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꽃과 부수는 세계>는 SF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지금은 2016년이라면 그 시대는 2100년 기준으로 시작한다. 물론 작중에 등장하는 도로시와 듀얼의 시기는 2100년보다 더욱 더 후에 존재하는 데이터라고 생각한다. 이 애니메이션은 조금 겉모습의 이미지처럼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 3명이 등장하여 뭔가 귀여운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닐까 하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단지 그런 소녀로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영상서사로써 흘러간다. 전형적인 스토리나 혹은 스포일러 등보다는 이 영화에서 말해주는 의미하는 바가 뭔지 생각해본다면, 인류에 대한 감독이 바라보는 시각이다.

 

환경, 솔직히 인간은 신석기 시대부터 도구를 만들어오면서 인류문명이란 것을 만들어왔다. 특히 철기시대에 오면서 중앙집권제로 이어지고, 각국에서 전쟁과 더불어 기술과 문명의 발전을 이루어왔다. 기원전 5~6세기 동양에서 공자와 석가모니가 있고, 서양에서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있다. 이들의 존재처럼 종교와 정치가 어느 정도 학문적 영역에서 큰 발전이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쟁의 손길은 모든 인간에게 흘러가고, 20세기 큰 전쟁을 맞이하면서 인간들은 전쟁이란 것들을 줄여가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분쟁국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고, 최근에 이슬람 과격테러로 분쟁이 일어나지만, 과거의 전쟁에 비하면 횟수의 차이는 분명하다.

 

전쟁의 순기능을 인정하기 싫으나, 전쟁은 인간사회를 변화시킨다. 인간의 수를 줄이고, 새로운 사상과 가치관이 등장하고, 과학적으로 기술이 발전하고, 문명의 수레에서 양날의 검이 되어 자신의 목을 겨눈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 인해 인류가 윤택해지면서 한편으로 비참해졌다. 환경이란 단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길을 나오면서 대기 중의 미세먼지가 코를 자극하고, 눈을 피로하게 만든다. 미세먼지의 농도가 강하면 호흡기 질환이 심해지고, 미세먼지의 입자가 작으면 폐 속으로 들어가 폐기종 같은 질환을 일으킨다. 과거에 결핵과 폐렴에 의한 폐질환이 이제는 대기오염으로 대체되고, 과거 이질이나 콜레라 같은 수인성 질병이 이제는 수질오염으로 인해 인류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런 모순에서 인간의 세계를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서는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어줄 도구나 시스템을 원한다. 아니라면 어떤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등장하여 신화처럼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고도 때로는 위대하기도 하다. 양날의 검이란 말처럼 검은 자신의 목을 노리지만, 자신이 노려야 할 대상의 목도 노리기 때문이다. 지구환경을 살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오염원의 통제고 오염원의 억제다. 지구를 오염시키고 파괴시키는 존재는 누구인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없으면 지구는 대기오염이나 수질오염에 몸살을 앓을 일도 염려도 없고 숲속의 작은 새들의 서식처를 잃을 일도 없다.

 

지구의 환경이 쇠약함에 따라 새롭게 만든 Mother System, 지구는 대지의 어머니라 하고, 지구를 Earth라고 하나, Gaia라고 하는 이유는 대지에서 만물의 생명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지구를 파괴하고, 지구를 망치는 존재다. 하지만 여기서 모순이 있다. 지구의 대자연은 아름답고 위대하나,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는 지구에서는 인간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기계의 사고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인간처럼 감성적이고 느낄 수는 없다. 이게 바로 기계와 인간의 차이다. 기계에겐 윤리라는 것이 없다. 단지 도덕적인 요소를 사회적인 시스템으로 대체할 뿐이다.

 

그래서 도로시와 듀얼이 사는 세계에는 2차 공간에서 바이러스가 나오고, 그 바이러스의 토대는 2차 가상공간의 데이터베이스가 실현화 된 3차 공간에서다. 3차 공간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두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불안하고 때로는 오류의 집단으로 나올 수 있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슬프고, 아프고, 잔혹하고, 거절하고 싶은 것들이 가득하다. 이런 상황에 등장한 소녀가 리모다. 리모는 듀얼과 도로시의 세계에 새롭게 찾아온 인격화된 프로그램이다. 그녀의 등장으로 듀얼과 도로시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프로그램으로 활동하는 그녀에게 인격이란 그저 만들어진 그 자체, 인격이 있다고 해도 감정은 그저 주입된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 느끼고 행동하고에 대해 뭔가 새로운 생각을 품지 않는다. 단지 듀얼은 뭔가 자신의 세계에 일어나는 일들이 석연하지 않다는 것만 느낀다. 그 환상의 의문을 깬 것이 바로 리모의 역할이다. 리모는 듀얼과 도로시하고 친구가 되어 다양한 경험을 나눈다. 여행을 가고, 요리는 하고, 수다도 떨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때로는 마음이 아픈 모습도 목격한다. 이때까지 프로그램이기에 맛이 있는 음식도, 재미있다고 여기는 일들도 모르고 살아온 도로시와 듀얼에게 리모는 신기한 존재다.

 

그러나 사실 바이러스란 존재는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 혹은 인간 그 자체에서 나온 불순물이다. 인간은 모든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받아들이기 싫은 것들도 있다. 현실세계 인간은 모두 Mother System에게 의존하다 그것이 인류의 멸망으로 이어지고, 다시 Mother System를 저지하려 했지만, 모든 지구의 시스템을 장악한 Mother System을 정지하는 것은 내 폐 속에 암이 있어서 그 폐조차 모두 잘라버리는 같은 행동이었다. 더 이상 인류에게 숨을 쉴 공간이란 있을까?

 

지구를 관리하는 Mother System에서 그런 인간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으려면 그 감정을 부정하는 자신의 구조체계를 변모해야 했다. 그래서 Mother System의 프로세스 백업 프로그램은 스스로를 바이러스로 인정하게 하여 Mother System의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인 듀얼과 도로시로 하여금 삭제되어야 했다. 그것은 지구를 멈추게 한 것은 인간이겠지만, 인간이 없다면 지구가 멈추는지 아닌지도 모르며, 인간만이 현실을 자각하기에 비로소 지구라는 존재가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기쁜 것만이 아니라 슬픈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듀얼과 도로시의 경험에서 듀얼은 자신이 관리한 가상세계에서 바이러스가 된 자, 스미레를 직접 지운다. 아름다운 피아노를 연주하는 꿈이 많은 소녀 스미레, 물론 프로그램의 업무로 본다면 듀얼의 일은 합당하나, 과연 친구였던 자의 꿈을 파괴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그저 주입된 것에 의존하여 모든 것을 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슬픈 일일 것이다. 정말 자신이 슬픈 일을 하고 있다거나 혹은 겪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기에 그렇다.

 

도로시도 처음에 듀얼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대략 19세기 유럽 귀족가문의 딸로 활동하고 있을 때, 도로시는 이때까지 가지지 못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매를 가졌다. 그곳에서 나눈 정이란 가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가상공간에서 경험한 자신의 마음과 기분은 가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 Mother System의 의도 아래 태어난 리모는 바로 이것을 노린 것이다. 인간은 시스템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으나, 그곳에 머물려 정체되면 아무 것도 만들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물론 인간이 이때까지 같은 인간에게도, 자연의 동물에게도, 대지의 자연에게 해왔던 잔인한 짓들은 관객의 눈으로 보는 나 역시 많은 것을 생각나게 만든다. 그런다고 인간 그 자체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 세계를 모두 부수는 것과 같다. 작품의 제목처럼 유리의 꽃은 인간에게서 완벽한 모습, 즉 좋은 점만을 말하는 것이고, 부수는 세계는 그런 아름다운 겉모습을 추구하는 세계는 결국 아무 것도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 아름다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아름다움에만 집착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새롭게 탈피할 때 태어나는 것이다. 주제성은 물론 이해할만하나, 그것을 어렵지 않게 잔잔히 보여준 점은 감독의 역량으로서 역량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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