 일화에서 지금은 전 지구적 놀이로 전환된다. 의식이 결국 놀이로 전환된 것이다. 요정에게 인간의 역사적 행위들 모두가 놀이로 변모했다. 아니라면 주인공이 처음 요정의 서식처에 가서 깃발을 꽂고 난 후 다음날에 가니 마치 SF미래영화에 나올 것 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인간에게 과정의 하나라면 그들에겐 과정이 아닌 그저 놀이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들 요정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편이 오히려 안정한 상태를 만든다. 요정에 대해 인간의 역사를 빗대어보면 인간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면 문명의 생성과 파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나, 인간이 만들어낸 그 자체로서 생성과 파괴가 일어난다. 심지어 요정에게 다가간 주인공이 이름이 없는 요정에게 이름을 준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본래 말로서 전파될 시기에 인간의 이성은 매우 한정적인 가치였고, 지식이란 곧 권력이었다. 과학기술이 뛰어나도 문자문화가 없던 요정에게 문자문화는 큰 충격이었다. 문자문화 이전에는 구술문화가 존재했고, 구술문화에서는 기록이 존재할 수 없기에 절대적인 존재가 없었다.

 

하지만 문자가 생기고, 그 속에 어떤 이념적 가치를 집어넣음으로서 하나의 체계와 이념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주인공이 신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신이란 한편으로 보면 매우 피곤한 점을 알 수 있다. 모두의 욕망과 자신들의 책임회피의식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어이없는 재미와 황당한 사건으로 꾸려나가고, 그 속에 착실한 내용이 전개된다. 주인공이 할아버지와 대화하면서 홉스가 나온다. 토마스 홉스라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국가권력의 중요성을 설명한 사상가다. 이미 인류가 쇠퇴하고, 인간의 잉여적 가치가 상실해가는 주인공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홉스의 사상은 폐기된 사상이나, 적어도 인류의 문화가 쇠퇴한 편이 평화롭다는 설정은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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