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통의 죽음
게오르그 뷔히너 지음, 최병준 옮김 / 예니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당통>이란 영화 일부분을 잠시 본 적이 있었다. 영화를 상영해서가 아니라, 잠시 명장면만을 보여준 모습이다. 그 장면은 프랑스혁명 이후 국민들을 위해 설치했다고 하나 막상 그러지 못한 혁명재판소였다. 그곳에서 당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모두 당통의 죽음을 가지고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이때 등장한 인물 로베스피에르, 그의 차갑고 냉혹한 눈빛과 말투가 모두를 사로잡고, 광기에 빠졌는지 아니면 이성의 착각에 빠졌는지, 모두가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부르고 있었다.

 

이미 재판장은 공정한 재판이 존재하기 위해 설치된 게 아니라 단지 피를 그리고 목을 원하는 마녀사냥 합의소로 변질되었다. 그런 당통이란 이름을 내가 어디서 들었을까? 예전에 영국으로 망명한 아서 쾨슬러라는 작가의 <한낮의 어둠>에서이다. <한낮의 어둠>은 처음 알게 된 동기는 프랑스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폭력과 휴머니즘>이란 작품에서 처음 알았고, 그 후에 내가 그 책을 찾아보았다. 온갖 냉소와 회의와 갈등이 버무러진 이 소설에서 아주 강렬한 냉소주의자인 루바쇼프라는 남성이 나온다.

 

그는 191710월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영웅이었다. 소설 설정에서 그가 말한 어른인 레닌과 같이 러시아 차르정권과 케렌스키정권까지 전복한 러시아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탈린의 대숙청이란 무서운 피의 재물에 자신의 목 뒤에서 울리는 권총 소리에 쓰러진다. 사형집행 당일에 사형장에서 처형되는 게 아니라 감옥에서 어디론가 이동할 때 뒤에서 그의 목을 노리고 사격하는 것이다. 그렇게 죽던 루바쇼프의 심문에서 당통이란 이름이 나온다.

 

러시아혁명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시작하여 결국 대숙청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죽음으로 마감한다. 그런 마르크스주의자 입에서 당통이란 이름이 튀어나온다. 당통이 누구인가? 당통이 어떤 인물이기에 그 냉소주의자 입에서 그의 이름과 그가 연설한 문장들을 외우고 있다는 말인가? 아쉽게도 당통이 직접 연설한 문장이 하나도 안 나오고, 그 연설이 언제 어디서 했는지도 모른다. 단지 유추할 가능성은 1792년 프랑스혁명 이후 외국의 침입에서 당통이 직접 국민들 앞에 나서서 연설로 통해 그 전쟁에서 승리를 잡은 것이다.

 

그것은 191710월 러시아혁명 이후 서구열강과 차르정권 시대의 귀족과 장교들이 다시 내전으로 러시아를 어둠의 시기로 만들 때 트로츠키가 한 연설과 비슷할 것이다. 역사의 반복은 정말 계속 이어지는가? 당통은 연설을 하여 프랑스를 지켰지만, 기요틴 아래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찾았으며, 트로츠키도 러시아를 지켰으나,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저 멀리 남미 땅에서 영원히 타도해야 할 스탈린에게 살해당했으나 소비에트연방 붕괴 이후 그의 승리가 되었다.

 

역사 앞에서 항상 정의가 패배하더라도 역사 후에는 정의가 승리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 승리라는 이름 아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고, 많은 공포와 파괴의 시간이 우리 인류를 엄습했다. 그래서 프랑스, 독일, 영국과 같은 유럽 국가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거친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로 그 당통의 죽음이란 그 비극과 같은 시작을 알리는 도화선이었다. 러시아혁명에서 많은 혁명가들이 프랑스혁명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프랑스 국민들이 계속 폭력과 억압에 저항한 것을 항상 마음에 새겼다.

 

그러나 혁명은 어느 새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처럼 혁명 자체가 오히려 역사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혁명이 인간을 만든 것인가? 인간이 혁명을 만든 것인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결국 덕치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결국 17944월 당통의 목이 단두대의 이슬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3개월 후 7월 말에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일당들은 테르미도르파의 결정 아래 결국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당통이 죽음을 오히려 허무한 무에 대한 욕망으로 받아들이는 타나토스의 미학에서 오히려 당통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혁명은 자신의 목처럼 그저 사라질 안개와 같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죽기 전에는 분명 열성적인 자코뱅당원이었다. 그는 처음에 지롱드당의 일원이었으나, 마음을 바꾸어 자코뱅당으로서 열성적이고 혁명재판소도 만들었다. 그러나 혁명재판소의 결정은 2가지다. 사형 혹은 무죄, 결국 사형만이 기다리는 재판에서 수많은 목들이 바람처럼 이슬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당통에겐 마음이 차는 것보다 마음이 떨어져 가는 것이 느낀다. 당통은 알고 있다. 저 단두대 아래 사라져간 희생양들이 늘어가고 있어도, 프랑스 국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고, 길 거리의 창녀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당통 역시 그 창녀들과 어울린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삶에 대한 열망으로 일으킨 혁명이 오히려 폭력과 광기로 변하자 그의 삶의 열정은 육체에 대한 간절함이다. 창녀가 처음부터 창녀가 아니라 오히려 창녀로 될 수밖에 없던 그 비운 한 현실에서 당통은 그들과 있다.

 

당통은 특권의식이나 절대적 추구사항이 없다. 로베스피에르의 충직하면서 어리석은 부하 죽음의 사제인 생 쥐스트는 그런 당통을 저주했다. 그는 혁명위원, 국민위원은 모든 국민들에게 추앙받아야 할 존재라고 생각했다. 왕권의 자리에 그 앙시앵레짐의 자리에 단지 혁명정권만 있었고, 독단적 독재는 영원했다. 그들은 국민들의 배고픔과 절망에서 혁명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았지만, 그 배고픔과 절망을 구원하지 못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그 절망의 분노를 대체할 죽음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왕족, 귀족, 지롱드당원, 이제는 내부의 적까지 이어진다. 인간이란 여기서부터 추악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은 정말 인간에겐 좋고 착한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을 좋고 착하게 보일 사람들이 필요하다. 즉 나쁘고 못된 사람이 필요하다.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에서 승리하는 것이 곧 정의란 사실이 당통의 죽음을 부른다. 당통은 이분법의 논리에 갇힌 프랑스를 걱정했다. 자신만의 자유만을 외치는 자유를 두려워했다. 나만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가 있기에 자신의 자유가 가능하다.

 

결국 프랑스는 나폴레옹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 열기와 광기에 빠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의 해결책은 오로지 전쟁이다. 적이 필요한 것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프랑스 사람들이다. !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에서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루소의 답답한 심정이 그렇게도 돋보였는가? 그렇게 루소가 외쳤는데도 <당통의 죽음>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사회계약론>을 들고 루소를 괴물의 아버지로 만드는가?

 

<당통의 죽음>에서 시민과 군중들의 대화를 보면 그들의 순간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논리가 상실한 그 상식박탈이 오히려 모든 것을 이루었다. 결국 그것을 간과한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는 목이 달아났다. 또한 그들의 목을 달아나게 한 이들은 전쟁에서 열기를 뿜는다. 또한 나폴레옹 역시 내친다. 인간이 왜 신화적인 존재인가? 신화에 영웅이 필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대신 보이게 하거나 또는 그 추악함을 감추기 위한 대리자인가?

 

역사는 바로 신화로 만들어진 이야기고, 그것은 후세에게 역사적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또 다른 신화를 창조한다.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당통의 죽음>은 게오르크 뷔히너가 저술한 연극대본이나, 그것은 현재까지도 재현된다. 영화 <당통>은 아마 이 책에서 많은 영감을 받지 않았는가? 영화 <당통>의 로베스피에르의 표정은 절대적인 폭력과 폭력적인 원칙만 가진 감정 없는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강력했으며, 그 혁명과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래도 그의 이름은 계속 나온다.

 

로베스피에르가 나오면 같은 자코뱅당의 당통도 나온다. 두 사람은 동지였으나 적이었다. 인간 최고의 적은 그 자신들의 모습인가? 이 연극대본인 <당통의 죽음>은 매우 역사적인 인물이 나오나 매우 철학적인 부분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당통과 로베스피에르가 아닌 주변 인물들보다 더 주변인 다수의 대중에서 말이다. 대중은 시민인가? 군중인가? 그들의 모습은 숨어있으나, 우리 일상과 제일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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