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인문학 2 - 섬뜩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언캐니의 세계 이미지 인문학 2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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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 2권, 분명 이 책은 진중권 교수가 일반인들 중에서 미학이나 인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을 위해 만든 책이 아니라 정말로 미학이나 인문학에 깊이 들어간 사람을 위해 만든 책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동안 <미학 오디세이>, <생각의 지도>, <아이콘> 등과 서적을 보면 그렇게까지 어렵게 적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미학이란 것은 아름다움에 대해 연구하기에 기본적으로 미학을 알기 위해서는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서적으로 통해 볼 수밖에 없다. 미학의 아름다움이란 그 가치를 찾는 것이고, 미학에서 찾는 가치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에서 뽑거나 혹은 현실이 아닌 이상이나 관념에서도 존재한다.

 

가령 고전주의 미학을 찾아보면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 모멘트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처럼 교회의 권력에 의해 유럽이 지배되는 정치적 구조에서 내세 내지 선악의 이분법은 군주와 종교 세력의 결탁에 따라 백성들(민중으로 판단하기 어려움)을 지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성이 중시되고, 신의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중심으로 가면서 과학적 근거를 중시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현실적인 시각과 관점이 예술에 반영되고, 미학적인 틀을 반영되었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보면 매우 과학적인 구조로 보이는데, 작품을 만들면서 물리적인 계산과 생물학적인 해부학으로 통해 완벽한 동상을 구현하려고 했다.

 

즉 눈에 보이지 않은 대상을 신성하게 만든 고전주의적 미학과 현실의 존재를 모방하는 과학적인 미학은 계속 대립되거나 혹은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 사고를 중시하는 계몽주의 사상이나 또는 더 나아가 휴머니즘은 20세기의 2번의 큰 전쟁으로 인간은 인간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초현실주의 내지 반미학이란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2번의 큰 전쟁의 원인은 제국주의적인 성향과 더불어 자본주의에 대한 급가속적인 팽창으로 인해 상품의 판로와 재료의 구입이란 경제적 조건이 정치적 이익과 결합되어 터진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란 것은 바로 이런 자본주의 체계에 드러난 비인간적인 모습, 전쟁에서 보이는 비이성적인 인간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지에 대해 인문학을 접근한다는 것은 바로 이미지가 가진 매체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활자문화가 도래하지 않은 시기에는 과학적인 사고와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전쟁이란 것도 귀족이나 기사 중심으로 벌였으며, 일반적인 농민을 최대한 휘말리지 않도록 했다. 이탈리아 정치사상가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다보면 군주는 모두에게 무서운 존재가 되어야하겠지만, 한 가지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다.

 

그것은 일반 백성들을 건들지 말고, 상대국가의 군주나 정치세력만 제거하라는 것이다. 백성들을 건드는 순간 민심을 잃게 되어 정복자인 군주는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19세기를 20세기에서 전투는 군인과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조차 살해하고, 20세기 중후반부터 21세기는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폭격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최소한의 보편적 윤리의식이 결여된 사건을 보여준 계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스라엘이 저지른 행위가 비도덕적인 것을 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미디어로 통해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접한 것은 무엇을 통해 우리는 보고 들었는가? 그것은 촉각이나 미각, 후각으로 정보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청각과 시각으로 멀티미디어 내지 또는 이미지라는 시각적 정보로 알게 된 것이다. 특히 뉴스나 인터넷 매체의 전달력에서 우리는 시각적인 정보로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전쟁의 학살대상이 군인에서 민간인, 정보의 전달력이 중세시대 때는 그림이나 말, 문자문화가 도래한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시대에는 신문이나 잡지 등이었고, 이제는 신문과 잡지보다는 TV와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폰까지 주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때까지 정보를 얻은 문자중심에서 탈피하여 영상중심으로 이어지고, 영상문화는 단순히 눈보다는 청각적인 매체로 통해 탈문자화 하였다. 문자의 탈피는 이미지에 대한 정보력을 더 강하게 부여했으며,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이미지 자체가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미지의 구축은 아날로그 시대나 그 이전처럼 분리된 정보로서 대중에게 전달되는 게 아니라, 이미지의 복제와 복제로 통해 그 이미지가 모두에게 같은 조건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지의 세계는 살아있는 자에 대해 가둠으로서 이미지의 공간에 찍혀진 피사체는 죽은 존재로 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도 아니므로 사진 속의 존재는 기록된 죽음일 것이다. 사진은 기존에 가진 기록기능을 대체하는 방편에서 최고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19세기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인물의 초상화를 그릴 이유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초상화보단 사진기로 촬영된 사진이 훨씬 더 실물을 자세히 기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기술의 발달은 회화의 새로운 길을 제공했으며, 눈에 보이는 실물보단 초현실적인 요소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전쟁에서 보인 비인간적 행위는 인류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은 우리에게 무섭고도 충격적인 느낌을 전달해준다. 그 충격이란 단순히 공포와 낯설게 보이려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느끼게 하는 것으로 통해 우리가 간과하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샘과 같은 경우 다다이즘으로서 레디-메이드란 20세기 초반 생활양식을 비판했고, 가장 인상적인 영화장면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보여준 기계와 인간의 결합성이다.

 

기계와 인간은 본래 이원적인 관계이나, 테일러주의 혹은 포드주의라는 경제적인 시스템은 인간은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계로서 보는 것이다. 기계 톱니바퀴를 돌리는 찰리 채플린의 모습은 상당히 우스꽝스럽게 연출되어 보이나, 그 모습은 살아있는 인간보다는 살아있지 않은 인간으로 보인다. 인간인데도 인간처럼 보이지 않은 섬뜩한 느낌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20세기 2번의 전쟁에서 인간의 대량학살은 정신적 외상이란 트라우마를 낳기 시작했다.

 

정신적인 트라우마로 인간은 삶에 대한 열망보단 죽음에 대한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고, 자신의 죽음은 항상 원하지 않는다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나, 무의식적인 영역에서 죽음에 대한 욕망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죽음은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 결코 낯선 존재는 아니지만, 인간 그 개인에게는 매우 익숙한 낯선 행위다. 단지 그 익숙한 낯설음에 대해 억압하므로 죽음의 순간에서 벗어나지만,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은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간극 사이에 만들어진 예술품을 본다면 한스 밸머의 인형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신체형식인 인형이 매우 괴기스럽게 보이나, 그 괴기스러운 모습에 색다른 매력을 느낀다. 낯선 것이나 왠지 낯설지 않게 보이거나, 또는 낯설지 않은 것 같아도 낯선 것을 보는 것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게 애매모호하게 될 때 우린 언캐니라고 부른다. 언캐니의 존재에서 인간은 실제 존재하는 인간 또는 존재가 아니라 새롭게 구성한 인간 내지 존재를 만들어낸다.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은 무존재를 만들어내서 새롭게 존재성을 부여한다.

 

내가 평소에 즐겨보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본다면, 그것들은 분명 실존하지 않은 존재이나, 마치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는 각 캐릭터에 대한 특징과 속성을 중시했으나, 어느 순간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실재 인간과 비슷한 외형과 얼굴모양을 가지게 되었다.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모습은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최대한 반영했기 때문에 대부분은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실존하는 인간과 다르게 생겼으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와 전혀 다르게 생겼기에 섬뜩한 느낌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3D영상의 구축과 더불어 실재 인간의 외형을 따라한 캐릭터들이 나오면서 우리는 왠지 모를 섬뜩한 느낌을 받기 시작한다.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속성이 사라진 캐릭터가 외려 인간이 닮은 모습에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처럼 보이기에 언캐니로 받아들인다. 캐릭터를 바라보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과 살아있는 인간에 의해 주시당하는 캐릭터의 간극에서 인간은 자신보다 더 완벽한 인간처럼 보이는 캐릭터에 대해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모습과 같은 존재가 있기를 바라나, 막상 그 존재가 눈앞에 등장한다면 오히려 적대적으로 변해 매우 낯설고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이 낯설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 스스로 가진 가치관의 변화와 시대적 흐름에서다. 우리가 이성적인 존재라고 여기고 만들어온 문명사회가 오히려 인간을 파괴하면서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인간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오히려 언캐니하게 된 것이다. 그런 언캐니의 요소에서 <이미지 인문학> 2권에서는 재미있는 요소가 나타난다. 바로 그 언캐니가 처음에는 매우 낯설고 불안하게 만들지만, 이제는 언캐니가 하나의 친숙성으로 되돌려지는 것이다.

 

이 부분이 너무 새로운 개념이고, 막상 생각하면 현실에 적용된 내용이니 많이 놀라웠다. 몇 년 전에 개봉된 <아바타>의 경우, 분명 외계인은 우리 인간과 유사하게 생긴 종족이나, 그 모습에 대해 불안감 내지 낯선 모습만으로 다가온 게 아니었다. 오히려 후반으로 갈수록 아바타의 캐릭터가 친숙하게 여기게 된다. 또한 언캐니하던 3D 영상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가령 오락실에서 인기 있는 게임으로 <철권> 시리즈가 있다. 철권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오락실의 오프닝영상이나 혹은 영화로 만든 영상을 본다면 그다지 낯설지 않게 보인다.

 

3D 영상에서도 인간처럼 작고 섬세한 근육이 보이고, 얼굴표정과 몸의 움직임이 매우 흡사하다. 본질적으로 인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과 같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아니라면 인간이 언캐니(그것이 언캐니인지도 모르면서)의 이미지들을 계속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그것이 정말 언캐니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못하여 낯선 것들이 낯선 게 아니게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인류 최초의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열차>다. 이 흑백필름으로 이루어진 영화는 실제 시오타 역에 도착한 열차를 촬영한 시퀀스로, 약 50초의 롱 테이크로 보여준다.

 

당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진짜 그 열차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처럼 보여 극장 내부는 혼란으로 쌓였다고 한다. 그런 모습은 1960년대 한국에 흑백 TV가 보급될 때 처음 TV 드라마를 보던 사람은 TV 안의 사람이 자신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하는 질문을 TV에서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낸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TV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없지만, TV에 나오는 사람에 대해 마치 옆에 있는 사람이나 또는 그 대상에게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있다. 하이퍼리얼리티한 공간을 만든 TV 이미지의 아우라는 여전하다. 그렇지 않으면 왜 TV 드라마의 연예인을 두고 많은 팬들은 열광하는가?

 

이미지의 세계는 바로 저런 대중매체로 동시다발적으로 정보가 전달되므로, 설사 실존한 인물이 피사체로 담겨도 그 인물은 진실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가상의 존재 내지 이미 그 모습은 사라진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이미지는 실존한 인물을 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존재조차 만들어낸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는 이미 존재한 것을 이미지로 기록하는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것을 창조하는 것과 같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에서 “신은 죽었다.”로 변화하면서 이제는 인간이 신화의 공간에 잠든 환상을 과학의 힘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로 이끌어낸다.

 

낯선 것들에 대한 현실화는 인간에게 큰 가능성을 부여하기도 하나, 인간 그 자체를 기계 내지 또는 가상의 영역으로 가려진 존재로 은폐할 수 있다. 따라서 보드리야르처럼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 사실로 되는 것이다. 시뮬라크르란 세계에 아무 것도 없지만, 그 아무 것도 없기에 하나의 진실로 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현상조차도 우리는 이미지로서 알아갈 수 있을 뿐이다. 현대사회는 이미지를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문맹인이라고 한다. 이미지 자체가 의미하는 정보는 알겠으나, 그 의미하는 정보의 숨은 의도는 읽지 못한 경우가 많다. 미디어에서 등장한 이미지는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정보이므로 그 정보는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조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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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0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이 책에 대한 호응이 별로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대중적이지 않아서 그런가요 ?

만화애니비평 2014-08-07 14:07   좋아요 0 | URL
정말 대중적이지 않습니다. 어려운 개념도 나오고, 새로운 개념도 나오고, 게다가 새로운 예술작품도 많이 나옵니다. 진중권 교수 이 양반 국내가 아니라 독일이나 프랑스에 있는 편이 훨씬 본인에게 이익이 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