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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
조병준 지음 / 예담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타지마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인도에 있는 타지마할을 보면서 감격하면서 그 격동의 감정이 그의 온몸은 감싸 안을 정도일 때 그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을 베여 나온다고 한다. 건축물에 대한 인간이 가진 하나의 신성성과 숭고함에서 일까? 만약 내가 타지마할에서 가서 가슴을 찌르는 알 수 없는 감정과 그리고 그 감정에서 눈물이 나와야 한다면 그 건축물이 가지는 위대한 아름다움 그 미(美)에 대한 찬양보다는 그 미에 희생에 대한 추(醜)에 대한 미학(美學)일 것이다.
타지마할 그것을 세우기 위해 인도 당시 왕은 수많은 백성들을 굶주림과 고통, 그리고 눈물의 나락으로 보내야 했다. 아름다움을 위한 희생이 결코 정당화된다는 자체가 나는 원하지 않는 미적인 가치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거대한 고분이나 왕궁,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중국의 진시황 무덤과 만리장성, 그리고 수많은 인류 문명 유적지들, 그들의 행위는 지금의 인간에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뒤에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다.
지금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희생이란 과거의 존재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희생이 다른 눈물과 고통이 우리 현실에서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신화적인 존재다. 개인이 죽어도 개인이 속한 사회는 죽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은 그 사회라는 공간에서 영원해지기 위해 신화적 욕망을 품는다. 인류가 소멸하지 않을 그 마지막 그날까지 우리의 신화는 멈추지 않는다. 신화의 전복은 또 다른 전복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조병준 작가가 만든 에세이집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는 그런 신화조차도 아름다운 여명으로 아니라면 황혼으로 보는 것인가? 다소 나와 다른 가치관을 지녔기에 그의 가치관에 대해 딱히 비난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그의 인생과 나의 인생은 완벽히 분리되어 있고, 그는 실존적인 인간으로 존재하니 말이다. 그가 보여준 책은 마치 일상적인 사람들에게 하나의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 환상은 그에겐 현실이었다. 환상이 사실인가? 현실이 사실인가? 진실은 언제나 하나이나, 사실은 언제나 다 갈래다.
진실과 사실이란 다를 수밖에 없고, 사실이 다양하기에 사실을 전복하는 가상도 더 다양하다. 아니 오히려 가상이란 자체가 오히려 사실로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사실은 그 자체로 사실이기에 그 사실이란 속성을 강조할 이유는 없으나, 가상은 사실이 아니므로 그 진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거짓이란 단어가 하나의 미적인 가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둠의 슬픔 속에 가려진 아름다움이란 사실과 거짓의 차이가 종이 한 장이란 경계 속으로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엇으로 있었냐하는 질문보단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가? 라는 것에 관심이 많다. 대부분 사람들이 어디 멀리 여행을 가게 되면 아주 유명한 유적지 및 관광지부터 찾아 다니고, 막상 소문으로 듣는 것과 달리 직접 눈앞에 당면할 경우 시시하거나 맥이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인간이 가진 문명유산인가? 물론 다는 아닐 것이다. 때에 따라 감격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리라.
그러나 여행에서 마주치는 것들에 대한 단상에서 그것이 자기에게 어떠한 가치관이 부합이 되는지 혹은 그 가치관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사람 저마다의 이야기와 표정이 다르다. 본래 인간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 만큼 안다’고 했던가? 조병준의 눈에는 분명 아는 것과 보는 것이 넓게 보인다. 분명 말하나 그의 책에서 나에게 보인 것은 환상의 세계다. 환상이 존재하려면 비환상이 있어야 한다. 일상생활의 영역이다. 그런다고 그가 라울 바네겜의 서적명인 <일상생활의 혁명>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단지 외로운 늑대처럼 이리저리 어슬렁어슬렁 거린다. 그의 목적은 외로운 늑대처럼 예고 없이 기약 없이 세상을 누빈다. 그가 한국인이면서 한국인이기보다는 세계인처럼 말이다. 그에게 집이란 한국에 있지 않다. 세계에 있을 뿐이다. 어디든지 가고 어디든지 묵어가는 그의 이야기는 비현실적이지 못한 환상이다. 그만큼 그의 이야기가 환상으로 되기까지는 그의 현실에 대한 초월성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가 가진 것들은 없다. 그래서 더욱 많은 것을 가졌다.
길가에 만난 사람들, 그리고 알게 된 사람들, 그 사람들과 만나고 마시고 즐기고 춤추고 같이 부둥켜 주는 인간냄새에서 말이다. 조병준은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라고 책을 적었다. 그가 말한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은 세상 그 자체의 사랑이다. 조금 세상에 대해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나와 달리 그의 사랑은 어긋나 있어도 좋은 것이다. 어긋나는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일까?
분명 그는 사람을 사랑했다. 위대한 성녀인 마더 테레사 수녀의 뜻을 기리면서 그 분의 의지를 찾아온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었다. 분명 나보다 세상을 아름답게 사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사진을 보면 인간의 표정과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어 그 자체에 대한 미를 중시했다. 책을 읽다보면 그의 사상은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싯다르타 즉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가르침이 그에게 맞아 들어가는 것일까?
인도의 캘커타에서 죽은 자에 대한 단념에선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든다. 아니 가톨릭 선교를 하신 신부님이 동양에 와서 불교와 무교의 영향을 받아, 그리고 옆에 다른 동료는 아예 불교도가 되어 서로 불상을 놓은 푸른 눈의 불교신도에서 조병준은 매우 감격스런 감회를 쏟아 붓는다. 모든 것에서 해방되기에 그런 삶의 모습이 나올지 모른다. 삶이란 다양성과 그 영역에 대한 깊은 고찰에서 새로운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조병준의 글과 사진에서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하고, 그렇게 같이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조병준은 조병준이고 그 우리 중에서 너는 너, 나는 나이다. 인간 그 자체는 실존적인 존재로서 각인할 필요가 있다. 조병준은 자신의 실존적 모습으로서 이 책에 보여주려 한 것이다. 늘 그런 인생을 추구하기에 그렇다. 단지 책에서 우리가 느낄 점은 늘 떠나는 삶이 아니라 한 번은 적어도 청춘이란 시기에 한 번 크게 세상을 보자는 것이다. 젊음이란 이유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없다고 하나, 언젠가 뒤돌아보면 젊음의 시기에 무엇을 했는가에 따라 자신의 중년과 노년의 초상이 달라진다. 그대는 정녕 당신의 인생을 뜨겁게 살았는가?
내 자신에 대해 이렇게 놓고 생각하면, 조금 냉소적인 인상이 강한 편이나, 때로는 불보다 더 뜨거운 감정을 느낀 것 같다. 단지 그 불같은 뜨거운 열정에서 내 가슴을 냉소적인 회의감으로 변화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나 말이다. 다소 긍정적이거나 희망적이거나 미래에 대한 기대감보단 그 반대에 대한 negative 한 요소가 많을 것이다. 삶에 대하여 너무 부정한다고 보여줄 수 있지만, 삶을 부정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단지 그 부정하고 싶은 부정이 언제나 인간의 삶에 들려 붙어 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혼자의 만족이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의 만족과 마주본다. 단지 작가 조병준과는 다를 뿐이다. 삶을 긍정하기에 긍정적으로 갈 수 있고, 삶을 – 부정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 부정하기에 긍정적인 삶으로 만들고 싶은 점이다. 그것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나오는 두 남자의 이야기처럼 삶은 달라도 추후 가고자 한 길은 노년에 이르러 결국 같았다는 점이 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