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통의 죽음
게오르그 뷔히너 지음, 최병준 옮김 / 예니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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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당통>이란 영화 일부분을 잠시 본 적이 있었다. 영화를 상영해서가 아니라, 잠시 명장면만을 보여준 모습이다. 그 장면은 프랑스혁명 이후 국민들을 위해 설치했다고 하나 막상 그러지 못한 혁명재판소였다. 그곳에서 당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모두 당통의 죽음을 가지고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이때 등장한 인물 로베스피에르, 그의 차갑고 냉혹한 눈빛과 말투가 모두를 사로잡고, 광기에 빠졌는지 아니면 이성의 착각에 빠졌는지, 모두가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부르고 있었다.

 

이미 재판장은 공정한 재판이 존재하기 위해 설치된 게 아니라 단지 피를 그리고 목을 원하는 마녀사냥 합의소로 변질되었다. 그런 당통이란 이름을 내가 어디서 들었을까? 예전에 영국으로 망명한 아서 쾨슬러라는 작가의 <한낮의 어둠>에서이다. <한낮의 어둠>은 처음 알게 된 동기는 프랑스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폭력과 휴머니즘>이란 작품에서 처음 알았고, 그 후에 내가 그 책을 찾아보았다. 온갖 냉소와 회의와 갈등이 버무러진 이 소설에서 아주 강렬한 냉소주의자인 루바쇼프라는 남성이 나온다.

 

그는 191710월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영웅이었다. 소설 설정에서 그가 말한 어른인 레닌과 같이 러시아 차르정권과 케렌스키정권까지 전복한 러시아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탈린의 대숙청이란 무서운 피의 재물에 자신의 목 뒤에서 울리는 권총 소리에 쓰러진다. 사형집행 당일에 사형장에서 처형되는 게 아니라 감옥에서 어디론가 이동할 때 뒤에서 그의 목을 노리고 사격하는 것이다. 그렇게 죽던 루바쇼프의 심문에서 당통이란 이름이 나온다.

 

러시아혁명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시작하여 결국 대숙청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죽음으로 마감한다. 그런 마르크스주의자 입에서 당통이란 이름이 튀어나온다. 당통이 누구인가? 당통이 어떤 인물이기에 그 냉소주의자 입에서 그의 이름과 그가 연설한 문장들을 외우고 있다는 말인가? 아쉽게도 당통이 직접 연설한 문장이 하나도 안 나오고, 그 연설이 언제 어디서 했는지도 모른다. 단지 유추할 가능성은 1792년 프랑스혁명 이후 외국의 침입에서 당통이 직접 국민들 앞에 나서서 연설로 통해 그 전쟁에서 승리를 잡은 것이다.

 

그것은 191710월 러시아혁명 이후 서구열강과 차르정권 시대의 귀족과 장교들이 다시 내전으로 러시아를 어둠의 시기로 만들 때 트로츠키가 한 연설과 비슷할 것이다. 역사의 반복은 정말 계속 이어지는가? 당통은 연설을 하여 프랑스를 지켰지만, 기요틴 아래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찾았으며, 트로츠키도 러시아를 지켰으나,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저 멀리 남미 땅에서 영원히 타도해야 할 스탈린에게 살해당했으나 소비에트연방 붕괴 이후 그의 승리가 되었다.

 

역사 앞에서 항상 정의가 패배하더라도 역사 후에는 정의가 승리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 승리라는 이름 아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고, 많은 공포와 파괴의 시간이 우리 인류를 엄습했다. 그래서 프랑스, 독일, 영국과 같은 유럽 국가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거친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로 그 당통의 죽음이란 그 비극과 같은 시작을 알리는 도화선이었다. 러시아혁명에서 많은 혁명가들이 프랑스혁명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프랑스 국민들이 계속 폭력과 억압에 저항한 것을 항상 마음에 새겼다.

 

그러나 혁명은 어느 새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처럼 혁명 자체가 오히려 역사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혁명이 인간을 만든 것인가? 인간이 혁명을 만든 것인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결국 덕치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결국 17944월 당통의 목이 단두대의 이슬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3개월 후 7월 말에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일당들은 테르미도르파의 결정 아래 결국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당통이 죽음을 오히려 허무한 무에 대한 욕망으로 받아들이는 타나토스의 미학에서 오히려 당통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혁명은 자신의 목처럼 그저 사라질 안개와 같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죽기 전에는 분명 열성적인 자코뱅당원이었다. 그는 처음에 지롱드당의 일원이었으나, 마음을 바꾸어 자코뱅당으로서 열성적이고 혁명재판소도 만들었다. 그러나 혁명재판소의 결정은 2가지다. 사형 혹은 무죄, 결국 사형만이 기다리는 재판에서 수많은 목들이 바람처럼 이슬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당통에겐 마음이 차는 것보다 마음이 떨어져 가는 것이 느낀다. 당통은 알고 있다. 저 단두대 아래 사라져간 희생양들이 늘어가고 있어도, 프랑스 국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고, 길 거리의 창녀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당통 역시 그 창녀들과 어울린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삶에 대한 열망으로 일으킨 혁명이 오히려 폭력과 광기로 변하자 그의 삶의 열정은 육체에 대한 간절함이다. 창녀가 처음부터 창녀가 아니라 오히려 창녀로 될 수밖에 없던 그 비운 한 현실에서 당통은 그들과 있다.

 

당통은 특권의식이나 절대적 추구사항이 없다. 로베스피에르의 충직하면서 어리석은 부하 죽음의 사제인 생 쥐스트는 그런 당통을 저주했다. 그는 혁명위원, 국민위원은 모든 국민들에게 추앙받아야 할 존재라고 생각했다. 왕권의 자리에 그 앙시앵레짐의 자리에 단지 혁명정권만 있었고, 독단적 독재는 영원했다. 그들은 국민들의 배고픔과 절망에서 혁명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았지만, 그 배고픔과 절망을 구원하지 못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그 절망의 분노를 대체할 죽음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왕족, 귀족, 지롱드당원, 이제는 내부의 적까지 이어진다. 인간이란 여기서부터 추악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은 정말 인간에겐 좋고 착한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을 좋고 착하게 보일 사람들이 필요하다. 즉 나쁘고 못된 사람이 필요하다.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에서 승리하는 것이 곧 정의란 사실이 당통의 죽음을 부른다. 당통은 이분법의 논리에 갇힌 프랑스를 걱정했다. 자신만의 자유만을 외치는 자유를 두려워했다. 나만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가 있기에 자신의 자유가 가능하다.

 

결국 프랑스는 나폴레옹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 열기와 광기에 빠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의 해결책은 오로지 전쟁이다. 적이 필요한 것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프랑스 사람들이다. !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에서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루소의 답답한 심정이 그렇게도 돋보였는가? 그렇게 루소가 외쳤는데도 <당통의 죽음>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사회계약론>을 들고 루소를 괴물의 아버지로 만드는가?

 

<당통의 죽음>에서 시민과 군중들의 대화를 보면 그들의 순간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논리가 상실한 그 상식박탈이 오히려 모든 것을 이루었다. 결국 그것을 간과한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는 목이 달아났다. 또한 그들의 목을 달아나게 한 이들은 전쟁에서 열기를 뿜는다. 또한 나폴레옹 역시 내친다. 인간이 왜 신화적인 존재인가? 신화에 영웅이 필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대신 보이게 하거나 또는 그 추악함을 감추기 위한 대리자인가?

 

역사는 바로 신화로 만들어진 이야기고, 그것은 후세에게 역사적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또 다른 신화를 창조한다.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당통의 죽음>은 게오르크 뷔히너가 저술한 연극대본이나, 그것은 현재까지도 재현된다. 영화 <당통>은 아마 이 책에서 많은 영감을 받지 않았는가? 영화 <당통>의 로베스피에르의 표정은 절대적인 폭력과 폭력적인 원칙만 가진 감정 없는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강력했으며, 그 혁명과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래도 그의 이름은 계속 나온다.

 

로베스피에르가 나오면 같은 자코뱅당의 당통도 나온다. 두 사람은 동지였으나 적이었다. 인간 최고의 적은 그 자신들의 모습인가? 이 연극대본인 <당통의 죽음>은 매우 역사적인 인물이 나오나 매우 철학적인 부분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당통과 로베스피에르가 아닌 주변 인물들보다 더 주변인 다수의 대중에서 말이다. 대중은 시민인가? 군중인가? 그들의 모습은 숨어있으나, 우리 일상과 제일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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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
조병준 지음 / 예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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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인도에 있는 타지마할을 보면서 감격하면서 그 격동의 감정이 그의 온몸은 감싸 안을 정도일 때 그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을 베여 나온다고 한다. 건축물에 대한 인간이 가진 하나의 신성성과 숭고함에서 일까? 만약 내가 타지마할에서 가서 가슴을 찌르는 알 수 없는 감정과 그리고 그 감정에서 눈물이 나와야 한다면 그 건축물이 가지는 위대한 아름다움 그 미()에 대한 찬양보다는 그 미에 희생에 대한 추()에 대한 미학(美學)일 것이다.

 

타지마할 그것을 세우기 위해 인도 당시 왕은 수많은 백성들을 굶주림과 고통, 그리고 눈물의 나락으로 보내야 했다. 아름다움을 위한 희생이 결코 정당화된다는 자체가 나는 원하지 않는 미적인 가치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거대한 고분이나 왕궁,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중국의 진시황 무덤과 만리장성, 그리고 수많은 인류 문명 유적지들, 그들의 행위는 지금의 인간에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뒤에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다.

 

지금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희생이란 과거의 존재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희생이 다른 눈물과 고통이 우리 현실에서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신화적인 존재다. 개인이 죽어도 개인이 속한 사회는 죽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은 그 사회라는 공간에서 영원해지기 위해 신화적 욕망을 품는다. 인류가 소멸하지 않을 그 마지막 그날까지 우리의 신화는 멈추지 않는다. 신화의 전복은 또 다른 전복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조병준 작가가 만든 에세이집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는 그런 신화조차도 아름다운 여명으로 아니라면 황혼으로 보는 것인가? 다소 나와 다른 가치관을 지녔기에 그의 가치관에 대해 딱히 비난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그의 인생과 나의 인생은 완벽히 분리되어 있고, 그는 실존적인 인간으로 존재하니 말이다. 그가 보여준 책은 마치 일상적인 사람들에게 하나의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 환상은 그에겐 현실이었다. 환상이 사실인가? 현실이 사실인가? 진실은 언제나 하나이나, 사실은 언제나 다 갈래다.

 

진실과 사실이란 다를 수밖에 없고, 사실이 다양하기에 사실을 전복하는 가상도 더 다양하다. 아니 오히려 가상이란 자체가 오히려 사실로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사실은 그 자체로 사실이기에 그 사실이란 속성을 강조할 이유는 없으나, 가상은 사실이 아니므로 그 진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거짓이란 단어가 하나의 미적인 가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둠의 슬픔 속에 가려진 아름다움이란 사실과 거짓의 차이가 종이 한 장이란 경계 속으로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엇으로 있었냐하는 질문보단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가? 라는 것에 관심이 많다. 대부분 사람들이 어디 멀리 여행을 가게 되면 아주 유명한 유적지 및 관광지부터 찾아 다니고, 막상 소문으로 듣는 것과 달리 직접 눈앞에 당면할 경우 시시하거나 맥이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인간이 가진 문명유산인가? 물론 다는 아닐 것이다. 때에 따라 감격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리라.

 

그러나 여행에서 마주치는 것들에 대한 단상에서 그것이 자기에게 어떠한 가치관이 부합이 되는지 혹은 그 가치관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사람 저마다의 이야기와 표정이 다르다. 본래 인간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 만큼 안다고 했던가? 조병준의 눈에는 분명 아는 것과 보는 것이 넓게 보인다. 분명 말하나 그의 책에서 나에게 보인 것은 환상의 세계다. 환상이 존재하려면 비환상이 있어야 한다. 일상생활의 영역이다. 그런다고 그가 라울 바네겜의 서적명인 <일상생활의 혁명>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단지 외로운 늑대처럼 이리저리 어슬렁어슬렁 거린다. 그의 목적은 외로운 늑대처럼 예고 없이 기약 없이 세상을 누빈다. 그가 한국인이면서 한국인이기보다는 세계인처럼 말이다. 그에게 집이란 한국에 있지 않다. 세계에 있을 뿐이다. 어디든지 가고 어디든지 묵어가는 그의 이야기는 비현실적이지 못한 환상이다. 그만큼 그의 이야기가 환상으로 되기까지는 그의 현실에 대한 초월성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가 가진 것들은 없다. 그래서 더욱 많은 것을 가졌다.

 

길가에 만난 사람들, 그리고 알게 된 사람들, 그 사람들과 만나고 마시고 즐기고 춤추고 같이 부둥켜 주는 인간냄새에서 말이다. 조병준은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라고 책을 적었다. 그가 말한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은 세상 그 자체의 사랑이다. 조금 세상에 대해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나와 달리 그의 사랑은 어긋나 있어도 좋은 것이다. 어긋나는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일까?

 

분명 그는 사람을 사랑했다. 위대한 성녀인 마더 테레사 수녀의 뜻을 기리면서 그 분의 의지를 찾아온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었다. 분명 나보다 세상을 아름답게 사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사진을 보면 인간의 표정과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어 그 자체에 대한 미를 중시했다. 책을 읽다보면 그의 사상은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싯다르타 즉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가르침이 그에게 맞아 들어가는 것일까?

 

인도의 캘커타에서 죽은 자에 대한 단념에선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든다. 아니 가톨릭 선교를 하신 신부님이 동양에 와서 불교와 무교의 영향을 받아, 그리고 옆에 다른 동료는 아예 불교도가 되어 서로 불상을 놓은 푸른 눈의 불교신도에서 조병준은 매우 감격스런 감회를 쏟아 붓는다. 모든 것에서 해방되기에 그런 삶의 모습이 나올지 모른다. 삶이란 다양성과 그 영역에 대한 깊은 고찰에서 새로운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조병준의 글과 사진에서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하고, 그렇게 같이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조병준은 조병준이고 그 우리 중에서 너는 너, 나는 나이다. 인간 그 자체는 실존적인 존재로서 각인할 필요가 있다. 조병준은 자신의 실존적 모습으로서 이 책에 보여주려 한 것이다. 늘 그런 인생을 추구하기에 그렇다. 단지 책에서 우리가 느낄 점은 늘 떠나는 삶이 아니라 한 번은 적어도 청춘이란 시기에 한 번 크게 세상을 보자는 것이다. 젊음이란 이유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없다고 하나, 언젠가 뒤돌아보면 젊음의 시기에 무엇을 했는가에 따라 자신의 중년과 노년의 초상이 달라진다. 그대는 정녕 당신의 인생을 뜨겁게 살았는가?

 

내 자신에 대해 이렇게 놓고 생각하면, 조금 냉소적인 인상이 강한 편이나, 때로는 불보다 더 뜨거운 감정을 느낀 것 같다. 단지 그 불같은 뜨거운 열정에서 내 가슴을 냉소적인 회의감으로 변화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나 말이다. 다소 긍정적이거나 희망적이거나 미래에 대한 기대감보단 그 반대에 대한 negative 한 요소가 많을 것이다. 삶에 대하여 너무 부정한다고 보여줄 수 있지만, 삶을 부정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단지 그 부정하고 싶은 부정이 언제나 인간의 삶에 들려 붙어 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혼자의 만족이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의 만족과 마주본다. 단지 작가 조병준과는 다를 뿐이다. 삶을 긍정하기에 긍정적으로 갈 수 있고, 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부정하기에 긍정적인 삶으로 만들고 싶은 점이다. 그것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나오는 두 남자의 이야기처럼 삶은 달라도 추후 가고자 한 길은 노년에 이르러 결국 같았다는 점이 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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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한길그레이트북스 91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한길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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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가 자신의 답답하고 피로한 마음을 담은 자서전인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대화> 저술 이후, 다시 루소가 자신의 자서전을 낸 도서가 바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읽은 후에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대화>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다른 문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대화>의 경우 자신의 대한 의견을 매우 강렬하고도 열정적으로 내뿜는 것이라면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의 경우 아주 잔잔한 호숫가에 떠돌아다니는 작은 돛단배와 같다.

 

루소의 생애가 이제 60이란 초로에서 죽기 전까지 저술한 이 고요한 자서전은 루소의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자기가 살아온 가치와 목표, 세상풍파를 이래저래 몽상가처럼 적어 내린다. 루소라는 인물은 상당히 소요학파적인 인물이다. 그의 소요에서 자연과 벗을 하며 조용한 숲속에서 걸어 다니는 산책이란 것이 그의 몽상을 활발하게 해주었다. 그에게 남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이 자신이 언제라도 빠질 수 있는 몽상의 세계였다. 그 몽상은 현실에 대한 도피보다는 그 현실 속에 대한 초월이었다.

 

루소는 이 서적에서 논하고 있지만, 상당히 프랑스에서 특히 파리라는 곳에서 심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에밀><사회계약론>은 공개된 장소에서 화형이 되었다. 그의 도서는 금서가 되었고, 그의 존재는 모든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우습게 된 악마가 되었다. 산책에서 몽상에 빠진 그의 글을 보면, 루소는 한 번 죽음을 당할 뻔 했다. 길가를 지나가다가 어느 큰 개와 부딪히는 바람에 길에서 쓰러졌다. 그는 넘어지면서 다리부터 지면에 닿을 것이 아니라 머리부터 닿았다. 그 덕분에 기절을 했다.

 

게다가 그 개와 충돌 직후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고, 마부가 조금이라도 늦게 확인했다면 마차의 수레바퀴가 루소가 가진 숙명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했을 터이다. 다행히도 마차는 자기 자리를 지켰고, 루소는 사람들에 의해 구해진다. 그러나 심하게 부딪힌 것인지 루소는 고통마저 느끼지 못했다. 아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사람들이 당신 집이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에 오히려 여기가 어디죠?”라는 발언을 했으니 말이다.

 

루소는 그 개와 부딪히면서 자신의 죽음과 같은 삶에서 오히려 삶이 있다는 반전되던 상황을 맞이한다. 그러나 세상은 루소를 다시 음모와 같은 루머로 그를 괴롭혔다. 루소는 직접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보다 그를 괴롭히겠다는 보이지 않은 악의를 더욱 무서워했다. 너무 많은 도망과 망명, 조롱 속에서 그는 외로움 속에서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루소는 자신에 대해 당당했다. 얼마나 당당했을까?

 

루소가 개와 부딪히자 루소가 크게 다쳤다는 소문이 조금씩 나돌았고, 심지어 루소가 그 사고로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6세가 루소의 죽음을 왕궁에서 들었다고 하고, 심심하면 루소에게 파리 경찰부청장 부관이 와서 확인한다고 하니 그의 인생은 이미 자유라는 단어가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루이16세는 루소가 만든 사회계약론을 들고 다닌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행에 의해 목이 무참하게 분리된다.

 

모든 프랑스 국민들이 그를 조롱하고, 모든 파리 시민들이 그를 외톨이로 만든다. 그래도 루소는 자신의 세계를 더 넓힌다. 자연을 찾아 숲속과 호수를 돌며, 숲속에 혹은 거리에 있는 풀과 꽃에 애정을 보인다. 루소는 식물학에 대해 관심이 참 많았다. 그는 풀과 꽃에 대한 유용적인 경제성보다는 그 풀과 꽃에 대한 그 자연적인 부분을 좋아했다. 겉치레로 이루어진 것들을 외면하고, 동물을 무참하게 죽이거나 또는 벌레나 곤충에 핀을 꽂는 것도 싫어했다. 그저 풀과 꽃을 보면서 마을에 위안으로 삼았다.

 

루소에겐 사람에 대한 증오와 분노보다는 오히려 그 분노와 증오를 받아들이어 그것으로부터 초월하려고 했다. 자신의 최고 무기인 말의 포탄은 더 이상 남발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말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특히 루소가 사랑스럽게 대하던 아내 테레즈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었다. 루소는 그 시련과 고통 속에서 힘들었지만, 그가 사랑하던 아내인 테레즈는 오죽할까? 아니 두 사람에게 태어난 다섯 명의 아이들 역시 그랬을 게다.

 

하지만 루소는 <에밀>에 적은 것처럼 아이들에 대한 교육은 억지로 해서는 안 되고, 특히 부모에 의해 망치지 않아야 한다며, 자신의 자녀 모두 고아원에 맡긴다. 어떻게 보면 세견의 말처럼 그는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아버지처럼 보이나, 루소는 자신의 아이를 매우 사랑하며, 심지어 길가에 걸어가는 아이들까지 사랑스럽고 그들의 친구처럼 살았다고 고백한다. 길가에 어느 남자아이가 간식을 먹고 싶어 그에게 용돈을 주고,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가서 대화하려고 한 사례는 그가 분명히 아이들에 대해 사랑 없는 사람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루소는 언제나 파리의 경찰들이 보낸 염탐꾼에 의해 감시되었고, 그 감시꾼들은 그 남자아이를 만난 루소가 그 남자아이의 아버지를 만나려는 것을 방해했다. 마치 루소가 그 아버지에게 먼저 가는 것을 못마땅한 듯 번개 같이 뛰어가니 말이다. 루소에겐 인간은 모두 소중한 존재였다. 특히 어리고 가여운 아이들이라면 루소에겐 그들의 얼굴에 미소를 보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다.

 

루소에겐 그 미래에 대한 미소를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란 것 같았다. 루소는 자신이 살던 시절에 결코 자신의 책이 용납되지 않음을 알았다. 자신의 서적은 언젠가 볼 먼 훗날을 기약했다. 그 훗날이 오면 루소가 애지중지하던 아이들이 어른이 된다는 점이다.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읽다보면 가난한 남자아이의 모습이 나온다. 굴뚝에서 일하는 어린 남자아이들에게 사과를 사주던 루소는 자신이 사줬던 사실보단 그들의 미소로 통해 위안을 삼는다. 그것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어느 구절을 보면 루소의 소망이 보이지 않을까?

 

어떤 한 사람의 특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허다하다. 개인의 이해는 거의 언제나 공공의 이해와 맞선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자신이 이야기하는 상대방의 유용성을 위해 타인들의 유용성을 희생시켜야 하는가? 어떤 한 사람에게는 유리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해가 되는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 사람들이 말해야 하는 모든 것의 무게가 오로지 공공의 선이라는 저울에 달아야 하는가, 아니면 배분성의 정의라는 저울에 달아야 하는가? 내가 이용하는 지식들이 형평성의 규칙을 충족시킬 만큼 사실의 모든 관계를 충분히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타인에 대한 의무를 검토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와 진실 그 자체에 대한 의무에 대해 충분히 검토해 보았는가? 타인을 속일 때 그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해서 나 자신에게도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떤 경우에도 결백하기 위해서는 부당하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한가?”

 

루소의 글에 나온 것을 보면 자유에 대한 권리와 책임, 의무를 생각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라면 반드시 새기고 또 새기야 할 글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루소의 사상을 엄청난 위력을 끼쳤다. 저 글은 민주주의에서 여러 가지 사고방식 중인 공리주의적인 요소를 다룬다. 민주주의는 공리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시민주의, 방임주의, 공화주의 등등이 이래저래 섞여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관용이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중요한 관점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로우나 사회에서 구속받을 수밖에 없기에 인간이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사고방식이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무서운 책 속의 문구란 점이다. 루소가 살아온 현실에서 그가 기대하는 세상은 현실에 없다.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에서 명상과 몽상을 꿈꾸길 위해 루소는 언제나 산책을 떠난다. 심지어 그가 이 책 10번째 마지막 미완의 글을 적을 때도 산책을 나간다. 그의 산책은 세상과 루소의 싸움이 아닌 루소와 장 자크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산책에서 모두 해소되어 편안한 일상을 마무리한다.

 

그래서인지 루소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은 왠지 모르게 갑작스럽게 보는 것보단 차라리 과연 그렇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루소는 삶의 경험에서 죽음에 대해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을 때 자신이 가진 온갖 재물과 재산에 집착하는 자들에 대해 어리석게 여겼다.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말하는 소크라테스나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어간다는 하이데거나 매한가지로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의 글을 적어보면,

 

청춘기는 예지를 배우는 시기다. 노년기는 그 예지를 실행에 옮기는 시기다. 경험은 언제나 교훈을 준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각자 자신 앞에 남은 생의 기간에 대해서만 유익할 뿐이다. 죽어야 할 바로 그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할 때는 아니잖은가?”

 

그러면서 루소는 이제 초로의 나이에 배워야 하는 것들은 자신이 바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삶이 고뇌와 절망이라도 루소는 삶으로부터 도망치거나 회피하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죽음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 지나친 삶에 대한 집착이나 가진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말이다. 그의 산책에서 얻은 몽상이란 루소로 향하는 모든 것에 대해 루소가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스스로 정리함으로 생을 마감하려 했다. 루소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냉소어린 비난과 조롱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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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쇠퇴했습니다 5 - J Novel
다나카 로미오 지음, 야마사키 토오루 그림, 곽형준 옮김 / 서울문화사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5권은 매우 개인적인 주인공의 일화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마을에서 국제연합기구 요원이며, 만물박사로 통하는 할아버지 아래서 자란다. 주인공이 기억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다지 지금의 할아버지와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이야 주인공이 특별한 일을 벌이지 않을 정도면 그렇게 간섭하거나 또는 혼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머나 먼 과거 시절의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엄한 분이었다. 조금만 실수를 저지르면 머리에 주먹을 날리며, 아침식사시간에 제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굶어야 했다. 통행시간도 6시 이전이란 절대적 규칙으로 주인공은 어린 시절부터 자유라는 단어 대신 통제와 억압이란 세상아래 자란 것이다.

 

덕분에 말이 없고, 감수성이 무척이나 예민하며,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상당히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성격이 되었다. 사람이란 존재는 태어나면서 천성을 지니고 나오나, 막상 성장하면서 주변 성장요건들이 계속 따르기 마련이다. 주인공의 경우 부모님의 부재, 할아버지와 삶, 할머니도 없기에 무척이나 건조하고 딱딱한 어린 시절인 것이다. 작품에서도 주인공의 용모나 혹은 별명을 보면 ‘빗자루 머리’라고 한다. 빗자루 머리로 된 원인은 그녀의 머리를 누가 다듬어 줄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가 없기에 마음 편한 존재가 없었고, 그 성격이 계속 유지되자 마을 안에 친구조차 없었다. 주인공은 학사에 입학 전까지 외톨이였다. 10살 정도까지 그런 인생을 살다보니 학사에 온 주인공은 다른 누구와도 사이를 좋게 할 생각을 없었다. 아니 하고 싶었으나 굳게 닫은 그녀의 마음에 그 누구를 허락한다는 자체가 무리였다. 인간에게 어린 시절의 충격이나 스트레스가 결국 성장하면서 성인이 된 시점에도 큰 부담을 일으킨다. 이번 편에서는 그런 부분이 많이 돋보인다.

 

학교에 오자말자 같은 반에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게다가 키도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컸기에 어서 빨리 여기서 탈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반에서 톱을 누렸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단체 활동까지 기피했다. 그런 그녀에게 장난꾸러기 남자아이들은 끊임없이 장난질을 걸었다. 왕따는 기본이고 교과서에 오물을 페이지마다 발랐다. 여기에 우연히 다가온 꽈배기머리소녀, 그녀는 독일인이라고 되어있다. 특별히 이름을 소개하지 않은 라이트노벨의 특수성에서 그저 꽈배기머리소녀는 이상하게도 주인공에게 달라붙는다.

 

주인공은 그녀의 행동에 너무 부담스럽고, 반에서 위치가 있어서 1년 만에 3학년으로 월반한다. 학사 내에는 같은 반이라고 해도 쉽게 과정을 마치지 못해 한 과정에 몇 년 동안 있는 자도 있고, 나이는 6~7세부터 20대도 존재하니, 3학년이 된 주인공은 안정된 생활을 했다. 문제는 여기부터이다. 그녀 역시 외로움을 느끼고, 괴롭고, 쓸쓸하고, 죽을 것만 같았다. 달리던 교정 아래 동물의 뼈가 가득한 곳에 달려가면서 주인공은 울면서 친구가 필요하다며 외치고, 이때 요정이 그 소원을 들어준다.

 

그 요정은 우연히 학교 뒤에 있는 산에 장난꾸러기 남자아이들로부터 주인공이 구출해준 요정이다. 그 요정은 마법 같은 것을 부리고 사라지며, 대신 책 한권이 그녀에게 들려져 있었다. 3학년으로 오면서 주인공에게 새로운 트러블이 생겼다. 그것은 꽈배기머리소녀가 어린 나이에 월반했다. 월반하면서 1학년 시절에 주인공이 나이 많은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다가 이제는 꽈배기머리소녀가 어린 이유로 괴롭힘을 당한다. 인간이란 어느 한 특수한 조직이나 단체에서 누군가 특정외부적인 조건을 가질 경우 그 대상을 괴롭히는 본성이 있다. 그것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보는 나이, 성별, 지역, 학력, 취미까지도 말이다.

 

인간에게 순수하게 타인에 대한 관용성이란 존재하지 않은 것인가? 꽈배기머리소녀는 3학년이 되자 호된 꼴을 당한다. 특히 치마가 빼앗겨서 엉망으로 된 것은 도가 지나친 일이었다. 인간에게 죄가 있는 자란 정말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보단 약하거나 자신들의 무리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극단적 배타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주인공의 괴로운 나날과 꽈배기머리소녀의 고통이다. 그런데 이 꽈배기머리소녀에게 조금 친절을 베푼 주인공에게 꽈배기머리소녀는 언니라고 부르게 해달라고 한다. 아니 심지어 엄마라는 말도 한다. 그것은 뒤에 있던 일화로 보면 알겠지만, 이 소녀는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5권에서 내가 잊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인간의 이중성이다. 꽈배기머리소녀와 친해진 후 주인공은 들장미회란 동경의 대상 서클에 가입되고, 꽈배기머리소녀는 주인공의 공작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된다. 문제는 그 서클에 있는 선배들은 모두 친절한 것 같은데, 주인공에게 상당히 부담이 오는 것이다. 남과 친하지 못하기에 그저 적당히 맞추어가는 생활 속에 이때 악우 Y의 친분이 쌓인다. Y는 들판의 은색여우처럼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오로라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 Y도 들장미에 있던 사람이고, 그녀는 요정의 다과회를 찾기 위해 분발했다는 점이다.

 

원래 들장미회도 요정들의 다과회를 찾기 위한 자리였으나, 결국 원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소녀들의 수다회로 변했다. 거기에 홍차와 간식은 일품이었다. 지명이나 습관성 내지 문화성 혹은 주인공이 홍차를 주로 찾는 점에서 이 작품의 배경은 아마 유럽 쪽이고 영국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홍차는 영국인들이 주로 애용하기 때문이다. 꽈배기머리소녀가 독일인이란 점에서 유럽권이란 설정은 높다. 대신 그런 연유는 요정에 대한 점이다. 요정이란 존재는 서양에 존재하던 정령이기 때문이다.

 

그 요정을 찾기 위해 존재했으나 실제적으로 이루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세월을 보내던 주인공에게 Y의 등장은 새로운 기획이었다. 왜냐하면 Y는 인간이 가진 어두움을 보여주었다. 들장미회에서 장미선배는 지독한 강박증 환자였다. 그녀는 겉으로는 미소를 보내지만 알고 보면 자신이 마음에 들지 행동을 한 대상에 대해 매일같이 노트에 기록했다. 그 중에 주인공의 행동들이 많으니 평소 남에게 조심성 있고, 꺼리는 소녀마저 top list로 올릴 정도면 엄청난 예민한 사람이었다. 마녀선배는 소녀들의 머리카락을 모아 그것을 정리하여 간직하던 사람이다. 아무리 봐도 페티시즘이 지나쳐 도착증세가 극으로 간 사람이었다. 그 밑에 4학년인 AB선배는 옷을 대충 입고 술을 마시고, 온갖 지저분한 이야기로 나누었다.

 

그리고 문제의 주인공의 방, 주인공의 방에는 꽈배기머리소녀가 혼자 있는데, 그녀는 주인공과 비슷한 인형을 의자에 앉히고 엄마 아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자신은 언니가 좋은데 왜 오지 않으냐고 혼자 우울하게 있다가 그 인형에게 뜨거운 스프를 쏟고 거기에 혀를 핧는 것도 모자라 칼로 여기저기 쑤신다. 아주 잔인한 목소리로 슬피 외치며 말이다. 그 소녀는 상대방에 애정이 지나쳐서 지나친 사랑은 곧 그 만큼의 마음만큼 분노와 증오로 바뀌는 애증의 대상이 된 것이다. 아마 그녀는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없기에 누군가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주인공은 그 누구와 마음을 나누기가 싫었다. 인격이란 주변 환경조건이 중요하다. 특히나 외부와 단절된 학교라는 밀폐성은 그 사람에게 극단적 행위를 발생하게 하는 좋은 조건이다.

 

그래서 이 책에선 아주 낯익은 이름이 나온다. 그것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Y가 꽈배기머리소녀가 자기 자신의 이성으로 억제하지 못한 행동에서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이란 말에 주인공은 들장미 사람들의 말을 주화등마처럼 떠올린다. 어린아이는 무조건 착하지 않다는 점과 오히려 그런 어린 아이들이므로 더욱 더 악랄한 짓을 한다는 것이다. 상당히 프로이트적인 학문적 이론을 늘어놓기에 주인공이 본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악마와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등치하여 요정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있다는 점이다.

 

학교가 폐교되었을 때 우연히 자기를 괴롭히던 남자아이들을 만난 주인공은 요정에 대해 물어본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모른다고 한다. 요정을 보고 달려들어 요정해부를 원한 악동이 이제는 어엿한 남학생이 되어 예의도 바르고 학교생활에도 충실하게 한다. 흔히 말해 중2병을 꾸준히 행동하다가 이제 그 나이를 벗어났다는 점이다. 인간의 언어는 사회와의 약속이고 한편으로 사회 안에서 아랫사람들이 규율처럼 행동해야하는 통제다. 그들은 사회의 존재가 되었고, 한편으로 보면 어른의 존재에 가고 있다는 점이다.

 

어른의 존재가 되면 될수록 들장미회에서 가면을 쓴 선배들의 모습인가? 그런 점에서 Y는 주인공을 테스트한 이유가 나온다. 겉으로 좋은 척하는 인간보다 뭔가 남과 구분 지을 수 있는 요소나 속물적 근성이 있는 편이 좋다고 한다. 주인공은 남들하고 사이를 꺼려하며 상당히 냉소적이며, 타인에 대해 차가운 이미지가 오히려 남들에게 거짓이나 뒤에서 음모를 꾸밀 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겉모습에 치중하면 할수록 뒤의 감춰진 속은 더욱 지저분한 것이 인간의 특징일 수 있다.

 

그렇게 주인공은 인간의 이율배반적, 트라우마에 갇힌 자들의 모습을 보며 졸업한다. 그녀의 졸업은 학교가 폐쇄가 결정되고, 그 이전에 마녀선배와 장미선배는 졸업했다는 점과 AB선배는 사정에 있어 도중에 하차한 점이다. 모두의 졸업식이 되자 학교 안의 울음바다가 되었다. 아무리 냉소적이고 혹은 변태적이고 속과 겉이 같던 혹은 다르던지 그 자리에선 마음은 같았다. 인간은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두의 마음이 같은 것일까? 혐오하거나 애증의 관계라도 헤어지면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못해 그마저도 그리워할 추억이니 말이다. 주인공에게 추억이란 2가지,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혼난 것과 학사 안에서의 갖가지 기억이다. 그런 과거의 꿈을 꾸던 주인공에게 Y가 찾아오고 예전의 이야기와 앨범, 그리고 주인공이 혼자 외로울 때 유일하게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듣던 RYOBO를 들고 온다.

 

이제 기능조차 하지 않은 이 로봇, 그러나 주인공에게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 와중에 요정들이 다시 돌아와 이 로봇 안에는 예전에 주인공이 만난 요정이 있었고, 그 요정 덕분에 주인공은 친구를 만들었다. 마치 메르헨 속에 등장할 것 같은 엔딩으로 이어지나, 그 메르헨 속에는 강력한 억압과 폭력적인 인간의 신화가 숨어 있었다. 억압에 대한 해방욕망, 그리고 그 수단은 타인에 대한 괴롭힘과 검은 마음, 언제나 인간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주인공은 냉소적이고 속물적이나 그 누구보다 요정과 마주했다. 그녀의 마음은 아주 검은 어둠이 숨 쉬고(조수의 인격과 성격이 다 그런 연유) 있었지만, 요정을 믿는 강력한 마음으로 마을에 돌아와서 그들과 지낸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자신이 본 그 무의식 세계는 무엇인가? 잠이 든 주인공은 꿈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모습으로 그 요정을 만난다. 친구를 만들었나? 질문에 그렇다고 하고 요정에게 외롭지 않아? 라는 질문에 요정은 웃으면서 천객만래라고 답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깨닫는 것이 있으니 이때까지 들장미회와 Y와 계속 찾아다닌 요정의 다도회는 그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마음에 있었고, 그 마음은 요정에 대한 강한 믿음이다. 대신 요정은 정령으로서 요정이 아닌 인류로서 요정이 특징이다. 주인공은 참고로 종교가 없다는 점이다.

 

그녀는 학사의 개인지도교수로 교장을 선택했다. 교장은 주인공의 할아버지와 매우 친분이 있었고, 인류학 전공자에 요정이란 인류신학에 속한 분야다. 오늘날의 인류학에서 신학은 직접적으로 대하는 것보다는 신화학이란 분야를 인류학에서 다룬다. 신화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소통하는 대화이고, 그 민족이 가진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주인공이 1권에서 문화인류학자로 나온 것이다. 인류학자에게 프로이트란 존재는 소중하다. 원시적이라고 판단하는 존재일수록 자신들의 행동에 더욱 과학적인 행동이 있다는 점이다. 강력한 이데아보단 그들의 삶에서 만들어놓은 삶의 체계가 그런 점이다.

 

주인공의 종교여부는 5권 후반부에 나온다. 문화연구센터이면서 주인공과 할아버지의 사무소는 요정들이 이래저래 온 바람에 알 수 없는 도구로 가득하다. 이때 과거 요정들이 만든 도구 중에 게임기가 버그를 일으켜서 마을 전체를 게임 속의 세상으로 바꾸었다. 처음에는 Dot 이미지로 다음은 2D 이미지로 그 다음은 3D 이미지로 말이다. 픽셀의 여부는 플레이어의 지능 즉 CPU의 성능에 따라 제어가 가능했다. 현실성과 부조리가 오고가는 사이에 게임이 게임으로 되지 못할 판국이니 인간이 게임을 하고 있는지 혹은 게임이 인간을 조종하는지 의문이 든다.

 

단지 이번 일화에서 주요 포인트는 주인공이 믿었던 조수에 대해서다. 게임에선 위기에 빠진 공주가 오히려 악당이었으나, 그녀의 지능이 낮기에 지능이 높은 마법사인 주인공을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게임과 그 게임에 대한 수치화된 컨피그 메뉴를 조수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우습게 되었다. 마을에서 자꾸 연애 붐이 일어나고 심지어 부부가 이혼한다. 할아버지는 주인공에게 손녀에게 증손자를 보고 싶다는 요구까지 한다. 이때 조수가 나타나 주인공에게 어떤 이벤트를 요구하자 갑자기 효과음이 나오고, 다시 또 대화가 나오자 효과음 소리가 나오자, 주인공은 조수에게 보관을 부탁한 컨피그 메뉴를 다시 찾아보자, 게임 설정은 당초의 몬스터헌터 쪽이 아니라 미소녀 게임 흔히 연애시뮬레이션으로 바뀐 것이다.

 

이 상황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살던 쪽이 오히려 애니메이션 그림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연애 붐에 빠진 원인은 아마 상대방에 대한 성적인 매력을 느낀 것과 그들의 결과가 베이비붐을 일으킨 점이다. 인류가 쇠퇴한 실정에서 인구감소는 인류의 멸망을 예상하게 조건이다. 그 조건이 조금씩 해결이 되면 국가연합단체 일원으로 기뻐해야할 일이나 요정들의 장난스러운 도구와 조수의 대담한 행동은 어떻게 볼 지이다. 참고로 조수의 성격은 주인공이 만들어놓은 성격이다. 아마 마음 한편에 대담한 마음을 지닌 자신의 인격이 조수에게 큰 전환점을 줬다는 것은 생각해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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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傷(탈상) : 노무현을 위한 레퀴엠 [CD+DVD, 80P 스토리북] [한정수량 할인특가!]
노무현 외, 강은일 / 사람커뮤니티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노무현, 그가 이 세상을 떠나간 지 어언 3년 반이 다 되어간다. 그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많은 충격을 던져주었고, 우리 사회에 깃든 모순과 왜곡 속에서 스스로 비틀린 채 우리를 떠나갔다. 마치 그의 마지막 자서전이 되어버린 <운명이다>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3년이란 길고도 짧은 시간을 흘러 보내고, 이제 탈상(脫喪)이 아닌 탈상(脫傷)으로서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한다. 아니 그의 죽음보다는 스스로 슬픔에서 빠져 나오려고 한다. 추모라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애도보다는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로하고 그 위로로 통해 아직까지 마음속 깊이 남아있는 아픔의 조각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물론 슬픔의 기억은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다. 그것은 평생 아니 영원히 우리 기억 속에서 살아있을지 모른다. 인간에 대한 개인은 하나의 존재이나, 그 존재가 속한 사회는 영원하다. 우리의 개인과 개인이 모인 그 사회 속에서 우리는 역사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노무현 그가 살아온 역사는 우리 근현대사의 암울함의 대치였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안고 간 신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고, 우리의 고통까지 모두 가져간 신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그 희생이란 거대한 숭고함에는 우리에게 크나큰 슬픔이 되었다. 우리들이 전하려는 그에 대한 추모의 진혼곡이란 레퀴엠, 하지만 그것은 슬픔 속에 가려진 우리 앞길이 아니라 그 슬픔으로 통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이었다. 누군가 앞에 서서 달려갈 수 있는 것은 누군가 뒤에서 따라오기 때문이다. 미래라는 것은 언제나 열려있는 것처럼 보여도 모두 열리지 않는다. 그런 만큼 탈상(脫傷)의 이름을 가진 앨범은 너무 깊은 슬픔과 애도로서 채우지 않았다. 조금은 신이 나게 조금은 감성적으로 조금은 편안하게 다가가려 했다.

 

물론 이 앨범에서 지나친 우울함과 절망적인 느낌이 없지 않은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내가 이 앨범에서 우울함과 절망을 느낀 곡은 예전에 신해철 씨가 영화앨범 <정글스토리> OST에 수록된 절망에 관하여란 곡이다. 절규에 가까운 그 외침은 희망도 빛도 없는 곳에서 알 수 없는 내일을 기약도 없이 찾아가는 내용이다. 마치 신해철 씨가 노무현 대통령이 서가한 후에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정말 신해철 씨는 그런 감정으로 살아온 것 같았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말투와 rocker의 상징인 긴 머리를 가진 마왕의 모습은 어디 가고 초라한 모습만 그에게 남았다.

 

이 앨범 다른 곡들은 편안히 들을 수 있는 곡으로 잘 맞추어졌지만, 신해철 씨의 고집은 여전한 느낌이었다. 다른 유명한 가수인 이은미 씨, 정인 씨, 조관우 씨는 평소 부르던 스타일을 유지하며 잔잔한 감동을 들려주었다. 아니 평소에 그 느낌을 그대로 유지하려던 평상심에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은미 씨의 곡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란 곡의 원래 제목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이름이었다. 니체의 서적 중에 <선악의 피안>이란 도서를 본 적이 있었다.

 

진정한 강자는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를 대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 자체로 대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제목과 그 책의 내용과 노무현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말 그대로 빽도 돈도 힘도 없이 지내던 이들의 옆에 있었던 그의 모습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를 두고 온갖 비난과 냉소 심지어 죽음의 문턱까지 선사한 그들의 모습에 니체의 책에선 약한 자들이 자신보다 뛰어난 자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노무현이란 인간은 퇴임 후에 권력도 돈도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초로이니, 그에게 행한 행동들이 과연 강한 인간이란 말인가?

 

다른 가수들의 제목을 보면 강렬하면서 부드러운 느낌이 교차하면서 그의 인생은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상록수처럼 푸르고 싶었고, 모든 노란 바람개비의 소망을 주었다. 아마 그래서 장필순 씨가 가수 이승철 씨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편곡하여 부른 것은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노무현의 레퀴엠으로 가면, 다양한 음악이 섞이고 섞인다. 마치 국악, , 클래식이 크로스된 퓨전스타일은 상당히 들을 만하다. 그의 진혼곡의 본격적인 서두에서 마지막까지 편안한 기분으로 마음을 위로한다. 마치 자신들 스스로를 위로하듯이 말이다.

 

앨범을 들은 것과 달리 앨범 전반적인 것을 훑어보았다. 거짓도 위선도 권위도 없이 막걸리를 한잔하는 노인이 보이고, 농촌에서 들판을 걸어가는 농부가 보였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느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우리에게 친근하게 온 그 분을 우리는 놓아드리는 것일까? 우리는 결코 그를 놓아드린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아픔과 분노 그리고 절망과 좌절을 놓으려 한 것이다.

 

앨범을 들어다보면 앨범의 페이지가 100매를 넘는다. 각 장마다 가수의 소개와 사연, 곡에 대한 가사와 의미, 그리고 제작과정들을 말이다. 또한 뒤로 갈수록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애절한 메모들은 이 앨범의 탄생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말만 그대로 앨범제작에 눈치를 보고, 제작비도 난항이었고, 제작스튜디오도 규모가 작은 곳으로 했다. 어느 한 남자의 죽음을 노래하는 것도 정말인지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스튜디오가 작다고 하여 음악 그 자체는 심혈의 기울였다. 국내 최고의 작곡가인 윤일상 씨가 참여하고, 신해철 씨는 이 앨범의 프로듀싱까지 했다. 레코딩에 참가한 뮤지션도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 이근형 씨와 그리고 함춘호 씨, 베이시스트 민재현 씨, 키보드 최승찬 씨, 드러머 신석철(시나위 리더 신대철 씨의 동생)이다. 그 외에 참가한 뮤지션과 오케스트라, 국악인들까지 보통 앨범에서 볼 수 없는 국악, 메탈, 클래식, 발라드, 포크가 이래저래 조화를 이룬다.

 

평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가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을 가진 대통령이었는지 앨범도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정말 장르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고, 뮤지션들의 조화도 너무 다양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민주주의사회,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관용과 포용 그리고 존중이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이 앨범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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