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 나의 고전 읽기 1
손택수 지음, 정약전 원저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서평 적을 때도 인용한 내용이기도 하나,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에서 처음 등장한 장소가 전남 강진이다. 물론 강진을 가기 위한 여정으로 영암을 지나쳐오는 것은 사실이나 모든 시작은 강진군에서 스토리가 시작된다. 강진군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랑생가도 있고, 많은 절과 문화재도 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곳은 거기에 다산초당이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목민관과 탐정 중에 하나였고, 19세기 이후부터는 조선만 아니라 일본과 베트남을 지나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은 분이다. 바로 유홍준 교수는 한국에서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 다산 정약용이라 한다.

 

하다못해 지식인뿐만 아니라 정치인까지 정약용이란 이름을 올리고, 어느 누구의 서재에 다산 정약용의 책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는데, 가끔 어떤 인물의 하는 행동을 본다면 과연 정약용 선생의 책이나 혹은 그에 대한 연구도서 1권 읽었을까 라는 의문도 들지만, 정약용의 이름은 한국에서 거의 떼어낼 수 없는 역사적 인물이다. 한국의 소개, 한국의 문화, 한국에 대하여 말한다면 사람들은 각종 인기스타나 스포츠, 문화, 음식물로 도배하는 것으로 생각하나, 막상 세계에 나가보면 그들이 진정 진정으로 내세우는 것은 자신의 역사와 문화이다.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고 거기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가끔 한국에서 역사의 자부심에 대해 논하는 자들을 이야기를 듣자면 잠도 재우지 않고, 임금도 잘 주지 않거나 적게 주며, 때로는 구타와 폭언으로 삶의 희망을 빼앗아 성장한 감추어 만든 것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진정 자랑스러운 역사라면 부조리와 모순을 은폐하고 겉모습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 숨쉬어온 인간이란 삶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각 개인에게 국민성으로 이어지고, 그 나라의 문화적 수준으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역사 속에서 우리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이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해왔으며,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기를 바랐는지를 알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문화강국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가치는 사상과 철학과, 문학과 정치, 예술과 종교까지 다양한 영역까지 이어져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방문하여 신해사옥에서 참형을 당한 진사 윤지충에게 시복을 내렸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사촌형제고, 정약용의 형님이 정약종, 정약종의 자녀들은 모두 한국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역사라는 아이러니는 바로 저런 시대적 상황에서 발생된다. 1800년 정조가 붕어하고, 1801 신유사옥과 황서영백서가 일어나서 정약종은 참수되고,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은 유배를 떠난다. 조선에서 유배를 받는 사대부들은 대부분 자신의 죄보단 권력의 희생물로서 가능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불운한 종말을 겪기도 한다.

 

정약용 선생이 다산초당에서 학문을 하는 게 편안 유배생활이라 생각할 줄 모르나, 당초 처음 갔을 때 자신이 기거한 곳에 담벼락이 무너지고, 아무도 자신에게 찾아와주지 않았다. 마치 귀신이 온 것처럼 동네주민들은 두려워했고, 부모님을 존경하는 문화에서 죽은 부모님의 신위를 태우고 부정하는 사람과 연루된 것만으로 본다면 공포 그 자체의 인물이었다. 정약용이 처음에 경상도 장기에 머물다 황서영백서로 국문을 받은 후 강진에 올 때 그의 기분은 참으로 반갑기도 혹은 우울했을 것이다. 강진 옆에 해남이 있어, 어머니의 본가가 해남 연동에 있는 점, 그리고 다산의 매우 가까운 친구 윤서유가 도암면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사화가 일어나면 그 지목되는 대상의 가족과 친구, 심지어 문하생까지 잡아들여 치조하거나 유배를 보내는 일들이 흔했다. 윤서유도 신유옥사와 황서영백서로 관청에 끌려와 문초를 받았으니, 단지 자신의 친구네 또는 아버지의 친구네(윤서유의 아버지 윤광택은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하고 친구다)라는 이유로 고초를 당했으니, 당시 그 살벌함이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나마 후에 다산은 자신의 외가의 먼 친척의 산장인 다산초당으로 가서 많은 제자를 받아들였고, 그곳에 다산학단을 조성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 언제나 마음의 고독이 숨 쉬고 있었다.

 

바로 흑산도로 유배 간 정약전에 대한 그리움이다. 정약전은 정약용이란 인물에 가려워져 있지만, 정약용의 기록에 보면 자신보다 훨씬 월등하게 능력이 있는지 인물이고, 인품 역시 매우 훌륭하여 형에 대한 감정이 애틋한 것을 알 수 있다. 정조가 살아있을 적에 어느 아무개는 형이 아우보다 낫다고 했으니, 그 아무개가 바로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를 말한 것이다. 정약용은 성격이 매우 꼼꼼하고 청백했으나, 그의 뻣뻣한 모습에서 많은 친구와 적을 만들어내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인물이라면 존경할만한 조정대신이나, 뇌물과 이권을 노리는 간신배에게 원한의 대상이다. 그가 신유사옥으로 구금될 때 주변 권력자들은 정약용을 사형시키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다.

 

정약전은 정약용만큼 활동하지 않았지만, 정약용의 형이란 이유만으로 그의 운명은 정해져 있던 것 같았다. 정약전이 유배지로 가기 위해 포졸과 같이 가면서 헤어지게 되자, 포졸은 정약전을 떠나보내면서 눈물을 흘렸고, 흑산도에 유배 간 정약전을 두고 섬마을 주민들은 서로 정약전을 모시려고 했으며, 정약전 다른 섬에 가려하자 모두가 길을 막고 가지 못하도록 했다. 유배지에 천주학쟁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온 사람에게 마을주민들은 오히려 자신들과 있어달라고 애원한다.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는 바로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한 곳, 흑산도에 가서 정약전이 머물다 간 삶의 향기, 그리고 남은 마을주민들에서 듣는 정약전을 다시 확인한다.

 

정약전의 신분은 양반에다 집안에서 옥당 즉 임금을 알현할 수 있는 당상관 자리에 계속 올라간 명문가 집안이다. 아무리 죄인처럼 쫓겨나도 신분으로 보자면 상당히 높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섬에 들어가는 순간 진정 유학자의 참된 길을 보여준다. 늙은 노파가 병에 들어 앓아누워있자 정성스럽게 병간호를 해주었고, 섬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알려주었다. 어민들의 삶에 대해 깊게 관찰하면서 <자산어보>를 저술했고, 바로 이 책은 우리 문화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재가 되었다. 정약전은 어민의 말을 최대한 들어주어 기록했고, 물고기별로 크기, 생김새, 성품, 사용용도를 적었다.

 

의원이 귀하고, 약이 귀한 시절, 병에 걸리면 손도 쓰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으므로 어류를 약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많은 해양 관련 글을 남기면서 한국의 해양문학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인상 남은 부분은 복어에 대한 부분이다. 복어는 맛은 좋으나 독이 많기에 잘못 먹으면 인명이 달리한다. 배고프고 가난한 백성들, 탐관오리에게 재물을 약탈당하고, 주변 못된 양반세도가들에게 노역으로 시달린다. 배고픈데 먹을 게 없어 해안가에서 복어를 잡아먹다가 복어 독에 걸려 목숨을 잃은 경우가 많았다. 이런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이니 주변 어민들에게 얼마나 신기한 존재였을까?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를 저술한 작가는 흑산도에 들어가 박씨 할아버지에게 정약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마을에 정약전 선생이 없었다면 글을 몰랐을 것이고,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조선말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어느 한 개인의 불운한 운명이 때로는 그 지역의 희망이 되기도 한다. 역사라는 것은 이토록 기구한 것일까? 정약전 선생은 정약용 선생이 해배되기 전 2년 전에 병으로 돌아가신다. 정약전에 애써서 만든 <자산어보>가 정약전의 유배하던 집의 벽창호로 사용되었다. 정약용 선생이 가장 유배지에서 해배되어 했던 것은 형님이 살던 집에 가서 형님의 유품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때 자산어보를 발견하고, 정약용은 자신의 제자 이청으로 하여금 자산어보를 복원하도록 했다. 만약 그것을 복원하지 못했다면 한국의 해양학, 해양생물학, 해양문학에 큰 빛을 잃을 뻔했다. 정약전은 엘리트 이상의 지식인이었다. 그 말은 매우 총명하였지만, 인품은 모든 사람들을 품으려했다. 사대부 집안의 일원이 아니라 그 시대 살아가는 어민들의 뜻과 마음을 모우 자산어보에 담아내었다. 살아생전 붕당정치의 소용돌이에 먼 곳까지 귀양살이로 운명을 마감했으나, 2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에서 현재는 제3자처럼 볼 수 있겠지만, 그 당시 소용돌이 중심과 주변에 있던 자들에겐 큰 멍에가 되었고, 그 멍에는 후손들에게 큰 짐이 된다.

 

영광의 업적은 슬픔과 좌절의 상처가 있어야 새겨지는 것인가? 시골이 있는 강진군에 갈 때 가끔 다산초당에 들릴 때가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다산초당에 올라간 이유는 거기가 외가 식구와 먼 친척이란 점도 있지만, 거기선 강진포구가 보이고, 그 바다를 통하면 형님에게 갈 수 있을까라는 사무친 그리움이 스며있다. 그리고 다산에 그리움 역시 강진에도 많이 스며든 것 같다. 시골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가보니, 다산 선생님이 처음 강진에 왔을 때 머물던 초가 ‘사의재’의 액자사진과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많은 책들이 방에 꽂혀 있었다. 지금이야 정약용 선생의 책들이 많이 읽혀지고 있겠지만, 조선말과 일제강점기 시절까지 정약용 선생을 탄압하던 자들의 후예들이 계속 탄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가치 높은 문화를 지키는 것이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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