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브루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 현실문화 / 2017년 11월
평점 :
2018년 평창 올림픽이 개최된다. 올림픽 마스코트가 백호와 반달곰을 기반으로 제작된 캐릭터이다. 이 캐릭터를 보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단방에 생각한 것이 있었다. 곰과 호랑이는 한국인의 국조 단군신화에 나오는 존재이다. 단군신화는 한국인의 시작이고, 한국의 역사와 신화의 시작이다. 단군신화가 없다면 한국인이란 정체성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된 올림픽 역시 호돌이와 반달곰 캐릭터가 등장했다. 한국에서 단군신화를 결코 놓칠 수 없는 이유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단군신화의 중요성은 단순히 국제행사의 마스코트로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은 하나의 민족이지만, 국가는 2개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전신은 고종황제께서 반포하신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따온 말이고, 한국(韓國)은 고대 우리의 국가인 삼한(三韓)의 한(韓)을 가지고 온 것이다.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가? 한국이란 국가는 우리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우리는 남한(南韓)이라고 말하고, 저 위에 있는 정권은 북한(北韓)이라고 한다. 반대로 북한은 자신을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라고 한다. 그들은 자신을 두고 북조선(北朝鮮)이라 하고, 우리를 보고 남조선(南朝鮮)이라 한다.
단어를 본다면 북한은 조선을 우리는 한국을 인용하는 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역사, 그리고 대한민국 이전의 역사 조선, 조선이란 국가가 단군조선을 계승한 점을 생각하면 국가의 이름에 아주 깊은 뜻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전쟁이나 전투에서 다른 국가와 민족보다는 같은 국가 내에서 같은 민족끼리가 더 잔인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부른다. 신화에서도 그리스비극 오이디푸스왕과 아가멤논왕의 가족이야기는 비극을 넘어 인간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같은 종족이기에 같은 형제이기에 갈등은 더욱 무섭다.
집안에서도 마을에서도 친하게 지낸 사람끼리 다투면 그 화가 더 심해진다.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높을수록 증오와 복수는 깊어지는 게 인간이 가진 딜레마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4주년이 되고, 광복절은 61주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일제로부터의 광복과 한국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조선총독부에 의해 징용에 끌려간 청년들, 위안부 성노예로 끌려간 소녀들의 영혼은 안식을 찾지 못했다. 이들의 영혼을 위로받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영원히 독립국가라 말할 수 없고, 한국이 통일되기 전까지 한국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韓國戰爭)은 종전(終戰)이 아닌 휴전(休戰)이다. 최근 북한 핵문제나 휴전선 귀순병사 사건을 보면서 우리에게 남겨진 지난날의 슬픔을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제로부터 시선을 돌리면 안 된다. 조선을 잊는 것은 분단 이전의 한국을 버리는 것이고, 일제와 전쟁을 피해 멀리 외국 타향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고려인들을 버리는 것과 같다. 이 모든 비극의 씨앗은 그 당시 살아간 이들만 아니라 이들의 후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후예들은 아직도 우리라는 사실을 가끔 우리들은 망각한다.
예전에 형과 집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우리 집안은 일본제국주의에 많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큰형님과 동생분이 징용에 끌려가고, 해방 후 돌아오신 할아버지의 큰형님은 그만 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본래 집안이 양반가문이나, 몰락한 남인의 후예이기에 그 여파로 할아버지는 한자를 제대로 읽지 못한 농부였다. 그래서 한국전쟁 전후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자유주의는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그러나 한국전쟁 시기 밤이면 늘 시골집 근처에 있는 저수지 들풀 사이에서 숨어 지냈다고 한다.
게다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아무 관련도 없는데도 빨갱이로 몰린 누명도 있었다고 했다. 비록 20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분이 살아온 인생은 순탄치 못한 굴레의 연속이었다. 징용에 끌려갈 뻔했으나, 스스로 몸을 자해하여 운 좋게 징용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가족의 비극적 시나리오에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을 읽었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도서로 가장 잘 읽은 서적은 박태균 교수의 <한국전쟁>, 김태우 박사의 <폭격>이었다. 한국전쟁사를 일방적인 관점이 아니라, 미국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군사기밀해제문서를 다각적으로 정리하여 만든 도서이다.
전쟁은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전후맥락을 관찰해야 하고, 특히나 그 시대에 전쟁 당사국이 아닌 주변 국가의 정치군사적 갈등도 확인해야 한다. 한국전쟁을 시기적으로 잘 정리하고 풀이한 도서는 박태균 교수님의 서적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한국전쟁에 가려진 분노와 역사적 관점은 브루스 커밍스와 김태우 박사의 책이다. 김태우 박사의 책에서 북한이 패배한 전쟁이 아닌 것처럼 보이나, 사실 북한은 상당한 피해를 받고 모든 것이 사라진 전쟁이라 말한다. 이에 반해 브루스 커밍스는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이기지도 못하고, 압록강에서 후퇴하여 패배한 전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승패가 나누지 못한 패배한 전쟁이라 말한다.
전쟁은 패배하지 않아도 패배라고 말하는 이유는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고, 그들이 저지른 행동들이 결코 떳떳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근 노근리 사건을 대두되고 있는데, 노근리 학살과 관련하여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한국전쟁에서 한국인이 300만명이 사망하고, 그 중 반 이상이 민간인이다. 한국인에 대한 학살이 미군도 그러하나 왜 자국민끼리 그럴까?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중공군의 개입보다 한국인끼리의 혈전에 많은 생각을 보여준다.
전쟁의 시작은 1950년이 아니라 1932년부터란 점이다.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이 설립된 시기, 만주군관학교에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장교로 임관하고, 그 중 일부는 유명한 대한민국 육군 장군이 되었다. 대한민국 초기 육군 장군과 육군사관학교는 친일세력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들과 더불어 경찰과 관료조직은 친일파들이 메우게 되었다. 이들은 자국민에 대한 탄압이 무척 잔혹했고, 항일독립투사에 대한 탄압도 지독했다. 민간인 학살에서 보여준 만행은 이가 떨리는 정도이다.
어느 친일파 장교출신 육군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마을 소년을 산에 끌고 와서 10명 중 9명은 일본도로 목을 베고, 나머지 1명에게 죽은 9명의 머리를 가져가게 했다고 한다. 군부와 경찰에 대한 불신과 문제점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등장하고,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중에 가장 많이 몸담은 단체가 대종교이다. 대종교는 국조 단군을 모시는 민족종교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 신자였다. 대종교 신자가 해방 후 서울에 오니 당시 자신을 지독하게 고문한 일본순사가 한국경찰이 되어 있었다.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김원봉 대장도 해방직후 일제시대 순사를 했던 친일파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고, 북으로 넘어갔다.
따라서 친일파와 친일파에게 불만을 가진 한국인의 대립이 이미 1930년대부터 존재했고, 쥐잡이작전은 육군사관학교에 가장 인기 높은 전략이다. 그런데 그 작전의 기원은 일본군이 하일유격대를 처치하기 위해 고안한 고도의 전략이다.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은 대부분 중국 및 러시아 일대에서 활약했고, 사회주의 노선 항일투쟁가들은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활동했다. 중국내전에서 조선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한국전쟁은 중국과 소비에트연방, 그리고 미국의 파워게임에서 시작되었으나, 이미 그 전초는 한국인 내부에 있었다는 점이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미국인이나, 은근히 한국사회와 역사, 게다가 문학과 신화 등 전반적인 한국문화를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갈등은 당시 전쟁만이 아니라 21세기에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책의 서문에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자신의 책을 바친다고 적었다. 반정부 인사, 평화중재자, 정치가로 활동한 그를 말이다. 지금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두고 호남에 태어났고, 한국전쟁 전에 인민위원회 활동으로 빨갱이란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하지만 브루스 커밍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몸담은 곳은 공산주의 세력과 무관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닌 각종 인민위원회는 자생적 조직이라 말했다.
그런 증거는 미군의 문서에서 발견되었고, 당시 미군은 한국의 자체조직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으며, 이들을 공산주의와 같은 세력으로 보았다. 대표적인 학살사건은 제주도의 4·3사건이고, 당시 제주도 주민들은 아무런 통신장비도 없었기에 공산세력과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 미군과 서북청년단은 경찰세력으로 편입하여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다. 아직도 제주도는 4·3사건의 비극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다. 당시 몇 만명의 주민들이 살해당했고, 몇 만명의 주민은 일본으로 대피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은 아직도 일본에 있다고 한다.
빨갱이로 낙인찍히면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에게 화가 미친다. 빨갱이라고 지목된 남자의 아내 여동생, 누나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윤간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희생자의 성기 안에 수류탄을 넣었다고 한다. 이 글귀를 보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잔인함이란 인간으로 해서 안 될 경계선을 넘은 것이다. 3살짜리 어린 여자아이가 총에 맞아 울고 있으니, 총에 달린 검으로 그 아이의 목을 베기도 했다. 당시 8살 소년은 자신의 여동생이 억울하게 죽어간 모습을 보았다. 평생의 상처가 되어 부모의 이름조차 말하지 못하다, 드디어 21세기 (진정한 의미로) 민주주의 정부가 도래하면서 당시의 비극을 말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미국은 한국에 대해 더 심각하게 대했다. 지금은 우방국가라고 하지만, 당시 한국전쟁 전후는 일본의 전진 군사국가, 일본의 전후경제 복구를 위한 체계로 보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군수물자 공장을 맡은 일본은 경제적으로 급성장을 했다. 미군에 의해 항복한 전범들은 일부 사형에 처해졌지만, 그들의 후손 대부분이 일본의 총리와 의원직을 차지하고 있다. 아베 신조를 비롯한 자민당 의원은 대부분 우익정치가 내지 군인들의 후손이다. 미국에게 가장 치욕을 당한 그들이 이제는 태평양 국가 중에서 미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한국인들은 미국의 최고 우방은 한국이라 여기나, 사실은 일본이다. 동북아시아 미군기지 중 가장 핵심 전략은 일본 오키나와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 괌은 미국의 영토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영토가 아닌 미군의 군사력은 일본에 많이 포진하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은 내전이고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된 전쟁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보여준 잔인성과 비극은 이미 뿌리내린 씨앗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나 북한군과 아무 관계없어도 단지 북한군의 의복을 세탁을 해준 이유로 많은 여성들이 살해당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 내지 사상 따위는 전혀 모르는 까막눈이며, 오로지 원하는 것은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식량이었다. 이런 민간인들의 속성을 모르는 미군과 주변 강대국, 일제강점기 때부터 싹이 튼 원한과 공포는 광기의 도가니로 몰았다. 한국전쟁이 세계전쟁사 특히 항공전쟁사에서 가지는 의미가 중요한 점은 세계 2차 대전보다 한국전쟁에서 폭격기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활약했고, 폭격기는 각종 군사시설 및 산업시설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이게 만들었다.
한국인은 대부분 흰색옷을 입으니 그들은 민간인인 것을 알아도 흰색만 보이면 무조건 폭탄을 투하했다. 민간인들에게 대피할 것을 권유해도 떠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있다.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농업에 종사하고, 집안의 조상이 산에 있기에 쉽게 고향을 버릴 수가 없었다. 여기에 만주군관학교 출신 친일파장교들이 수행한 독립군 토벌작전도 포함되어 있다. 간도나 만주의 조선인들은 몰래 독립군에게 식량과 군자금을 지원하는 지원세력이었다. 그곳 출신 청년들은 독립군의 용사가 되어 일제에 항거했다.
조선의 민간인을 친일파 조선인들이 무참하게 살해하였던 것이다. 이런 그들이 이승만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한국전쟁까지 이어졌다. 제주도 4·3사건 당시 제주도 주민들은 대부분 희생자의 친척들이었다. 이들의 증오와 복수심은 지금도 제주도의 한으로 남아있고, 이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더 심한 억압과 폭력을 가한 것이다. 제주도만큼 심하게 압박을 받은 곳은 전라도지역이다. 전라도는 동학운동 시절 가장 착취를 많이 당한 지역이고, 외세가 가장 많이 초토화시킨 지역이다. 청일전쟁에서 전라도 지역이 많은 타격을 받았고, 일제강점기 시대에 가장 많은 곡식을 수탈당했다(왜 군산시가 항구도시로 성장했을 수 있는가?).
전라도 지역사람들이 폭압을 당한만큼 그들 역시 저항을 많이 했다. 그래서 제주도처럼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많은 사람들이 갈등을 빚은 곳이었다. 지금 전라도 내부에서는 자신들끼리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기보단 타 지역과 갈등을 빚고 있다. 518의 비극에서 아직도 빨갱이로 낙인이 찍히고 있는 그들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한국전쟁 전후의 한국사를 보면 항상 피해자가 악마나 마녀 내지 적으로 간주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나, 단지 그것은 살아남은 하나의 국가나 사회적 합의체이지 그 사회 내의 존재들이라면, 결국 역사적 진실은 다시 우리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책을 보면서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다시금 떠오른다.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고, 그것은 하나의 진실이다. 하지만 진실은 어느 관점에 따라 사실과 왜곡으로 변모된다. 20세기 한국에서 광주는 불온세력이 포진한 지역이라면, 21세기 현재 광주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킨 곳이다.
서평을 보자면 한국전쟁 전후로 민간인 학살을 한국인과 미군만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겠지만, 북한군 역시 민간인을 학살했다. 문제는 민간인학살을 하던 전범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그 죄를 건들면 아직도 이데올로기적인 마녀사냥을 구가한다. 당시 한국전쟁의 전환점은 미군의 군사력이다. 미군은 2차 세계대전 시에도 국방력을 그렇게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군사력이다. 한국전쟁을 기해 미국은 방위산업체의 확대되고, 지금 미국의 방산업계는 세계 최고이다.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있어서 2차 세계대전처럼 파시스트에게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계 패권을 잡기 위한 싸움이다.
그 전쟁은 베트남전쟁도 이어지고, 냉전체계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 상원위원인 메카시가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메카시즘은 미국정치와 사회를 숙청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고, 그 시기 한국은 공산진영과 전쟁을 벌였다. 브루스 커밍스의 책에 언급했지만, 더 자세한 것은 <폭격>이란 도서에 나와 있는데, 미군은 유색인종인 동양인을 상당히 무시했다. 일본 상공에 폭격을 하나 한국의 농촌을 폭격하는 심정이었다. 한국인도 그들에게 하나의 gook(동양인을 멸시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학살하고도 이기지 못한 전쟁, 게다가 민간인학살까지 저지른 일들이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잊어진 전쟁이 되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미국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디어가 참 많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에게 베트남 그 자체가 적이나, 한국은 적이 아니라 반쪽자리 우방국이다. 압록강까지 올라가 흥남부두에서 쫓기듯 내려온 그들에게 한국이란 인상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두고 변증법적인 논리로 보자면, 한국전쟁 이전 일제치하에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횡포를 부린 친일파와 그들과 대치한 민중의 갈등에서(방안에 가득 찬 메탄가스),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 정체세력이 총(라이터)을 발사한 것이다.
1950년보단 못하나, 아직도 그 메탄가스는 여전히 우리 주변을 부유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정치적 세력으로 표출되며, 정당간의 대립은 한국전쟁과 그 이전에 존재했던 과거의 그늘에서 나오고 있다. 저자의 놀라운 관찰력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로 나올 때의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영부인 권양숙 여사는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아버지는 사회주의 단체와 연계되어 있지만,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란 점에서 그가 실제 전쟁에서 한국군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과거를 가지고 색깔론을 상대편 후보가 펼쳤다. 그 시대가 한국전쟁이 끝난 지 54년이 넘어도 그런 말이 나왔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계속 우리 사회에 남아있다면 한국전쟁의 불씨는 꺼질 수 없을 것이다. 당장 북한과의 대화를 해야 하나, 한국사회의 갈등은 국내외적으로 정치, 군사, 외교에 큰 갈등을 야기한다. 전 정권의 정부는 일제가 저지른 위안부 문제와 징용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려 했다. 당시 자국민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지울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