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쇠퇴했습니다 2 - J Novel
다나카 로미오 지음, 야마사키 토오루 그림, 곽형준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2권을 열어보면서 역시나 이 책은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읽다가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에서 유명한 시인 워즈워스의 이름이 튀어나올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와 관련된 인물로 존 러스킨이란 예술가는 자연에 접하지 않고, 예술은 태어나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사실 생각하면 모든 미적인 가치를 인간 스스로 관념하면서 만들어간다고 해도, 그 관념이 대상의 시초는 자연이다. 자연이야 말로 모든 인간의 시작이면서 끝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동물로 태어나고,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어떤 방식으로 통해서든 말이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에서 인간의 존재를 두고 매우 자연의 조건에 밀접한 존재로 나온다. 식량이 예전만큼 나오지 않거나 혹은 에너지가 없다거나 말이다. 인간에게 문명이란 시간과 공간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물론 인간의 노동이나 그 노동의 투여대상이 자연이란 점에서 이미 인류의 쇠퇴가 자연적인 원인이란 점도 고려하면 충분하다. 이와 달리 신인류라는 요정은 자연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 식량이 없으면 칼로리 부족으로 생명의 지장을 초래하는 인간들과 달리 그들은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단지 그들은 즐기는 문화를 좋아한다. 유희적인 인간상인 것이다. 덕분에 맛있는 과자와 사탕, 초콜릿이 없다면 그들에게 먹을 것이란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들은 뛰어난 문화기술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 기술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이고 이론으로서 설명이 가능한 정밀함이 전혀 없고, 대신 상상을 초월한 기술 그 자체가 이미 마술과 맞먹는다는 사실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예전에 한국에서 TV가 막 들어올 때 사람들은 TV를 처음 보고 모두 놀라 어쩔 줄 모르거나 TV안의 목소리가 들리니 그것이 직접 자신과 대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착각했다고 한다.

 

TV라는 자체가 엄연히 따지면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의 산물이다. 기술로서 이루어진 그 사물이 어느 순간 마술과 같은 효과로 느꼈을 예전 우리 문화였다. 따지고 보면 요정들이 만들어낸 믿을 수 없는 일들은 모두가 비합리적이고 논리전개가 불가능한 것이나, 그들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하나의 귀결점이다. 논리와 합리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란 가치를 적용해보면 충분할 것이다. 어차피 미학 내지 문화는 그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입지에 따라 다르게 전개된다. 살아가는 공간이 다르면 생각하는 범주도 다른 것이다.

 

게다가 그 공간이 다른 것도 모자라 존재적 차이로서 시간적 관념도 다르다. 우리는 124시간을 모두 공평하게 받아들이나, 어느 대상에게 그 시간이란 모두 같지는 않다. 동양의 낮이 서양에는 밤이고, 서양의 낮이 동양의 밤이다. 지구 남반구와 북반구, 적도와 북극은 같은 시간을 줘도 다른 시간적 패턴을 지닌다. 그렇다면 24시간이 같은 조건으로 줘도 다른 시간처럼 느끼는 인간 이외의 존재들은 어떠한가? 이 작품 주인공인 조정관은 요정들이 만든 요상한 도구에 의해 몸이 작아지게 된다.

 

게다가 그 도구는 인간이 사용하는 숟가락처럼 생겼으며,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숫자가 자신의 지능이었고, 그 지능에 따라 자신의 신체적 구성 지지토대를 결정하는 것이다. 머리에 쑤시니 그대로 튕기고 나오는 게 아니라 머리에 꽂힌 채 밀가루가 나오면서 그 밀가루가 알고 보니 뇌가 가지고 능력과 신체적 능력이었다. 조정관은 자신의 뇌에너지를 소모함에 따라 지능이 떨어짐과 동시에 몸도 작아져 마치 요정처럼 변했다. 그런다고 하여도 요정처럼 신비의 기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

 

특이한 것은 자신은 인간이나 인간이 규모가 작아져서 일반적으로 대화가 불가능한 햄스터와 족제비와 대화가 되고, 평소에 알고지낸 요정 대신 다른 요정들과 말이 통하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변화는 시간적 변화다. 이성이 가진 판단력의 한계는 곧바로 시간의 관념을 124시간이 아니라 그보다 짧은 시간으로 되돌린다. 보통 생물의 수명에서 생물의 몸집이 크면 클수록 오래 사는 것이 통계적인 사례다. 인간이 70~80살 정도 살고, 개와 고양이 같은 작은 포유류는 10~20년 정도 산다. 개의 나이가 15세 넘어가면 인간으로 따지면 할머니 정도 된다고 하니, 그 시간이 비록 인간에게 20년이라도 그들에게는 80년 정도가 되는 것이다.

 

존재에 부여된 시간적 차이가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다를까? 몸집이 작아진 주인공은 자기가 보통 인간일 때의 모습과 작아진 자신에 모습에서 시간과 공간이 너무 다르게 받아들인다. 마치 수 십일이 지난 것 같이 생각했으나, 알고 보면 1일 정도만 지났다는 사실이 퍽 인상적이다. 수명이 엄청 짧은 생물이 자기보다 훨씬 수명이 긴 생물과 비교하여 심장박동수가 비슷하다는 사실에서 절대적인 시간이 아니라 상대적인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그렇다면 이렇게 상대적인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가? 주인공이 몸을 되찾고 나서 이것에 대한 동화 같은 이야기가 펼친다. 이 작품에서 주요인물은 3명이다. 조정관인 주인공, 주인공의 할아버지인 박사, 그리고 이들 옆에서 보조하는 조수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2권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조수와의 만남이다. 마치 시간과 공간을 해체하여 가역적인 일치는 모두 해체와 모순으로 틀어버리는 요정들은 그것을 두고 다정한 공간이라고 명한다.

 

그들에게 합리와 비합리와 구분도 없이 오로지 하고 싶은 것이 하나의 합리다. 이치가 적당하지 않으니, 조수와 만남에서 끊임없이 슬립타임을 하는 주인공에서 존재에 대한 그 각인을 다시금 확인한다. 인간의 오랜 학문 중에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라는 것이 있다. physics란 물리에 관한 것이기에 물리학이고, meta라는 것은 그 너머에 있는 의미다. 즉 사물이 가진 그 너머의 존재라면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은 세계를 다루는 것이 형이상학이란 영역이다. 이를테면 이 라이트노벨이 글자와 그림이란 것으로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눈으로 즉 형이하학적인 관찰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읽고 난 후에 이런 세계가 존재하지 않아도 가상적으로 존재해야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관념으로 빠진다. 생각하면 쉽게 풀이할 수 있으나, 깊이 들어가면 평생을 투자해도 난감하다.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삶과 죽음의 경계에도 눈을 돌리며, 플라톤의 저서 중에서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게 아니라 같이 하므로, 인간의 (생물적인)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idea의 세계에 진리가 있으므로 갈 수 있다는 것처럼, 이런 것을 조금 이해하면 이 책에서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다.

 

바로 조수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조수는 존재감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말을 들어도 그는 생물학적인 존재적 데이터인 키, 몸무게, 혈액형, 혈압, 성별은 식별가능해도 그 이후는 알 수 없다물리적으로 보면 그가 남자아이라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남자아이가 어떤 남자아이인가? 라는 것이다성격이나 생각, 태도, 취향과 취미 모두 알 수 없다. 게다가 그가 옆에 있어도 그가 있는 것을 각인할 수 없다. 여자의사가 조수를 붙잡고 있었고, 또한 주인공도 같이 붙잡고 있지만, 어느 순간 없어졌다. 그가 있다는 존재적 각인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조수라는 존재는 본인 자체에 대해 존재적 각인은 있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같이 개인적 존재적 각인은 완성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모인 사회라는 공간과 시간이 있어야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결국 내가 나로서 있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누군가의 존재로서 통해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고, 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비교대상이 없다면 이것이 무엇이라고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조수는 바로 그런 사회적 동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적 가치를 찾지 못했다. 그가 계속 이리저리 방황하고, 숲에서 돌아다닌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가장 어울리는 질문인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서적의 문구처럼 조수는 물리적 존재로 있지만, 왜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라는 모순적 상황에 놓인다. 하이데거의 설명을 빌려 말하자면, 인간의 눈에 나무라는 존재가 있다. 그러나 나무가 있더라도 그 나무에 대해 우리가 나무라고 불러주지 않는다면 나무가 아니다. 결국 나무가 나무로서 존재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사고에서 태어난 언어적 명명이다. 조수에게 그 언어적 명명으로 통한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드러내지 못했다.

 

거의 무()에 가까운 경지인 그는 자신의 존재적 부여를 위해 계속 고민하고, 이때 요정들의 다과회가 열린다. 요정들은 다과회는 2가의 효과가 있다. 요정들에게 많은 과자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과자를 만들 기술자가 필요하나, 인간에게 과자를 만들 기술마저 상실하기에 쿠스노기 마을에 유일한 과자제조 기술자인 주인공이 많이 필요했다. 요정들에게 인간이 인간으로서 실존적 존재가 아니라 비실존적 존재로서 존재해야만 했다. 인간 본인은 오직 자신 혼자만 있고, 혼자만이 자신의 행동을 실천해야 하는데, 요정들의 시간은 정지된 시간으로 인간이 시간적 존재라는 사실을 해체해 버린다.

 

덕분에 바나나를 먹은 후에 계속 자신의 복제 그 자체가 복제가 아닌 하나의 실존적인 존재가 됨에 따라 주인공은 숲속 다과회에서 수 없이 자신과 조우한다. 문제는 주인공은 자신과 같게 생기고, 게다가 그 많은 아가씨들이 모두 같이 생겼어도 그들이 자신이라고 혹은 그들이 모두 비슷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주인공이 질문을 던지면 모두 생각을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 대답의 방향은 조금씩 달랐다. 주인공의 복제가 진실로 복제가 아니라, 모두 하나의 자신이었다. 단지 자신이 가진 여러 단편적 부분들을 모조리 분리한 셈이다. 심지어 지금의 존재와 앞으로 미래의 존재까지 그 공간에 존재했다.

 

그러면서 대화주제는 조수에 대해서다. 조수에 대해 말하면서 조수가 어떤 사람이면 좋은가? 어떤 사람이길 바라는가? 라는 수다로 이어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인간은 자신의 천성으로 성격과 인품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 경험과 타인간의 접촉에서 비롯된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변증법적인 논리에서 부딪히면 결과론적인 조수의 존재가 형성된다. 건방지고 야한말만 늘여놓고, 남자와 모르는 사람을 꺼리는 주인공에게 장난스러운 조수는 주인공의 가슴과 엉덩이를 만지고, 심지어 볼에 뽀뽀도 한다. 그것에 대해 불쾌하게 여긴 주인공은 많은 자신과의 내면적 대화로 통해 머리칼은 부드럽고, 온순하고, 침착한 아이면 좋겠다고 한다.

 

덕분에 조수는 그런 성격이 되나, 문제는 그런 장난꾸러기 조수의 일면이 조수가 바란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가진 여러 가지 마음과 욕망 중에 하나라는 사실이다. 많은 자신과 조우한 주인공이 조수의 이상적 모습을 그릴 때 때로는 대담이라고 한다. 대담은 조수가 본래 대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 자신의 은연중에 바라는 1가지 속성인 것이다. 인간의 성격은 일관적이고 언제나 같을 수 없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단지 평소에 조수의 모습을 바라는 것이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2권 후반부의 숨은 의미다.

 

주인공의 소망이 간절한지 평소 조수의 모습은 조용하고 침착하고 주인공의 말을 잘 듣지만, 때로는 과감하고 용감하며 무모한 행위도 한다. 인간이란 모두 그런 속성이 들어가 있으니 말이다. 단지 그것은 조수의 그 자체보다는 요정들이 만든 다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주인공이 분리된 각각의 자아에 의해 형성된 점을 생각하면 인간이란 타인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것 자체에서도 존재적 형성이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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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공공장 2015-08-14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님 대박 @_@
천하제일 리뷰쓰기 대회라도 하셨어요? ㄷㄷㄷㄷ

만화애니비평 2015-08-15 22:50   좋아요 0 | URL
http://www.koscas.com/modules/doc/index.php?doc=intro

여기 정회원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