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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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 만수를 둘러싼 주변인물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모든 이야기가 만수만 나오는 것은 아니나, 분명 만수의 행동과 만수와의 대화가 <투명인간>의 중요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독서모임에서 이 투명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느 분은 만수라는 인물이 자신의 세대와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나이가 50대 중반 분들은 만수가 학교를 다닐 시절 이야기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고, 그가 격은 시대적 흐름과 많이 공감대가 형성되어 마치 소설이기보단 하나의 역사적 기록을 실어놓은 이야기 같다는 점이다. 소설에서 어느 시대적 배경과 흐름을 두고 하나의 결과가 필요하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거나 또는 환상의 이야기로 말이다.

 

작품에서 환상의 세계는 만수가 투명인간이란 점밖에 없다. 단지 그가 마지막에 자동차에 박혀 교량 아래로 추락하는 것에서 그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혈흔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말 처음부터 만수라는 인물은 존재했는가? <투명인간>이란 존재는 아마도 만수로 통해 보는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상황과 모습을 다시 회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만수의 가계를 보면 조부는 원래 양반후예로 나름 사회적 지식인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불온사상으로 인해 고문을 당하고, 게다가 큰 아들마저 죽게 되자, 작은 아들을 데리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산지 화전민 마을로 유입된다.

 

거기서 만수의 아버지는 화전민의 딸과 결혼하여 6남매를 낳고, 중간아들 만수가 태어난다. 다른 형제와 비교 해봐도 얼굴이 크고 못난 만수, 그런데 만수를 보면 집안의 일을 가장 많이 돕고, 여러모로 학교나 직장 그리고 군대까지도 사람들과 가장 잘 지낸다. 만수라는 인물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고, 어디에도 거슬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50대 남성 주변으로 형제들 이야기가 나오면 만수 같은 인물이 있고, 그들은 항상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를 한다고 들었다.

 

심지어 어린 시절 연탄가스는 인상적이다. 2명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딜레마, <투명인간>에서 큰 누나를 선택하고, 작은 누나는 뇌가 손상되어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간다. 곁에 계신 분도 중학교시절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옆에 자던 할머니와 동생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고 한다. 학교 이야기도 그렇다. 학교에 등교할 때 책가방 대신 보자기를 싸고 다녔는데, 모임에 계신 분들도 그런 상황을 이야기했다. <투명인간>은 말 그대로 현실에서 살아오던 사람들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그때 어떤 일이 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고 감상들을 대화할 때, 이 책은 전근대 사회와 근대사회에서 정체성을 잃은 한국사회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고 했다. 특히 그 주체는 남성이란 점이다. 만수의 할아버지는 전통사회에서 농민공동체가 존재하던 마을에서 선비의 후손, 거기에 지식인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전쟁을 거쳐 근대의 어둠까지 본 것이다. 당장 오늘 하루 먹고 살아가는 것이 걱정인 시절, 몸이 약한 할아버지는 아들 하나를 두고, 계속 그 마을에 약사와 정신적인 지주로 지켜왔다.

 

그러나 배고픈 것과 정신적인 것은 참으로 모순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매일 나무하러 가고, 풀을 뜯고, 소와 돼지를 치는 일에 자란 아이들은 학교조차 가는 것도 높은 장벽이었다. 그나마 백수는 할아버지를 닮아 영특하고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 몸이 약한 것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대학교에서 가난과 외로움만 아니었다면 불운한 인물이 아닐 것이다. 만수의 모든 가족들은 오직 백수 하나만 바라보고 움직인다. 백수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그 모든 비용이 만수의 가족에 의해 만들어진다. 백수를 보면 그가 마치 당연한 가족의 희생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자기 나름대로 고민하고 가족의 기대에 억지로 자신을 내몬다. 그 마지막이 월남전이다. DDT라는 약품은 제초제로서 상당히 위험한 독극물이다. 다이옥신은 중금속보다 더 위험하고, 소량이 첨부되어 코끼리에게 투여해도 죽을 정도다.

 

다이옥신에 중독된 백수, 그 이후로 만수의 가족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가족의 정체성에서 백수의 상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인생의 목적을 빼앗아 가버린다. 백수가 죽고, 만수와 석수의 실랑이에서 불씨가 집으로 번져 모조리 태운다. 그리고 그들은 시골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에 올라오면 희망이 있을 것이라 보지만, 사실은 돈에 의해 울고 웃는 비정한 시간이 왔다. 만수는 학교를 마치고 공장에서 일을 하여 나중에 전경으로 들어간다. 전경이 되어 교통경찰 업무를 보조하며 이른바 뒷돈을 모아 집안을 부양한다.

 

어느 날 석수가 총을 탈취하여 탈영할 때 석수는 만수를 못 알아보고 발포하고, 자신은 죽는다. 석수는 그렇게 행방불명 처리로 되어 남자는 만수만 남았다. 아버지와 불화로 큰 누나의 결혼도 엉망이 되고, 공장에 일하던 만수가 처음에 흥하려 하다가 어느 순간 회사사장이 업체를 일부로 도산시키고 도주한다. 직장을 지킨 만수와 일행은 거기에 불만을 느껴, 저항하나 결국 남은 건 빚이다. 그래도 만수는 그 모든 것을 안고 가고, 마지막에 빚도 갚으나 계속 불운한 일만 터진다.

 

가족을 위해 일만 하고, 자신에게 이때까지 제대로 된 즐거움을 찾지 않은 채 반 세기를 살아온 만수, 20세기문턱에서 IMF 여파에 남은 것이란 빚이고, 가족들은 다들 좋은 길보단 불운한 현실에 좌절한다. 그런다고 시대적 흐름에 바르지 않은 조류를 거꾸로 거슬려 가려한 이들도 절망하여 도박에 미친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고, 아무 것도 가질 수가 없었던 우리 지난 세대들은 마침내 최후에는 투명인간이 되어버린다. 자기 자신은 어디에 존재하는지 전혀 알 수 없고, 단지 그 존재적 정체성을 자아의 관찰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서 비추어진다. 타인의 눈은 자아의 눈에 비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만, 자아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세세하게 볼 수 없다.

 

자신을 알기 위해서 자아의 탐구와 타인의 관점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만수에게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의지로 삶을 살아간 점이 있었을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닌 것까지도 포함하여 공장과 그 후에 어른이 될 때의 가족관계, 만수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억지로 떠밀린 책임을 마치 자신이 선택한 것처럼 행동한다. 늦게까지 일만 하여 결혼도 거의 미루다시피 생활했고, 결혼해도 신혼의 축복도 없다.

 

그야말로 가족을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아니라면 국가라는 시스템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온 만수다. 그 모든 것들을 위해 살아왔으니 이제 자신을 위해 무엇이 옳은지 모른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한국 남성들은 만수와 같은 인생을 살았는지 모른다. 대략 40대부터도 그 생활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며, 30대조차도 그런 영향을 조금 받는다. 왜냐하면 내가 어린 적에도 연탄가스로 중독된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형이 어린 시절 어머니하고 같이 잠을 자다가 연탄가스 중독을 피하기 위해 겨울밤 창문을 열고 자다가 형이 감기에 걸려 폐렴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그때 형이 감기 걸린 후 폐렴에 걸렸을 때 병원비가 없어서 어머니가 무척이나 서럽게 울고 있었다고 한다. 가난이 결국 우리사회의 에너지가 되면서도 발목을 잡던 딜레마인 점에서 <투명인간>에서 보인 우리 사회의 모습이란 우리는 과연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를 되묻는다. 처음부터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대상을 존재했다고 믿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존재하고 존재했다고 인식하더라도 그를 인간적 가치로 존재했다고 볼 수 있었을까? 아니라면 단지 자기 편하게 지내려고 하려고 만수란 인물을 대했을까?

 

어느 쪽이든 만수를 위해 그나마 옆에서 위해주던 사람은 중학교 시절 친구와 공장에서 밥을 하고 나중에 결혼한 여자 정도일까? 모두 만수에게 다가오고 했지만, 진심으로 와준 것이 아니라 필요성에 의해 상황적 여건에 따라서이다. 가족조차 마찬가지다. 만수에게 많은 돈은 없지만, 돈을 착실히 모아 여유자금이 있다는 것을 안다. 만수는 결국 이용하기에 좋은 일꾼이고 자금줄이었을 뿐이다. 만수는 그런 자신에 대해 불만보단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다. 만수 주변사람에게 만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투명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 독서모임에서 대표적인 투명인간은 만수지만, 비단 만수만이 아니다. 만수를 처음 만날 화자가 맨 마지막에 만수를 찾지 못할 때조차 이어질 때, 그 자신도 투명인간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얼굴과 온몸을 가리며 자전거를 타는 그는 외형적인 모습을 보면 누군지 알 수 없다. 진짜 투명인간이 겉옷만 두르고 다니는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니라면 거대한 국가와 사회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은 모두 다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배고픈 시절을 지나 막상 살만하니 다른 문제들이 나온다.

 

거기서도 자기의 주관이나 의지도 없이 사회적 흐름에 따라 물결이 요동친다. 요동치는 세계는 단지 강요하는 삶을 보여줄 뿐이다. 만수가 수업시간에 담임이 왔는데, 자신이 대위출신이고 정직한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학교 내 나무 하나가 누군가의 장난으로 훼손되자 그 장난을 친 사람이 자기반 학생이라 여기고 나오라고 한다. 사실 자기 반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고, 그런 일에 굳이 방과 후에 종례시간을 억지로 묶여둘 필요가 없다. 다들 괴로워하자 만수가 자진으로 나오자 선생은 만수를 진짜 개 패듯이 팬다.

 

그도 학생도 만수가 아닌 것을 안다. 단지 그는 본보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말이다. 만수는 이빨이 깨지고 심하게 다쳐도 선생은 사과나 보상 따위 하지 않는다. 투명인간은 색이 없어야 한다. 그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무조건 색을 맞춰야 한다. 카멜레온이 어느 순간 색을 너무 바꾸다보니 본래의 색이 뭔지 모르고 계속 변색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현실의 우리조차도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우리는 만수에 비하여 책임의식이 약하다.

 

만수는 자기의 능력으로 누군가를 부양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무리인 세대가 왔다. 우리는 투명인간처럼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서이다. 옆에 계신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사회는 현재 표백사회로 인해 표백인간이 되었다고 말이다. <투명인간>은 빛에 반사하지 않고 투과하므로 있어도 없어도 느낄 수 없다. 하얗게 모두 변색된 표백인간은 어느 색 한 가지로 칠하면 그렇게 된다. 현실에 적응조차 어려운 세상이 온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잃어버리고 박탈당하는 세상,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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