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라 구한 인물이라고 한다면 대부분 한국인들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양면의 검을 가진 인물이다. 무척이나 강직하고 엄한 사람이기도 하나, 때로는 밑에 사람들의 말을 매우 귀를 기울여 주는 현명한 사람이다. 무관이던 그가 고을의 현감이 되어갈 때 조카를 데리고 갔는데, 대개 고을의 원님이 되어 친족들을 많이 데리고 가면 지역 백성에게 큰 부담이 되므로, 삼가게 했었다. 그래서 이순신에 대한 문책상소가 올라왔으나 이순신은 눈물을 흘리며 조카들은 형제 내외가 먼저 세상을 하직해서 형님을 대신하여 조카들을 돌보고 먼저 출가시키려 했다.


그는 과감한 무인이기도 하나, 약자에게 매우 다정한 인물이다. 여기에 다양한 모습이 있겠지만, 이순신을 거론하는 점에서 한국은 임진왜란을 당한 지 약 520년이 지났지만, 이순신에 대한 기록은 여전히 뜨겁고, 통영시의 충무공 사당은 언제나 하례객들로 붐빈다. 그러나 지금의 이순신에 대한 모습과 당시의 모습에서 너무나도 아이러니를 느낀다. 이순신은 당시 당쟁에 참여하는 자는 아니나, 당쟁의 피폐를 너마나도 당한 사람이다. 이순신의 친구는 그 유명한 명정승은 서애 유성룡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에게 가르침을 받고, 이황은 정암 조광조의 학문을 이은 성리학자다.


퇴계 이황을 이은 율곡 이이가 등장하면서 학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린다. 다시 동인은 정여립 모반사건을 두고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진다. 북인도 추후에 소북과 대북으로 갈린다. 대개 국가와 민족이 서로 다르면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고, 패자는 단지 승자의 기록에서 조연으로 등장하여 퇴장한다. 하지만 같은 나라 안의 사람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누군가 엄청난 피해를 받고, 후예들조차 자신의 선조들의 모함조차 풀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이순신이란 자 역시 동인이었고, 남인의 영수인 유성룡의 친한 친구이란 이유로 모진 일을 당한다.


충무공의 죽음에 의문이 많으나, 그날이 유성룡이 서인과 북인에 의해 탄핵당해 파직되던 날이다. 유성룡의 모습은 마치 중종 때 조광조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중종의 질투는 조광조를 유배지에서 사약을 내렸다. 단지 유성룡이 사약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그가 전쟁에서 많은 업무를 처리했기 때문이다. 변방의 전장에서 임금은 바라볼 수 없어도 옆자리의 군무를 보는 문관을 지켜볼 수 있다. 임금의 자질이 신하의 운명을 좌우하고, 국가의 운명을 뒤집어버린다. 서애 유성룡 이후 조선의 명재상으로 정조가 즉위할 때 번암 채제공이다.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과 유성룡의 연계성에서 유성룡이 가져야할 진정한 가치는 정조가 알아보았다.


정조가 남인을 기용하려던 점은 노론의 권력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을 정리한 <유성룡>이란 서적에서 유성룡의 행동들은 분명히 옳으나 매우 여의치 않은 입장이었다. 중종시대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이유는 권력층의 비리를 타파하고, 기득권의 모순과 부조리를 개혁하려 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은 단순히 보자면 일본 왜군이 넘어온 것이지만, 그 과정과 전개정황은 조선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파정쟁, 선조의 질투, 명군의 간계, 왜군의 전황, 심지어 무관들의 행동조차도 도저히 정리하기 어려운 변수다.


그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해결한 인물이 유성룡이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읽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 치질이 걸려 제대로 걷지도 못한데도 선조가 불러 거의 기어가서 어전의 임금을 뵙고, 그런 그를 본 의원방의 하인이 계속 따라와 통곡하는 장면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유성룡이 1607년 서거하자, 길가의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마치 자기의 어미를 잃은 것처럼 통곡했다. 조광조가 죽을 때나, <유성룡>에서 서애를 기록하던 백호 윤휴가 죽을 때도 마찬가지다. 3명의 사대부는 백성을 사랑하고, 기득권 세력을 부수어 개혁을 주장하다 죽음과 배신을 당했다.


그래도 조선의 명운을 살리기 위해 유성룡은 정치적으로 싸워나가고, 전쟁 이후 고향에 내려간 이래 일절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벼슬을 내려도 받지 않고, 공록을 줘도 받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선조, 병자호란의 인조를 생각하면 아마 조선 시대 가장 멍청한 임금이었을 것이다. 선조의 멍청하고 이기적인 행동은 충신을 죽이고, 선비들에게 큰 화를 끼쳤다. 이미 기축옥사에서 억울한 죽음으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 선조의 이기심과 자만심, 그리고 권력을 잡고 상대 세력을 몰아내는 붕당정치의 폐단은 이미 이준경의 유언처럼 남인과 서인의 피로서 피를 씻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개혁을 주장한 자들은 모두 당쟁에서 몰려 화를 당하고, 그 결과는 조선의 국운을 멸망하게 만들었다. 국가가 약해지는 것은 건강한 사람이 없고, 세금을 낼 사람이 없으며, 국가의 북가 축적되지 않음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처럼 유성룡 역시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나야하고, 특히 세금의 폐단을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양반과 관리, 아전, 심지어 재산 많은 백성까지 반대했다. 전쟁을 승리를 이끈 그가 그런 대우를 받은 이유는 개혁의 실천이고, 윤휴 역시 사약을 받은 이유도 권력자들이 부조리하게 모은 재산을 걷어내려 했기 때문이다.


같은 역사적 사실을 보고, 또한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거짓 이야기가 다시 그를 공격하는 수단이 되었다. 율곡 이이의 십만 양병설에서 우리는 통상적인 것으로 알지만, 선조실록에는 그런 말은 없었다. 단지 병정을 키우기 위해 세금문제를 해결하고, 부조리한 제도의 결점을 정리해야한다는 점을 주장했다. 책에서 이이의 제자들이 스승이 가진 국정철학을 억지로 갖다 억지로 꾸며대고, 그것이 현재에도 먹힌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제일 놀란 점은 학봉 김성일에 대한 부분이다. 김성일은 일본에 사신으로 넘어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할 때 같이 가던 자와 다른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원래 일본의 야욕은 알고 있었으며, 유성룡도 일본의 위기감을 알 정도라면 그가 거짓보고 했다는 것은 매도되었을 뿐이다. 오히려 외교정사를 볼 때 침착하게 원칙적으로 수행했으며, 다른 관리와 다르게 합리적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나중에 전쟁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출전하여 전사한다. 현재 임진왜란에서 단순히 이순신만을 추앙하는 현실에서 전후관계 및 당시의 여러 인물을 알아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여겼다. 집에 족보를 보면서 직계 할아버지가 명종 때 무관이 되어 훈련원사(군사를 훈련시키는 기관의 수장)를 맡았으며, 광해2년 1610년 향년 74세 북쪽 여진족을 지키다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명종에 임관하여 광해 초반에 돌아갔으니 임진왜란을 겪지 않을 리가 없다(당시 친척 분은 선조가 대피할 때 어가를 수호하던 무관이었으나 추후 이억기와 같이 출전하다 전사한다). 조선시대 60살 이상이면 장수한다고 들은 시절에 나이 70 넘어도 변방에서 국경을 지킨 점은 아마 선조와 유성룡, 이순신 그리고 당쟁의 무리수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 문중은 조선시대에 남인이었다. 유성룡과 그를 아끼던 종친 이원익이 있었더라도 전쟁의 승기를 잡은 남인의 영수가 내치게 된 점에서 오히려 변방에서 백발무장으로 수호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명성을 날린 의병장과 무관에 대해 선조는 상당히 질투했다. 이몽학의 난에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아무 상관없는 김덕령의 이름을 거론했고, 김덕령 장군은 무고에 의해 옥사하여 순국했다. 그의 죽음은 죄가 없으나 권력자들의 가시거리란 이유로 제거 당했다. 유성룡은 반란자들을 한곳에 모아 심문하여 김덕령 장군의 누명을 벗기려 했으나 실패한다. 이순신 역시 일본군의 계략과 당쟁의 이익, 그리고 유성룡에 대한 견제를 하고자 하는 정치적 노림수가 숨은 것이다. 다소 과정적이지 모르지만, <유성룡>을 저술한 이덕일의 주장은 현재 역사학계는 노론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고 한다. 노론도 조선 말기에 몰락했다고 하나, 을사오적 중에 하나가 노론명가의 후손이니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째든 유성룡의 활약을 보자면, 참으로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정부터 군사업무, 외교까지 두루 섭렵하고, 선조와 광해군 사이의 긴장관계도 조율했다. 명나라는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치적 입지를 가지게 하여 구왕파 선조 그리고 신왕파 광해군으로 대립하여 조선의 내정을 크게 개입하려했던 정치적 공작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 유성룡의 노년은 참으로 허무하다.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친구를 죽이게 만들고, 자신을 모함하며, 백성을 외면했으니 말로 하지 못할 울분은 얼마나 큰 것인가. 정치적 이익을 떠나 상대세력이라도 정말 옳다면 그 상대가 곤란한 처지에 있더라도 유성룡은 포용해주었다. 자신도 명문 사대부집안이고도 계급을 차별하고 유용한 인재를 두자고 했다. 이런 유성룡을 두고 성웅 이순신만이 아니라 성현 유성룡이라고 칭송해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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