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쇠퇴했습니다 1 - J Novel
다나카 로미오 지음, 야마사키 토오루 그림, 곽형준 옮김 / 서울문화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 알게 된 동기는 우연히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봐서이다. 처음에는 소녀에서 벗어나 이제 막 숙녀로 된 머리카락이 긴 아가씨가 주인공에서 단순히 순정물인가 싶었으나, 알고 보니 black comedy 철철 넘치는 아이러니한 메르헨이었다. 그 이유는 인류는 쇠퇴했습니다란 말처럼 정말 인류는 쇠퇴했던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라이트노벨이란 점에서 조금 신선한 충격을 나에게 전해왔고, TV 애니메이션이 모두 12화로 종료되면서 나는 이 원작에 대한 도서를 읽어 볼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먼저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1권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유사한 기본적 맥락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문화인류학에 매우 관심이 많은데, 특히나 문화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문화와 사회 그리고 그곳의 인간에 대한 여러 가지 담론들에 관심을 가졌다. 물론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가 저술한 도서와 레비 스트로스의 서적 몇 권, 그런 학술적인 기본 토대가 되는 원전 텍스트까지 읽는 점에서 인류는 쇠퇴했습니다에 대한 재미는 그 상황이 아니라 작가가 서술해가는 망해가는 인류와 새로운 종족인 요정과의 관계가 무척 재미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私(일본어로 여성이 나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한자어)는 인간의 학문기관인 학사를 졸업한 마지막 학생으로 10년 동안 거기서 다양한 학문을 배운다. 그 중에서 인류학에 대해 배우면서 요정이란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요정이란 존재에 대해 어떻게 봐야할까? 기본적으로 문화인류학에서 특히 문화인류학이 문화유물론적인 관점이 들어간 점에서 메르헨의 주인공인 요정이란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실존적인 존재, 즉 생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학자들이 각 문명에 대한 조사에서 그들의 문화와 그 문화 속의 신화 내지 민담, 전설 등에 대한 구술기록에서 찾는 하나의 미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존재적으로 그 한정적인 영역, 즉 인간 개인이 살아가는 영역이 있듯이 인간과 인간이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역사로 만든 시간적 공간적 영역에서는 그 미신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그래서 요정이란 존재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은 존재이나, 인간이 상상력에 의한 미신세계에선 충분히 인식 아래 존재한다. 그것이 존재하기에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그것이 있다고 여기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존재론적인 각인에서 볼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관념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과 거기에 반대되는 문화유물론적인 적절하게 혼합된 것이 이 작품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라고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이 작품은 상당히 치밀한 사회구조를 밝혀두고 있다. 인간에게 생식력이 감퇴한 것인지 아니면 문화적 능력이 감퇴한 것인지 몰라도 적어도 자본주의구조가 해체되었다는 증거다. 자본주의구조라는 것은 결국 자본력, 현금이 모든 물건들의 지표가 되어 교환이 되고, 그것이 축척이 되어 하나의 소비의 척도와 그 척도에 대한 사회에 미치는 권력성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고전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가 저술한 국부론이 18세기 영국에서 이미 자본주의가 움을 트고 있었으나,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경제구조를 인간에게 주어졌다. 인간에게 경제적 상황은 결국 하부구조로 통해 상부구조로 이어지고, 화폐의 가치가 사라진 그 사회는 오로지 물건과 물건으로서 교환이란 시장문화가 형성된다. 물물교환은 각자의 필요에 의한 경제활동이므로 잉여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은 인간이 정말 재화나 사회적 인프라가 넘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물자부족과 더불어 인류 존립자체에 위기에 따른 생존의식이다.

 

물물교환으로 통해 필요한 것만큼 받아가고, 배급표에 의해 정해진 물건만 받으므로 인간에게 전쟁과 투쟁은 의미 없는 일이다.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로서 그의 연구실 벽에 보면 많은 총들이 걸려있다. 총은 인간에게 전쟁과 약탈의 의미한다. 그런데 그 총이 어느 노인의 취미를 위해 벽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인간에게 잉여적 가치를 탐내어 남을 침략하는 일들은 없다. 기껏 총을 사용하는 일이란 사냥으로 통한 단백질의 공급이다. 그 단백질의 공급원인 동물들도 큰 포유류는 이미 멸종한 상태이니, 이미 인류는 모든 면에서 쇠퇴했다.

 

주인공이 학교폐교에서 자신들에게 교육을 해야 할 교수나 교사들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죽고, 그 지식을 전수하지 못한 채 일부 도서로 의지해야 했다. 교육이란 것은 인간에게 하나의 사회적 기회를 부여함과 동시에 정치적, 경제적 척도에도 매우 중요하다. 학교교육으로 신분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으나, 그마저 정지되었고 문화라는 것은 끊임없이 재생산해야 존속이 가능하나 그 존속마저 위태롭다. 주인공이 고향으로 오면서 이동수단이 트럭이나 그 트럭도 속력을 크게 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트럭은 태양광으로 에너지를 만드는 하이브리드차량이다.

 

차량의 에너지가 석유라는 점에서 이미 석유가 고갈되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석유라는 화력에너지가 없기에 에너지는 비축이 불가능하고 수시로 사용이 불가하다. 절대적인 조건 아래서 가능하다고 하면, 거기에 대체되는 기술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트럭이 고장이 나면 재생 불가 판단이 나올 정도로 인류의 기술력은 소실되었고, 그 기술력의 원천인 교육기관이 재기능을 못하는 것은 재생산의 의미로서 상실한 사회현상을 의미한다.

 

그런 와중에 요정에게는 무한의 세계가 있다. 그들은 우리처럼 먹지도 않아도 살고, 정확하게 거주지가 일정하지 않아도 존재한다. 어디에 얼마나 사는지 수명과 신체적 구조와 기능조차 판단조차 불가하다. 주인공이 맡은 임무는 UN에서 조정관을 수행하는 것이다. 인간과 요정의 매개체로서 그들의 문화를 대하면서 소통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왜 문화인류학인가? 라는 키워드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인류학이란 단순히 원시부족이나 멸망한 모아이석상만 쫓아가는 게 아니라 현대사회의 인간과 그 인간의 문화 역시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객관적인 시점의 문화인류학이 요정이란 전설적 존재와 마주하는 점에서 매우 모순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이 작품은 가치가 보인다. 요정이 하는 행동에서 인간의 행동역사를 매우 단기간으로 잡아낸다. 주인공이 치쿠와라는 요정을 볼 때 그들은 종교의식을 나타낸다. 원시부족 놀이에서 영웅이 마치 군중 앞에 나타나 신에게 선택된 존재라고 하는 제정일치 사회의 샤머니즘에서 종이로 만든 공룡을 죽이고, 그 공룡의 탈을 쓴 토템이즘, 심지어는 애니미즘까지 발전한다.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서 종교는 단순히 신앙심에서 비롯되기보다는 일련의 주술성 내지 놀이에서 비유된다. 어느 특정조직의 통일성과 영구성, 정치사회적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종교적인 기능을 한 것이다. 지금이야 제정분리사회라고 하나, 고대사회는 제정일치 사회다. 그런 모습을 요정들이 심심풀이로 만든 3기 즉 쥐라기 시대다. 4기는 빙하기의 메머드가 나오고, 5기는 포유류의 시기로 나온다. 단지 조금 역설적이나 인류는 메머드가 나온 빙하기와 그 이후에 나온다. 백악기와 쥐라기 시대에 공룡이 활보할 때는 본래의 인간은 없다. 단지 인간에게 투쟁이란 생존본능은 살기위한 존재적 의무라면, 요정에게 재미를 위한 놀이였다.

 

본래 주술과 종교, 사냥의식 등이 결국 놀이로서 이어져 온다. 생각해보면 헬로윈 파티 역시 처음에는 서양시대에 마녀와 관련된 일화에서 지금은 전 지구적 놀이로 전환된다. 의식이 결국 놀이로 전환된 것이다. 요정에게 인간의 역사적 행위들 모두가 놀이로 변모했다. 아니라면 주인공이 처음 요정의 서식처에 가서 깃발을 꽂고 난 후 다음날에 가니 마치 SF미래영화에 나올 것 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인간에게 과정의 하나라면 그들에겐 과정이 아닌 그저 놀이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들 요정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편이 오히려 안정한 상태를 만든다. 요정에 대해 인간의 역사를 빗대어보면 인간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면 문명의 생성과 파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나, 인간이 만들어낸 그 자체로서 생성과 파괴가 일어난다. 심지어 요정에게 다가간 주인공이 이름이 없는 요정에게 이름을 준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본래 말로서 전파될 시기에 인간의 이성은 매우 한정적인 가치였고, 지식이란 곧 권력이었다. 과학기술이 뛰어나도 문자문화가 없던 요정에게 문자문화는 큰 충격이었다. 문자문화 이전에는 구술문화가 존재했고, 구술문화에서는 기록이 존재할 수 없기에 절대적인 존재가 없었다.

 

하지만 문자가 생기고, 그 속에 어떤 이념적 가치를 집어넣음으로서 하나의 체계와 이념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주인공이 신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신이란 한편으로 보면 매우 피곤한 점을 알 수 있다. 모두의 욕망과 자신들의 책임회피의식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어이없는 재미와 황당한 사건으로 꾸려나가고, 그 속에 착실한 내용이 전개된다. 주인공이 할아버지와 대화하면서 홉스가 나온다. 토마스 홉스라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국가권력의 중요성을 설명한 사상가다. 이미 인류가 쇠퇴하고, 인간의 잉여적 가치가 상실해가는 주인공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홉스의 사상은 폐기된 사상이나, 적어도 인류의 문화가 쇠퇴한 편이 평화롭다는 설정은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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