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 살다 - 조선 지식인 24인의 서재 이야기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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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너무 부족하다 못해 어설프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다른 국가의 축제 내지 기념일을 찾아보면 그들의 국가 내지 민족에 대한 기념적인 행사로 남을 수 있도록 최대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휘한다. 프랑스의 경우 1789714일 처음으로 프랑스 민중들이 봉기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한 것을 최고로 여기며, 미국의 경우 독립기념일을 최고로 여긴다. 자신들의 국가가 지금의 모습을 생기게 해준 것에 대한 가치다. 그런 반면에 일본은 경우 에도시대부터 내려온 문화, 혹은 근대 전후로 생긴 문화를 이어져 내려온다. 그들의 축제는 전통문화의 연속적인 향연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의 얼굴을 내보일 수 있는 정체성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한국의 근대 이전 사회, 즉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시절과 그 이전에 있던 조선이란 이름으로 왕조가 있을 때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잔혹한 일제나 시대에 뒤떨어진 조선이란 시기는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역사에서 그 시대의 흐름이 없었다면 현재 모습이 없다. 한국에서 최고의 도시는 서울이다. 서울이 도읍이 된 시기가 바로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개성이 도읍이던 고려에서 한성이 수도이던 서울로 이전한다.

 

서울이란 곳이 한성 즉 한양이란 말처럼 한양이 우리의 수도가 된지가 거의 620년이 넘었다. 조선에서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이란 국가로서 살아온 시기를 본다면 한국의 역사에서 조선은 최후의 왕조국가이면서, 우리가 남긴 문화적 유산을 가진 국가다. 아쉽게도 그나마 조선 이전에 남은 문화적 유산은 고려나 통일신라(보단 후기신라가 맞겠지만) 정도다. 종교가 정치적인 제도로 살아가던 시기에 한국의 종교는 단군시대부터 삼국시대 초기까지 샤머니즘에 의해 유지되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말기까지 불교, 조선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유학, 그 안에서 성리학으로 대체된다.

 

성리학이 조선의 학문과 정치사상이 되면서 사회는 오히려 개혁을 추구하기보단 퇴보하기 시작했다. 사농공상이란 사대부 중심의 사회가 되면서 사대부는 학문의 근본을 세우기보단 그저 성리학 안에서 허례허식만 추구했다. 공자의 유학은 전쟁이 많은 시기, 군자의 정치로서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어려운 국가 내정을 회복하고자 했다. 왕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쌀이라 할 수 있다. 배고픔에 굶주려 옷을 헐벗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군자의 적선이라 할 수 있다.

 

본래 사대부들은 유럽 중세시대에 봉건영주와 같은 위치다. 마을에 향약이나 서당을 열고, 그 마을에 일어난 일을 주관하거나 관리하기도 한다. 물론 관청도 있으나, 마을의 풍속은 그 고을에 사대부들의 인품과 학문적 기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조선후기로 갈수록 양반들 사이에서 부익부 빈익빈, 특히 당파전쟁과 세도정치로 인해 많은 사대부들이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다. 이번에 읽어본 <서재에 살다>는 바로 그런 시대에 살아간 지식인에 대한 기록이다.

 

지식인들이 나온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학문적 가치와 삶의 향기를 찾아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 것도 우연인지 <서재에 살다>는 내가 최근에 읽어본 서적에서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기 좋은 서적이다. 약간 아쉬운 점이라면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가족을 제외하자)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이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한국에서 조선이란 국가의 마지막 르네상스, 그 시기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일대기를 찾아보고 그분이 귀향살이를 하던 강진군 도암면에 가본 적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기거하던 도암면 귤정처사의 산장인 다산초당은 한국 전통문화로서 혹은 더 나아가 한국인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이른바 다산학단이 생긴 곳이며, 한국의 인문학에서 모든 종점은 다산이었다. <서재에 살다>에서 다산의 지인이 하던 말처럼 열수의 죽음 수 만권의 서고가 무너진 것만이 아니라 조선의 학문과 미래까지 멸망이었다. 그런 그가 머문 곳 인근에 그분의 따님이 시집가서 살던 곳이 있었다. 한국 후기 유학자 중에 이름을 날린 방산 윤정기의 외할아버지가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다.

 

방산 윤정기의 가택 이름은 명발당(明發堂)이라 한다. 방산 윤정기는 후사가 없지만, 지금은 방산 윤정기의 먼 일가의 후손이 기거하고 있다. 작년 가을 시골에 가면서 그곳에 가보았다.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태어나고 살아가던 집에서 걸어가면 10분조차 되지 않았다. 약간의 현대적인 기술이 있지만, 아직도 기와로 이루어진 지붕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한 점이 있었다. 유학이 중심이던 조선은 확실히 구시대적인 세기다. 하지만 19세기 초반에 움이 트던 실학이란 과연 무시하지 못할 사상과 가치관이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비롯하여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이 3사람은 한국의 다도(茶道)문화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고, 한국의 차의 성인으로 지금 이 시기의 사람들에게 추앙 받고 있다. 나 역시 대학교 동아리가 다도동아리였기에 다도문화를 배우면서 이 3사람의 이야기를 보았고, 현재 남양주 마재, 여유당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살이할 때 그가 머문 산장의 주인이면서 제자이던 사람의 후손에게 헌다를 받고 있다. 스승이 귀향하고 서거하면서도 아직도 찾아오는 제자의 후손을 보면서 뭔가 200년이란 시간을 넘어 계속 이어지는 이런 모습이야 말로 우리의 정체성이라 여겼다.

 

그동안 한국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게다가 근대경제화로 인한 빠른 변화와 방황에서 우리가 원래 천천히 바꾸고 가꾸어야 할 것들을 모조리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저 비극적인 40(을사늑약 포함)3년간의 전쟁에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거의 파괴되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문화에는 외국의 문화를 천천히 받아들인 게 아니라 급작스레 억지로 밀어 넣고, 그것이 우리하고 전혀 다르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에 정착되기 시작했다. 변화라는 것은 마치 공기가 진공의 공간에 흘려 들어가는 것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지만 그 변화의 바람이 조화를 이루고 새로운 양식이 하나의 산들바람이라면 모를까 태풍처럼 몰아치면 남는 게 없다. 우리의 정체성 그게 뭔가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왜 나츠메 소세키가 근대와 전근대 시대의 문화적 간극에서 고뇌하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인생이라 삶의 미학이 오로지 사사로운 이익에 묻히기 때문이다. <서재에 살다>를 읽는 순간,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되찾음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나오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잘못된 인식에서 계속 유지된다는 점이다. 군사문화에 길들어진 사회, 사회라는 공간에서 특히 남자들은 군대문화에 익숙해져 이른바 까라면 까라는 게 통용된다.

 

이런 시기에 여자들은 오로지 자가만의 이익, 혹은 자식을 위한다고 하나 막상 자신의 자존심만 채우는 이런 모습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의 그런 천박한 현실적 가치관이 한국의 정체성으로 되어 버렸다. 남을 위해 살아가지 못할망정 남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은 세상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과 삶의 미학이 다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렇다. 사람들은 자신에 먹고 사는 것이 약간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문화적 욕구를 채우려 한다. 하지만 그 욕구의 해소는 그저 대중문화라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남과 나의 자아적 경계구분이 없다.

 

19세기의 지식인들의 서재는 바로 남이 아닌 나만의 공간이 있고, 그 속에는 삶의 미학과 지식인의 가치가 있다. <서재에 살다>는 바로 그런 우리 조상들 중에서 19세기 북학파 중심으로 구성된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흔히 조선의 사대부만이 있는 게 아니다. 서얼 출신도 있었고, 가난에 허덕이는 자들도 많았다. 심지어 세력가에 의해 노염을 사서 먼 곳에 가서 귀양살이를 수 년 동안 고생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재산이 바로 서재였다. 책과 붓, 벼루 그림 그리고 그림이 걸려있는 공간을 말이다.

 

지금 우리의 공간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예전에 개마고원 출판사로부터 선물로 책을 받으면서 <나만의 공간>이란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나만의 공간, 어느 자는 책이고 누구는 옷이고 누구는 음악이며 누구는 다른 무엇인가가 채워져 있다.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과 취미 그리고 더 나아가 삶의 모습은 그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풍요롭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란 점이다. 우리에겐 바로 그 원동력이 존재하고 있는가라고 되물어본다면 과연 있을까?

 

자신만의 공간이 있기에 상대방과 교감이란 것이 있는 것을 아는가? 부끄러운 것인지 아닌 것인지 나는 TV를 보지 않은지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취미로 만화, 라이트노벨, 애니메이션과 같은 하위문화를 즐긴다고 하나, 나의 서고에는 각종 철학, 사회학, 인문학 도서들이 꽂혀 있다. 나의 서고엔 결국 철학과 사회학이란 학문적 영역처럼 세상에 대해 인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문명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기 좋은 공간이다. 지식인들의 서재이름을 보면 화려하기보단 오히려 겸손하거나 또는 어려운 자신을 묘사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여유당(與猶堂)이라 한 것처럼 만약 나의 서고를 두고 어떻게 말하여야 하는가? 오타쿠란 별명이 한국에서 오덕 내지 덕후라고 하나, 본래 의미가 상대방의 댁을 부른 말이기에 은댁재(隱宅齋)가 좋을 것 같다. 오덕쿠의 서재 오덕의 서재, 그늘에 가려진 하위문화 공간이 즐길 수 있는 곳은 역시 집이다. 그 집에서 서고라면 은댁재가 내게 맞는 서재인 것 같다. 만화책과 철학책이 공존하는 공간이기에 세상의 유행 따위 잊은지가 옛날이다. 덕분에 보통 사람들과 대화를 제대로 이어가기 어렵다. 이미 TV와 단절했던 점과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영역을 파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와 대화하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추구한다면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한국의 문화, 세계의 문학과 문명, 그리고 예술의 세계까지 말이다. TV를 안 본 후에 내가 더 예술에 대해 더 관심을 두게 된 동기가 예술이란 모두 같은 것으로 보는 것으로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남과 다르게 살라고 하듯이 남도 다른 남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만의 공간, 나만의 세계는 그 시작의 중심이면서 시작이다. 어찌 보면 다양성이 없는 우리의 모습에서 <서재에 살다>의 지식들은 자신의 가치에 의해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우리와 관계없을지도 모른다고 하나, 그들의 재산들은 우리의 우수한 문화재며, 국보와 보물로 남아있다. 게다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라는 그림은 바로 <서재의 살다>에 나온 것처럼 그들만의 삶에서 나타낸 삶의 미학이었다. 그러나 나는 서재를 생각하면 바로 책을 읽는 사람의 모습만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서재가 곧 자신의 집이고 방이었다. 서재에서 글을 읽는 선비는 자신만의 세계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고고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학문의 성취는 무릇 자신의 출세만이 아니라 더 넓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아에 나아간 자, 백성보다 더 괴로운 일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괴로워하고, 백성들이 만족하고 나서 만족하라는 말은 인상적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 살이 할 때 갈밭마을의 아낙네 사연이 내 마음에서 항상 떠나지 않는다. 시아버지와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아이에 대한 군포세 대신 소를 끌고 간 관청, 그것에 좌절한 남편은 칼로 자신이 남근을 자른다. 그 피가 흐르는 남근을 잡고 관청에 가는 아낙네지만, 아무리 곡성을 높여도 관청의 벽은 너무 높아 쳐다 볼 수 있다. 19세기의 일들이 200년이 지나 지금도 비슷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저 멀리서 안타까워 비통해하던 다산 정약용 선생은 나그네 글방에서 시조를 읊으며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이 다 저렇게 백성을 위해 고뇌하는 것만이 아니지만, 적어도 서재에 책을 잡던 그들은 허례허식에 빠진 자들이 아니라 현실적 문제에 큰 관심을 두었다는 점이다. 학문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근본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이란 점이다. 그런 치열한 공간에서 힘들게 살아가던 지식인들의 서재란 결국 그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크나큰 재산이란 점이다. 우리의 정체성 과연 우리에게 어디서부터 찾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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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nly 2015-01-18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시기에 여자들은 오로지 자가만의 이익,혹은 자식을 위한다고하나 막상 자신의 자존심만 채우는 이런 모습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의 그런 천박한 현실적 가치관이 한국의 정체성으로 되어버렸다? 참 뜬금없고 편협한 한국 정체성에 대한 정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5-01-18 23:27   좋아요 0 | URL
님의 그런 시선이 참 답답하네요.
현실의 교육을 보시면 알 겁니다. 학생들에게 언제나 과중한 교육, 부익부 빈익빈으로 양극화, 이런 문제로서 바라본 천박한 한국사회라는 것이고, 그러한 흐름이 결국 자본주의에 대한 가속화라는 점이고, 그런 것이 생긴 것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정립되지 않아 이렇게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무슨 의도로 덧글을 남기는지 몰라도, 조금 본인의 생각을 현실적 상황에 전후맥락을 판단하여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여성만 비난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