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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 ㅣ 동양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14
주희 지음, 이기석 옮김 / 홍신문화사 / 2008년 7월
평점 :
어릴 때 우리들은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자랄 것이다. 남녀7세 부동석, 백이숙제 굶어주는 이야기들 등등 말이다. 예전에 소학(小學)에 대한 부분을 조광조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면서 본 것 같다. 조광조는 소학군자로 불리는 자였고, 그의 제자와 제자의 후손은 소학을 토대로 실천주의적인 학문을 추구했다. 소학을 읽으면 정말 사소한 것에 대해 적어 놓았다. 솔직한 심정을 본다면 주희가 정리한 글이다. 소학을 보면 공자와 맹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특히 공자의 가르침이 많이 등장한다.
송나라가 거의 힘을 잃어 남송시대 등장한 주희가 주자학을 성립하면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주자의 유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주자의 소학을 보는 내내 평소 많이 듣던 말이나 내용이 많았다. 실제 아직까지 이루어지는 모습도 있다. 주자의 소학을 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군주에 대한 충성이다.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시작하여 정치권에서 높은 자는 낮은 자에게 경의를 받아야 하는 점이다.
그러나 예전에 공자의 논어(論語)를 보면서 생각하나, 소학은 논어와 조금 차이점이 보인다. 공자의 논어는 소학과 다르게 실천도 있지만, 그 실천의 주체성에서 선비의 자격을 많이 따진다. 선비의 자격이 되는 것은 농민에게 즉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통치하는 방법론이다. 백성에게 농업기술을 잘 전파하는 게 아니라 농민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행정적인 절차를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모이면 마을을 형성하고, 마을을 형성하면 국가가 탄생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에서 인간의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규칙이 필요하다.
게다가 규칙이 필요하려면 그 규칙을 만들 수 있는 자와 규칙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군주와 신하는 바로 이래서 필요하다. 군신 간의 관계성에서 충심이 중요하나 제일 필요한 부분은 민심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다. 공자의 논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다. 소학이 역시 그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런 과정에 대한 설명은 현대사회와 많은 괴리감이 존재한다. 물론 소학에서 알려 주는 부분에서 공감대도 있다.
소학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이 와 닿은 문구는 풀이에서 나온 “부모의 나이를 알아야 하니, 한편으로 기쁜 마음으로 알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으로 안다.”로 어린 아이거나 혹은 아직까지 청춘일 때는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부모의 나이가 인간 평균수명의 2/3 정도 지나치는 순간 문득 느낀다. 부모님이 늙어 가시고, 예전에 비해 몸이 많이 불편한 것을 말이다. 부모의 나이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인간의 수명은 어쩔 수 없는 천운일 때도 있다. 병으로 죽거나 사고로 죽는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면 집안 내력에서 7대조 할아버지부터 증조부까지 외아들(3형제 중 맏형과 중형은 후사 없이 돌아가셨다.)이었고, 그나마 증조부는 장수했지만, 고조부는 일찍 돌아가셨다. 고조모가 힘들게 외아들 증조부를 키운 점에서 아비 없이 자라난 후레자식의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조상의 제사를 두고 요새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게 여기나, 늙으신 부모님을 보는 순간, 언젠가 말없이 흙덩이 안에 누워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 된다면 그 위의 조상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싶다.
소학에선 집안의 부모님에 대해 잘 모시라는 이야기와 제사를 통해 조상을 잘 모시라고 한다. 현대사회가 아무리 서구화되었지만, 한국인이란 문화적 정체성을 본다면 가족 간의 우애에서 나름 소학의 가르침은 유용하다. 하지만 소학의 한계점은 하층계급에 대해 너무 멸시한다는 점이다. 논어의 공자는 분명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고, 그 백성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유학자의 의무다. 조선시대 유학자는 경구 문구에만 집착하다 전쟁의 화를 이길 수 없었고, 타국의 침략에 망했다. 진짜 공자의 가르침이라면 가렴주구의 비극을 제대로 해결해야만 했다.
조광조의 일화처럼 정암 선생이 도학을 실천하면서 소학을 중시한 이유는 국가의 대사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하는 점이다. 선비 된 자는 청렴해야 하며, 이유 없이 소와 돼지를 죽여서는 안 되었다. 소학에서는 선비가 자애로우며 밑의 노복만이 아니라 말 하지 못하는 짐승까지 교화된다고 했다. 인간의 선한 가치가 인간만이 아니라 주변의 사물까지 덕이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 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아버지와 이야기 나누면서 조선시대에 남자가 여러 여자에게 장가가는 일부다처제가 옳다고 했다. 나 역시 그래 여긴다. 지금 관점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워낙 전쟁이 많았기 때문에 남자들이 전쟁터에 가서 목숨을 많이 잃었다. 대부분 병졸은 양인이나 농민이었고, 장수나 무관들은 양반계급이 많았다. 전쟁에서 군사들이 한 부대에 최소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고 대군은 수만 내지 수십만까지 이른다. 이긴 전쟁이 아니라 대부분 패배한 전쟁에서 반 이상은 죽고, 그 반에 반은 후유증으로 죽고, 겨우 남은 자는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소학에서 내가 가장 우려하고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여성에 대한 인권이다. 죽은 남편에게 가족 중에 늙은 노모나 어린 아이 같이 부양해야할 식솔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사람도 없이 한 평생 혼자서 수절하라는 식은 심각한 병폐다. 과부는 다시 시집갈 수 없는데, 남자는 새장가를 드는 점에서 아무리 그 당시 전쟁에 의해 남정들이 많이 죽었다고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부들도 출가시켜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는 게 좋은 것 같았다.
소학은 좋은 가르침과 더불어 아쉬운 부조리가 많은 서적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소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소학의 가르침에 그대로 따라가라는 것이 아니다. 소학에 나온 이야기들이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흔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가 잘못된 게 있다고 그것을 비판할 수 있어도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과거의 인간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소학을 보면서 우리 시대를 다시 본다. 자본주의시장체계는 가족관계를 대가족에서 핵가족화 시켰다. 대가족 아래 시집온 여성에게 많은 멍에를 씌우는 것은 맞다. 하지만 굳이 대가족만이 아니라 가족 간의 관계는 생각해볼만 하다. 옛날 농사짓던 시기에 마을에 대부분 집성촌이 위치하여 어디의 누구 집은 촌수는 멀어도 일가집안이라 곤란한 일이 있으면 서로 돕고 그랬다. 요새는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시대가 오니 가슴 아픈 일이다.
뭐든지 옛날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고, 뭐든지 새로운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지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에 대한 판단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소학을 보며 조금 아쉬운 기분은 한국의 현실에서 나이가 어리거나 손아래의 사람을 보면 무조건 연장자 내지 윗사람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방식이 안타깝다. 소학에서는 그런 방식을 다소 인정하는 분위기가 깔려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위쪽에 있는 자라도 자신의 도리를 밝히지 않으면 그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부정부패가 있어도 그 문제를 제대로 왈가불가하지 못한 사회라면 제대로 굴러갈리 없다. 말을 들을 때까지 계속 좋은 얼굴로 건의하는 것 역시 한계고, 그것이 되지 않으면 신하는 군주를 포기한다고 하나, 그 군주 아래 통치 받는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면 과연 옳은 말인가? 조선후기 주자학의 민폐는 바로 그런 점이다. 내가 누군데 감히 네가 그러느냐? 내가 누구의 측근인데 감히 어디서 무엄하게 말을 하느냐 등이다. 그런 꼰대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 아닌 어른은 한국에 너무 많이 있다.
한국에서 유학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선 소학의 가치는 조금 볼 필요는 있으나, 생각해보면 공자와 맹자 관련 도서 한권조차 보지 않은 이들이 어른의 도리를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아연해진다. 율곡 이이 선생은 자신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퇴계 이황에게 편지글로 토론을 하였다. 요새 같은 시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버릇장머리 없는 놈이라며 면박을 주었을 것이다. 소학은 어른의 입장에서 밑 사람이 의당 해야할 의무를 적어놓은 서적이다. 그런데 그 어른부터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누가 따라올 것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