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약론 외 - 사회계약론.코르시카 헌법 구상.정치경제론.생피에르 영구평화안 발췌.생피에르 영구평화안 비판 루소전집 8
장 자크 루소 지음, 박호성 옮김 / 책세상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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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책을 항상 읽을 때마다 깜짝 놀란다. 그는 철학자, 문학가, 극작가, 음악가로 활동했지만, 점을 치는 예언자는 아니다. 그러나 루소의 책을 읽으면 그가 제시하는 의견과 예견이 그대로 적중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에밀>은 1762년에 제작된 도서이나, 거기서 말하기는 조만간 유럽은 혁명의 시기로 빠져든다고 하고, 프랑스대혁명에서 루소의 사상이 혁명가의 복음서가 되었다. 19세기 유럽은 에립 홉스봄의 서적 책제목인 <혁명의 시대>였다. 프랑스대혁명과 자본주의 시장 발달, 그리고 지나친 환경파괴와 인간성 상실에 따른 반계몽주의 내지 낭만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의 투쟁이 있었다.

 

역사적 맥락에서 유럽은 18세기말부터 20세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전쟁과 혁명, 쿠데타와 사건의 연속이었다. 변화의 시기에 루소의 말이 소름 끼치는 것은 “러시아 제곡은 유럽을 정복하고 싶겠지만, 자기가 정복당할 것이다. 러시아의 신민 혹은 러시아의 이웃인 타타르인이 러시아와 우리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내게는 이런 혁명이 불가피해 보인다. 유럽의 모든 왕들이 힘을 합쳐 이런 혁명을 재촉하고 있다.” 사실 러시아혁명은 1905년 러일전쟁에 따른 문제에서 시작했고, 1917년 2월은 1차 세계대전, 그리고 10월 혁명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일어났다.

 

러시아황제가 차르가 통치할 때 그의 무능함과 관료집단의 어리석음으로 러시아의 재정(財政) 상태는 파탄하고, 수많은 러시아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죽었다.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키혁명 이후 러시아황제의 소속된 장교 백위군들은 유럽의 열강들의 지원 아래 소비에트연방과 내전을 벌였다. 러시아내전 역시 인류의 비극 중에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런 비극조차 사실 볼셰비키와 유럽 제국주의 이해관계에서 얽힌 전쟁이다. 왜 이런 이해관계에 인간이 얽매이는 것인가? 장 자크 루소가 러시아에 대하여 지적한 말이 나온 도서는 <사회계약론>이다.

 

<사회계약론>은 이미 국내에서 발간되어 몇 십 년 동안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전 중에 고전이다. 하지만 그 고전은 낡은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도 살아있는 서적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가 만든 프랑스공화국 헌법의 토대가 되었고, 루소가 제시한 정치사회적인 관찰은 지금 헌법이나 법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계약론>은 토대가 되는 책은 <인간불평등기원론>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불평등을 어디서 시작하는지 찾기 위한 하나의 길라잡이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불평등은 자연적, 신체적인 요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인 불평등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사회계약론>에서 과거 귀족정에 대한 원로들의 정치행위에서, 원로들은 그 지역에서 나이가 있는 노인 중에 학문과 덕성이 탁월한 자로 뽑다가 어느 순간 투표로 이어지고, 마지막 최악은 세습제로 가는 것이다. 세습제로 가면 나이가 스물도 안 된 자가 원로원에 참석한다. 나이가 젊어서 정치적인 참여를 하지 마라는 것은 아니나, 원로원이라는 것은 경험과 덕성이 있어야 한다. 세습제 정치와 사회적 권력은 그 사회에 불안한 요소만 안겨준다.

 

한국에서 이런 것을 보면 정치적인 조건보단 정치적 입장을 좌우하는 경제적인 조건으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루소가 정치철학자라고 하나, 그의 사유에서 경제적 요건을 제외하지 않았다. 루소는 부(富)라는 것은 매우 경계했다. 부자와 거지가 많은 세상은 결코 제대로 되지 않은 세상이고, 그곳은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몸부림치는 곳이라 했다. 인간은 자신을 팔 만큼 가난해서 안 된다고 루소는 주장한다. 그러면 인간의 가치가 돈으로 정해져 버리고, 그 돈으로 매겨진 만큼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인간의 목숨은 어느 순간 돈으로 변질되었다.

 

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거기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애도보다는 처음부터 보상이나 배상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다. 그런 관심을 보인자의 어리석음은 결국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면 자신과 그 가족조차 돈의 가치로 전락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의 어리석은 마치 그리스신화 오디세우스가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 동굴에 갇히는 일화가 생각난다. 키클롭스는 하루에 사람 1명을 잡아먹는다. 눈이 1개인 이 괴물과 눈이 2개인 인간에서 누가 더 관찰을 잘하고 생각의 폭이 넓은가? 눈이 2개라는 점은 인간이 사물을 보고 판단을 훨씬 잘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키클롭스의 동굴에서 인간들은 괴물에게 잡혀먹을 때까지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한다. 그 생활의 맛에 빠져 결국 괴물의 먹이가 되는 순간까지 그것을 간과한다. 마지막에 잡혀먹을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자기 차례가 아닌 남의 차례가 될 때까지 그 문제를 생각해 내지 못한 점이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내가 바보인지 남이 바보인지 그것은 어느 기준에 맞추는 것인가?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에서 도덕이란 윤리적 가치와 멀다. 가령 조선시대 신분의 차이로 평민들이 착취당해야 했던 것이나, 유럽의 중세시대 여성들이 성적인 불평등을 겪는 것은 그 시대 자체에는 큰 모순이라 해도 그 자체가 당연한 시대인 것이다.

 

바로 현실에서 말하는 도덕적 가치가 때에 따라 얼마나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것들이란 점을 우리는 가끔 찾아볼 수 있다. 어느 시대에 하나의 법칙, 제도 등은 많은 사람들에게 선(善, goods)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때로는 억압과 핍박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이 말이 나오지 않은가?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나지만,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주인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들보다 더한 노예다.” 우리 사회에 진정한 노예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최근 한국사회에서 흙수저, N포 세대라는 말이 나온다. 경제적으로 빈곤하여 사회적인 영역에서 매우 취약하다. 사회적 취약하므로 정치적인 입지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밑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그 위에 누가 있는 것인가?

 

<사회계약론>에서 정말 놀란 말이 나온다. “외국의 지원과 귀화와 이민 없이 시민이 많이 거주하고 증가하는 정부야말로 의심의 여지없이 최선의 정부다. 인민의 수가 줄어들어 없어지는 정부는 최악의 정부다.” 통계적으로 한 나라의 강력함이란 그 나라에서 생산되는 총 생산력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생산력은 전체의 합이 아니라 균등적인 질에 의해서다. 한국의 노령화와 신생아 출산율의 저하는 여러 가지 단서를 보여준다. 한때는 인구가 너무 많아 문제여서 인구정책을 펼쳤으나, 그런 시대의 조건은 있었다. 바로 식량의 공급이다. 식량의 공급이 농촌에서 이루어진 점, 자급자족이 어느 가능했던 20세 중반 이후는 그렇다.

 

하지만 공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체계가 발달하여 기술력과 상거래의 중심으로 이전되면서 농업사회는 퇴화할 수밖에 없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한국전쟁 이후 90% 이상이라면 지금은 10% 이하로 밑돌 것이다. 식량생산력이 증가하여 식량의 공급은 충분하다 해도, 그 외의 문제가 있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음식이나, 인간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조건이다. 절망하는 청춘에게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없고, 그 능력조차 발휘할 수 없는 사회다. 최근 일본의 취업률이 증가했는데, 그것은 단카이 세대들의 장년들이 은퇴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계속 순환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이 진입할 수 있는 빈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다. 이 문제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문제로 이어진 점이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행위와 사건들은 항상 어떤 이슈가 몰려있다. 누구의 이익이 되는가? 누구에게 어떤 인센티브가 있는가이다. 정치사회적인 관점이 결국 경제적 이익이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경제적 이익이란 단순히 화폐의 수입, 땅의 양도만이 아니라 어느 특정 인물이나 단체가 권력을 누리거나 지역적으로 전반적인 혜택을 볼 수 있는 것도 말한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바로 일반의지다. 일반의지는 사적인 이익을 위한 개별적인 의지, 단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전체의지를 제외하고 마지막에 남은 최우의 공공선을 추구한다. 일반의지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덕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의 사상을 20세기 미국 최고의 자유주의 사상가 존 롤즈의 사상이 토대가 된다. 존 롤즈의 <만민법>을 읽으면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면서 세계시민이란 사람은 어떤 것인가를 논하고 있다. peoples이란 단어는 사람들이란 말도 있으나, 사실은 시민, 인민, 만민 등의 의미로 불린다.

 

루소의 peoples이란 의미는 남들을 지배하지도 지배받지 않은 국가의 주권자를 의미한다. 문제는 루소가 잘 지적하다시피 모든 국민은 제대로 된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으로 지적 수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적인 수준만 아니라 지성에 걸맞은 덕성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월급으로 그 어떤 투자를 하지 않는다. 친구가 허무맹랑한 일확천금을 꿈꾸며 외국 로또복권을 살 때, 혼자하기 그래서 나보고 같이 하자 해서 한 달에 1~2만 원 정도만 지원한다. 물론 높은 금액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끽해야 9등 1달러 수준만 계속 될 것이란 점도 안다.

 

주변에서 보면 매일 로또 복권 당첨, 아파트 분양권을 위하여 총을 쏘는 이야기던가, 혹은 주식 등을 보면 조금 아연해진다. 사실 복권이야 지나치지 않을 정도라면 삶에 큰 부담을 주지 않는다. 문제는 주식시장은 어느 돈이 시장에 모이면 그 화폐의 총액이 증가하는 게 아니라 그 화폐의 모인 돈을 누가 가져가는가이다. 주식에서 모인 화폐가 상승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 화폐가 모인 업체에 화폐가 들어와도 그 화폐는 그대로다. 결국 화폐의 이익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노동을 하여 생산력을 통해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 투자업체가 만약 아무런 성과를 내지 않고, 경영의 부실이 따라온다면 자신이 투자한 주식은 한 장의 메모지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청약통장은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다. 나보고 300만원을 6개월 동안 입금하여 분양권이 나오면 응모하란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보통 천 만 원이고, 아마 서울경기 지역은 P가 붙으면 억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엄청 많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모두 한입으로 총 잘 쏴야 하는데 하면서 요새 먹기 살기 힘들다고 한다. 당연히 그렇다. 최근 홍대 주변에 상권이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홍대에서 작은 점포 하나의 임대료가 천 만 원에 이르니 상인이 어찌 견딜 수 있을까? 임대료만 가게의 수입을 차지하는 돈을 차감하는 것이 아니다. 세금과 재료비, 그리고 인건비 등이 있다.

 

높은 임대료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상품의 가치는 올라가고, 상품의 가치가 오르는 것은 결국 소비 물가를 상승하게 되는 원인이다. 그래서 나는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기만성을 깨닫는 일이라 생각했다. 모든 삶을 바르게 살지 못하고, 때로는 추악하고 어리석게 살아갈 수 있지만, 적어도 기만적인 삶은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은 한 장 차이다. 죽음을 생각하고 사람을 살지 않는다. 죽음을 생각하더라도 그 죽음 직전까지의 인생의 즐거움이나 이익을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마지막 순간을 언제 닥칠지 모른다.

 

기만적인 삶을 살아온 자에게 인생의 마지막을 말해도 대충 묻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인간은 미련을 갖더라도 후회를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의 삶에 미련이란 더 하고 싶은 것들이 여전히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후회는 다르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서 오점을 정리하지 않고, 그것을 계속 안고 살아온 점이다. 반성과 성찰 대신 이기심으로 은폐되거나 조작되었다면 마지막 순간 후회한다. 하지만 그런 후회를 반성하기보단 마지막까지 은폐하고 조작하려는 자의 말로는 더욱 비참하다. 역사적으로 독재자의 최후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약자를 괴롭히고 그들이 가진 것들은 더 빼앗으려고 했다. 결국 독재자의 최종목표는 부에 대한 집착이다. 자신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재물로 대체하는 것이 재물이 있는 이유는 그 재물이 필요한 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나, 현실은 오히려 재물은 타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노예와 주인에서 자신이 노예의 주인이라고 여기는 자야말로 정신적으로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가난에 의해 노예의 삶을 사는 자는 비참하고, 가난한 자를 부리는 부자는 정신적으로 빈곤하다.

 

루소의 <정치경제론> 부분에서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나는 부유하고 당신은 가난하니,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 서로 합의하자. 내가 당신에게 명령하는 수고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사소한 것을 내게 준다는 조건으로 나를 섬기는 영예를 허락하노라.” 왠지 우리 한국사회의 직장이야기가 생각나는 것 같다. 아니라 최근에 논란되는 갑질행위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 노동계약이나 업체 간의 업무는 정당한 계약에 의해 실시된다. 물론 서류의 외부로서는 그렇다. 하디만 내부로 들어가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

 

약자는 비굴해지고, 강자는 비굴해진다. 그런 삶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에서 올바른 정치사회가 된다고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강자나 약자나 모두 한국에서 투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영국 잉글랜드 사람들은 투표하기 전에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라 했다. 그 이후에는 사람들은 국가의 일에 관심이 없고, 국민이 국가에 무슨 일(문제)이 있는지 모르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했다. 폭군은 전제군주가 될 수 없더라도, 전제군주는 언제나 폭군이다. 그런 전제군주와 그 군주의 아래에서 개별의지와 전체의지를 발휘하는 자들이 있다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 나라의 국민은 노예일 때가 가자 자유롭다고 한다.

 

“길게 보면 인민은 정부가 만드는 대로 만들어지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정부가 원한다면 전사, 시민, 인간 가운데 어느 것도 가능하며, 천민과 불량배가 좋다면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 자신의 신민을 멸시하는 모든 군주는 자신이 그 신민을 존경받는 존재로 만들 줄 몰랐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를 불명예스럽게 만든다.”

 

루소의 정치사상을 본다면 그는 인간의 불평을 정치적 사회적 조건을 봤으나, 경제적 조건을 상당히 많이 보았다. 그 이유는 인간의 빈곤함과 가난함이 그 사회의 악을 만드는 것이란 점을 알았다. 가난한 자가 빚에 허덕이는 가운데 차압이 들어와 그의 옷과 이불, 그리고 식기류까지 앗아간다면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 있는가? 루소가 지적한 불평등은 사회적 도덕적인 관계라고 하나, 그 사실의 근본에는 경제적 빈곤이 담겨있다. 루소의 경제사상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재화가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고, 당시 절대주의 왕정시대의 중상주의에 대해 비판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1776년에 발매되었다면, 루소가 제시한 <정치경제론>은 1755년에 발행된 책이다. 무려 20년 앞서서 루소는 스미스가 원하는 경제적인 목적을 제시한 것이다. 루소의 책을 농촌지역에 대한 찬미가 가득하다. 도시의 과다성장에 반발하여 농촌과 도시의 균등적인 발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조금 더 상공업을 중시했지만, 그도 역시 농촌경제가 도시의 이익으로 황폐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방법론적이나 기술적인 요소에서 스미스의 <국부론>은 이미 경제학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스미스가 주장한 도덕 그 자체에 대한 경제적인 가치에서는 이미 루소는 20년 이전에 주장한 셈이다.

 

그 근본은 역시 많은 사람들이다. <국부론> 역시 많은 나라의 국민들이 좋은 생활을 하기 위해 서적을 작성했다. 권력층과 부유층만이 아니라 가난에 허덕이고, 물품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나쁘나,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것은 여전히 큰 문제다. 인간의 목숨과 인권을 돈으로 주고 사는 것을 반대했던 루소의 사상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인간은 돈에 의해 죽고 사는 기로에 놓여있다.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루소가 제기한 문제는 250년 전이나, 그가 의문을 품은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큰 지혜와 등불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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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3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1-23 14:51   좋아요 0 | URL
이런 말하긴 그러나 그냥 그런 사람 죽으면 좋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1-23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루소 전문 알라디너는 만애비 님이시죠. 알라딘 루소의 80%는 만애비 님이 장악하신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1-23 14:51   좋아요 0 | URL
오덕게리온 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