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 루쉰 - 위대한 지식인의 초상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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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루쉰이란 이름은 예전부터 들어본 이름이었다. 내가 알게 된 동기는 그의 소설인 <아Q정전>이 제법 유명했기 때문이다. 어떤 유명 대학교나 독서 관련 사이트에서 루쉰의 <아Q정전>이 올라온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루쉰의 이름을 인터넷의 독서목록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접한 것은 2015년 2월이었다. 내가 사는 지역 옆에 누구를 만나러 가서 루쉰의 이름을 들었다. 차가운 공기가 온 몸을 감싸고 있으나, 조용히 하천강변에 조성된 공원을 걸으면서 어느 한 사람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상대방에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서적을 몇 권을 주었다.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인문학자이면서 페미니즘 연구가인 매릴린 옐롬의 서적 2권, 인류학자가 저술한 도서, 취미생활과 관련된 도서였다. 내가 가진 책을 몇 권 주었기에 그 사람도 나에게 책 1권을 주기로 했다. 그때 받아야 했던 도서가 <루쉰평전>이었다. 그러나 그때 본 이후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루쉰이란 이름은 나에겐 인간에 대한 다소의 회의감을 안겨준 채 내 기억 속에서 묻혀 있었다.

 

인간에 대해 나는 다소 비관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나 최근에는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인간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나? 그렇게 믿는 편도 아니고, 이래저래 사람들이랑 교류를 하더라도 깊이 있게 지내고 싶지는 않다. 가뿐한 마음도 아니지만 그런다고 무거운 마음도 아니다. 물과 기름이 서로 층을 분리하여 존재하고 있다면, 나는 층 가운데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점이 많았다. 어차피 내가 관심이 가는 분야나 좋아는 것들이 일반적인 대중의 시각이 아니기에 한편으로 고립된 관념적 세계에 놓여있다.

 

고립에 대한 사회적 영역에서는 직장을 다니기에 외적인 관계성에서는 고립은 아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을 볼 때마다 느끼는 이질감과 이율배반적인 가치관에서 나는 고립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생활을 하던 와중에도 나는 계속 도서사이트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내 글을 올리거나 타인의 글을 본다. 그리고 내 글에는 타인의 덧글이나 타인의 글에는 내 덧글과 또 다른 타인의 덧글이 올라온다. 이때 우연히 내 블로그 작성 글에 어느 분의 아이디가 루쉰의 이름을 사용했다.

 

루쉰에 대해 잘 모르지만, 루쉰에 대해 뭔가 과거에 찜찜한 기억에 남은 나로서는 다른 블로거와 덧글과 답글을 나누면서 루쉰에 대한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추천받고 이번에 읽은 책이 박홍규의 <자유인 루쉰>이다. 내가 아는 정도는 루쉰이 중국의 문학가 정도이지 얼마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잘 몰랐다. 하지만 읽어본 내내 루쉰이 남긴 중국의 유산, 그리고 그가 보고자 했던 가치관이 상당했다는 것은 알겠다. 루쉰을 읽을 때 조금 생각나던 한국인 아니 조선인이 떠올랐다.

 

단재 신채호 선생으로, 그는 한국의 민족주의자이면서 한편으로 아나키스트였다. 조선의 고대역사를 밝히면서도 한편으로 무정부적인 가치관으로 항일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단재 신채호나 루쉰이나 직접 몸으로 투쟁하지 않았다. 그들의 투쟁은 글로써 투쟁하여 만민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전파하여 스스로 행동하는 것을 추구했다. 물론 방향성은 조금 달라 보이지만, 평생 그런 생활을 했기에 언제나 고민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루쉰이나 신채호나 둘 다 동북아시아의 나라에서 그것도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유교의 문화가 자리 잡은 시대에 유학의 가치는 이미 타락할 때로 타락했다. 루쉰이 본 그것이나 혹은 박홍규 교수가 본 시대적 흐름에서 1900년대나 혹은 2000년대는 큰 변화는 없어 보인 것 같았다. 인간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것이 바뀌지 않는다고 여겨 그대로 눌러앉을 수만은 없다. 바뀌지 않은 세계가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세상이 멈추는 게 문제가 아니다. 멈추는 순간 계속 퇴보하여 마침내는 소멸의 길에 도달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변하는 세상에 나를 변화하지 않을 경우 나는 나를 유지할 수 없다. 루쉰이 본 중국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오랜 전통과 문화는 중요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하나의 주박이 되어 발목을 잡고 있으면 그것만큼 심한 독은 없다. 루쉰이 언제나 비판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상한 집착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연연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사형수들의 시체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에 기대하는 군중을 보면서 아연실색했다. 사형집행에서 전쟁 중이면 대부분 총살하는 경우가 많다.

 

총으로 사람은 죽이면 심장을 관통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군중은 그런 방법보단 참수형을 원했다. 목이 잘라나가는 순간과 그 목이 효수되어 걸리는 장면을 말이다. 사람이 죽는 장면을 보면 당시 공개처형장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형장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구경 온다. 교수형이나 참수형이나 능지처참이나 사람이 고통 받고 죽어 가는 장면이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 루쉰은 인간의 본성을 비관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만은 옳고 타인 중에 누군가 잘못된 사람이 등장하길 바란다.

 

나와 내 주변 인간들이 합심하여 무차별적으로 비난하고 욕할 수 있는 희생양을 말이다. 그런 자가 죽을 때가 왔으니 정의의 철퇴를 내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아Q정전>에서 바로 이런 인간들이 살아가는 중국을 말한다. 아Q는 반혁명자였다가 어느 날 혁명자로 바뀌고, 나중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에게 혁명이나 사회나, 혹은 국가에 대한 가치관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익과 군중심리에 도취하여 벽 뒤에 숨기를 바란 것이다. 물론 가장 폭력적으로 타인을 칠 때는 선두에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군중심리의 문제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딜레마 증세, 루쉰은 항상 그것과 싸운 것이다. 편견과 고정관념이란 인간에게 가질 수밖에 없는 숙제다. 인간에게 자신이 그런 것들로 에워 쌓인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언제나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세계 속에만 생각하고 말하려 한다.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가치관이 자신에게 찾아오면 거부하려고 한다.

 

물론 새로운 것들도 받은 만큼 기존에 가지고 있는 가치관 역시 잘 적절하게 소화할 필요는 있다. 너무 새로운 것만 받는데 집중하면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게 된다. 정체성은 바로 자신이 누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루쉰이 비판하는 것은 간단히 지나간 것에 모순과 부조리가 많다면 마땅히 그것을 고치야 하나, 거기에 얽매이는 점, 새로운 바람이나 혁명이 온다 해서 그 조류에 휘말릴 것이 아니라 거기서 자신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혁명이 중국에서 계속 일어나기 시작했다. 유럽은 프랑스대혁명을 필두로 19세기는 에릭 홉스봄의 책제목처럼 <혁명의 시대>이였다. 하지만 동양은 이제 20세기 초반에 혁명이란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일소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문제를 앞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만 준 것이다. 기회를 줘도 그 안에 머문 자들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저히 방도가 없다. 루쉰의 사상을 보면 그가 특히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사상에서 많은 것을 받았으며, 루소를 두고 그런 미치광이는 중국에서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루소 같은 미치광이가 나와야 새로운 물꼬를 트는데 중국이란 곳은 그런 사람을 만들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자신 안에 숨겨진 진정한 자유를 찾는 과정에 대해 루쉰은 니체의 사상처럼 그 자신이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루쉰은 자신에 대한 어떤 기념품이나 기념행사를 기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루쉰 사후 20주년이 되던 날 성대하게 루쉰을 기리는 날이 생겼다. 루쉰이 정녕 원치 않은 것은 바로 지나간 것들로 현재의 인간에게 사슬을 남겨주는 것이다.

 

물론 고전의 가치와 고전의 저자나 실제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본받을 필요가 있으나, 중요한 것은 행동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지, 거기에 머물러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만큼 나쁜 것은 없었다. 루쉰이 그렇게 현실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점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유교의 문화에서 각종 혁명을 지나 현재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세상이 왔다. 그러나 공산당은 있어도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는 없다. 중국의 자본주의 시장체계는 그 어떤 국가보다 더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빈부격차를 비롯한 각종 사회의 모순을 타파하려 했지만, 그 모순의 벽이 더욱 견고하게 높이 세워졌다. 지금의 시대를 보고 루쉰은 무엇이라 말할까? 아Q가 모든 것을 점령 시켜버린 세계에 그의 외침은 깊은 어둠에서 나오지 않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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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27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브라보!!! 정말 정말 루쉰 선생에 대한 리뷰 중에서 역대급입니다. ㅠ.ㅠ 온 감동이 제 몸을 휘감고 있어요. 아!! 정말 이 글의 품격과 근본의 정신은 정말이지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에서의 문체가 떠 오릅니다. 전 그 책은 정말 내용을 떠나서 쓴 사람의 생명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런 글이었어요. ㅠ.ㅠ 너무 잘 쓰심...저 몇 번 읽었어요.

만화애니비평님께서 쓰신 것처럼 루쉰 선생은 어떤 고정적인 이렇다 라는 사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파악하기가 힘든 것도 있죠 ㅋ `인간`에 대해 그 암흑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에는 강하다고 할까요? `쩡짜` 저항정신이라 할까요? 모든 것에 있어서 암흑을 파헤치는 재주가 아주 좋은 분이에요. 항상 사람들은 루쉰의 글이 어렵다고 합니다. 물론 논쟁으로 시간을 보낸 적이 많기도 해요 ㅎ
하지만 전 `권력`이란 것에 대하여 격렬하게 싸우던 투사는 루쉰 선생 뿐이지 않나란 생각을 해요. 정신을 날카롭게 만들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는 영원한 진격자라고 할까요?

아Q정전은 아Q는 인간의 가장 볼품없는 쓰레기 같은 생명에 대해 형상화한 것으로 보여요. 자기 기만이라고 할까요?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자세, 실패를 하고서는 내 탓은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 `정신승리법`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기는 하지만 자기에게 눈을 감아버리는 그런 인간 내면의 악적인 생명에 대해 명확히 소설로 펼쳐 놓은 것 같아요.

역시나 만화애니비평님 대단하십니다....ㅠ.ㅠ 이 글 정말 너무 좋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6-27 08:36   좋아요 0 | URL
루쉰p님을 생각하며 서평을 적었지요...그런데 1권 보고는 대략 이 사람이 요 정도인가? 라는 생각만 했지 그 이상으로 모르겠더라고요. 안의 글이 어떤 식이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려면 결국 원래 책을 읽어야 하겠더군요....

루쉰P 2016-06-28 20:42   좋아요 0 | URL
아악...제가 여성도 아닌데...저를 생각하시다니...이거원(발그레)

개인적으로 박홍규 교수님의 저 책은 다른 루쉰 평전이나 루쉰의 글을 읽고 읽으면 좋을 듯 싶어요. 다양하게 루쉰을 조망하고 있거든요. ㅋ 저도 몇 번이나 읽었지만 루쉰에 대한 좀 더 넓은 시야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ㅎ

그리고 루쉰 선생의 사상은 참 뭐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저도 참 좋아하는 작가인데도 불구하고 ㅋㅋㅋ 어렵더라구요 ㅎ

만화애니비평 2016-06-29 08:34   좋아요 0 | URL
루쉰님이 그렇게 열변을 토하는데, 어찌 제가 책을 읽지 아니하고, 어찌 제가 그렇게 거론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아~ 그런데 여기 곰곰생각하는발님과 몇 번 만나 술을 마셨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