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1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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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카와 류노스케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보면서이다. 그의 문학은 류노스케라는 사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또 하나로 알게 된 동기는 애니메이션 기획물 중에 <푸른문학>에서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작품 하나인 <지옥변>을 본 것이었다. 지옥변이란 작품을 약 25분 정도의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꾸몄지만, 그 작품이 단순히 애니메이션이라 하여 우리가 그래 만만하게 볼 것은 아니다. 미치광이 화가, 그리고 그 화가가 살던 폭군들, 이 작품을 보면서 인간이 가진 미적 감각이란 반드시 기존의 미적 가치에 부여한 게 아니라 그 이상의 것들을 찾아가거나 또는 추구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소 소설과 애니메이션의 전개나 성향은 다른 것 같았으나, 나와 친한 분에 의하면 <지옥변>이란 작품은 지상예술주의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작품을 한 번 보게 되면, 그의 작품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요소를 들여보는 것보다 그 예술적인 성향으로서 작품을 이끌어가는 것이 보인다. 현실을 외면하는 비정치적인 표현의 글들, 하지만 과연 그가 그렇게 쓰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적으로 현실에 대한 외면 내지 회피는 그 시대에 대한 거울적인 요소로서 대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은 근대문학을 꽃 피우던 시기고, <라쇼몽>이란 서적을 읽은 후 류노스케의 정보를 보는 순간, 그가 일본 대문호인 나츠메 소세키의 문하로서 있었다는 점이다. 나츠메 소세키의 글을 보는 것과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글을 보는 것, 더 나아가 다자이 오사무가 좋아한 류노스케의 글을 생각하면 조금 다른 괴리감이 나온다.

나츠메 소세키는 이른바 도쿠카와 쇼군 정치에서 메이지 시대로 이향되면서 그 시대에 보여진 희망찬 미래에 대해 그냥 보지 않았다. 오히려 메이지 시대가 이전의 시대보다 못하거나 비슷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메이지 시대가 일본의 문화적인 요소에서 상당히 개방적으로 변하여 진보적인 역사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메이지유신의 도래는 다시 천황이란 이름에 대하여 신적인 힘을 부여하고, 군국주의적 이상을 만들어가던 시기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어본다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지만, 막상 주인공인 간게쓰 선생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표정으로 달관한다. 그런 모습은 이전에 읽어본 니체의 <반사회적 고찰>에서 니체가 바라보던 독일의 모습이 흡사한 느낌이 있었다. 독일은 1871년 독불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승리한다. 그때 도취된 독일의 모습에 많은 독일 국민들은 그 흥겨움에 빠졌다. 그러나 니체는 바로 그런 독일 사람들에 비판을 날렸다.

조금 다르게 나츠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선 간게쓰 선생은 엉뚱하고 미련하나, 그 모습은 영락없이 실존주의적인 모습이었다. 국가가 승리해도 나에게 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오히려 신문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한 격려금 모금이라든지 혹은 전쟁에 참가한 장군이 군주의 죽음을 듣고 자살했다는 게 과연 자신과 무엇인가 말인가? 라는 의문을 남기는 것이다. 근대국가에서 일본은 근대사상에 입각한 게 아니라 단지 군국주의적인 요소로서 이향한 것이다.

근대국가에서 국가의 주체는 국민이고, 그 국민은 이성과 자율적인 선택에 의해 국가라는 조직을 운영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근대화란 이름에서 근대사상과 철학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근대화란 이름이 진행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차라리 근대사상에 입각한 국가적 체계는 무참히 살해된 1871년 파리의 시민, 꼬뮌들이라 볼 수 있다. 시민 내지 국민이 주인이 된다는 점은 그들의 표현과 의사전달에 대한 자율성을 부여한다. 일본의 대문호들이 나오던 시기에 그런 일본이란 국가를 보면 그들이 추구하던 문학적 모습을 보면 일본이란 국가가 추구하던 방향이란 전혀 다르다.

문학이란 것, 혹은 예술이란 것이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과 성찰을 요구해야 하던 것이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나츠메 소세키의 비판적인 성찰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회적인 구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적인 변화에 어느 개인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개인의 이야기로만 진행된다. 하지만 계속 읽는다면 그 사회에 놓인 개인의 입장에서 그 시대에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과 사회의 모습에 대해 나츠메 소세키는 분명 일본이란 사회가 더 좋아지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츠메 소세키의 문하에 들어간 류노스케는 어떠한가? 류노스케의 작품을 읽다보면 처음과 끝에 대한 설정이 전혀 다르다. 이른바 보통 사람들이 즐겨쓰는 말인 기승전결, 문학에서 내러티브라는 것에서 그의 작품은 서사전개가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시작과 끝의 방향이 전혀 다르거나 또는 이야기의 진행이 긴장감을 이끌어 가는 것처럼 보이나, 결말은 너무 싱겁고, 때로는 전혀 엉뚱한 설정으로 들어간다. 혹이라면 역자의 후기처럼 <덤불 속>이란 작품처럼 가려진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로 인해 이야기의 본질이 흐려지는 경우도 있다.

류노스케의 대표작품인 <라쇼몽>, 처음에 내가 <라쇼몽>이란 작품을 들어본 계기는 계명대학교 영화학과 서정남 교수의 <영화서사학>이란 도서를 접하면서부터다. 이른바 몽타주 기법에 대한 연구로서 혹은 다양한 영화이론을 독학하면서 <라쇼몽>을 알게 되었다. 그런 <라쇼몽>이 일본 거장감독인 구로자와 아키라에 의해 만들었지만, 막상 류노스케의 <라쇼몽>과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설정한 것을 알았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은 사실 류노스케의 <덤불 속>을 토대로 이야기를 구성한 것이었다. 아직까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을 감상하지 않았으나, 적어도 류노스케의 <덤불 속>과 그 <덤불 속>이 실린 <라쇼몽>을 읽으면서 류노스케의 소설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라쇼몽>이란 어느 절망적인 시기에 주인에 의해 쫓겨난 하인이 어느 노파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산적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상대방이 다른 상대방의 것을 취한다면, 나 역시 그 상대방을 취하는 것이 문제없다는 것에서 인간의 본질적 요소를 보여준다.

그런 빼앗고 빼앗아가는 구도는 생명이란 이름이 새겨진 나생문(羅生門, 라쇼몽의 한자어)에서 인간의 윤리와 현실적 상황의 대립을 보여준다. 여기서 인간은 윤리보단 현실을 선택하나 아이러니하게도 최소한 산적이 된 하인은 노파의 목숨을 훔쳐가지 않는다. 후기 역자의 말처럼 주변에 시체들의 몸에는 옷이 입혀져 있었고, 그 중에 여자도 제법 있었기에 노파는 그 여자시체들의 옷을 입고, 그 여자의 머리를 뽑아 가발을 만들어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하인의 도적질은 문제되나, 노파의 행동 역시 윤리적으로 용납하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노파는 자기가 어느 여자의 머리를 뽑으면서 그 여자의 행동을 비난하는 모습이 나온다.

마치 끝도 없는 비난과 그 비난에 대한 응징의 도적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이 나온다. 아마 일본의 당시 모습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인간들은 타인의 것을 빼앗아야 자신에게 부가 증가되고, 그런다고 하여 그 남을 것을 빼앗는 게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지만 분면 다른 방식으로든 그 문제점이 있다. <라쇼몽>이 류노스케의 첫 작품이고, 나츠메 소세키 문하시절에 내놓은 것이라면 충분히 나츠메 소세키의 영향력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현실에 대해 다른 모습으로 바꾸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라쇼몽>과 다르게 다른 작품들은 초현실적인 요소로 보여주거나 혹은 인간이 현실에서 엉뚱한 착각을 하는 모습들을 다룬다. <덤불 속>은 어느 남자의 죽음에서 목격자와 가해자 그리고 다른 피해자의 진술이 모두 다른 것처럼 진실은 항상 다른 곳에서 숨어 있었다. 죽은 남자의 혼령이 무당에 의해 나올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혀 다른 전개로 흘러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세계에 있어도 전혀 다른 이야기와 증언이 흘러가면서 우리는 현실에 대해 일관적인 비판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계속 돌고 도는 것이다.

모든 작품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에는 항상 결론이 흐지부지 하거나 또는 싱겁게 끝나거나 도대체 작중 인물이 무엇을 말하고 전달하고자 하는지 제대로 전개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이것은 곧 현실에 대하여 용린을 건들지 않겠다는 점과 같을 것이다. 현실의 이야기보단 환상과 괴이한 상황의 연출은 현실로부터 도피다. 하지만 그 도피는 암울한 시기에 살아간 지식인들의 숨이 막힌 우울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우울한 상황이 류노스케의 글이 되었던 것이다. 현실을 벗어나 전혀 다른 결말과 결론, <덤불 속>과 <라쇼몽>에 있었던 자들은 <덤불 속>과 <라쇼몽>의 등장인물들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속에는 현실에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단지 그들은 그 속에 나온 주인공들처럼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라쇼몽>의 형태는 21세기에도 진행 중이고, <덤불 속>에는 아직 우리들이 살아있다. 현실을 외면한 그의 현실에 대한 느낌이 그의 작품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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