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간 -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지음, 류한수 옮김 / 교양인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추석연휴에 남들처럼 맛있는 음식도 먹고, 보고 싶은 애니메이션도 보고, 그리고 주어진 논문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런 추석연휴를 남들보다 더 잉여적으로 보낸 나에게 이번에 서평을 적은 책 마지막에서 무척 놀랄만한 사진 1장이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홍범도 장군의 사진이 보였기 때문이다. 홍범도 장군하면 김좌진 장군과 더불어 대한민국 항일운동에서 큰 활약을 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전쟁사를 만든 투사다. 독립군 투사 대부분이 민족종교인 대종교 일원 중에 하나이었으나, 그는 전형적인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의 영웅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내가 읽고 있던 <혁명의 시간>이란 책에 나올 줄 몰랐다.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 부분, 즉 번역자인 상명대학교 류한수 교수가 개인적으로 적을 글에서 나온 사진이다. 홍범도 장군은 1919년 삼일운동을 확인하고 만주와 러시아 이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36~1938년 스탈린의 모스크바재판 기간 중에 강제로 카자흐스탄에 강제 이주되었다. 까레이스키, 러시아어로 조선인을 의미하는 바로 그 슬픔을 간직한 명칭이 생기고 말았다. 오늘 낮에 카자흐스탄 한국인들의 후예가 나온 것을 보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내지 또는 조선말기 잔혹한 가렴주구를 피하여 먼 이국땅으로 밟은 해외동포들, 그들은 까레이스키로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독특한 문화를 유지했다.

 

이미 한국어를 잊어도 벌써 잊을 해외교포 후손들, 그런 후손들을 보면서 <혁명의 시간>에서 나타난 홍범도 장군은 모습을 참으로 기이했다. 그는 러시아혁명사에서 혁명운동에 참여했고, 그를 위시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볼셰비키혁명에 가담했거나 또는 그 혁명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조차 놀라웠다. 홍범도 장군은 볼셰비키당원으로 분명 1920년 “극동의 볼셰비키 정치 지도위원”이라고 되어 있었다. 게다가 홍범도 장군의 사진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홍범도 장군은 소비에트연방 최초의 총수이며, 볼셰비키혁명을 지휘한 레닌에게 권총을 직접 받았다는 점이고, 그 권총은 평생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예전에 러시아혁명에 대한 공부로 TV 다큐멘터리를 보는 도중 코민테른이란 제3 인터내셔널 모임에서 조선인이 참여한 것을 보았고, 일제에 의해 지배받던 제3국인 조선의 독립을 위해 레닌이 원조하기로 한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런 모양새로 홍범도 장군이 1920년 잊을 수 없는 국군 전쟁사 청산리 전투에서 이미 볼셰비키로서 활동했다는 점은 참으로 기이하고 씁쓸한 일이다. 한국전쟁 전후로 좌우이데올로기 문제점은 분명히 존재했고, 그 모순은 사회구조적으로 큰 문제를 보여주었다. 어느 유명한 대학교의 명예교수는 당시 중산층은 대부분 친일파라는 말에서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당시 중산층의 기준은 어느 정도로 재산을 가졌고, 사회적 지위는 무엇이고 자신은 그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 천재적인 독문학자인 전혜린 교수는 자신의 아버지가 대표적인 악독한 친일파란 사실에서 고통스러워했고, 그런 부분에 대해 젊은 시절 양심에 대한 가책을 느낀 모양이다. 양심의 가책마저 보이지 않고, 지나간 오점에 대한 반성하여 새로운 길을 찾기보단, 그것을 두고 하나의 터부적인 속성을 넘어 이제는 보편타당한 논리로 이끌어내는 현실을 보면 과연 역사란 왜 중요한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분명 러시아혁명사에서 1905년 피의 일요일부터 시작하여, 1917년 2월과 10월은 잊을 수 없는 세계사이다. 서양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면 분명 근대이전 사회에서는 프랑스대혁명이고, 근대사회부터는 러시아혁명일 것이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을 읽지 않고서는 오늘날 존재하는 나 자신만 아니라 우리 모두, 더 나아가 세계라는 큰 영역조차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사람들은 프랑스혁명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프랑스혁명에 대한 개념과 원인 그리고 그것을 발동하게 된 사상조차 이해할 수 없다. 지식의 맹신은 오히려 독이라는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 장 자크 루소가 거론했지만, 그런다고 지식의 맹신조차 없이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세론의 허영심만큼 더 위험한 것을 없으리라.

 

<혁명의 시간>을 읽으면서 볼셰비키의 모든 것이 옳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모든 문화적 현상은 무엇에 의해 이루어져 지는가? 그것은 경제적인 조건이란 물질적인 조건만 아니라 환경적인 조건까지 덧붙이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밝히다시피 처음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의 힘은 아주 미약했다. 단순히 1917년 2월에 발발한 혁명은 차르체제를 무너뜨리게 한 일이었으나 그 원동력은 볼셰비키만이 아니라 다양한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코르닐로프 장군과 정치적인 라이벌로 되어야 했던 케렌스키도 처음에 정치범으로 고발당한 혁명가를 위해 변호해주던 법조인이었다. 2월 혁명 후 그는 법무장관에 임명되다가 7월 사태를 맞이하면서 총리로 된다. 그러면서 한쪽에는 볼셰비키, 그리고 한쪽으로 코르닐로프와 같은 능력도 없는 전쟁지휘관에 위기를 맞이한다. 국내에 어떤 경제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토대로 정치학에 대하여 글을 작성하는데, 그 글에 케렌스키 정부를 전복하던 볼셰비키에 대한 비판이 아닌 근거도 제대로 구성되지 않은 비난 같은 글이 있었다.

 

그 책에서는 코르닐로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무능하고 거만한 멍청한 장군이 케렌스키와 임시정부를 타도하여 군사정권을 내세우려 했던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역사는 반드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구성해야 하며, 되지도 않은 어설픈 지식을 인용하여 일방적이고 편견만 사로잡힌 글을 작성한다면 그것만큼 자신이 지식인이란 이름을 내걸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런 내용을 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미 <혁명의 시간>을 읽기 전에 류한수 교수가 번역한 <러시아혁명, 1917에서 네프까지>를 읽어보면 안다.

 

외국의 역사학자들이 사료를 토대로 전문가의 판단으로 작성한 글과 철학적 깊이도 없이 어설프게 진영논리를 대놓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따라서 <혁명의 시간>을 읽어보는 것은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큰 화제인 러시아혁명이 어떻게 일어나고 그 배경이 무엇인지 잘 봐야 한다는 점이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을 읽다보면 사회적인 현상을 두고 그 원인과 배경을 알았고 하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요소도 확인해야 한다. 러시아혁명에서 단순히 볼셰비키혁명을 두고 군사쿠데타라고 하는 자도 있지만, 솔직한 말로 군사쿠데타로 되려면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한 집단이 있어야 한다.

 

볼셰비키는 물론 그들에게 군사력이 있었지만, 적어도 장교와 같은 지휘관보단 아래에서 지휘 받는 병사들, 농민들, 노동자들 같은 일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지지 세력은 강력한 국가기구가 아니라 강력하지 못하나 그 무엇보다 더 강하고 위대한 민중이 있었다는 점이다. 볼셰비키혁명이 된 것은 단순한 군사쿠데타로 본다면 페트로그라드 같이 거대한 도시는 물론이고, 그 도시를 이어주는 많은 교통과 정보를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에게 지지하는 무리가 생겼는가?

 

이 책의 저자인 알렉산더 라비노비치는 처음부터 볼셰비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자다.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태어난 저자는 본래 자신의 아버지가 러시아 물리학자이었으나, 볼셰비키에 의해 죽음을 당했고, 그는 볼셰비키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증오를 품었지만, 러시아혁명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 할수록 기존 러시아혁명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점을 인식했다. 러시아혁명을 연구하면 자꾸 프랑스혁명사에 대해 연계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특히 당통이 외국군대가 프랑스를 침입한 것에 대해 연설한 것이 인상적이다.

 

당통은 “우리는 대담하고 대담해야 하며, 더 대담해야 합니다.”라는 강력한 언변술로 프랑스 의용병들이 자국을 보호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혁명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르던 인터내셔널가만 부른 것이 아니라 현재 프랑스의 국가이기도 하면서도 1792년 프랑스대혁명 기간 중에 만들어진 라 마르세예즈를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에 불렀다는 사실이다. 하다못해 루이 보나파르트의 관료정치, 1871년 파리 꼬뮌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러시아혁명사를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키만을 볼 것이 아니라 계속 혁명사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볼셰비키가 대중을 사로잡은 이유는 그들이 처음부터 대중을 잘 지휘한 것보단 왜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것은 케렌스키 정부의 무능함과 2월 혁명 이후 인민을 위해야 하나 인민을 위하기보단 그저 1차 세계대전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 전에는 러시아제국의 국민인 병사와 러시아 사람들이 이제는 혁명 이후에는 봉건군주의 신민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의 주권자로서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개념은 본래 국가가 존재하던 곳에 살았던 사람보다는 새롭게 탄생한 국가 내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케렌스키 정권 실수는 2월 혁명이 전쟁으로 인한 물자부족과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에서 시작된 것을 망각한 점이다. 그가 내각의 총리로 부임하면서 전쟁에서 빠져나와 휴전을 하고 병사들을 어서 빨리 집으로 보내야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는 점과 전장이나 혹은 러시아 내의 장군들은 전쟁의 종료보단 전장으로 더 나아가 승리하기를 원했다. 전장의 총알받이가 되는 것은 병사들의 운명이다. 고위 장교들은 후방에 안전한 곳에서 편하게 앉아 포도주나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냐고 계속 부하를 닦달하고, 도망치는 탈영병에 대해 무자비하게 총살을 집행했을 것이다.

 

물론 탈영병에 대한 처우는 그러하나, 처음부터 전쟁에서 가지는 의의조차 파악하지 않고, 단지 부하로 하여금 목숨을 버리게 하여 거기서 얻는 영광의 훈장만 바란 지휘관들에게 볼셰비키혁명의 씨앗은 이미 볼셰비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힘을 부여한 것이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수립된 소비에트연방은 어느 순간 독재와 공포정치의 대표적인 공간이 되었고, 하다못해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인 <1984>가 탄생한 것도 그렇고, <1984>와 더불어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비판적 3대 소설인 <수용소군도>, <한낮의 어둠>이 괜히 탄생한 것은 아니다.

 

악덕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유언으로 남긴 <동물농장> 메이저 영감의 가르침에서 오직 악덕만 본받아 끔찍한 사건을 탄생하게 되었다. 이 서평 본문 위에 홍범도 장군 역시 볼셰비키에서 활동한 인물이고, 레닌에게 권총을 받을 정도면 그가 레닌에게 얼마나 많은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한 대이주 그리고 대숙청이란 사건은 역사의 비극으로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보다 찾아내지 못한 유물처럼 되어버렸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부터 시작하여 어째서 그렇게 길을 꼬였는지 우리는 항상 다시 생각해야 한다.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자인 만큼 그는 지금도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자 중에 하나로 인정받는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억압하는 사슬로부터(사슬의 이름은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부터 나온다.) 모두 자유롭게 되고자 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으킨 볼셰비키혁명 이후의 러시아는 오히려 어긋난 길로 가버렸다. 어떻게 보면 마르크스주의자인 레닌의 거대한 도전이 문제보단 그 사회시스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정치제도나 혹은 사상을 들고 와도 그 사회 구성원 자체가 그것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지 말이다. 겉만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가 존재해도 그 시스템을 이루는 구성원들이 자각하지 못하면 결국 관료주의 폐단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도화선이 되게 해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은 프랑스 사람들이 과연 몇 %인지 혹은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키를 제외한 수많은 군중들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사람이 과연 %인지 생각해보면 다소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한민국 내에서 헌법을 찾아보고 읽은 자 역시 과연 몇 %나 되는 것인가? 역사의 가르침을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료로서 판단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역사의 위조는 결국 그 사회의 인간의 정체성마저 기만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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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9-10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아직도 만애비 님이 준 정의론을 아직도 읽지 않고 있네요. 이거 빨리 읽어야 하는데.. 마음이 무겁군요....

만화애니비평 2014-09-10 21:41   좋아요 0 | URL
아직 저도 쥐를 읽지 않았습니다~! ㅎㅎㅎㅎ
도서관에서 꼭 빌려볼 도서를 보고 난 뒤에 바로 보려고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9-11 00:08   좋아요 0 | URL
아니, 그재미있는 쥐를 아직 안 읽으셨다니 실망이지만, 셈셈이니 대만족이네요.. ㅎㅎㅎㅎ

만화애니비평 2014-09-11 08:35   좋아요 0 | URL
어느 인물이 생각나서..ㅋㅋㅋ

어제 집 근처 대학교에서 산책 및 운동하러 가는데

거기 학교입구부터 학교정문까지 그분이 그려져 있더군요.

국부와 레닌의 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