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에서 조금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사랑이란 에로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문학이라고 한다는 것은 너무 깊이 다양하게 파고들어가겠지만, 결국 사랑은 인간의 본능적인 에로스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행위다. 그런다고 사랑은 단순히 에로스로 보는 것일까?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가족과 친구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애적인 사랑, 아가페도 존재한다. 사랑이란 이름은 어떻게 보면 숭고하고도 때로는 무서운 이름이 된다. 사랑의 깊이는 결국 증오와 질투의 깊이까지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2014년 봄 신작이던 <건전로봇 다이미다라>는 상당히 적나라한 언어와 이미지로 범벅된 작품이다. 일어는 자세히 모르나, 미다라인 단어가 음란하다면, 다이 미다라는 2가지 음란하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음란한 짓을 할 수 있는 것은 남자 1명이나 여자 1명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녀 1쌍이 모여야 그 음란한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야한 농담이나 저속한 단어 그리고 여체를 강조하는 그림이나 또는 실제 남자주인공인 코이치가 자신의 파트너인 쿄코를 상대로 무자비하게 가슴을 만지는 것은 처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격에 빠뜨린다. 게다가 청소년이나 여성들이 보면 상당히 기분이 나쁘거나 유해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작품 결말부를 보면 조금 생각을 다르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미소녀 내지 미녀들은 많으나, 남자주인공들은 오로지 자신의 파트너에게만 충실할 뿐이다.

 

특히 여자 가슴이라면 죽음을 불사할 코이치의 경우, 지나가는 여자들의 가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자신이 다이미다라 파일럿이 될 때는 같이 동승하는 쿄코를 아주 사납게 가슴을 만진다. 이와 다르게 다른 다이미다라 파일럿인 키리코의 경우, 자신의 동급생 친구인 소마와 같이 동승을 한다. 소마와 키리코는 과격한 코이치와 다르게, 계속 손을 잡고 공공장소에서 키스를 하거나 포옹까지 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민폐를 넘어 짜증이 밀려올 정도로 서로 사랑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다이미다라의 주인공들에서 대부분 파일럿이 고등학생이란 점이 중요하다.

 

일단 키리코와 소마는 고등학교 3학년 정도 되고, 코이치는 2학년 정도로 보인다. 이에 다르게 쿄코는 키리코가 선배라고 부른 점과 예전에 있던 학교 선생들이 얼굴을 아는 점에서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이다. 쿄코가 어른이고, 코이치는 학생이나 서로 커플로 나오는 장면에서 코이치가 여자 가슴에 대한 정렬적인 집착은 결국 성숙한 여자의 몸을 원하는 것이고, 키리코와 소마는 성숙하기보단 핸드터치 및 서로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사이로 나온다.

 

물론 2가지 다 에로스에 기반하고, 그 에로스는 다이미다라의 에너지원으로 사용된다. 하이에로입자, 에로입자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에너지 중에서 프로이드가 주장한 id(이드, 무의식)에서 libido(리비도, 무의식적 성적 에너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처음 작품 오프닝에서 넘치는 리비도를 힘으로 바꾸어 라는 말이 결국 리비도가 <건전로봇 다이미디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왜 리비도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펭귄이란 존재다. 펭귄은 일반적으로 남극에 서식하는 날지 못하는 새가 아니라 인간의 몸에 마치 인형 탈을 씌우고, 꼬리가 뒤가 아니라 앞으로 길게 나온 생물이다.

 

펭귄은 인간과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문제없으나, 하이에로입자를 강력하게 주입된 펭귄은 인간으로 변하고, 하이에로입자가 빠진 남자는 펭귄으로 된다. 펭귄은 자신의 부족한 하이에로입자를 구하기 위해 지구로 오고, 인간의 하이에로입자인 리비도를 회수한다. 리비도는 성적인 욕망을 의미하기에 그들이 빨아들인 리비도는 결국 사회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효과가 나타난다. 다이미다라 파일롯이 활약하지 못하던 시기에 펭권들이 야한 콘텐츠를 가지고 가자, 편의점 한 편에 위치한 에로잡지코너가 사라지고, 수상한 가게들도 점점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키리코가 돌아오고, 코이치가 다시 돌아오자 이런 상품코너는 증가하고, 정부는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다이미다라 운영기관인 미용실 프린스를 숙청하고자 한다. 이유는 건전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고, 그 건전함은 특히 청소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왠지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순간 우리나라의 현실이 왜 이리 비슷한 것일까? 흔히 아청법이라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로 이른바 아동 및 청소년에 성적인 자극을 주는 것을 통제하겠다는 것처럼 인간본연의 생물학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것과 같다.

 

왜 이것이 문제로 떠오르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이 야한 것을 직접 보지 않아도, 야한 것을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몽정기에서 반드시 AV 내지 포르노를 보지 않아도 사람(남성)은 수면 중에 단순히 꿈에서 무의식적인 상상의 세계에서 상대 이성을 보고 사정을 한다는 점이다. 물론 우연히 사춘기에 접어든 사람들 중에 야한 것들을 접하게 되면, 각인에 의해 몽정을 할 가능성은 더 높다. 그런다고 그 몽정은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이란 사실이다.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가려진 성적인 호기심 및 욕망을 막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의 조건에 어울리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에서 왜 펭귄황제는 하이에로입자를 모우는 것인가이다. 바로 원인은 인간이 리비도란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이 리비도라는 에너지는 하이에로입자로 변환하여 자신의 DNA를 닮은 존재를 만들어낸다. 즉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생식기능이다. 펭귄황제는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펭귄코만도를 만들어낸다. 펭귄코만도는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펭귄황제가 하이에로입자를 에너지로 하여 복제를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펭귄황제는 감정을 그렇게 잘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때에 따라서는 매우 합리적이며 괜찮은 인성을 가진 등장인물이다.

 

그가 말하기로 인간에게 하이에로입자가 없으면 자신과 같은 펭귄이 된다는 점이고, 남성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서구사회의 이분법적인 관념에서 남성은 이성적인 존재고, 여성은 감성적인 존재라고 본다면, 펭귄황제는 이성적인 존재이므로, 그에게 부족한 감정적인 존재는 오로지 펭귄코만도로 나온다. 펭귄코만도는 이성적인 판단력으로 활동하기보단 욕망과 충동에 의해 활동한다. 그런 점에서 황제펭귄과 펭귄코만도는 서로 다른 성향을 보인다. 결국 황제펭귄의 유전자를 복제한 펭귄코만도들은 황제처럼 이성적인 판단보단 오히려 재미와 성적인 욕망을 앞세운다.

 

펭귄황제가 그러길 바라는 이유는 바로 펭귄제국의 멸망과 관련해서이다. 인간들이 펭귄처럼 된다는 사실은 인구가 줄어드는 만큼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켜 그 사회나 국가를 계속 유지해야할 재생산적인 운동이 계속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재생산의 조건에서 필요한 것은 역시 남녀 간의 결혼에 의해 탄생하는 새로운 생명이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서는 남녀 간의 리비도로서 결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문제는 왜 일본정부에서 프린스 미용실을 돕다가 배신을 하는가이다.

 

결론은 국가라는 조직은 국가운영을 위해 출산을 통제하여 필요한 만큼 인구를 유지해야할 목표가 있는 셈이다. 펭귄제국이 처음 나올 때는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없으므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야 했고, 이른바 풍속문화를 계속 탈취하기에 사회적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펭귄코만도 활동에서 처음에 야한 행동과 언사를 날렸으나, 그들의 활약이 오히려 그 사회의 야한 행동과 생각들을 모두 가지고 간 셈이다. 하이에로입자 저하는 결국 모든 사람들이 건전해진다는 논리로 가겠지만, 문제는 인간은 결코 무의식적으로 건전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억지로 건전성만 강조하면 인간은 역으로 더 음란해지거나 또는 스트레스나 노이로제로 인해 정신적인 증세가 오기 마련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독일 성심리학자인 빌헬름 라이히에 제기한 의견이 있다. 그는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친분이 깊은 학자로서 그가 남긴 말로는 "성의 억압이 파시즘 낳는다."고 하고, 영국 철학자 겸 수학자인 ​버트란트 러셀은 “가장 음탕한 사회에서 금욕주의가 싹튼다.”고 한다. 성으로 그 사회를 권력으로 억압할 경우, 인간의 본래 펼쳐야 할 정신적인 에너지를 분출하지 못하므로 그것이 역으로 변태적인 요소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건전로봇 다이미다라>에서 다이미다라는 결코 건전한 에너지로 움직이지 않으나, 오히려 그런 음란함이 있기에 그 사회는 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하다시피 코이치는 오로지 여자가슴만 좋아하는 열혈남자이나, 그는 다른 여자보다는 오직 쿄코의 가슴이 최고라고 한다. 펭귄제국의 공격을 받고 죽을 위기에 처할 때, 그는 쿄코를 살리고, 대신 죽기로 결심한다. 이때 코이치는 “좋아했어, 쿄코의 가슴을”이라고 한다. 목숨을 던지면서 쿄코를 구했다는 점은 코이치는 진심으로 쿄코를 사랑했기 때문이고, 평행세계에서도 돌아온 것도 역시 쿄코에 대한 마음이다. 에로스라는 것은 단순히 야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힘 즉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에서 문명은 오히려 인간의 본래의 성질을 파괴하고 성장하기에 인간은 그 자연적 성질을 되찾아 회복해야 하나, 도리어 인간은 더 문명적 업적으로서 대체하고, 다시 새로운 파괴와 건설이 이루어진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여 최후에 착취하는 것은 인간 본인이라고 한다. 자연스러운 에로스의 흐름을 파괴하는 것이 결국 인간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은 적당히 이성적으로 억제하여 통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문제는 그 통제성은 개인과 개인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나, 오히려 자위대의 출현은 국가의 폭력으로서 성을 통제하려 한다.

 

그 이유는 청소년이 너무 음란하여 풍기문란을 일으키고, 거리와 가게 한 편에는 야한 잡지가 돌아다니고, 밤거리는 너무 유혹적이라고 한다. 물론 다 그런 흐름이 좋다는 것은 아니나, 그 모든 것을 억압하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의 윤리 내지 도덕성을 상대방에게 강조하는 것만큼 나쁜 것은 없다. 일방적인 자신의 가치관을 남에게 심어주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시에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어야 말로 폭력을 미학으로 간주하는 파시스트적인 사고방식이다.

 

물론 상대방의 동의 없이 몸을 더듬거나 혹은 성희롱하는 것도 문제다. 코이치의 경우는 처음부터 로봇에 탈 마음이 없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특이체질과 그것을 권유하는 쿄코에 대한 음란함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음란함이 사랑으로 이어진다. 소마와 키리코의 경우 서로 간의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우연한 기회로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아직 미성년자인 그들이 지나친 성적욕망을 표출하는 것은 좋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권리를 무조건적인 박탈은 옳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어른들은 어른이란 이유로 그 권리를 가지고, 밑에 있는 사람에게는 누리지 못한 것이 분명 불평등한 처사다.

 

단지 조건은 여자가 임신할 수 있는 상황까지 가거나, 또는 그렇게 되었다면 그 에로스를 새로운 생명에 대한 책임성으로 가야할 것이다. 펭귄황제의 충고는 매우 중요하다. 언젠가 펭귄제국처럼 인간도 변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리비도라는 무의식적 성적욕망과 더불어 리비도가 사랑으로 이어지면 에로스로 변하고,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이 되고,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숭고하고 아름답다고 하나, 유럽의 고전주의 시대에는 그만큼 불쾌한 것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으로 살아가야 하나, 오히려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 내지 무의식적인 충동에 의해 현실을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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