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학개론
권경민 지음 / 북코리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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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라는 것은 그저 사람들에겐 재미로 보는 시간 때우기 용으로 생각하기 쉽다. 만화라는 것은 다른 매체에 비해 정보전달하는 요건이 매우 수월하면 게다가 구매하기 쉬운 콘텐츠 중에 하나이다. 누구나 눈을 가지고 있으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며, 누구나 글만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재빠르게 이야기의 흐름을 단번에 파악한다. 다른 정보매체와 다르게 만화라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같이 대하기가 좋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경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앞서 지나간 샷이나 시퀀스를 그대로 보내야 한다. 만약 복선의 배치가 깔려 있을 경우 그 상황을 다시 재정리하기 위해서 시간을 역행하여 과거로 돌아가야 하나, 자신의 집에 DVD로 시청하지 않으면 많이 어렵다.

 

왜냐하면 다중영상매체는 실시간으로 방영 내지 상영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다시 시간을 역행하기란 어렵다. 또 다시 한 번 봐야하거나 재방송을 기다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이에 반해 만화는 문학처럼 시간적인 흐름을 되돌릴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전체 만화책 100페이지 중에서 현재 보는 곳이 90페이지일 경우를 생각하자. 보통 서사구조에서 발단-전개-위기-결정-결말이란 단계에서 90페이지가 있는 90% 정도를 보면 항상 최고의 위기상태인 절정에 이른다. 이때 등장하는 갈등의 주체나 정체에 대한 정보력이 부족하거나 상황적 전개가 다소 이해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른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다.

 

시간적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 만화이다. 물론 실존적으로 우리 인간의 시간은 역행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만화라는 세계는 시간의 역행이 가능하고, 다중영상매체처럼 움직임 내지 소멸의 미학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다. 게다가 만화는 이미지를 내포하기 때문에 시간적 흐름과 동시에 공간적 요소도 가지고 있다. 만화 중에서 단 1장의 그림으로 풍자나 세상을 비판하는 만평 같은 만화는 공간적 요소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우리가 글로 쓰거나 말로 하는 것보다 만평에서 나오는 그림 내지 혹은 4컷에서 나오는 시사카툰이 오히려 더 강렬한 비판과 재미를 준다.

 

만화라는 것이 어렵지 않으므로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하기에 가벼운 소재가 된 것 같이 보인다. 사실 생각해보면 만화도 일반적인 서양화 내지 동양화를 비롯한 회화예술 요소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사실 미술실에서 데생하는데 필요한 연필이나 만화를 그리기 위해 사용하는 연필은 별도로 만들어진 것보다 오히려 그 연필 자체로 이용하고 있다. 물론 전문 만화작가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이나 전문예술가가 사용하는 미술도구들에서 조금 차이점이 보일지도 모르나, 기본적으로 비슷한 도구를 이용하고 있다. 그리기 위한 방법에서 만화는 회화예술에서 사용하는 기법이나 연출들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장르나 예술에서 가지고 있는 요소를 과감히 차용한다.

 

지난 BICOF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학술적인 요건이 강화된 컴퍼런스 주제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토대로 만든 장르만화 세계에서 Beck이란 작품이 여러 가지 장르 중에서 하나로 소개된 바가 있었다. 이미지라는 세계로 이루어진 만화에 소리라는 절대적 시간적 흐름이 반영될 수 있는가? 라는 의미에서 장르만화라도 음악이 가진 특성을 만화에도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이 컴퍼런스 발표에서 나온 주제 중에 작은 단락에도 나왔다.

 

사실 만화라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에서 이미 만화로 만들어진 이상 하나의 허상을 이루는 존재다. 그러나 그 허상에서 만화는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 하나의 표현방식을 가지고 있다. 달리는 자전거와 자동차에서 역동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람이 지나가는 모습을 선으로 묘사하고, 선의 배치로 통해 강렬함을 전달한다. 표현주의적 미학을 가지고 있기에 만화라는 것은 보여주기 위해 전달하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이다.

 

그런 만화를 두고 우리는 그저 보고 있다는 것으로 끝낼 수 있을까? 이미 프랑스에서 만화라는 것은 제9의 예술이란 정식명칭을 부여받고 있다. 대중들이 쉽게 접하는 문화생활에서 영화는 제7의 예술이다. 그 이전의 건축이나 클래식음악, 무용 등과 같은 여러 예술에 대해 대중들의 기호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고, 대중들에게 큰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다른 예술에 비해 어렵지 않은데도 대우를 받으나 만화는 그러지 못하다. 게다가 영화라고 해도 장르나 분류를 보면 예술성을 강조한 영화도 있으며, 특히 아방가르드, 인디 장르 등도 역시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

 

삐에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라는 서적처럼 대중들은 문화와 예술로 통해 하나의 구별 점을 만들어내고, 그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 부분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한다. 만화라는 존재가 정말 유치하거나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별 짓기>라는 책제목처럼 편력된 성향이 결국 정립시킨 문화적 상황이다. 2013년 여름에 극장가에서 개봉된 <설국열차>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실사 영화로 제작된(물론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이 상당히 들어가나) 이 작품은 원작은 프랑스 예술만화였다.

 

만화라면 유치하거나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던 한국의 문화정체성에서 <설국열차> 영화의 흥행은 만화 <설국열차>의 관심도가 증가했으며, BICOF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는 <설국열차>를 그리고 제작한 프랑스 만화작가와 한국 영화감독 봉준호 씨가 나오기도 했다. <설국열차>가 아니더라도 웹툰으로 영화를 만들거나 웹툰 소재가 광고나 드라마형식을 만들기도 했다. 혹은 하나의 만화책으로 이루어진 <식객> 역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만화에서 보이는 다양한 소재나 재미 등이 영화와 드라마로서 콘텐츠 요소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더 이상 만화라는 것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위치에 머무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만화와 웹툰작품이 흥행하고, 때에 따라서는 다른 콘텐츠로 제작된다고 해고 그것은 일시적인 요소다. 중요한 것은 이런 요소를 어떻게 더 개발하여 발전시키어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하여 시장에 내놓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대중적으로 접근과 동시에 어떻게 하면 만화라는 것도 예술적 가치가 높고 다양한 담론이 가능한 세계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가이다.

 

결국 만화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고, 어떻게 다시 봐야 하는지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남서울대학교 애니메이션학과 권경민 교수가 집필한 <만화학 개론>은 그런 흐름에서 만화의 가치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책일 것이다. 국내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도서에서 만화보다는 애니메이션 쪽에 더 많은 도서가 있는 것 같았다. 애니메이션 관련 도서는 영상학이나 영화학 전공자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으며, 국내에도 영화학 관련도서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영화학 도서에서도 애니메이션 한 장르나 소재로서 소개된다. 하지만 그 정보를 제공해주는 질적, 양적인 부분은 많이 부족한 현실이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애니메이터 내지 만화가들이 만든 책이 절실한 부분이고, 설사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만화가와 애니메이터 입장에서 만든 다소 한계점이 존재한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 자체를 잘 풀어갈 수 있어도, 관점의 차이 내지 담론적인 요소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다. 국내 만화와 애니메이션 개론이나 이론에 대한 도서를 보면 관련 분야에 종사하거나 전문교육을 받는 사람에게 적당할지 모르나, 일반적으로 초심자 내지 혹은 교양으로서 접근하는 사람에게 소개해줄만한 도서는 어려운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내 입장을 생각해보면 프랑스 구조주의, 구조주의 이전의 소쉬르의 언어학(기호학),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등을 알게 된 동기는 만화애니메이션에 대한 도서를 보면서였다. 사실 만화라는 것이 이미지라고 해도 하나의 그림체로서 기호이며, 기표로 통해 기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부여된 점이다. 서사의 진행에 따라 이미지 표상과 흐름에서 전달되는 이데올로기의 분석은 쉽지 않다. 정확하게 정리하면 그렇게 분석하기 위해 독자로 하여금 배경적인 지식과 학문적 요건을 쌓기가 어렵다.

 

쌓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이런 세계와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지시키게 하고, 그것이 간단히 무엇인지 정보로 제공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가령 대중들이 흔히 무슨 뜻인지 모르고 남발하는 “스펙타클하다.” 내지 영화나 광고포스터에서 나오는 “초강력한 스펙타클한 전개” 등에서 스펙타클이란 단어가 어디서부터인가에 생각해보면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는 것은 쉽지가 않다. 최소한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매개가 되는 사회”라는 의미처럼 주요 핵심을 간추려 이해시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만화라는 것은 그냥 보고 간단한 것이나 알고 보면 생각이상으로 어려우며, 다른 학문과 많은 연계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만화를 만화로서만 대하는 것으로 만화를 이해하기가 부적당하다. 만화의 연출이나 묘사방법에서도 몽타주나 미장센, 시퀸스와 같은 영화용어를 적용할 수 있다. 특히 화면 안에 이원적인 것을 동시에 넣어 상황의 극대화 내지 갈등의 증폭 역시 좋은 방법이다. 물론 <만화학개론> 책 1권을 읽고 만화전문가 내지 만화비평가, 만화작가로 될 수는 없다. 이 책은 개론도서이지 전문적인 요소를 더 들어간 서적은 아니다. 하지만 만화라는 것이 무궁무진한 작품을 가진 세계이고, 무궁무진하게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세계라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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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병 데이즈 3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중2병 데이즈 3권>을 다 읽는 순간 이 책은 나름 실존주의적 혹은 개인에 대한 성찰을 위핸 만든 도서인 듯하다. 철없는 여동생 린, 흑련, 붕어빵에 빠진 슈, 바보 뱀파이어 루나를 아무리 살펴봐도 제 정신이 아니다. 그나마 제 정신보다는 그저 평범하게 삶을 살고 그냥 하루를 충실하게 보내고 싶은 연오만이 한숨을 내쉬며 독백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러나 중2병 아이들에게 아니 진실로 중2병은 아니나 비현실적인 인생을 살아온 주변 인물에 의해 정상적인 삶이란 없다. 그렇다면 연오에게 주어진 정상적인 삶이란 어떤 것인가?

 

이 작품 3권에서 연오는 자신의 선배에 대한 추억을 넘어 현실에서 마주치는 모습이 나온다. 갈까마귀왕이란 아명을 얻기 전에 그 아명을 지닌 남자, 조직에서 가장 무섭고 잔인하며 모든 것을 넘어선 남자 자오, 그는 사실 연오와 똑같이 생긴 남자였다. 아니 연오와 똑같은 것이 아니라 연오는 자오의 복제판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생명에겐 처음부터 의미가 있었는가? 살아있는 인간보단 억지로 만들어진 기계인간처럼 이들에게 평범한 삶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조직의 명령에 따라 마술사를 찾아 죽이고 죽여 그들의 눈에 모조리 시체로 되어 있을 때까지 미친 듯이 피스톨의 방아쇠를 당기고 장전한다.

 

여기서 선대 갈까마귀왕인 자오는 어느 순간 회의감을 느낀다. 연오를 두고 했던 말들, 뭔가 알 수 없으나 쓸쓸한 눈으로 미소 짓는 그 얼굴을 연오에게 살짝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리고 연오와 자오는 둘만의 전투를 시작하고, 연오에게 패배한 자오는 자취를 감춘 채 사라진다. 그런 자오가 사라지고, 연오는 조직의 넘버원이 된다. 정상에 오르기 전에 연오는 그저 자오의 뒤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가는 순간 한 없이 가슴속으로 허무함이 뒤따랐다. 과연 나는 이때까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원하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느 한 서글픈 정치인이 저술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제목처럼 인간에게 주어진 삶이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의문과 숙제가 남아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의문과 숙제도 따른다. 산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의미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그 유한성에 따라 시간이 존재한다. 인간에게 시간이 없는 것이라면 무한의 정지된 시간이다. 시간적 존재가 되지 않기에 육체적으로 움직임도 없고, 정신적으로 생각을 할 수 없다. 그저 멈추어버린 우주공간의 진공일 뿐이다.

 

그래서 연오가 선택한 것은 린을 데리고 나와 조직에서 나온 것이다. 조직을 나오기 위해 조직의 일원과 마찰이 있었고, 생사를 넘어 평범한 남고생과 여중생이 되었다. 물론 전자는 현실을 적응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적응은 빠르게 되었으나 브라더 콤플렉스로 오빠라면 모든 것을 망각하고 달려드는 강박관념자다. 연오의 일상은 무엇일까? 평범하게 중2병 환자로 소문나서 학교에 가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어야 하고, 심지어 유튜브 영상 조회 10만을 거뜬히 넘은 인터넷 스타이기도 하다. 아쉬운 점이라면 스타가 되면 생계현황이 좋아져야 하나 오히려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식사 때마다 편의점에서 김밥, 라면, 햄버그로 때우다 점심 때 학생식당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연오에게 현실은 그렇게 만족할 만한 것인가? 그의 일상은 불과 몇 개월만 하더라도 양손에 잡고 있는 총자루에서 불을 내뿜으며 상대방의 생명을 태워버렸다. 그저 죽음을 주기만을 위해 태어난 킬링 머신, 그 킬링 머신이란 이름이 결국 자신의 일상이었다. 그가 선택한 일상은 진실한 일상인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일상을 버리고 새로운 비일상을 선택해야 했다. 그런 몸부림이야 말로 연오가 눈부시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였다.

 

나는 누군가에 의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나는 나에 의해 살아간다는 개인에 대한 성찰과 실존적인 자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삶은 과다 포장하여 억지로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없던 만큼 자신이 인간이라고 느낄 수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누군가 같이 밥을 먹고 같이 길을 걷고, 이야기를 나누어 작은 것이라도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정말 자신이 작은 것에 만족하고 살아가는가? 빛나는 순간은 늘 거대한 무엇을 손에 넣어야 빛이 나는 것인가? 물론 개인마다 차이점은 있다. 하지만 연오는 그 빛남을 알지를 못하나 손에 넣었다.

 

옆에 중2병 환자들처럼 이상한 녀석이나, 그래도 같이 웃으며 싸우고 같이 지낼 수 있는 친구들이 있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늘 사람을 이용하고 속이는 것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오의 모습은 살인귀 갈까마귀왕 시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성적 논리만 존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아니라 기계에 불과하다. 마음의 감성이 들어가는 순간 삶을 진한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 연오에 대해 자오는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자오는 연오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랑을 할 수 있냐고 말이다.

 

자신 이외에 타인이고, 그것도 인간과 인간이 아닌 남자와 여자로서 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냐고 말이다. 연오는 당시 살인귀가 되기 위한 시기였기에 그런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오로지 조직에서 실력 있는 인간 청소기가 되고 싶을 뿐이다. 그런 연오가 어느덧 사랑이란 달콤하고도 위험한 덫에 걸린다. 린이 조직에 같이 있을 때 연오에게 접근한 여자에 대해 처리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부분 접근하는 여자는 마술사 조직에 속해있는 주술사들, 그 주술사들은 미인계로 조직의 남성을 유혹한다. 린은 유혹하려는 여자가 나오는 순간 모두 자신의 손에서 나오는 무기로 토막토막을 내었다.

 

오빠만 찾는 지독한 중2병 브라더 콤플렉스라도 일단은 일류 살인기계였다. 그러나 이번에 연오가 당한 것은 린은 눈치 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 채는 것이 불가능했다. 연오가 빠진 유혹의 덫은 마술사가 마술을 부린 것이 아니라 마술사가 여자로서 마술을 부린 것이다. 조직의 적인 마리가 이상하게도 연오의 선배인 자오와 함께 활동하고 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마리는 학교 안에서 최고의 미인에다가 성격도 운동도 학업도 뛰어난 미소녀다. 그런 미소녀가 연오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연오의 삶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없이 하늘을 날아가기 위해 날개 짓만 반복하는 작은 새처럼 보잘 것 없이 보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정말 빛이 나는 것이다. 마리는 그저 자신을 숨기고 맞추어 살아간다면 연오는 숨기지 못한 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점에서 마리와 다른 삶을 선택한 것이다. 피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인 연오의 삶, 하지만 자오에겐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오와 자오는 분명 전쟁이 끝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쟁이 끝나는 것만을 생각하고 살인만 했지, 그 이후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마술사 조직과의 전쟁도 끝난 상황에서 전쟁의 회귀는 불가능했다. 평화가 온 것이다. 손에 피 냄새가 나지 않고, 억지로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연오는 그것에 대한 생각에서 자오를 따라가지 않았다. 만약 살인기계로 태어난 자신들이 더 이상 살인기계로서 활동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행복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인정받을 때 행복해진다고 했다. 자신에게 있어야 할 공간, 아니 있을 수밖에 없는 공간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오는 스스로 허무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이 살아왔던 그 공간과 흔적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조직이 없어지면 자신의 살아온 흔적이 무의미해지는 것이고, 자신이 싸우던 전장이 사라지면 자신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의미다.

 

마치 그것은 전쟁터에서 지겨울 정도로 총탄을 피해 상대진영의 병사에게 총을 발사하고, 칼을 찌르는 군인처럼 전쟁을 끝난다고 해서 전쟁은 끝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전쟁에서는 자신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저 골칫거리라면 그 평화 뒤에 오는 세상을 파괴하고 싶을 것이다.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것을 부정한다는 것을 부정해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증법적인 논리에서 자신의 일상이 곧 타인에게 비일상이야 하듯이 자신이 살아갈 공간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일 것이다.

 

그것은 지배계급에 대해 피지배계급이 전복을 시도하는 혁명이 아니라 그저 힘이 있는 자들이 자기만의 세상을 가지고 싶어 하는 쿠데타다. 연오의 삶은 혁명과 쿠데타도 없이 그저 자신의 길만 찾아간다. 연오는 병기로서 지배세력이나 현실생활에서는 피지배계급에 가깝다. 학교에서 중2병으로 소문나고 맨날 동생과 주변 중2병 소녀들에게 휘둘림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이란 존재에 대하여 중2병 소녀들은 사람으로서 대해주었지 연오를 살인기계로서 대해주지 않았다.

 

그런 비일상 같은 일상이 자오에 의해 파괴당할 위기에 처한다. 연오는 날카롭게 살기를 띠고 있는 자오에게 이길 수 없었다. 자오가 가진 각오와 허무함에서 연오의 결심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그의 목숨이 자오의 손가락에 의해 결정될 때, 겨우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것은 흑련의 정신없는 중2병적인 말투다. 중2병에 의해 살아가는 엉뚱함에서 결국 자신이 살아갈 공간이다. 일상과 비일상이란 2가지 선택지에서 한 가지만 아니라 2가지 모두 속하거나 혹은 속하지 못한 것이 연오다. 오히려 2가지 선택을 모두 가져간다는 3분법적인 선택도 있으나 물론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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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 Q (30p 화보집) - 디지팩 + 화보집 + 아웃박스 + 띠지
안노 히데아키 감독, 하야시바라 메구미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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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다. 위대한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만들고 그것을 비극 시로 만든 것은 소포클레스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을 보면 마치 이번 이카리 신지의 앞에서 나타나게 된다. 독일 사회경제학자 마르크스가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에 대하여 “역사적 사건은 반복되는데,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끝난다.”는 말을 남긴다. 그 의미는 바로 신지가 저지른 그 비극의 씨앗이 이미 한 번은 비극으로 나타났는데, 한 번은 희극으로 끝이 난다로 갈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를 보면서 내가 판단한 내용은 ‘You Can (not) Advance’라는 명제에서 신지가 과연 성장했는가? 혹은 하지 않았는가? 라는 변증법적인 질문이다. 이와 반대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에서는 ‘You are (not) alone’에서 결국 신지의 결말은 alone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Advance로 보였으나 그것이 결국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You Can not Advance’라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것은 바로 신지에 의한 서드 임펙트의 시행이다.

  

 

미사토는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레이가 사도에게 잡혀먹어 중간에서 고민하던 신지에게 자신의 길을 가라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신지에 대한 경멸의 눈빛을 감추지 못해 증오가 표출된 정도이다. 그것은 미사토가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까지 신지와 레이, 그리고 초호기의 비밀을 몰랐기 때문이다. 신지에게 초호기를 비롯하여 에바에 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에바 자체가 신지의 어머니인 유이의 몸과 영혼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에바와 달리 유일하게 초호기만 조종석이 LCL 용액으로 가득 차 있다.

 

 

다른 에바 시리즈는 LCL용액이 아니라 뇌파와 에바하고 연결하여 신경조직을 연결한다. 즉 <신세기 에반게리온>부터 시작하여 <신극장판 에반게리온>까지 사이버펑크 장르 유효성은 이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신지가 서드 임팩트의 원인과 결과이다. 신지와 초호기의 비밀을 아는 자는 이카리 사령관, 후유츠키 부사령관 그리고 리츠코 박사일 것이다. 그러나 서드 임팩트가 일어난 후 14년이 지나자 리츠코는 이카리 사령관을 떠나 Wille의 미사토와 합류한다. 즉, 리츠코 박사는 초호기와 신지의 비밀을 알았다고 해도 이카리 사령관이 무엇을 꾸미는지 알 수 없었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에서도 나오는 장면이고, 먼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나온 장면 중에서 레이가 영호기 테스트 중에 폭주를 일으키는 소동에서 리츠코 박사는 이카리 사령관이 레이를 소중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질투감을 느끼는 부분이 나온다. 심지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자기 어머니인 레이코에 대한 질투심과 그것에 대한 모방심리 내지 보복심리로서 이카리 사령관과 리츠코는 불륜 관계를 맺는다. 그런 리츠코가 미사토의 Wille에 갔다는 사실은 기존의 에반게리온에 대한 관념을 모두 흔드는 것과 같다. 

 

신지가 우선 에바 초호기를 타고 레이를 구하는 순간 서드 임팩트로 이어지는 것은 결국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고, 그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이카리 사령관과 후유츠키 부사령관이었다. 신지가 신으로 가는 것에서 레이라는 존재가 왜 나타나는가? 라는 의문에서 바로 고대 그리스 위대인 시인인 호메로스와 그리고 위대한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의 신화를 되돌릴 수밖에 없다. 먼저 오이디푸스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에게 버림받고, 추후 다른 나라의 왕의 양자로 들어가 신탁에서 아버지를 죽인다고 듣기에 자신을 양자로 받아주던 나라에서 떠난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어느 남자들과 시비가 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남자들의 일행 모두 때려죽인다. 그런 후에 테베이란 나라에서 심한 재앙에 걸렸는데, 몸은 사자 머리는 인간인 스핑크스가 인간을 괴롭혀서 만약 스핑크스의 재앙을 막는 자에게 테베의 왕과 더불어 이오카스테라는 미모의 여왕과 결혼해준다는 엄청난 조건이 따랐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모두 풀어 스핑크스를 처단하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놓는다. 게다가 지혜롭고 용감한 오이디푸스는 덕까지 겸비하여 정치적으로 매우 우수한 왕이었다.

 

 

어느 날 테베이란 국가가 자꾸 재앙이 걸리고, 흉년까지 겹치어 백성들이 몹시 고통을 받았는데, 이때 신탁을 받은 결과 어느 누군가가 천륜을 어기어 신이 노여움을 샀다고 한다. 만약 그 천륜을 어긴 자로 하여금 죗값을 받지 않으면 그 저주는 영원히 이어지게 되어 추후 테베이란 왕국은 멸망한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오이디푸스 왕은 그 저주의 원인을 찾다가 그 원흉이 바로 자신이란 사실을 안다.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난 일행은 아버지 라이오스와 호위병이고, 여왕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였다.

 

 

이것이 탄로 나자 여왕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칼로 찔러 맹인이 되다가 영웅 테세우스의 인도 아래 숨을 거둔다. 하지만 저주는 남아 오이디푸스의 아들 2명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 죽고, 그 여동생인 안티고네 역시 오빠의 시체를 장을 치르려다 죽게 된다. 신지의 죄는 바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윤리인 근친상간이란 죄를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인간의 문명에는 자연적인 흐름을 거슬려 그것을 파괴하는 것에서 문화는 시작된다. 자연의 존재를 문화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다. 인간의 노동이야 말로 진정한 우리 문명을 만든 주체적 에너지다.

 

 

그런데 그 노동이란 것은 현재 국가경제체계처럼 자본주의체계가 아니라 그 이전에 농경사회라도 존재했다. 농경사회는 중앙집권화를 이룬 왕권을 중시한 구체제적인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임금과 아버지는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임금과 아버지의 옆에 있는 어머니 내지 여왕을 노리는 것은 무서운 죄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신지가 저지른 죄가 바로 근친상간의 시도라는 점이다. 아야나미 레이가 어머니의 분신조차 몰랐으나, 그래도 2사람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이끌린다. 신지의 초호기 탑승도 그러하나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도 이카리 사령관이 다른 인간들은 에바초호기에 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LCL이란 용액이 어머니의 양수라는 점에서 신지는 에바 초호기가 곧 어머니의 자궁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에바의 에너지원은 물론 코어의 핵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을 무한대로 이끌어내는 것은 에바와 조종사와의 싱크로 율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에바 초호기 S2기관을 가진 이유는 에바초호기와의 싱크로가 400%이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도 필요 이상의 싱크로를 보여준다. 그것은 자궁 속에 있는 태아가 생존본능 내지 투쟁본능과 같은 무의식적인 기질이 결국 에바초호기에 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지가 에바초호기와 높은 싱크로를 보여주어도 그것은 자궁 안에 있는 아들일 뿐이지 레이처럼 물리적인 육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신지가 레이에게 손을 뻗어 직접적인 성적 행위가 없더라도 여성의 육체를 지닌 어머니의 클론인 레이를 원했다는 것이다. 레이와 신지가 비로소 손을 잡아 하나가 되려는 순간 카오루가 보낸 롱기누스의 창에 의해 서드 임팩트가 불완전하게 끝이 난다.하지만 적어도 중요한 점은 신지가 하던 것은 인간이 문명사회에 의해 진행되어온 근친상간 발상을 무의식적으로 시도한 것과 인간의 욕망이 신화로서 구전되어도 그 신화적인 욕망을 하나의 사실로 만드는 순간, 신화는 현실의 터부에서 벗어나는 계율을 파괴한 것이다.

 

 

그래서 신지는 꿈의 세계에서 인정되는 신화를 현실에서 실재로 반영하려는 것이 곧 신화의 파괴, 질서의 파괴로 이어진 것이다. 그 질서의 파괴로 인해 기존 세계관은 파괴된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오이디푸스왕과 어머니 이오카스테의 관계가 결국 테베의 붕괴로 이어지려 했다. 신지의 그런 행위가 결국 14년 후에 깨어날 때 미사토를 비롯한 전 NERV 요원들에게 증오와 분노를 산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미사토가 신지에 대해 증오를 하더라도 그 증오가 반드시 신지를 세상에서 말살해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애증이 담긴 눈빛이었다. 신지의 목에 폭탄을 달아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었는데, 미사토는 새로운 복제 레이가 조종하는 “아담스의 그릇”에게 구출당한 신지를 그대로 보낸다.

 

 

일부러 멀리까지 가는 것을 보고 스위치를 눌러 굳이 신지를 죽일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신지에게 에바에 타지 말라고 권고한다. 미사토가 신지와 대립적인 관계인 NERV로 간다고 해서 미사토 자체가 신지에 대한 절대적 적대감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점들은 아스카로 통해 알 수 있다. 아스카는 신지를 처음 우주에서 만날 때 “빠가 신지!”라고 한다. 정말 적이라고 여겼다면 그런 호칭을 아스카가 사용할 이유는 없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적 사건에서 서드 임팩트는 비극으로 끝났으나 포스 임팩트는 희극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변증법적인 논리다.

 

 

카오루의 역할에서 만약 그가 희생이란 극적플롯이 없었다면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의 개별적 역사적 사건에서 비극이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만약 되풀이 된다면 그것은 마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End of Eva>에서의 나오코 박사와 리츠코 박사의 최후처럼 될 뿐이다. 나오코 박사는 어린 레이를 교살한 죄책감에 자살하고, 리츠코는 레이에게 질투심을 느껴 이카리 사령관 앞에서 NERV 본부를 자폭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카리 사령관에게 살해당한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리츠코는 미사토와 같이 있음으로서 어머니와 같은 비극으로 피한다.

 

 

말 그대로 한 번의 비극이 두 번의 비극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작품에서 조금 특이한 점에서 인류보완에 대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조금 나중에 다룰 부분이나, 인류가 리린이 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게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선 유이는 인간이 진화하여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점에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의 예고편에 나오는 수많은 에바들은 결국 서드 임팩트로 통해 인류가 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진화하지 않은 것이 바로 리린이 아닐까 한다. 본래의 릴리스의 주변을 보면 수많은 에바의 유해가 있다. 그것은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진화한 것이 아니라 일부만 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에서 리린의 왕은 이카리 사령관으로 나온다. 그가 한 것은 신의 죽음이다. 본래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기존 관념의 틀을 깨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른바 해체주의 미학으로서 당초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신지의 어머니와 초호기에 대한 비밀을 풀어간 것은 미사토가 추적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알게 했다면, 이번에는 후유츠키 사령관이 직접 신지에게 설명하여 그 비밀을 폭로한 것이다. 곧 작품의 진행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알게 만들어 작품 내에서 주인공에게 비밀이어야 하는 것이 이미 비밀이 아니게 만든 점이다.

 

 

그런 역할을 후유츠키가 맡고, 그것을 하게 한 것은 이카리 사령관의 인격의 불안정이다. 이카리 사령관은 신지가 NERV에 오고 난 뒤로 모든 시나리오를 관여하고 유도한다. 심지어 신지의 탈출과 더불어 카오루의 죽음까지 말이다. 카오루를 죽이게 금 유도하고, 그 카오루의 동일한 존재인 사도까지 죽이게 유도한다. 네메시스의 등장과 분더의 출동, 롱기누스 창과 더불어 한 짝의 창을 같이 뽑아야 하나, 알고 보니 롱기누스의 창만 2개만 있었다. 덕분에 신지는 그것이 어느 창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임을 부정하기 위해 혼자 뽑는 순간 카오루는 제1사도에서 제13사도 되어버린다.

  

이때 기존 작품과 다른 점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TVA에서는 인류보완계획에 대해 죽음의 욕망이 아닌 삶의 욕망인 에로스적인 요소를 조금 가미하여 신지가 지금의 세상이 다소 힘들어도 그래도 살만하다고 여기고, <End of Eva>에서는 모든 진화의 최종단계는 타나토스, 즉 죽음의 욕망으로 본다. 제레의 욕망은 바로 타나토스적인 죽음의 욕망이다. 하지만 이카리 사령관은 제레와 같은 시나리오를 가지기보단 유이가 가진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후유츠키와 같이 행동을 한다.

 

 

이미 죽은 유이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자연의 모든 섭리, 혹은 그 섭리가 신이란 관념적 존재로 만들었다면 이카리 사령관은 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도구가 바로 에바 시리즈다. 에바로 통해 인간을 진화하고 신을 넘어볼 수 있는 위협성에서 이카리 사령관은 신을 죽이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 신을 죽인 남자로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신을 정말 죽인 것이 아니라 신이란 존재를 인간의 신화적 욕망에 의해 탄생했기에 그 인간이 가진 관념을 바꾸는 것이다. 리린의 왕이란 것에서 모든 권력적 힘이 이카리 사령관에게 있고, 그의 책략을 모두를 기만하고 속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한다.

 

 

이른바 프로파간다라고 하여 군중심리나 유도로서 이카리 사령관은 자신만의 신화를 위해 모든 인물을 하나의 도구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희생되는 제물은 당연히 자신의 아들인 신지이다. 서드 임팩트와 더불어 포스 임팩트를 일으킬 수 있는 인간은 신지만 가능했다. 신화적 욕망에 의해 제물로 바치면 제의적 구조에 의해 신화는 은폐로서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하지만 예고편에서 신의 모습을 따라한 에바가 계속 나온다는 것은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은 별도의 세계관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주제는 ‘You Can (Not) Redo’이다. 이미 한 번의 비극을 겪은 신지가 다시 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 결론은 다음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시리즈에서 제시될 뿐이다. 작품을 감사하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신지의 손에 들린 워크맨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선 단지 타인과의 소통을 원하지 않기에 귀를 닫아주는 도구에 불과한 워크맨이 계속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에서 주요한 아이템으로 나온다. 그것은 아버지 이카리 사령관과 아들인 신지를 유일하게 이어주는 도구다.

 

 

신지가 벌을 받은 이유와 죄를 지은 이유는 단순히 그가 오이디푸스왕이 저지른 신화에서 이름을 따온 오이디푸스콤플렉스만이 아니라, 레이에 대한 욕망이 아버지와 다름없다는 점과 같다. 신지가 왜 초호기와 싱크로가 0.00%인 이유는 바로 신지는 어머니를 따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권위에 따른 것이다. 마음속 깊이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실생활에선 서로 꺼리는 모습이 나오나, 그 워크맨은 바로 이카리 사령관이 젊은 시절에 자주 사용한 물건이고, 그것만이 유일하게 신지에게 전해준 아버지의 물건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오로지 워크맨으로 이어지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아야나미 레이가 워크맨을 잡고 신지와 결합하려한 점에서 신지가 아버지와 비슷한 인간이 되어 감을 보여주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도 역시 워크맨은 나온다. 워크맨을 잡던 신지는 수리 이후 계속 이용하나 에바13호기 파괴 이후 그 워크맨을 버리고 가는 장면이 나오고, 그 모습을 복제 레이가 본다. 아마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았으나 레이가 그 워크맨을 줍는 것이 확률이 높을 것이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의 레이는 완벽한 인형으로 나오나, 마지막에는 그 인형적 모습에서 탈피한다.

 

 

NERV 본부와 교신이 되지 않아 명령체계를 따르지 못하고, 그런다고 생존적인 조건에서 아스카와 신지하고 같이 활동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 전개에서 가장 활약상이 뛰어난 인물은 미사토와 아스카다. 초반에 신지는 주인공의 역할보단 그저 보조에 불과하고, 전체 1/3에선 미사토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런 후에 신지가 탈출하여 2/3은 카오루와 관계, 최후 1/3은 NERV와 Wille의 전투로서 이야기가 끝이 난다. 기존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와 파>는 신지가 주인공으로 되어 신지를 바라보는 작품인물이 미사토였다면, 이번에는 미사토가 신지에게 바라보고 있음으로 나온다. 

 

그 외적으로 캐릭터를 보면 아스카의 설정이 돋보인다. 고양이귀를 상징하는 빵모자와 모자 앞면에 2개의 버튼이 달려있다. 하나는 해골무늬에 한쪽 눈을 가리는데, 그것은 자신의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 가지의 색이다. Blue, Red, White 이것은 분명 프랑스 국기를 의미한다. 실제로 그런 비슷한 문양을 프랑스에서 사용하고, 특히 1789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에서 프랑스시민이 모두 달고 다닌 마크와 유사하다. 딱히 프랑스대혁명과 아스카에게 프랑스 국기의 의미인 자유-Blue, 평등-White, 박애-Red의 요소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지 않으나, 캐릭터에 대한 아이템은 기호학적으로 의미가 있음은 분명하다.

 

 

영상연출에서 돋보이는 것은 우선 초반의 우주에서의 신지와 초호기의 수거이다. 로켓엔진이 분사하는 모습은 여전히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처럼 매우 세심한 작업이 보인다는 점과 마치 실제 우주에서 물체가 유영하는 듯한 연출을 보이려 했다는 점이다. 기억이 또 남는 장면은 신지가 심리적 불안에 의해 괴로워하는 점에서 신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어지럽게 화상이 떨리는 부분과 신지를 중심으로 카메라의 회전으로 왼쪽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walking-outside라고 하며,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그남자와 그여자의 사정>에서 사용한 방법이다.

 

 

또 다른 기법으로 서로 다른 화면이 겹치고 겹치게 보이는 프로몽타주 기법이다. 이것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나오고, TVA 25~26회에서 신지의 얼굴에서 다른 영상이 계속 이래저래 바뀌는 모습이 나오는 점에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통해 이미지의 연출효과는 좋아졌으나 그 근본적 연출이나 혹은 시나리오에서 보이는 작품세계관은 기존 가이낙스로부터 크게 탈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모든 생명의 진화는 멸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은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와 일맥상통한다. 새로운 생명이 존재하려면 기존의 모든 생명은 멸망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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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 가?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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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가?>라고 말한다면 우리들은 흔히 국내 방송 중에 아버지와 자녀가 같이 TV방송프로그램에 나와 이런저런 체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쇼로 생각한다. 쇼라는 것에서 TV라는 매체는 실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실재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거대한 가상세계다. 딱히 내가 TV에 나오는 아버지와 자녀가 서로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해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으나, 부모 특히 가족관계에서 언제나 소홀하게 대해지는 아버지의 존재를 생가하면 TV라는 쇼는 역시 쇼일 수밖에 없는 체계이다. 이른바 spectacle이라는 말이 있듯이 TV세계의 이미지가 매개로 되어 대중들은 아빠 어디가로 통해 재미를 느낄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하나의 쇼프로그램이 그들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연예인 내지 특수한 사람이란 것을 아나, 한편으로 우리는 아버지란 존재가 TV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약간 따라하거나 받쳐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방송에서 나온 장소가 나오면 누구는 그곳에 반드시 가려고 한다. 자신이 원해서 가기보단 미디어의 위력이 결국 아빠 어디가? 에서 아빠 우리도 저기가! 로 변할 수 있다. 물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아이는 분명 어느 정도 지적능력이 있을 것이고, 하다못해 그곳에 가서 충분히 놀 수 있는 체력이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내가 읽은 <아빠 어디가?>는 그러지 못한 아버지가 일기로서 적은 책이다. 장 루이 푸르니에라고 프랑스 방송인이자 시나리오 작가는 하늘에 무슨 벌을 받았는지 아니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몰라도 태어난 아이 중에 아들 2명이 장애인이고, 그나마 딸은 정상인이었다. 장애인이란 이름은 그나마 복지나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비된 유럽조차도 괴로운 삶의 연속인데, 우리나라는 얼마나 힘들까? 솔직한 말로 정신적 문제가 아니라 단지 육체적으로 문제만 있을 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장애인의 기준을 일정하게 만든다. 사회부적응자로 말이다.

 

물론 그런 인식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 누구도 자신이 혹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가진다. 만약 가진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민될 것이다. 실제로 아이를 준비하는 산모와 그의 가족들인 아이가 장애인이 되지 않을까 라는 고민 속에서 산부인과에서 깊은 호흡을 내쉰다. 후천적인 장애와 달리 선천적 장애는 매우 치명적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장 루이 푸르니에의 고통을 보면 알다시피 몸집은 계속 어린아이 수준이고, 뇌는 마치 지푸라기만 든 것처럼 텅 빈 아이들을 보면 어떨까?

 

삶은 하나의 연극이고, 그 연극은 하나의 비극과 같다. 물론 희극이라는 종점이 없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인간의 마지막은 언제나 죽음이고, 누구나 그 죽음이란 이름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인생은 비극이 되어야 하는 점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육체적인 존재를 떠나 정신적인 존재가 있다. 형이상학적 존재론에서 보자면 작가는 현세의 고통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나, 그 고통이 삶을 넘어 죽음이란 이름을 건네준다면 그것은 하나의 희극이다.

 

아니 눈을 뜨지 않은 채 잠을 청하면 장애인이던 그의 아들이 꿈에서 유명한 선수나, 배우나, 하다못해 자동차 수리공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먼저 떠나보낸 큰 아들 마튜는 자동차 엔진소리를 내기 좋아했다. 부웅부웅~ 이라고 말이다. 무슨 말을 하든지 알아들을 수도 없다. 듣는다고 해도 그것이 이해할 수도 이해해볼 수도 없다. 그저 스쳐가는 소음에 불과하다. 몸짓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몸짓만 내세울 뿐이다. 그래도 몸짓을 내세우는 것도 좋다. 점점 꼽추가 되어가고, 등은 펴지 못해 척추수술을 받다가 3일 만에 하늘로 가버린 마튜에겐 과연 어떤 것일까?

 

아버지 본인은 정작 담담하나, 예전에 안락사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다. 죽음이 과연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죽음에 대해 인간이 괴롭게 생각하고 두려워할 때마다 인간 스스로 나약해진다. 동물은 죽음의 위기를 느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죽음이란 관념은 상상으로 통해 자신을 대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위기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등을 펴지 못해 괴로워하던 마튜, 하지만 마튜는 왜 괴로운지 이유조차 알 수 없다. 마튜는 죽음이란 관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죽음을 아는 것은 오로지 아버지 루이, 하다못해 마튜의 동생인 토마는 형의 죽음조차도 알지 못한다. 형을 찾는 것처럼 보이나 언제 존재했냐는 듯한 행동으로 집안을 돌아다닌다. 막내 딸 마리는 정상으로 태어나 루이의 이야기 속에 그저 그런 아이로 나온다. 이런 인생에 루이는 자신의 암울한 현실에 대해 어둠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심지어 아이들의 생모에게 이혼을 당해도 말이다. 그런 현실에서 루이는 아이를 돌보는 보모 조제에게 농담을 던지고, 장난감 가게에 점원에게 늘 같은 것을 사간다.

 

누가 보면 미쳤거나 혹은 실성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상황은 완전히 절망에 가까워도 그의 글은 절망보단 농담으로 가득하다. 아빠 어디가? 라고 토마가 물어보면 은행을 털러가, 자살하러 가, 나이지리아 폭포에 다이빙을 하러 간다는 말을 한다. 토마는 무엇을 대답해도 계속 같은 것을 묻고 또 묻는다. 일일이 거기에 대응하여 말해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저 계속 의미 없는 진담에 의미 없는 농담만 늘어놓을 뿐이다. 무슨 말을 해도 토마는 모르니 말이다. 그래도 초현실주의적 그림도 그리고, 글도 간단히 적는 모습도 나온다.

 

나름 발전이라고 하나, 그 발전은 기대감으로 이어지기에 너무나 잔혹한 발전이다. 그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루이는 자신이 그런 처지라고 기죽으려고 하지 않는다. 좋은 차를 몰고 다니며, 어디든 돌아다니려 한다. 때로는 허풍도 치고, 때로는 상상에서 허세도 부린다. 물론 허풍과 허세는 모두 현실적으로 소용이 없으나, 그것에 얽혀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비극적인 삶을 희극적인 유머로서 글로 내려간다. 작가 본인부터 블랙코미디를 잘 만드는 작가인지 글 자체도 역설적인 내용이 많았다. 누가 봐도 참을 수 없는 상황에 그의 엉뚱한 상상력과 행동 그리고 말투는 우리로 하여금 씁쓸한 웃음과 재미를 준다. 마음이 편하지 못한 즐거움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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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재장전 - 자본주의와 코뮤니즘에 관한 대담
제이슨 바커 엮음, 은혜.정남영 옮김 / 난장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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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재장전 책보단 우선 번역된 영화부터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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