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건축 서양 건축 함께 읽기 - 임석재 교수의 대중을 위한 건축 강의
임석재 지음 / 안그라픽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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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건축을 본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와 그 민족의 정서를 보는 것과 같다. 한국의 건축이 우월한지 아니면 열등한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건축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분명 내가 생각할 때 한국의 동양 문화권과 서구의 문화권의 차이점이나 각각의 장단점은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넘어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라보는 시대인 것이다. 한국 건축에 대해 다루는 것은 한국인의 삶을 다루는 것이고, 삶을 본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가치관을 다루는 것과 같다.

 

건축이 미학적으로 예술로 볼 수 있는 이유도 다 인간의 삶을 그대로 베여 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을 하나의 광학적으로 보는 것도 있으나, 삶의 가치 그 자체를 건축에 담아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건축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을 표현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건축은 그런 삶을 어떻게 보여주는 것일까? 현대사회에 넘어오면서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는다. 서구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그 이전에 나라를 잃은 설움과 동족을 죽이야 하는 비극까지도 말이다. 온갖 고통과 슬픔이 나라와 민족을 닥친 후 우리는 문득 낯선 곳에 와 있다.

 

문제는 그 장소가 낯설어 보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지금 모습을 제대로 다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형이상학적으로 인간의 상상력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데아적인 요소를 현실에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 온갖 사물들이다. 인간이 원하는 바를 그리지만, 인간이 원한 세계는 완벽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플라톤의 철학은 인간의 현실세계는 허구에 불과한 것이고, 완벽한 세계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존재하지 않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현실적 조건에 대해 정체되어 있기보다는 계속 자신의 이상적 가치와 삶의 의미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자신에 대해 발견이야 말로 자신의 삶을 정립하는 여정인 것이다. 건축물은 아마 그런 것이다. 삶은 무엇인지 내가 살아가는 방향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여기는 모습이란 무엇인지 말이다. 한국인의 삶에서 보이는 그 운명적 결정체는 바로 건축양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 건축 서양 건축 함께 읽기>란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나온 도서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시골에 가면 친족으로 올라가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가에 가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살아계셨다. 시골마다 어른들이 계시는 댁으로 방문하면 그 집이 요새 나온 집이 아니다. 아주 예전에 지어진 건물이고, 특히 친할아버지 집은 전형적인 한옥구조 형태였다. 외갓집도 그렇지만, 친할아버지의 집은 한옥구조로서 기와가 있었고, 처마가 달려 있었으며, 지붕 아래에는 까치가 둥지를 짓고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주변에 논과 산으로 펼쳐져 있었고, 방의 형태는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작은방 2개가 모여 있었다. 두 분이 귀천하시고, 현재 작은 아버지 댁이 사시고, 옛날과 비교하여 조금은 변해있지만, 과거 한옥의 형태를 어릴 적에 본 것은 행운인지도 모른다. 소 한 마리가 외양간에 살고 있었고, 부엌에는 가마솥이 하얀 밥을 머금고 있었다. 벽은 흙으로 되어 있고, 기둥은 나무로 되어 있다. 나무도 현대 한국의 도시처럼 직사각형으로 만든 목재보단 나무를 그대로 뽑아 껍질만 벗겨내어 만든 기둥이었다.

 

이 책을 보는 순간 예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있던 때가 기억났다. 우리 할아버지 댁은 그나마 외양간을 떨어져 소를 키웠지만, 작은할아버지 댁은 마루 쪽이 아니라 다른 방향의 문을 열면 소가 보였다. 옛날부터 농사를 지어온 한국인에게 소는 가족과 같아보였다. 소여물 먹이려 들판에 나가고, 겨울에 소가 병에 걸리지 않도록 볏짚을 말아 소 등에 얹힌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듣는다. 서구사회로 된 한국에서는 온통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가득하다. 지구온난화와 열오염 등은 지나친 열로 인해 인간에게 큰 고통을 준다.

 

각종 피부병과 열사병, 순환기 쪽으로 영향을 미쳐 심장병 같은 위험도 증가한다. 우리의 옛날에 살던 집들은 그런 일들이 별로 없었다. 내 친구 하나는 아토피성 피부질환에 시달린다. 어릴 때부터 계속 피부가 가려워 긁어대는 모습에서 우리는 몸과 마음이 약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잘 살아보세! 라고 말하며 전국을 온통 콘크리트 범벅으로 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이것들이 우리의 삶을 역행하고 있었다. 기존 서구 합리주의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로서 동양문화를 낮추어 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동양문화가 서구에서 지니지 못한 힘과 미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계속 우리의 모습을 바꾸고 부수고 멀리하는 사이, 외국에서는 한국의 전통가옥이나 문화를 보기 위해 저 멀리서 찾아온다. 예전에 승효상 교수와 같이 활동하던 정기용 건축가를 다룬 <말하는 건축가>라는 영화를 보았다. 정기용 건축가는 노무현 대통령의 봉하 사저를 설계한 사람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후 한국에 돌아온 예술건축가다.

 

그가 본 한국은 끔찍했다. 한국 고유의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을 모조리 허물고, 시멘트로 도배되는 것이 말이다. 인간이 숨을 쉬고 살아가듯이 건축물의 흙도 숨을 쉬며 산다. 인간과 건축에서 인간에 의해 건축물이 도구화 되는 게 아니라 같이 숨을 쉬며 가는 것이다. 건축물은 단순히 흙과 돌, 나무와 유리로 이루어진 무기체가 아니다. 그 속에는 인간이 살아온 향기와 삶의 여운이 담긴 곳이다. 특히 건축물 중 집이란 인간이 살아있는 그 자체를 보여주는 미적 공간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빛과 공기를 마주하며 나무와 풀하고 느껴야 한다. 정기용 건축가가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자연의 세계에 와서 자연에게 감사하다고 하는 말은 잊을 수 없다. 왜 인간은 자연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우리 건축 양식인 한옥은 자연과 함께 녹아 있다. 서양의 건축은 대부분 콘크리트 자재로 이용되어 주변 환경과 소통을 차단한다. 서양의 예술작품을 보더라도 자연은 건축물을 받쳐주기 위한 주변의 존재로 보여준다. 그러나 한옥은 오히려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같이 공존을 추구한다.

 

자연과 조화를 나누는 것은 인간이 자연의 삶에서 모두 사이좋게 지내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권력층이었기 때문에 계급사회라는 특성상 다 그렇게 지내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적어도 진정한 사대부 지식계급들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위해 유교학문을 정진했다. 퇴계 이황 선생이 기거한 도산서원은 그런 모습이 보였고, 각각의 건축물마다 개성을 주었고, 그 개성이 다르다고 해서 도산서원의 조화가 깨지는 것이 아니었다. 건축자재도 나무를 있는 그대로 쓰는 것도 좋다.

 

나무가 바로 올곧게 자랄 수 없다. 한국의 소나무들은 좌우로 휘어 마치 뱀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여 중간에 돌과 흙을 집어넣어 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보여준다. 입체적인 요소에서 전체를 조화를 중시하지 서양처럼 어느 한 가지 대상에 집중시키지 않으려 한다. 이런 문화적 특성에 대해 내 개인적으로 한국의 사회는 농경문화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라 여긴다.

 

농경문화에서 단체로 논에 나가 벼를 키우고, 타작을 한다. 노동으로 놀이를 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같이 노래를 부르고 농악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문화는 개방적으로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따라서 건축모양이 자연과 동일한 느낌이 들도록 조화를 이루고, 방과 방이 마주보게 하며, 툇마루에 걸쳐 앉아 멀리서 손님이 오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런 문화적 특성이 예술적 감각으로 남아 전수되는 것이다.

 

우리 친할아버지의 댁만이 아니다. 아마 원래 집터로 보자면 500년 정도 된 곳이고, 그 집터 역시 내 직계할아버지의 집이었다. 지금은 먼 일족이 살고 있지만, 그 집을 봐도 안방이 중심으로 되어 다른 방이 중앙 마루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집들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공간적인 이윤만 추구한다. 거실의 기능은 분명히 통로이기는 하나 방과 방이 마주보기보단 서로의 사적공간을 위해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요새 같은 아파트가 성행하는 시대는 공간적배치가 각을 이루며, 그 각의 외부가 각자의 영역으로 가기 쉽다. 자기만이 공간에 자기만의 세계가 펼쳐진 현실에서 가족과의 관계는 친숙하기보단 그저 필요의 존재로서 보일 수 있다. 서구의 건축이 이런 한국의 미에 관심을 돌리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서구의 합리주의는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었고, 거기에 따른 한계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직각과 직선보단 타원과 기하학적인 모습은 인간의 사유의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준다.

 

자연을 파괴하고 짓밟는 행위로는 사유의 확장은 불가능하다. 해체주의적 특성이 20세기 말에 도래해도 역시 그것은 반 문명주의이었지, 자연의 희귀성은 아니다. 책을 보면 조금 유감스러운 것은 장 자크 루소가 저술한 책을 읽으면서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란말을 직접 말하지 않았다. 루소가 말한 자연이란 인간의 본연의 마음이었고, 그 본인의 원초적인 세계로 가는 것이다. <에밀>에서 루소는 에밀이란 가상의 인물로 통해 인간을 자연적 인간상을 제시했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는 인간이 숲에 살아가는 곰과 같이 살 수 없음을 인지했다. 저자의 미학적 시야는 분명 철학적 사유에서 시작되나, 작가의 글에서 낭만주의 내지 고전주의 등과 같은 철학, 미학, 예술적 용어가 나온다. 아쉬운 것은 거기에 대한 설명이 없다.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보기 좋게 잘 나온 사진만 책에 올리는 것도 좋으나, 더 중요한 것은 개념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점이다.

 

한국의 건축이 자연과 소통, 인간과의 소통을 추구한 것을 말하고 싶은 분인데, 막상 독자와의 소통을 위해 배려는 조금 부족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상이 나온 계기와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으면 건축과 미학을 제대로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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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5-09-03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괜찮지요~^^

만화애니비평 2015-09-04 09:23   좋아요 0 | URL
과연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