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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올해의 시작은 정말 최악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에서 이런 일까지 실제로 겪은 것은 처음이었다. 대학교 때 친하게 지낸 동기친구가 우연한 사고라 하기에 너무 부조리한 비극을 맞이했다. 인간의 비극에서 최악의 상황은 살아있는 삶으로부터 박탈이다. 그 비극적인 슬픔을 내 친구에게 닥쳤다. 죽음이란 어둠, 사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관념적인 영역에서 매우 두려운 요소다. 동물은 죽음에 대한 예지는 하지 않는다. 단지 야생의 천적으로부터 잡혀 먹는 것을 두려워 순간 도망치다, 일정 안정권에 도달하면 긴장감이 풀린다. 물론 인간도 위기의 순간을 넘으면 안도의 여유를 보이나, 그런다고 죽음 그 자체를 잊지를 않는다.
위기의 순간에 자기가 아닌 타인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인간도 있다. 동물에게 그 정도의 트라우마가 있다면, 이미 야생의 모든 동물은 멸종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죽음에서 죽음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 죽음에 대한 공포와 혹은 환희를 느낀다. 삶에 대한 욕망인 에로스와 더불어 죽음에 대한 충동적 욕망 타나토스는 우리 생활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다고 무의식적인 죽음충동이 온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이성에서 죽음은 언제나 두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막상 인간이 죽는 순간, 자신이 죽는 것을 미리 예견하는 것보다 불의의 순간들이 많다.
내 친구의 죽음이 불의의 비극인 이유는 그 친구는 산업재해로 죽었다. 미혼이고, 애인도 없기에 자신의 혈육을 남기지 못했다. 결혼한 여동생과 처남은 있어도 내 친구의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하다못해 이름을 어느 정도 알렸다면, 그를 기려주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그 친구에게 가족과 친척, 대학교 친구 정도였다. 친구의 관을 2016년 1월 1일 오전에 운구하면서 화장터까지 따라가고, 그의 육신 하얀 재로 변하는 것까지 본 후, 마지막에 땅에 묻히는 순간까지 지켜보았다.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트라우마 중에 하나였다. 같이 운구행렬에 따라가던 친구와 추모공원에서 돌아와 시내로 돌아올 때 같이 소주 4병을 마셨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지 않은 내 성격이나,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다. 이때 나에게 갑자기 생각나던 책 한 권이 있었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라고 말이다. 책 제목에 갑자기 내 심정을 이렇게도 잘 찔렀는지 생각지도 못했다. 원래 이 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한 번 읽어보았다. 마르크스가 나오므로, 결론은 노동문제와 현실의 경제적 문제를 다룬 서적이었다. <자본>을 읽어봤다면, 혹은 더 앞서서 <국부론>을 읽어도 노동문제에 대한부분을 반드시 나온다. 왜 나오는가? 노동자에게 자신의 화폐를 유지할 수 없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하여 고용주로부터 임금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고용의 관계는 사회적인 관계, 즉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 계약의 조건은 두 입장이 서로 공평하거나 대등해야 하나, 막상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친구가 근무한 곳은 분명 2인 1조야 하고, 사실 밀폐된 공간이라면 환기시설의 안정성은 물론 안전보호구를 완벽하게 지참해야 한다. 하지만 안전보호구는커녕 혼자 가서 일을 보고, 게다가 자신의 회사가 아닌 그 회사의 하도 받은 업체로 파견근무를 나갔다. 도대체 뭐라고 생각해야 할지 의문이다. 혹자라면 운이 없거나 혹은 그 사람의 어쩔 수 운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이때까지 겪어보지 못했고, 자신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기만적 사고가 바탕 되어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일이 터지면 뭔가 대안을 마련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혹은 이런 비극으로 상처받은 가족에게 진심의 위로를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친구가 평소 무슨 약을 먹는 이유로 배상비를 가지고 몇 십 %를 깎아보자는 식으로 나왔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도리어 돈으로 해결하고, 그 돈조차 아끼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돈의 가치 아래 절하된 사건을 옆에서 일어난 것이다. 사람이 소중하다면서 항상 돈을 택하는 게 이 사회다. 물론 자신과 가족이 당장 옆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그런 비정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개인적인 이익의 추구인 개별의지, 그리고 회사나 사회라는 거대한 집단의 이기심이 일치하는 전체의지,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우리에게 공공선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이성적 선택을 하는 일반의지는 증발된 게 아닌가 싶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어보듯이 내가 아픈 것은 친구의 죽음도 그렇지만, 친구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병폐이기도하다. 친구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 내지 급성 종양이나 불치병이 아니다. 그저 우리 사회의 허술한 제도에 의해서였다. 산업재해는 기본적으로 안전사고이다. 안전이 미비하다는 점은 충분히 사전에 조치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는 200년 전의 마르크스가 살던 영국과 유럽세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 인간은 항상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 의해 규정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인간 본연의 인식과 존재적인 사유로서 파악하는 관념적인 영역만이 아니다. 그게 되는 것은 니체와 같은 사고를 지닌 자일 것이다. 니체가 아닌 다른 자는 니체주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런다고 그 타인과는 무관한 존재는 아니다.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우리의 사회성이 구축된다.
내가 만일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나 혹은 아프리카에 태어난다면, 혹은 거기서 중산층인지 빈곤층인지 아니라면 노예인지 주인인지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흔히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한다는 발언에서 실효성은 있다. 어느 마을에 폭격기가 출몰하여 폭탄을 투하하여 10만 명 인구 중에 10명 살아도 살아남은 사람은 있다. 그런다고 그게 생존에 대한 사실성에 보편적인 관계성을 가지는가? 한국에서 아마 이런 보편적이지 못한 상황에 등장한 하나의 사례를 전체적으로 확장하는 논리오류가 있다.
우리의 생활에서 폭격기가 떨어지더라도 저 공격이 오는지, 와도 어디에 숨을 곳이 있는지를 알고 있는가? 혹은 숨으려 해도 그곳에 물리적으로 멀리 있든지 혹은 정원이 다 차 있을 수도 있다. 결국 성공신화나 누군가의 잘난 이야기는 결국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만의 리그에 마치 자신들이 그 좌석에 배정받은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한국사회의 이런 착각, 그리고 노동문제 등등 우리는 언제나 좋은 자리에 앉아 편하게 갈 수 없다. 그럴 확률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나, 그것이 자신에게 올 것이란 착각을 그것을 향하여 무조건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젖어 있다. 게다가 자신과 무관해도 그 신화를 바라보면서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는 이상한 꼰대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현실적인 사고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미신 아닌 미신에 자신의 이성을 상실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의견들은 모두 환상의 세계가 아니오, 망상의 약속도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마치 북한군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마법의 요술램프로 생각하던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오히려 한국전쟁에서 전쟁이라는 그 자체를 멈추게 하는 마법이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 아직도 마르크스하면 이상한 시선이 다가온다. 책에서 2011년 어느 해군 장교가 <헤겔 법철학 연구>라는 마르크스의 저작을 들고 있다는 이유로 군수사관으로부터 고소당한 일이 있다.
지금 도서관에서 유명한 서점에서 가도 <공산당 선언>이 버젓하게 팔리는 판국인데, 한국의 인식이 그런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재단인 유네스코에서도 마르크스의 <자본>을 인류가 보전하고 기려야 할 문화재산으로 올렸다. 우리는 세계의 변화에 따라 움직였지만, 세계의 흐름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게 오늘 우리의 현실에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항상 민생경제를 외친다. 민생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민생이 필요한 생활의 질을 올리는 것이다.
이미 트리클다운이란 낙수효과는 지나가버린 낡은 시대다. 유럽에서 경제공황이 일어나고 미국에서 경제공황에 휘말린 이유는 생산은 언제나 과잉이나, 그것을 소비하는 주체가 없다. 한국경제에서 시장소비 감축을 보면 알 수 있다. 늘 주머니의 지갑이 닫혀있다 혹은 잠겨있다고 한다. 돈의 유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중산층 아래에 위치한 대다수의 경제적 약자들은 자신의 생계수단을 위해 최소한의 소비만 할뿐이다. 소비의 대상과 범주가 너무 단순하고 광범위하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워진다.
현대사회는 이른바 문화콘텐츠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시대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은 이미 충분히 시중에 나와 있고, 단순히 자본력이나 노동력의 단위로 승부하는 과거 유럽의 19세기 자본주의는 한계라는 점이다. 어떤 상품을 소비하려면 다른 상품이 소비해야 하나, 어느 지정된 상품만 있다면 다른 상품이 팔려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전혀 다른 색다른 분야로 물꼬를 트는 것이다. 레드 오션에 치중한 한국 경제구조로서 기계의 발달, 기술의 발전은 10명의 노동자를 1명으로 대체가능한 시대가. 나머지 9명이 취업을 하지 않거나, 임금이 적으면 결국 인구 재생산이란 위기에 봉착한다.
한국에서 차후 경제적 총생산량이 축소 때문에 문제화 되고 있다. 인구의 감소는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결혼비율이 줄어든 것도 있으나, 결혼 후 출산이 1명 내외인 점이다. 한국의 재생산력을 유지하려면 부부마다 2명을 가져야 한다. 물론 모든 남녀가 결혼하지 않고, 자녀들이 태어나도 불운의 사고로 죽어도 수명의 연장으로 충분히 노동력이 유지된다. 하지만 생각하면 국가의 최고로 중요한 정책 중에 하나가 국방력에선 심각한 타격이 온다는 점이다. 징병제를 시행하는 한국에서 남성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전체 인구가 줄어드는 영향에서 시작된다.
현재의 인구감소속도, 노령화에 따라 한국은 2100년이 되면 과연 국가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싶다고 한다. 미국처럼 다인종 국가가 아니라 한국은 단일민족이란 이름을 내세우는 국가다. 단일민족이란 이름은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에 이용되기도 하나, 그만큼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쉽게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한국 같은 나라에서 인구가 감소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의 존속조차 위협이 되는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의 말만으로 아이를 3명을 낳는 게 도리라 하나, 막상 중산층 이하의 많은 국민입장에서 결혼 자체가 부담스럽고, 출산조차 어렵다.
결혼의 조건은 경제적 기반이어야 하나, 그 경제적 기반이 무산되면 결혼을 해야 하는 젊은 사람들은 오직 좌절과 현실도피만 있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현실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국가의 문제에 대해 다들 “문제네, 문제야”라고 말하지 실제로 현실에서는 그런 젊은이들을 궁지로 몰아간다. 마르크스가 목표인 세상은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주장한 것을 좀 더 확장한 것이다. 루소는 모든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자신을 팔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신을 판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넘어 그 사람의 인권과 삶의 가치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 문제를 노동이란 것을 본 이유는 많은 노동자들이 비참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문제점으로 모두가 대기업이나 판검사, 혹은 좋은 직장을 원하지만, 그런 자리는 솔직히 15% 내외이다. 그 외는 자영업, 중소기업 등과 같은 서민이다. 본인이 서민이고도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의료비가 올라 병원에서 진료 받은 분들이 병원비가 오른 것은 병원 원무과 직원에게 항의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아프면 청춘이 아니라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집에서 쉬어야 한다. 현실의 고통이 아프게 만들었지만, 현실은 그 아픔조차도 고통을 가하여 통증을 잊게 만든다. 어째보면 그것이 더 무서운 게 아닌가 싶다. 아픈데도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이제는 아프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일 때 말이다. 누구나 태어날 때 사랑을 받기 위해라고 말하나, 왠지 그 사랑이란 이름은 가식과 허울 좋은 변명에 지나친 거짓인 것 같다. 마르크스가 다시 내게 물어본다. 아프냐고 말이다. 마음이 아파도 현실은 늘 냉정하다 못해 살벌하다.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사회계약론>에서 10만 명의 투표로 선출된 정치가는 막강한 힘을 가지나, 그 대상이 되어야 하는 국민 1명의 존재는 겨우 1/100,000에 해당된다. 보잘 것 없는 한 개인이 세상을 바꾸기란 어렵다. 단지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거름이나 하나의 동기는 될 수 있다. 세상의 덕목에 대해 생각하자면, 겉으로는 인간의 도리를 말하면서 타인의 고통과 부조리 앞에서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아마 홉스가 주장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삶의 지침을 여기는 사람이 많다.
물론 내 일상생활에서도 직장동료나 옛날 친구들도 그렇다. 나보고 미련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기심을 합리적으로 여기는 전체의지에서 그들조차도 그 안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뒤쳐진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자기 아이는 좋은 학교를 가서 좋은 직장에 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제로섬 게임이다. 앞으로 더 심한 경쟁으로 모순과 부조리가 우리를 조우할 것이다. 그때 가서도 과연 지금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인간은 오만스러운 존재이다. 나 역시 가끔 내가 오만스럽다고 생각한 점이 많다. 하지만 그 오만함을 다시 돌아보고 거기서 또 시작하는 점에서 또 다른 나로서 성장할 수 있다.
현실 일상생활에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누구나 알아주거나 하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도 옆 사람은 그들만의 논리를 제시한다. 어느 부분에 대해 내가 모르는 부분은 있지만, 적어도 정확히 문제가 되는 부분에 대해 다들 그 현실적 문제를 부정하는 게 보인다. 겉으로는 좋은 사람인척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기심을 남들도 같다고 말하는 전체의지적인 발언에서 이 사회의 누군가는 희생되고 소외되어 간다. 문제는 본인 자신도 그런 희생과 소외의 대상이란 사실조차 각인하지 못하는 점이다. 어떻게 보자면,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어본 후 내가 “그렇다”라고 말하는 편이 행복할 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